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성군은 세종, 인간 승리 드라마는 정조”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세종은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나 조선에 태어난 첫 임금이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다.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조선 제4대 왕이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왕.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된 후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이 되는 전반적인 제도를 갖추었고, 조선왕조가 지배 기반으로 삼은 유교문화를 융성하게 했다.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농사에 도움이 되는 천문기구를 개발하고 도량형을 정비했고, 출판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대외적으로 여진과 왜를 정벌하고 명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했다.
세종은 31년의 재위 치세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으며, 역대 한국사 군주 중에서도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이 통용되는 군주이기도 하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으며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세종의 치세는 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세종은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제도의 정비
세종이 재위한 15세기 전반기는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 즉 군현제(郡縣制)가 정비·확립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세종은 그의 치세 동안 태종이 이룩해 놓은 지방통치체제의 기반을 계승하면서 토호적 향리를 제거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 행정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기 위한 수령육기법(守令六期法)과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의 실시, 도와 군현 구획의 부분적 개편, 임내(任內)의 정비, 양계(兩界) 신설주진(新設州鎭)의 개척에 따른 구획과 사민입거(徙民入居) 및 유향소(留鄕所)의 복설, 경재소(京在所)의 효율적인 운용 등 지방통치면에서 획기적인 치적을 남겼다.
이와 더불어 관리의 등용·녹봉 체계를 고치고, 언로(言路)를 보장하는 등 관료제도를 정비했다.
관리등용제도로는 과거제도 이외에 취재제도(取才制度)를 실시해 지방의 수령(守令)·이서(吏胥)·문음(門蔭) 출신자 등에 대한 선발기준을 마련했다. 아울러 실직품관(實職品官)으로 흡수하기 어려운 종친·공로자·연로자 등에게 관직 없이 관계(官階)만을 주는 산관제도(散官制度)와, 잡직관인(雜職官人)·품외관인(品外官人)에게 교대로 녹봉을 받게 하는 체아제도(遞兒制度)를 실시해 관직에 대한 과다수요를 조절했다. 이외에도 백관(百官)이 교대로 왕과 정사를 논의하게 하는 윤대법(輪對法)을 실시해 언론의 활성화를 꾀했다.
한편 법제적인 면에서는 1422년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속육전 續六典〉을 편찬하기 시작해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1435년에는 완성을 보았다. 또한 형벌제도를 개혁하여 가혹한 고문으로 피심문자(被審問者)가 죽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죽을 죄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심(三審)을 받게 하는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했다.
1444년에는 노비를 노주(奴主)가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도록 하고 위반한 자는 처벌하게 했다.
경제정책
세종은 국가의 수입을 증대하고 민산(民産)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기술을 발전시키고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태종 때 보급된 〈농상집요 農桑輯要〉가 중국 화북지방의 농법을 다룬 것이어서 조선 농업의 중심지인 삼남지방의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편찬했다. 이는 삼남지방의 농업관행을 기초로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법을 보급하려 한 것이었다. 〈권농교문 勸農敎文〉에서는 목민관들에게 권농의 이념과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유의사항을 지시했다.
또한 세종대에는 농업 재생산력의 보존과 사회안정책의 일환으로 진휼정책이 가장 빈번하게 시행되기도 했다. 한편 토지분급제도도 일대 개혁이 단행되어 1431년 새로운 급전법(級田法)인 4등순급법을 마련해 과전(科田)의 지급량을 축소하도록 했다.
또한 공신전(功臣田)의 지급을 대폭 감축하는 등 개인에게 지급하는 과전의 총량을 크게 줄이고 나머지는 국가기구로 돌려 전체적으로 국가재정을 증대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이는 곧이어 제정되는 공법의 정지작업이었으며 하삼도사전(下三道私田) 환급의 전제가 되는 것이었다.
조세제도의 개혁에서 가장 큰 업적은 공법(貢法)의 제정이었다.
과전법(科田法) 체제에서의 조세규정은 지역마다 차이가 나는 토지비옥도를 상세히 고려하지 않아 조세징수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가, 실제 풍흉을 조사하여 세액을 결정하는 답험손실(踏驗損失)에도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즉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공전(公田)에서는 수령이, 전주(田主)에게 조(租)를 납부하는 사전(私田)에서는 전주가 답험을 담당했으므로 이들의 농간에 따라 공평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세종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 1443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세우고 이의 개선을 연구하게 했으며, 1444년 공법을 시행했으며 여기에서는 풍흉과 토지비옥도의 차이에 따라 각각 9등급과 6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의 차이를 두는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전분6등법(田分六等法)을 실시해 조세의 공평을 도모했다.
이때의 세율은 과전법에서의 1/10에서 1/20로 감소되었지만, 토지가 비옥한 삼남지방이 대부분 높은 등급으로 책정되었으므로 국고수입은 크게 증가했다. 농민의 경우는 결당(結當) 기준 세액이 300두(斗)에서 400두로 늘어나 세율의 인하만큼 부담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전주나 관리의 자의적 중간수탈이 배제되어 그 부담이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대외정책
세종의 대외정책은 태조 이래의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왜·여진 등에 대한 교린(交隣)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에서는 처녀진헌(處女進獻)과 금은조공(金銀朝貢)을 폐지하는 등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했다.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두만강·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고 6진(六鎭)·4군(四郡)을 설치, 이곳에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왜에 대해서도 1419년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1423년 삼포(三浦)를 개항하면서 회유책도 병행했다.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1443년 계해조약을 맺어 세견선(歲遣船)과 세사미(歲賜米)의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했다.
문화의 발달과 훈민정음의 창제
세종대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문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을 비롯하여 음악·미술 등 예술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훈민정음의 완성과 반포는 이 시기 문화유산의 결정이라 할 만하다.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간행사업은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 등의 역사서, 〈사서언해〉·〈대학연의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 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 明皇誡鑑〉·〈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동국정운〉 등 훈민정음이나 음운·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 등의 의서, 〈농사직설〉 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중국문학·천문·병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유교의례가 정리되면서 이에 필요한 음악이 크게 발달했다(한국음악). 여러 악기를 조율할 수 있는 율관(律管)이 제작되고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정간악보(井間樂譜)가 만들어지는 등 음악학이 발달했고, 조회아악(朝會雅樂)·제례아악(祭禮雅樂) 등 아악이 정비되었다.
이러한 음악의 발달은 박연(朴堧)이라는 뛰어난 음악가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음악에 조예가 깊은 세종의 역할도 컸다. 1443년 완성되어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와 해설서, 한문서적의 언해서를 간행하고 활자를 목각하는 등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일반 민(民)들에게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보급시켜 유교윤리에 바탕을 둔 교화(敎化)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밖에 춘추관·충주·전주·성주 등에 실록 보관을 위한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과학기술의 발달
세종대에는 과학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천문기상 부문에서는 1434년 천체관측시설인 간의대가 준공되었다. 이곳에 설치된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 등 천문관측기기는 송·원의 과학기술의 영향과 고려 때까지의 우리나라 천문과학의 유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괄목할 만한 것으로 해시계·물시계·측우기의 발명을 들 수 있다. 해시계로는 정초·장영실(蔣英實) 등이 발명한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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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시계는 흐린 날이나 밤에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표준시계로 쓰였다.
1398년에 이미 경루(更漏)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가 있었지만, 세종대에는 장영실이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 더욱 발전한 물시계를 만들었다. 1441년 측우기의 발명은 빗물이 땅속에 스며드는 깊이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개선해 과학적이고 수량적인 강우량 측정을 가능하게 했다.
이밖에도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이라는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발달한 중국·이슬람의 천문학과 역법의 계산방법을 흡수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독자적 역법계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술의 발달이다. 태종 때인 1403년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만들어졌으나 글자의 모양과 크기가 매끈하거나 고르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즉위초부터 새로운 금속활자 인쇄기술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은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활발한 간행사업의 수행은 이러한 인쇄기술의 발전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1431, 1446년에는 도량형 제도가 확립되었다. 아악에 사용되는 황종관(黃鐘管)의 길이와 그 속에 담기는 물의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도량형 제도는 그뒤 〈경국대전〉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화포의 주조기술과 화약 제조기술도 단순한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했다.
천자화포(天字火砲)·지자화포(地字火砲) 등 새로운 화포를 개발했으며, 〈총통등록 銃筒謄錄〉을 편찬하여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정확한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했다.
'밀어주는' 세종-'끌고가는' 정조
세종 "충분한 토론 거쳐 업무 위임"
정조 "국정목표 설정 뒤 동참 설득"
세종과 정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君師)'로 칭송받고 있다. 군사란 임금이 곧 스승이란 의미다. 마침 이들을 다룬 사극이 방송 전파를 타고 있다. 드라마 제작에 발맞춰 두 군주의 삶과 정치를 다룬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종과 정조, 이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의 닮은 꼴과 다른 꼴은 무엇일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는 동양철학 비평·리뷰지인 <오늘의 동양사상> 제17호에 투고한 글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 스타일 비교>에서 이 문제를 검토했다. 박 교수는 둘의 리더십 차이를 결론적으로 이렇게 규정했다. "세종이 '뒤에서 미는' 방식의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앞에서 끄는' 방식의 지도자였다." 즉 세종은 충분한 찬반토론을 거쳐 정책의 장단점을 드러나게 한 다음, 그 일을 주관할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긴 반면, 정조는 국정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신하들에게 그 길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거나 위협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회의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고 지은이는 밝혔다. 세종은 "어전회의를 국가 운영의 핵심적 과정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태조와 태종 때 23회와 80회에 불과했던 어전회의인 경연을 세종은 무려 1898회 열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경연에서 말끝마다 "경들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하여 신료들의 토론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고 박 교수는 적었다. 세종의 회의 활성화 전략에는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도 포함된다. 그는 계속되는 가뭄에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반면 정조는 자신이 직접 나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혁한다는 혐의'를 두려워 하는 개혁 반대론자들에게 "현상 유지의 폐해가 훨씬 심각하다"면서 개혁의 정당성을 강하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송나라때 개혁을 시도했던 왕안석과 같은 인물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도 정조의 개혁 전략 가운데 하나였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정조는 경연에서 왕안석을 재평가함으로써 개혁 부정론과 소극적 국왕론을 동시에 극복하려고 했다. 재위 15년의 '중용강의'가 그 예다." 중용 강의에서 좌의정 채제공이 "한 자의 글을 읽는 것보다 한 치의 실천이 낫다"고 하자 정조는 이에 공감하며 "용의 고기가 어떻다고 하는 것보다는 돼지고기라도 먹는 것이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을 실천이 아니라 앎의 문제로 보는 당시 보수적 노론 신하들의 견해를 경연에서 정면 반박한 것이다.
말투와 성격도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이라고 했다. 정조의 말 첫머리에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반면 세종은 "일단 긍정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스타일"이다. 예컨대 "네 말이 아름답다" "경들이 말을 합하여 간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고 말한 뒤 "그러나 말을 따를 수는 없다"고 하는 식이다.
"세종이 '정치적 리더십'에서 뛰어났다면 정조는 '지적 리더십'에서 역사에 기여했다." 박 교수는 세종 시대 배출된 100여 명의 집현전 학사가 조선 전기의 기틀을 닦은 정치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이나 박지원과 같은 걸출한 학자로 성장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정조의 '가르치기 좋아하는' 회의 방식이 정약용 박제가 등의 왕성한 학문적 결실로 이어진 점을 긍정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평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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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일생
정조대왕은 1776년부터 1800년까지 한국의 조선 왕조를 통치한 군주였습니다
조선 제 22대 왕이자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 학자들을 등용하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물 위주로 등용하는 준론탕평책을 펼쳐 관료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전제 개혁 등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고 장용영을 설치해 군문을 정비했다. 재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북학파를 중시해 재화를 늘리도록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을 해나갔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규장각 설치와 문운의 융성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금원(禁苑) 안에는 규장각의 부설기관으로 봉모당(奉謨堂)·열고관(閱古觀)·개유와·서고(西庫)·이안각(移安閣) 등을 두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활발한 서적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1781년 〈어정성학집략 御定聖學輯略〉·〈어정팔자백선 御定八子百選〉, 규장각 소장 3만 여 권의 분류목록인 〈규장총목 奎章總目〉, 1782년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한 〈증보동국문헌비고〉(146권), 〈국조보감 國朝寶鑑〉, 1784년 〈규장각지 奎章閣志〉·〈홍문관지 弘文館志〉, 1785년 〈대전통편〉·〈태학지 太學志〉, 1786년 〈갱장록 羹墻錄〉, 1787년 〈문원보불 文苑黼黻〉·〈어제춘저록 御製春邸錄〉·〈전율통보 典律通補〉, 1788년 〈동문휘고 同文彙考〉, 1789년 〈해동읍지 海東邑誌〉, 1790년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1794년 〈주서백선 朱書百選〉, 1796년 〈규장전운 奎章全韻〉·〈어정사기영선 御定史記英選〉, 1797년 〈오륜행실 五倫行實〉, 1798년 〈오경백편 五經百編〉, 1799년 정조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이 편찬·간행되었다.
탕평책의 실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으며,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지는' 정도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초기부터 홍국영·유언호(兪彦鎬)·김종수(金種秀) 등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시비(是非)·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에 우선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에서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고, 산림(山林)·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즉위초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의 외척당을 와해시켰으며, 홍국영도 제거했다.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세력에 의한 공론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지향했다.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文風)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규장각은 이제까지의 여러 관각(館閣)들의 기능을 병합(倂合)하여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기(士氣)·명절을 존중하는 청론을 강조함으로써 준론탕평을 달성할 수 있는 청류(淸流)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기능했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개혁정치의 지향
정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정조가 의도했던 개혁은 1777년 반포된 대고(大誥)에 "민산(民産)을 만든다, 인재를 무성하게 한다, 군사를 다스린다,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4개 항목으로 집약되어 있다.
민산의 문제는 경계(經界)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전제(田制)의 개혁으로 파악하고,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정조 치세 동안에 실시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은 말업(末業)으로 파악했으나, 농민의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 소상인의 증가에 대해서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함으로써 해결을 기도했다.
군사문제는 군문(軍門)의 혼란을 지적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 재정의 문제는 축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전통적인 주자학자들의 주장인 절약과 검소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보았다. 재화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하는 북학파를 중시하고,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를 받는 등 농업생산력 발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재정확립을 위한 기초 조사로서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양곡수를 조사한 〈곡부합록 穀簿合錄〉, 전국에 걸친 환곡의 현황을 조사한 〈곡총편고 穀總便攷〉,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한 〈탁지전부고 度支田賦考〉 등을 간행했으나, 구체적 방안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금지했다.
1777년 서얼들의 허통요청으로 〈서류허통절목 庶類許通節目〉을 정했다. 1778년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기 위해 형구(刑具)의 규격과 품제를 정한 〈흠휼전칙 欽恤典則〉을 발포하고, 도망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역(曆)을 미리 계산하여 〈천세력 千歲曆〉을 편찬·간행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 字恤典則〉을 반포하여 흉년에 버려지거나 굶주린 아이들을 구하는 법을 정했다. 재위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으나,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정조의 역사적 평가
정치 개혁
부패와 싸우고 통치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중요한 정치 개혁을 시행,
공무원 시험 제도의 강화를 추구했고 출신보다는 공적에 입각한 관리들을 승진시켰으며
강력한 파벌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경제와 농업 개혁
성장과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와 농업 개혁을 시작했으며, 토지 분배를 개선 하기위해
토지 개혁을 시행했으며, 관개 사업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장려했으며, 기반 시설 개발을 지원했으며,
서민들의 세금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과학과 학문의 장려
예술, 과학, 학문의 후원자였습니다.
그는 집현전(집현전)을 세웠는데 이것은 학자들의 지적 중심지 역활을 했고 재위 기간동안
학문과 지적 탐구를 양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의 종합 백과사전인 "4대 보물 전집" 편찬을 후원했습니다.
화성의 건설
정조대왕의 가장 유명한 업적중 하나는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 산성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상징이였고 그의 기억을 기리기위한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국방에서 전략적인 역활을 했고 행정과 경제활동의 중심지 역활을 했습니다.
복원과 보존 노력
정조는 역사적인 장소와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는 해인사와 불국사를 포함한 중요한 사찰들의 복원에 자금을 지원하여 종교적 건축적
랜드마크 보존에 기여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지원
정조는 예술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 예술적 노력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문학과 시의 발전을 장려했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의 창작을 후원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동안 문학과 예술적 표현의 번영을 목격했습니다.
수원시 개발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려는 그의 노력을 통해 정조는 도시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산성의 건설은 수원을 지역 중심지로 성장시켜 경제활동을 유치하고 문화적 역사적 중요성에 기여했습니다.
사회복지의 증진
서민의 복지를 우선시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는 가난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고 자연재해 동안 구호를 제공했으며 공중 보건을 개선 하기위해
병원과 약국을 설립했습니다.
정조의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고 진보적인 군주 중 한명으로 여겨집니다.
부패와 싸우고 강력한 파벌의 영향력을 줄이고 공무원의 능력주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통치를 강화하고 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인 행정을 확립하기위한 노력은 높이 평가됩니다.
정조의 경제와 농협 개혁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토지개혁, 관개 프로젝트,
인푸라 개발노력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서민들의 부담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경제성장과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문학, 시 그리고 예술에대한 그의 지원은 그의 통치 기간동안 문화적 르네상스를 촉진했습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의 상징으로 수원 화성을 축조한 것은 큰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그 요새은 그 자체로 건축적인 경의로움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리고 가족의 보존하는 정조의 헌신하는 그의 강한 효심을 보여줍니다.
정조의 통치는 종종 좋은 통치와 서민들의 복지에 대한 강조와 관력이 있습니다.
부패를 줄이고, 공무원 서비스를 개선하고, 사회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대한민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는 신민의 안녕을 우선시한 통치자로 기억됩니다.
정조의 통치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진보와 계몽의 시기를 나타냅니다. 그의 개혁, 예술과 과학에 대한 지원,
그리고 사회복지에 대한 강조는 번영의 문화와 지적 환경에 기여했습니다.
진보적이고 계몽적인 군주로의 그의 유산은 대한민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반적으로 정조는 통치, 경제 발전, 문화 후원, 그리고 효도에 대한 그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역사적 평가는 한국 역사에 대한 기여와 국민들의 복지와 복지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반영합니다.
(옮겨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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