5·18 무장헬기 소령 “발포명령 받아”…코브라 등 28대 왔다
등록 2023-05-18 05:00수정 2023-05-18 13:09
5·18진상규명조사위, ‘공격헬기 대기’ 조종사 진술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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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광주 상공에 뜬 UH-1H 헬기. 연합뉴스
17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 설명을 종합하면, 계엄군이 1980년 5월27일 도청 진압작전 직전 공격헬기 코브라 2대, 500MD 14대, UH-1H 12대 등 28대를 광주비행장에 대기시켜 놓았다. 조사위는 “이들 항공기들에는 기관총 무장을 갖추거나, 무장병력을 태우고 출동 대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이런 사실을 당시 출동한 계엄군 조종사 및 승무원 3명한테서 진술로 확보했다. 광주 출동 UH-1H 승무원(사수 역할) ㅅ씨는 조사위에 “5월27일 도청 공격 당일 UH-1H 12대에 M16으로 무장한 공수 특전여단 병력이 헬기당 7~8명씩 탑승해 출동 대기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지상군의 도청 진압작전이 실패하면 광주비행장에 대기 중인 무장헬기가 출동해 2차 작전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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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 충정작전 상보(왼쪽)와 ‘전교사 작전일지’. 5·18진상규명조사위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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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 충정작전 상보(왼쪽)와 ‘전교사 작전일지’. 5·18진상규명조사위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무장헬기는 5월27일 새벽 4시50분 진압작전 때 3공수여단의 요청으로 위력시위를 했다. 정조종사 ㄱ씨는 “보병 대대장이 목표 건물에 대해 헬기사격을 요청한 직후, UH-1H에 탑승했던 병사 3~5명이 건물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며 “몇분 후 ‘사격하는 놈들을 제압했다’는 내용이 무전으로 들렸다”고 진술했다.
조사위 쪽은 “보병부대장이 요청이 있으면 곧바로 출격할 수 있게 무장 헬기가 대기 상태였다. 전두환 내란세력의 폭압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5·18 ‘바퀴형 장갑차’ 운전 시민군 최초 증언
생전 전씨 “시민군 장갑차에 군인 희생” 주장
자위권 발동 차원 집단발포 논리 거짓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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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 정오께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시민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이 장갑차는 오후 1시께 병사 1명을 치어 죽인 뒤 시민에게 기관총을 쐈다고 조사위는 설명했다. 5·18조사위 제공
“상체가 들린 상태로 입에서 피를 토하던 군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8일 광주 북구의 한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조아무개(64)씨는 43년 전인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본 계엄군의 처참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그는 시위 행렬 맨 앞에서 시민들이 탄 장갑차를 운전하던 중이어서 사고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고 했다.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직전 시위대 장갑차를 몰았던 운전자의 증언이 나온 건 처음이다.
조씨는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장갑차 안에 있던 대학생 형들이 ‘밀어 밀어’라고 외쳤고, 옆에 있던 버스가 먼저 앞으로 나가자 장갑차를 5m 정도 전진시켰다. 장갑차가 무거워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며 “우리 앞에 있던 계엄군 장갑차가 뒤로 후진하면서 장갑차 오른쪽(조씨 시야 기준)에 있던 병사가 하반신을 궤도에 깔렸다”고 기억했다.
조씨의 증언은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가 ‘시위대 장갑차에 계엄군이 희생된 데 따른 자위권 발동 차원이었다’는 전두환씨 등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만원씨 등 극우세력은 시민군이 군용 장갑차를 운전했다는 건 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시민들은 전일빌딩 앞에서 버스와 트럭 등을 동원해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다. 조씨가 탔던 장갑차는 아세아자동차(기아자동차의 전신) 공장에서 시민들이 가지고 나온 시엠(CM)6614 기종 차륜(바퀴)형 장갑차로, 계엄군이 탔던 엠(M)113, 125 기종의 궤도형 장갑차와는 외형부터 달랐다. 사고 전 이미 실탄을 분배했던 계엄군은 M16 소총과 장갑차에 장착된 캘리버50 기관총 등으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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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들이 탄 장갑차와 지프 차량이 광주 남구 양림동을 지나고 있다. 기무사 사진첩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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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 정오께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시민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위쪽 장갑차는 오후 1시께 병사 1명을 치어 죽인 뒤 시민에게 기관총을 쐈다고 조사위는 설명했다. 5·18조사위 제공
1980년 조씨는 포니 왜건 차량으로 광천공단 공장에서 북구 운암동 영일식품 공장으로 포장지를 배송하는 일을 하며 지냈다. 1978년 운전면허를 딴 그는 화물차 기사로 일하고 싶어 빵봉지 배송으로 운전 경험을 쌓는 한편 8톤 트럭 조수 일도 함께 했다.
정확한 날짜(18일 추정)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5·18민주화운동 때 영일식품에서 파고다빵을 실어 도청 앞 전투경찰에게 가져다준 일을 계기로 시위에 참여했다.
조씨는 “빵을 주고 나오는데 전경들이 최루탄 상자를 주면서 ‘지금 후퇴해야 하는데 빵공장이 본부와 가까우니 시민들 몰래 갖다 놓으면 나중에 가지러 가겠다’고 했다”며 “광주 천변 쪽으로 나왔는데 군인들이 차를 붙잡고 최루탄을 가리키며 ‘훔쳤느냐’면서 마구 때렸다. 피범벅이 된 뒤에야 간신히 상황을 설명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씨는 포니 차량을 화정동 사장 집에 가져다 놓고 무단결근한 뒤 분통이 터져 시위에 동참했다고 한다.
그는 “상무관과 동부경찰서 사잇길에 갔는데 장갑차가 한대 서 있고 대학생 형들이 운전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며 “나는 8t 트럭을 몰아봤기 때문에 장갑차를 운전해보겠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장갑차 운전석은 변속레버 모양새와 위치만 달랐을 뿐 일반 트럭과 비슷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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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 집단발포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 조아무개씨가 당시 자신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갑차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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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들이 무한궤도형 장갑차를 동원해 버스에 탄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기무사 사진첩 갈무리
후송을 갈 때마다 장갑차에 총알이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났다. 무서워서 내리겠다고 하자 옆자리에 타고 있던 광수(또는 광희)라는 이름의 2살 위 대학생은 ‘네가 없으면 누가 장갑차를 운전하느냐’고 만류했다. 도청에 잠시 내려 화장실을 갈 때도 대학생 시민군들은 조씨가 사라질까 봐 항상 붙어 있었다.
송암동 쪽에서 유달리 사격을 많이 받은 직후 조씨는 광주기독병원에 환자를 내려준 뒤 장갑차를 세우고 뛰쳐나왔다. 이후 계엄군에게 붙잡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지만 연행 과정에서 손목 관절이 빠져 치료를 요구하자 그냥 풀려났다고 한다.
현재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조씨는 혹시나 모를 불이익을 우려해 40여년 동안 시위 참여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극우세력이 시민군 장갑차를 북한 특수군 침투 근거로 삼자 2020년 5·18기념재단에 연락해 장갑차 운전에 대해 증언했다.
조씨는 “차륜형 장갑차는 트럭을 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다”며 “진실에 대한 왜곡이 멈출 때까지 5·18은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기록진실부장은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시민군 장갑차가 돌진해 병사를 치어 죽여 발포했다는 논리를 펴 5월단체와 법정 다툼을 벌였고 현재 대법원 계류 중”이라며 “계엄군의 자위권 논리를 깨뜨릴 수 있는 의미 있는 증언”이라고 말했다.
고 박금희양 고교 동창 문순애씨
“5·18 진압부대, 헌혈차에도 총 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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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월 전남여상(당시 춘태여상)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 박금희(맨 왼쪽)양과 친구 문순애(가운데)양. 문순애씨 제공
1980년 5월21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도청 앞에서 군인들이 총을 쏴 난리가 났던 날이야. 오후 두세시쯤이었나? 무서워서 방림동 자취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네가 나를 찾아왔었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내가 급히 쌀을 안쳐 밥상을 차렸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네가 ‘집에 가야겠다’고 해 내가 바래다주러 집 밖으로 나왔을 때야.
적십자 마크가 선명한 헌혈차가 우리 앞에 다가왔어. 차에선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절박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고. 내가 “헌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자, 넌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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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기독병원 1980년 5월21일 헌혈자 명단에 춘태여상(전남여상) 3학년 박금희의 이름이 보인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 제공
할 수 없이 집에 가려고 헌혈차를 다시 탔어. 버스는 지원동으로 향했는데, 저녁 6시나 7시쯤 됐을까? 헌혈차가 시내버스 종점 앞 큰길을 도는 순간, “따다다닥” 콩 볶는 소리가 났어. 군용 트럭을 탄 군인들이 우리가 탄 차를 향해 총을 쏜 거야. 누군가 “엎드려” 하고 외쳤고, 나는 의자 밑으로 몸을 숨겼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탄 헌혈차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어. 넌 의식을 잃은 채 의자에 엎드려 있었고. 내가 “금희야, 금희야” 불렀지만 넌 반응이 없었지. 총에 맞은 사람은 너를 포함해 모두 세 명이었어.
그길로 바로 헌혈차를 몰아 기독병원으로 갔지. 사람들은 “어떻게 헌혈차에 총을 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어. 넋이 나가버린 나는 산부인과 병동 침대에서 그날 밤을 보냈단다. 그리고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날 이후 한달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5·18이 끝나고도 난 너희 집을 찾아가지 못했어.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도저히 네 식구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지. 부모님께 ‘나만 살아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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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수학여행 때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첫 줄 맨 왼쪽이 박금희양이고 뒤에서 둘째 줄 왼쪽 둘째가 문순애씨. 문순애씨 제공
43년이나 지났는데, 오월만 되면 난 가슴이 시리고 아프단다. 널 죽게 만든 사람들이 사죄도 하지 않고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 화가 나. 그래도 금희야, 아무쪼록 그곳에선 평안하길 바라. 미안해, 금희야. 미안해.
2023년 5월에 친구 순애가(1980년 5월21일 헌혈을 하러 병원을 찾았다가 귀가 중 계엄군 총격을 받아 숨진 박금희(당시 춘태여상 3학년)양의 친구 문순애씨와 한 인터뷰를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이 기사에 나온 “그런데 병원에 가서는 헌혈을 하지 못했어”라는 문순애씨 진술과 “난 최근 기독병원 5월21일 헌혈자 명단에 너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라는 내용이 충돌한다는 독자들 지적이 있어 설명드립니다.문순애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1980년 5월21일 오후 박금희양과 헌혈차를 타고 광주 양림동 기독병원에 갔을 때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피를 보관할 용기가 부족해 헌혈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독병원 5월21일 헌혈자 명단(102명)에는 박금희양 이름이 나옵니다. 이 명단은 ‘대한적십자사 광주적십자 혈액원’이 정리한 기록입니다.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이에 대해 “박금희양이 5월21일 기독병원에서 헌혈한 뒤, 문순애씨의 집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문순애씨도 “그랬을 수 있겠다”고 수긍했습니다.
5·18진상조사위 대국민 보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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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끝난 뒤 광주 와이엠시에이(YMCA) 건물 밖으로 나온 김종연씨가 총을 맞고 앉아 있는 모습(왼쪽 사진). 그때까지 살아있던 김씨는 또 다시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오른쪽 사진).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 제공
검찰 검시 조서를 보면, 김씨는 전신 다발성 총상을 입었다. 김씨의 주검은 5월27일 와이엠시에이에서 사살된 뒤 합판에 실려 전남도청 뒤편 정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총격으로 상처를 입은 시민을 사살한 사례는 또 있다.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11공수특전여단 소속의 군인이 5월23일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미니버스에 탑승해 있다가 공수부대 총격을 받고 다친 채수길·양민석씨 등 2명을 주남마을 안 11공수여단 주둔지로 끌고 가 사살한 뒤 암매장했다. 조사위는 “민간인 2명을 사살한 뒤 암매장한 군인은 채씨의 사촌으로 확인됐고 그 군인이 그들을 사살하고 암매장한 사실을 인정한 진술을 영상으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또 조사위는 5·18 당시 어린이 행방불명자 이창현(당시 7)군의 마지막 모습이 찍힌 사진을 확보해 이동 경로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어린이는 앞서 노먼 소프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가 찍은 사진과 국외 방송사가 찍은 영상에 이동춘 목포과학대 교수에게 안겨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한겨레> 2021년 5월10일치 12면)
조사위는 당시 버스에 타고 있던 이군 등 어린이 3명 중 조아무개(당시 11)군이 아동복지시설로 옮겨져 입양된 사실을 확인했다. 허연식 조사2과장은 “그동안 실종자는 암매장과 연관해 조사했는데 조군의 입양 사실을 확인하며 이군도 입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전국의 아동복지시설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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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진기자 프랑수아 로숑과 파트리크 쇼벨이 1980년 5월27일 아침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찍은 군버스.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이창현군(붉은 원)의 마지막 모습이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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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전남 해남에서 5·18 관련자로 보이는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조사위 제공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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