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진압작전 비선 임무 의혹
<한겨레>와 통화서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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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일해재단 비리 청문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부터),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 정권 시절 대통령 경호실장 등을 지내며 ‘부동의 2인자’로 군림했던 장세동(86)씨가 최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5·18 직전인 1980년 5월15일에 광주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장씨는 당시 공수특전사령부(특전사) 작전참모(대령)였다.
장씨는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5월15일 C-54 비행기(수송기)를 타고 (광주) 전교사에 잠깐 들러 이틀 뒤(17일) 7공수 특전여단 2개 대대가 광주에 도착한다고 알렸다”고 말했다. 그는 “전교사 실무자들 몇 사람 만나 ‘(7공수여단이) 배속(된다는) 명령 받으셨죠. 잘 좀 돌봐주십시오’ 하고 얼굴을 내밀고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씨가 전교사를 방문한 5월15일은 2군사령부가 닷새 전인 5월10일 ‘학원소요에 대한 증원 계획’에 따라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여단 4개 대대를 전북대, 충남대,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하기로 결정한 직후다. 7공수여단은 장씨의 광주 방문 이틀 뒤인 17일 밤 10시쯤 금마 주둔지를 출발해 18일 새벽 1시10분 광주에 도착했다. 장씨는 “거기(광주)에 대대장만 덜렁덜렁 보낼 수가 없잖나. 여단장은 혼자여서 네군데(4개 대대)를 전부 다닐 수가 없었다”며 “내가 거기를 잠깐 들른 것은 내가 (특전사) 작전참모로 (7공수)여단장을 보조해준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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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육군본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의 1980년 5월10일 작전일지.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장씨는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광주에 있었고, 5월24일에도 광주 현장에 있었다. 장씨는 “5월24일날 이제 (서울로) 돌아오려고 헬리콥터 시동을 막 걸고 있는데 (광주 송암동에서 군부대 간) 오인 사격이 났다”며 “그때 전교사 사령부에 있다가 그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현장에 가 부상자들 수송하는 것을 전부 보고, (서울로) 왔다”고 말했다. 장씨는 5월27일 전남도청 등 시가지에서 이뤄진 최후 진압 작전 때도 광주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5월26일 저녁에 광주에 가서 밤을 새우고 27일 오전에 (서울로) 왔다. 새벽 4시인가 (상황이) 종료가 돼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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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이 전 전교사 작전참모 1995년 12월27일 서울지검 진술서.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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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식 7공수여단장은 1996년 1월6일 검찰 조사에서 전교사 2층 전교사 사령관실 옆에서 머물렀다고 진술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장씨의 광주 행적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장씨의 직속상관이었던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2021년 2월과 5월에 있었던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에 낸 조사 신청서에서 5·18 당시 장씨의 광주 행적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이다. 정씨는 당시 “5·18 당시 광주를 네차례 방문했지만, 인사·군수지원만 담당했을 뿐 (나에게)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은 없었다”며 “1980년 5월10일께부터 27일까지 장(세동) 대령이 보고하지 않고 광주를 수차례 방문했지만, 지휘계통에서 배제된 나는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씨의 이런 주장에선 특전사의 5·18 유혈진압 책임은 당시 진압군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자기보다 모종의 임무를 띠고 광주를 여러차례 찾았던 장씨에게 물어야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는 정씨에게 여러차례 전화를 걸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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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 진압 작전 직후 정호용 특전사령관(오른쪽)이 장형태 전남도지사와 악수하고 있다. 5·18기록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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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2021년 2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제출할 조사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자필 수정한 내용엔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가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광주를 방문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장씨의 광주 행적은 5·18 당시 군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전두환씨 등이 5·18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자신은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공수 특전여단장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복인 장세동씨가 특전사 작전참모의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며 진압 작전에 개입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신군부 실권자인 전씨가 대리인 장씨를 통해 광주 현장의 진압부대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5·18 발포명령 책임을 규명하려면 장세동씨와 현지 보안부대장 등을 고리로 현장의 계엄군과 공수여단 지휘부로 연결된 비공식 지휘라인의 작동 양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쳐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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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이 2019년 4월25일 서울 서초동 장세동씨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포명령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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