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참사 특별법 왜곡과 싸우는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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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참사유가족과 시민들이 29일 서울광장 시민분향소 앞에서 진행된 '이태원참사 6개월 추모촛불문화제'에 참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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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안고 이 밤에 촛불을 켜 / 새빨간 별 서로 비추는 별 / 이리 와 여기 앉아 쏟아지는 빗방울을 같이 보자 / 세상이 끝나지 않게 / 너를 안고 세상에 용기를 내"
29일 오후 7시, 서울광장 이태원참사 시민분향소 앞. 기타를 메고 추모 공연에 나선 이는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인 고 진세은씨의 사촌언니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예람씨였다. 참사가 발생한 지 6개월.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함께한 촛불추모제 자리에 추모 공연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비가 그친 직후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씨 탓에 촛불이 꺼지기를 반복했지만, 유가족과 시민들은 함께 불을 나누고 담요를 덮어가며 추모제를 이어갔다. 예람씨는 공연 중간에 "정부는 참사가 6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등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용기라는 것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립조사기구 설치가 재난의 정쟁화? 어떤 진실이 규명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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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서울광장 시민분향소 앞에서 '이태원참사 6개월 추모촛불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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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의 시간 흘렀지만,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여전히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다. 윗선 배제 수사로 비판받은 경찰청 특별수사본부 수사와 반쪽짜리로 끝난 국회 국정조사 이후,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특별조사기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같다.

유가족들의 전국 순회 진실버스를 통한 국민동의 청원 달성 이후,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기본소득당 183명의 야권 국회의원들이 이태원참사진상규명 특별법을 공동발의했지만, 여당인 국민의힘은 요지부동인 상태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더나아가 지난 2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이태원참사특별법안을 야권의 "총선전략 특별법"이라고 깎아내린 바 있다. "국회 국정 조사를 통해 많은 부분이 규명됐다"는 주장이었다.
유가족들은 일제히 비판을 제기했다. 이들은 이날 낸 입장문 '우리들의 다짐'에서 "국정 운영의 한 축인 여당, 국민의힘 지도부 일부에서 특별법 내용을 왜곡하는 발언을 했다"며 "특별법 안에는 과거 세월호 참사, 과거사 인권 침해, 자연 재난 등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정됐던 여러 특별법에 이미 명시돼 있던 수준의 권한을 가진 독립조사기구로 상정돼 있는데도 무소불위 조사기구라며 여론을 호도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촛불추모제에서 마이크를 잡은 고 유연주씨의 아버지 유형우씨는 "많은 시민 분들과 국회의원 여러분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많이 동참해주셨는데, 그 참사 (책임) 당사자인 국민의힘과 정부는 우리를 지금까지도 외면하고 막말을 일삼으며 유가족들을 2차가해를 한다"면서 "'몰랐다'는 말만 하는데, 그 자체로 행정을 모르는 것으로,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권력을 영위하고 있다.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10.29이태원참사 대응 TF 단장을 맡고 있는 윤복남 변호사는 진상규명 특별법을 '정쟁'으로 폄하하는 여당 측의 태도를 다시 꼬집었다. 윤 변호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증거는 교묘히 사라지고 생존자와 구조자들의 기억도 희미해지므로 하루 바삐 특조위를 구성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서 "그런데도 정부 여당은 (특별법 발의를) 재난을 정쟁화한다고 한다. 무슨 진상을 더 밝히냐고 따진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군중 유체화가 사건의 원인이라는데 말이 되나"라면서 "왜 몇 년간 배치한 경찰 인력을 배치하지 않아 군중 인파 관리에 실패했는지, 왜 경찰청 보고에서 한 달 전부터 인파 위험 대비가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는지 규명이 안됐는데 어떤 진실이 규명됐나. 군중유체화는 (참사의) 결과일 뿐 원인이라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진선미 민주당 의원도 참석했다. 진 의원은 오는 9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 심판 공개 변론 기일을 걱정했다. 그는 "유족을 대표하는 분들이 함께 방청하며 진행과정을 지켜봐야할 텐데, 이 자리에서 책임 회피 발언을 묵묵히 듣고 계셔야 할 것 같아 가슴 아픈 일"이라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늘 연대해서,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도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함께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모욕부터 응원까지, 필름처럼 생생한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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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민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부대표가 29일 서울광장 시민분향소 앞에서 진행된 '이태원참사 6개월 추모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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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대표 직무대행은 6개월의 시간을 돌아보며 "너무 생생하게 필름처럼 머릿속에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녹사평 분향소에선) 우리에게 아픔과 생채기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 너무 힘들었다. 우리가 왜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나 의구심이 많았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보냈다"면서 "서울시청에 들어올 때도 생생히 기억난다. 솔직히 우리를 지지해주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힘듦과 아픔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다.
이 직무대행은 "유가족 몇몇이 어떻게 이 무거운 싸움을 해 나가겠나. 절대 불가능한 싸움을 우리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이걸 가능하게 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 드린다"고 했다.
한편, 이태원시민대책회의와 유가족협의회는 특별법 제정 동참을 촉구하는 5월 8일 국민의힘 당사 앞 24시간 행동과 함께, 참사 200일을 맞아 5월 20일에는 국민과 함께하는 추모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아빠를 위로하던 "치맥, 콜?"... 더이상 오지 않는 딸의 문자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옷으로 '이야기' 전하려 했던, 아름답게 빛나던 박가영씨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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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의 아버지 박계순씨가 26일 오후 충청남도 홍성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의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 |
ⓒ 유성호 | 관련사진보기 |
유독 춥거나, 유독 더운 날 박가영(21)씨는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치맥, 콜?"
그렇게 마주앉아 맥주 한 잔을 나눴다. 가족 내 유일한 술친구였다. 30년 동안 자동차 정비일을 해 온 아빠의 고단함을 안 가영씨 나름의 마음 표현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한 잔 하러가자"며 엄마와 치킨집에 가 콜라를 시켜놓고 수다를 떨던 딸이었다. 엄마 나이 서른에 낳아 스무해 키운 딸은 진즉부터 친구 같았다. 엄마는 "아침부터 농담을 시작하면 저녁 때까지 내리 떠들어도 그렇게 즐거웠다"고 했다.

아름다울 가, 빛 날 영. 가영은 이름대로 아름답게 빛나던 아이였다. 유쾌하고 강단 있었다. 아빠가 옥편을 뒤져가며 지은 이름이다. 으레 친할아버지가 지었을 이름을 아빠가 지은 건, 가영이 어렵게 가진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귀하고 소중했다.
결혼하자마자 엄마 자궁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자궁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는 아기를 못 가질 거라고 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호르몬 주사도 맞고, 배란 주사도 맞고, 시술도 했다. 햇수로 3년을 매달렸다. 그러다, '포기하자' 한 그 달 가영씨가 찾아왔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딸은 바닥에 내려놓을 일 없이 컸다. 시댁에서 첫째 손녀, 친정에서는 고명딸이었다. 증조할머니도 살아계셨고, 친할머니·친할아버지에 작은할아버지·작은할머니, 외할아버지·외할머니 모두 "이루 말할 수 없게 가영이를 예뻐"했다. 어른들이 '우쭈쭈' 해주시기에, 가영의 엄마·아빠는 도리를 가르쳤다.
"'할아버지 은행'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용돈을 주셨어요. 그래서 '용돈을 받으면 적어도 세 번에 한 번은 뭐라도 대접해드려라'라고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혼자 부산 여행을 가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라~' 해놓고 몰래 뒤를 따라다녔죠. 그러다 가영이한테 걸렸어요(웃음). 그 뒤로 각자 여행하자기에 집에 돌아와서 만났는데, 부산 어묵을 한 보따리 사온 거예요. 외가·친가에 빠짐없이 싹 돌렸어요."(엄마)
"그래, 해봐~" 역시 부모님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다.
"해보고 안 될 수도 있고, 잘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무조건 '안 돼' 해버리면 시작도 못해요. 그래서 되든 안 되든 해봐, 그렇게 말해줬었죠." (엄마)
가영이가 가고 보름 뒤, 합격 통보서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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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가 생전에 어머니 최선미씨와 함께 찍은 사진. | |
ⓒ 유성호 | 관련사진보기 |
지난 26일, 아빠의 가게에서 만난 엄마 최선미씨와 아빠 박계순씨는 가영이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길 바랐다고 했다. 피아노·바이올린·첼로·가야금·댄스 스포츠·과학·합기도·미술 해볼만한 건 다 시켜봤다. 가영이 택한 건 그 중 가장 못했던 미술이었다.
"7살 때부터 2년을 미술학원을 보냈는데, 학교 선생님이 '미술 학원을 보내셔야 하지 않겠냐'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그만뒀죠. 그림 그린 걸 보면 '어이구야' 하게 되는데 가영이가 하나하나 설명하면 나름의 스토리가 있더라고요. 제일 못한 게 미술인데 결국 자기 의지로 미술 쪽을 진로로 택했죠." (엄마)
가영은 장래희망을 중학생 때 정했다. 목원대 패션디자인학과 학생들이 패션쇼를 하는 걸 TV로 보고 매료됐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였다. 가영은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옷으로 전하고 싶다"고 했다.
굳은 마음은 그림 실력이 모자라도, 학교 성적이 부족해도 꺾이지 않았다. 입시 미술 선생님이 "솔직히 대학가기 어려울 거 같다"고 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3시간 수업 들을 거 6시간, 9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난 될 거야" 자신하던 가영은 정말 목원대 섬유·패션디자인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에 들어간 가영씨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캐나다 학교로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뉴욕으로 넘어가 패션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유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도 12시간씩 일했다. "엄마가 내줄게"해도 "엄마 도움도 받겠지만, 그것만으로 유학을 가는 건 맞지 않다"며 세 번의 방학을 오롯이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명절에도 알바비가 더 나온다며 근무를 자처했다. 편의점, 햄버거 가게, 마트, 감자탕 가게, 가릴 것 없이 했다. 2022년 10월 29일, 사고가 난 그 날에도 학교에서 치르는 수시 시험 감독을 돕는 알바를 했다. 며칠 뒤 알바비가 들어왔다. 7만 9000원. 가영이가 써보지도 못하고 간 돈이 1400만 원에 달했다. 가영이가 지원했던 캐나다 학교에서는 가영이 떠나고 보름 후 합격 통보를 보내왔다.
세월호 때 외숙모 잃고, 이제 딸을 잃은 아빠... "또 유가족이 될지 몰랐네요"
10월 29일, 가영은 친구와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는 "자율적으로 혼자 결정할 수 있게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거까지 물어보고 행동하게 했어야 했나, 이태원을 못 가게 했어야 하나, 온갖 것들이 후회가 된다"고 했다.
가영이 떠난 지 벌써 6개월. 5월이 다가오니 엄마는 마음이 아리다. 가영이가 준 카네이션을 한 번도 가슴팍에 달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양가 어르신이 많으니까, 유치원 때 카네이션을 만들어와도 할아버지·할머니 먼저 챙기라고 했죠. 커서도 가영이가 어버이날 때 꼭 할아버지·할머니한테 편지 쓰고 선물하고 그랬는데, 젊은 제가 뭘 꽂고 다니기가 뭐해서 전 항상 뒷전이었거든요. 그게 이제사 아쉬워요."
그 어르신들이 2021년부터 연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가영의 증조할머니,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가시고 이제 친할아버지 한 분 남아계신다. 엄마는, 가영의 사고가 나자 가신 분들을 향한 원망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가영이를 예뻐하셨으면, 가영이가 오지 못하게 하셨어야지... 친정 엄마 돌아가시고 유품 몇 개를 가영이가 썼는데 그거 때문에 그랬나, 자꾸 나에게서, 내 주변에서 원인을 찾게 되더라고요. 미치겠었어요. '왜 이렇게 됐지'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아빠도 자책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때 외숙모를 잃었어요. 그런데 또 유족이 될지 몰랐네요. 외숙모는 일반인 희생자라 학생 희생자 분들과 유가족 모임이 나뉘어졌었죠. 그게 마음이 안 좋아서 유가족 활동에 참여를 많이 안 했어요. 그 때 나도 열심히 참여해서 참사 특별법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가영이 사고가 안 났을까... 후회되더라고요."
자꾸 '나'에게서 원인을 찾던 엄마·아빠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첫 기자회견(관련기사 : "무능한 정부에 아들 뺏겼지만... 무능한 엄마 되지 않겠다")을 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참사구나, 원인이 정부에 있구나. 그 원인을 밝히면 내 아이 명예가 회복되겠구나."
가영의 죽음은 물음표 투성이었다. 10월 30일 새벽 1시 반 엄마는 구급대원과 통화를 했다. "순천향대학병원으로 가영이를 이송하고 있다"고, "가영이 사망했다"고 했다. 그 길로 엄마·아빠는 차를 몰고 내달렸다. 충남 홍성에서 서울까지 135km를 1시간 만에 주파했다. 병원에서는 출입을 막아섰다. 12시간 넘게 병원 앞에서 대기했다. 시신이 자꾸 구급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겨우 겨우 수소문해 아이가 강동성심병원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날 새벽 구급차에 가영이 친구도 타고 있었어요. 연고자도 있었고 구급일지를 작성한 구급대원도 있었고, 구급일지에 우리 전화번호도 가영이 이름도 다 적혀있었는데 '무연고자'로 신원확인을 해야 한다며 12시간만에 아이를 찾게 한 거예요. 가영이를 병원에 데려다 준 구급대원이 이후에 몇 명이나 옮겼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가영이를 내려놓고 거기 계속 있었대요. 다시 현장에 나가서 누굴 구한 게 아니라, 시신을 분산배치해야 하니 대기를 시킨 거예요. 도대체 왜 아이들을 다 떼어놓은 걸까요. 누가 시킨 걸까요." (엄마)
서울에 도착한 지 14시간 만에 아이를 만났다. 손이라도 만져보고 싶었지만 못 만지게 했다.
"한 엄마는 병원 관계자가 자리를 피해주며 둘이 있게 해줬대요. 그래서 샅샅이 봤대요. 왼쪽 가슴 밑에 요만큼 절개된 부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뭘까, 유일하게 그 엄마만 본 거예요. 그걸 못 본 엄마들은 '내 새끼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울화통이 터지는 거죠. 왜 애들한테 손도 못 대게 한 건지..."
'가영이 엄마'가 직업이 된 엄마, "남은 애들 지켜야죠"
'왜'가 쌓여가, 그 타래를 풀기 위해 나선 엄마는 '가영이 엄마'가 직업이 됐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서울과 홍성을 오가며 기자회견, 1인 시위, 서울 시청 앞 분향소 지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11월부터 줄기차게 해 온 얘기예요. 독립적 조사기구가 출범해야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잖아요. 내 새끼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쓰러졌나 CCTV를 보여달라고 해도 그걸 안 보여줘요. 자료가 없대요.
제가 이렇게 매달리는 건, 내 새끼 한 명(가영씨 남동생) 살아있는 것도 이유지만, 남의 새끼도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세월호 엄마들은 이태원 참사 나고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었대요. 다시 4월 16일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죠. 또 참사가 나면 견딜 수 있을까요. 이만큼의 슬픔에 또 이만큼의 슬픔이 더해져요. 그러니 남은 애들 지켜야죠. 결국 나를 지키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다. 정부와 여당은 '묵묵부답'으로 답을 내놓고 있었다.
"시청 분향소 차렸다고 서울시에서 계고장이 날라오고 유족한테 변상금을 부과했죠. 영정사진에 그늘막 안 지게 차광막을 씌우려고 했더니 그것마저도 안 된대요. 시골 사는 엄마들 냉이 좀 캐서 나누려 가져와도 그 가방을 뒤져요. 김밥 싸와도 그걸 사진 찍어서 서울시에 보고한대요. 2분이면 오세훈 시장이 내려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우린 보이지 않나봐요. 이태원 참사 특별법도 여야 합의로 할 것처럼 하더니 야 4당이 발의하게 해놓고 나몰라라. 해결하려는 의지가 하나도 안 보여요." (엄마)
답답함에, 조바심에 유가족들은 하나 둘씩 지쳐가고 있다고 했다. 가영의 사고 후, 엄마는 체중이 25kg 이상 빠졌다. 하얗던 낯빛도 검어졌다.
"애간장이 녹아서 그래요. 뭐라도 조금 먹으면 위가 아프고 당이 300씩 올라가요. 시청 현장에서 쓰러졌었는데 혈압이 220 나왔어요. 이제 제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은 큰 암에 걸려서 (빨리) 병사하는 거예요. 종교를 가진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잖아요. 그럼 우리 가영이를 못 만나잖아요."
엄마의 이 말에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빠의 바람은 하나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잘 만들어서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가영이 만났을 때, '아빠 잘했어, 아빠 덕분에 나라가 살기 좋아졌어' 이 말을 꼭 듣고싶어요."
엄마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벌써 세 번째에요. 개인 책임이라고 넘겨버리면 참사는 언제든 일어나고 또 일어날 거예요. 나라에 세금 내는 건 이런 일이 있을 때 안전하게 보호받으려고 내는 거잖아요. 지금 싸우고 있는 저희에게 '언제까지 울 거냐' 그러지 말고, 시간이 걸려도 버틸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
가영은 장래희망을 중학생 때 정했다. 목원대 패션디자인학과 학생들이 패션쇼를 하는 걸 TV로 보고 매료됐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였다. 가영은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옷으로 전하고 싶다"고 했다.
굳은 마음은 그림 실력이 모자라도, 학교 성적이 부족해도 꺾이지 않았다. 입시 미술 선생님이 "솔직히 대학가기 어려울 거 같다"고 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3시간 수업 들을 거 6시간, 9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난 될 거야" 자신하던 가영은 정말 목원대 섬유·패션디자인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에 들어간 가영씨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캐나다 학교로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뉴욕으로 넘어가 패션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유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도 12시간씩 일했다. "엄마가 내줄게"해도 "엄마 도움도 받겠지만, 그것만으로 유학을 가는 건 맞지 않다"며 세 번의 방학을 오롯이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명절에도 알바비가 더 나온다며 근무를 자처했다. 편의점, 햄버거 가게, 마트, 감자탕 가게, 가릴 것 없이 했다. 2022년 10월 29일, 사고가 난 그 날에도 학교에서 치르는 수시 시험 감독을 돕는 알바를 했다. 며칠 뒤 알바비가 들어왔다. 7만 9000원. 가영이가 써보지도 못하고 간 돈이 1400만 원에 달했다. 가영이가 지원했던 캐나다 학교에서는 가영이 떠나고 보름 후 합격 통보를 보내왔다.
세월호 때 외숙모 잃고, 이제 딸을 잃은 아빠... "또 유가족이 될지 몰랐네요"
https://youtu.be/t7Ohn_pbDCE | |
▲ 이태원 참사 고 박가영씨 부모 "카네이션 한 번 못 달아봤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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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가영은 친구와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는 "자율적으로 혼자 결정할 수 있게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거까지 물어보고 행동하게 했어야 했나, 이태원을 못 가게 했어야 하나, 온갖 것들이 후회가 된다"고 했다.
가영이 떠난 지 벌써 6개월. 5월이 다가오니 엄마는 마음이 아리다. 가영이가 준 카네이션을 한 번도 가슴팍에 달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양가 어르신이 많으니까, 유치원 때 카네이션을 만들어와도 할아버지·할머니 먼저 챙기라고 했죠. 커서도 가영이가 어버이날 때 꼭 할아버지·할머니한테 편지 쓰고 선물하고 그랬는데, 젊은 제가 뭘 꽂고 다니기가 뭐해서 전 항상 뒷전이었거든요. 그게 이제사 아쉬워요."
그 어르신들이 2021년부터 연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가영의 증조할머니,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가시고 이제 친할아버지 한 분 남아계신다. 엄마는, 가영의 사고가 나자 가신 분들을 향한 원망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가영이를 예뻐하셨으면, 가영이가 오지 못하게 하셨어야지... 친정 엄마 돌아가시고 유품 몇 개를 가영이가 썼는데 그거 때문에 그랬나, 자꾸 나에게서, 내 주변에서 원인을 찾게 되더라고요. 미치겠었어요. '왜 이렇게 됐지'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아빠도 자책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때 외숙모를 잃었어요. 그런데 또 유족이 될지 몰랐네요. 외숙모는 일반인 희생자라 학생 희생자 분들과 유가족 모임이 나뉘어졌었죠. 그게 마음이 안 좋아서 유가족 활동에 참여를 많이 안 했어요. 그 때 나도 열심히 참여해서 참사 특별법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가영이 사고가 안 났을까... 후회되더라고요."
자꾸 '나'에게서 원인을 찾던 엄마·아빠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첫 기자회견(관련기사 : "무능한 정부에 아들 뺏겼지만... 무능한 엄마 되지 않겠다")을 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참사구나, 원인이 정부에 있구나. 그 원인을 밝히면 내 아이 명예가 회복되겠구나."
가영의 죽음은 물음표 투성이었다. 10월 30일 새벽 1시 반 엄마는 구급대원과 통화를 했다. "순천향대학병원으로 가영이를 이송하고 있다"고, "가영이 사망했다"고 했다. 그 길로 엄마·아빠는 차를 몰고 내달렸다. 충남 홍성에서 서울까지 135km를 1시간 만에 주파했다. 병원에서는 출입을 막아섰다. 12시간 넘게 병원 앞에서 대기했다. 시신이 자꾸 구급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겨우 겨우 수소문해 아이가 강동성심병원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날 새벽 구급차에 가영이 친구도 타고 있었어요. 연고자도 있었고 구급일지를 작성한 구급대원도 있었고, 구급일지에 우리 전화번호도 가영이 이름도 다 적혀있었는데 '무연고자'로 신원확인을 해야 한다며 12시간만에 아이를 찾게 한 거예요. 가영이를 병원에 데려다 준 구급대원이 이후에 몇 명이나 옮겼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가영이를 내려놓고 거기 계속 있었대요. 다시 현장에 나가서 누굴 구한 게 아니라, 시신을 분산배치해야 하니 대기를 시킨 거예요. 도대체 왜 아이들을 다 떼어놓은 걸까요. 누가 시킨 걸까요." (엄마)
서울에 도착한 지 14시간 만에 아이를 만났다. 손이라도 만져보고 싶었지만 못 만지게 했다.
"한 엄마는 병원 관계자가 자리를 피해주며 둘이 있게 해줬대요. 그래서 샅샅이 봤대요. 왼쪽 가슴 밑에 요만큼 절개된 부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뭘까, 유일하게 그 엄마만 본 거예요. 그걸 못 본 엄마들은 '내 새끼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울화통이 터지는 거죠. 왜 애들한테 손도 못 대게 한 건지..."
'가영이 엄마'가 직업이 된 엄마, "남은 애들 지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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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의 어머니 최선미씨가 26일 오후 충청남도 홍성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 |
ⓒ 유성호 | 관련사진보기 |
'왜'가 쌓여가, 그 타래를 풀기 위해 나선 엄마는 '가영이 엄마'가 직업이 됐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서울과 홍성을 오가며 기자회견, 1인 시위, 서울 시청 앞 분향소 지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11월부터 줄기차게 해 온 얘기예요. 독립적 조사기구가 출범해야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잖아요. 내 새끼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쓰러졌나 CCTV를 보여달라고 해도 그걸 안 보여줘요. 자료가 없대요.
제가 이렇게 매달리는 건, 내 새끼 한 명(가영씨 남동생) 살아있는 것도 이유지만, 남의 새끼도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세월호 엄마들은 이태원 참사 나고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었대요. 다시 4월 16일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죠. 또 참사가 나면 견딜 수 있을까요. 이만큼의 슬픔에 또 이만큼의 슬픔이 더해져요. 그러니 남은 애들 지켜야죠. 결국 나를 지키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다. 정부와 여당은 '묵묵부답'으로 답을 내놓고 있었다.
"시청 분향소 차렸다고 서울시에서 계고장이 날라오고 유족한테 변상금을 부과했죠. 영정사진에 그늘막 안 지게 차광막을 씌우려고 했더니 그것마저도 안 된대요. 시골 사는 엄마들 냉이 좀 캐서 나누려 가져와도 그 가방을 뒤져요. 김밥 싸와도 그걸 사진 찍어서 서울시에 보고한대요. 2분이면 오세훈 시장이 내려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우린 보이지 않나봐요. 이태원 참사 특별법도 여야 합의로 할 것처럼 하더니 야 4당이 발의하게 해놓고 나몰라라. 해결하려는 의지가 하나도 안 보여요." (엄마)
답답함에, 조바심에 유가족들은 하나 둘씩 지쳐가고 있다고 했다. 가영의 사고 후, 엄마는 체중이 25kg 이상 빠졌다. 하얗던 낯빛도 검어졌다.
"애간장이 녹아서 그래요. 뭐라도 조금 먹으면 위가 아프고 당이 300씩 올라가요. 시청 현장에서 쓰러졌었는데 혈압이 220 나왔어요. 이제 제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은 큰 암에 걸려서 (빨리) 병사하는 거예요. 종교를 가진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잖아요. 그럼 우리 가영이를 못 만나잖아요."
엄마의 이 말에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빠의 바람은 하나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잘 만들어서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가영이 만났을 때, '아빠 잘했어, 아빠 덕분에 나라가 살기 좋아졌어' 이 말을 꼭 듣고싶어요."
엄마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벌써 세 번째에요. 개인 책임이라고 넘겨버리면 참사는 언제든 일어나고 또 일어날 거예요. 나라에 세금 내는 건 이런 일이 있을 때 안전하게 보호받으려고 내는 거잖아요. 지금 싸우고 있는 저희에게 '언제까지 울 거냐' 그러지 말고, 시간이 걸려도 버틸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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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의 부모인 박계순씨와 최선미씨가 26일 오후 충청남도 홍성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의 꿈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
ⓒ 유성호 | 관련사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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