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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5·18 군 기록 3곳에 등장하는 공용터미널 18구 주검 행방 묘연

by 무궁화9719 2023. 5. 18.

5·18 군 기록 3곳에 등장하는 공용터미널 18구 주검 행방 묘연

등록 2023-05-18 14:00수정 2023-05-18 14:54

옛 광주공용터미널 지하에 주검 방치
군 기록 3곳서 등장…진상규명 필요
공용터미널 학살 참상 목격자 기록도

1980년 5·18항쟁 당시 공수 특전여단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항쟁 당시 옛 광주공용터미널 지하에 18구의 주검이 방치돼 있다고 각종 군 기록 3군데에 나오지만, 주검 행방은 묘연해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한겨레가 확보한 ‘광주사태시 전교사 정보일지’를보면, 5월22일 밤 10시35분 공용터미날 지하에 18구(시체) 전시라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공용터미널은 광주시 동구 대인동 현 롯데백화점 터에 있었는데, 공용터미널 로터리는 금남로와 광주역과 함께 5·18 당시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진압에 맞서 시위가 격렬하게 발생한 곳이다. 이 작전일지는 보안사령부 광주 505보안대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것이다.
 
육군본부 상황일지와 전남합수단(505보안대)의 ‘광주사태시 전교사 정보일지’, 출처 불명의 군자료 등에 광주공용터미널에 주검이 방치돼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육군본부 상황일지의 5월22일 기록엔 ‘광주 공용터미날 지하실 시체 전시(실물) 18구’라고 적혀 있다. 또 다른 군 기록엔 ‘5월23일 광주 공용버스터미날 지하실에 시체 18구 전시’라는 내용이 나온다. 동일 사건으로 3건의 군 기록이 보이지만, 당시 18구 주검의 행방과 처리, 이동 과정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용터미널 학살 참상의 목격자도 있다. 5·18항쟁 10일 동안 취재수첩 3권에 공수 특전여단 군인들이 저질렀던 학살의 참상을 꼼꼼하게 기록했던 고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는 <10일간의 취재수첩>(1988)에 “오후 6시쯤 대인동 공용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고 밝혔다. 김 전 기자는 “이 주검들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라며 “또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공용터미널 앞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고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1988)에 나오는 공용터미널 상황.
 
당시 공용터미날은 공수 특전여단 군인들의 집결지이자 숙영지였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5월19일 7공수 특전여단 35대대가 시위진압에 나선 뒤 전남도청, 광주소방서를 거쳐 공용터미널에서 11공수 특전여단 61대대와 함께 숙영한 것으로 나온다. 11공수 특전여단 61대대는 20일 새벽 4시께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했다. 정수만 5·18 연구자는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땐 시민들이 부상자를 대부분 병원으로 이송했기 때문에 공용터미널 주검 기록은 5월21일 이전 사건 희생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1공수 특전여단이 공용터미널에 숙영했다는 군 상황 기록.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공용터미널 주검 18구에 대해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사위 쪽은 ‘암매장’과 5·18 행불자 의혹과 관련해 “광주시와 5·18기념재단으로부터 이관받은 53곳 암매장 제보내용에 대한 사실관계를 조사했고, 민간인 주검을 가매장 또는 암매장하도록 지시·실행·목격했다는 계엄군 56명의 증언을 받아 17곳에서 유해 발굴 조사를 해 영암·해남·광주교도소 앞 등지에서 9기의 유해를 발굴해 신원 확인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오인해 30분간 교전…현장 참혹”

등록 2023-05-18 10:00수정 2023-05-18 12:09

5·18 전투병과교육사령부 교도대원 정광효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육군 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
 
1일 경남 합천군의 한 지역신문사 사무실에서 만난 정광효(65)씨는 오래된 일기장 안에 보관해온 ‘국난극복기장’ 휘장을 보여줬다. 전두환 정권이 비상계엄(1979년 10월26일~1981년 1월24일)을 해제한 뒤 군인과 공무원 등 79만명에게 수여한 것 중 하나다.
 
정씨는 “5·18 때 민간인들이 군인한테 당한 것을 아는데 그걸 기념하겠다고 기장을 주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정씨는 일기에 ‘훗날 전씨 시대가 끝날 때 이 쇳조각이 올가미의 상징일지 모르겠지만 주는 거니까 받긴 했다’는 속마음을 적어놓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 복무를 했던 정광효씨가 1981년 전두환 정권에서 받은 국난극복기장과 이에 대한 생각을 쓴 일기장.
 
전씨의 고향이기도 한 합천 율곡면 출신인 정씨는 1979년 6월29일 논산훈련소로 입대한 뒤 전북 익산 제2하사관학교로 파견되면서 호남 땅을 처음 밟았다고 한다. 1979년 12월31일 광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육군보병학교 교도대(교육·훈련이 주목적인 부대) 조교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5월19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는 채 소총(M16)과 개인용 실탄 120발, 분대용 실탄 1060발, 비상식량, 판초우의, 모포, 야전삽 등을 챙겼다. 당시 그는 ‘북한군이 쳐들어온 줄 알았다’고 한다.
 
교도대는 광주와 화순, 나주 사이 경계지역에 투입됐다. 5월24일은 송암동 인근 야산에 매복했다. 시민군이 장갑차를 탈취했다는 소식에 화기중대는 90㎜ 무반동총을 챙겨 광주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1~3중대는 나주 쪽에서 오는 차량을 차단했다.
 
1979~1981년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심정을 쓴 일기.
 
당시 정씨는 본부~대대~중대가 연결된 무전기를 메고 있었다. 오후 2시께 화기중대장이 “첨병(감시병)들이 마을을 향해 총을 쏘며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무장세력을 봤다”고 보고했다. 교도대장(중령)은 “폭도인지 단단히 살펴보라”고 수차례 지시했다. 화기중대장이 “폭도 같다. 우리 앞까지 왔다”고 보고하자 교도대장은 “그러면 잡아라”라고 명령했다.
 
화기중대는 곧장 무반동총 등으로 장갑차와 뒤따르던 군트럭을 공격했다. 정씨 기억으로는 30여분쯤 교전한 뒤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상대편이 11공수여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교전 현장은 참혹했다. 11공수여단의 한 중사가 교도대장의 정강이를 발로 차며 “아군 적군 구분도 못 하는 너희가 군인이냐”고 하극상을 벌였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된 뒤 정씨가 길 안내를 하려고 앞장서서 걷고 있는데 승용차에 탄 최웅 11공수여단장이 옆으로 다가와 권총을 겨누며 “총성이 또 들리면 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후 교도대는 매복 임무를 이어가다 부대로 복귀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산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가 일기장에 그린 전교사 전경.
 
정씨는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내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1988년 국회에서 광주청문회가 열리자 합천 출신 김광일 통일민주당 의원실에 전화를 걸어 일기 내용을 토대로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줬다. 명령이었지만 출동한 사실 자체가 미안해 1990년대엔 자녀들을 데리고 국립5·18민주묘지를 네차례나 찾아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전두환씨가 합천 출신이라는 사실도 부끄러움을 더했다. 2004년 합천읍에 생긴 ‘새천년 생명의 숲’이 2007년 1월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자 원래 이름 찾기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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