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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 조선 ‘왕의 계단’ 콘크리트 때려부어…궁궐유산 ‘테러’

by 무궁화9719 2023. 10. 16.

일본, 조선 ‘왕의 계단’ 콘크리트 때려부어…궁궐유산 ‘테러’

노형석입력 2023. 5. 16. 06:05수정 2023. 5. 16. 08:30

[현장] 일제 전차 철로에 짓눌린 광화문 월대
계단 정중앙 깨뜨리고 잡석·콘크리트 타설
복원해도 일부는 남겨 역사 교육 활용해야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무지막지한 공사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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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했던 한 건축물이 테러와 학살을 당한 현장이었다.
 
조선의 임금과 대한제국 황제만이 궁궐 밖 세상을 나갈 때 거닐었던 월대의 장대한 계단과 돌길은 절반 이상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그 파편들 상흔에 잡석으로 뒤발된 콘크리트가 마구 부어졌고 그 위에 다시 수백개의 육중한 철로와 침목이 놓였다.
 
지난달 25일 문화재청이 취재진에 개방한 서울 광화문 앞 세종로 월대 발굴 현장은 전율을 일으켰다. 100년 전 일제가 조선 왕조의 존엄한 건축물에 자행했던 공간적 테러의 실상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광화문 앞 세종로 남쪽으로 48.9m를 나아가면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흔적이 적나라했다. 선로는 광화문 동쪽으로 휘어져 안국동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취를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반대쪽으로는 효자동으로 꺾어지는 노선이 서로 와이(Y)자 모양을 이루면서 엇갈리는 형상이었다.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흔적이 적나라하다. 선로는 광화문 동쪽으로 휘어져 안국동 방향으로 나아간다.

 

광화문 앞에서 월대를 깔아뭉갠 선로 위로 전차가 주행중인 모습. <동아일보> 1923년 10월4일치 지면에 실린 사진이다.
 
흔히 건축업계나 공사현장에서는 기초를 쌓기 위해 막 잡석을 섞어 버리듯이 기초부를 다지는 콘크리트를 버린 공굴, 막 공굴이라고 부르는데 일제 당국자들은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계단과 임금의 길을 이런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파괴하고 덮어버리면서 전찻길을 닦았던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시와 발굴조사를 벌여 월대의 전체 규모(길이 48.7m, 너비 29.7m)를 확인했고, 임금의 길인 어도시설과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축조한 얼개 등도 확인했지만, 현장에서 이런 성과들 못지않게 도드라진 건 현재 지표보다 약 70㎝가량 아래쪽에 있는 월대 시설물에 1918~1923년 사이 가해진 폭력적인 침탈의 흔적들이었다.
 
앞서 전날 윤석열 대통령은 방미일정을 앞두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안 된다’‘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문제적 발언을 쏟아냈는데, 이에 반박하듯 일제의 공간적 만행이 자행된 궁궐 공간의 도드라진 흔적이 나타난 셈이었다.

 

구한말 광화문을 옆에서 본 모습. 왼쪽으로 삼군부 외행랑과 월대 난간석이 보인다. 전각 아래에는 작은 초소도 보인다.
 
1917년께 전차선로가 부설되기 직전 찍은 광화문과 앞 월대의 모습. 양옆으로 월대의 난간석들이 도열하듯 설치되어 있다.
 
이 치떨리는 궁궐유산 테러의 원흉은 바로 전차였다. 월대가 발굴된 세종로는 본디 서울에서 가장 넓고 큰길인 육조거리였다. 1917년 5월26일 경복궁 앞에서 한창 지반공사를 하던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공사에 들어갈 자재를 실어나르기 위해 먼저 화물수송용 전차 선로가 광화문 왼쪽 문으로 부설되면서 월대 권역은 훼철의 수난을 겪기 시작한다.
 
1918년 6월부터 광화문 사거리인 황토현에서 월대 앞쪽까지 승객을 수송하는 전차 운행이 시작됐고, 운명의 1923년 가을 경복궁에서 일제당국이 조선인 교화를 위해 단골수단으로 써먹던 박람회의 일종인 조선부업품공진회가 열리자 동원한 관객들을 실어나를 전차노선이 경복궁 서쪽을 끼고 돌아 영추문 효자동까지 부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월대는 일제가 타설한 콘크리트에 덮여 지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전차선로에 한세기 넘게 짓눌리는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 궁장이 떼어진 채 남아있는 동십자각과 짝을 이루던 서십자각이 전차선로에 밀려 철거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무지막지한 공사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 계단의 세부.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붓고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날 공개된 현장은 인왕산과 북악산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선 광화문을 배경으로 월대와 그 옆 국방관청인 의정부 삼군부의 외행랑을 짓누르며 뻗어가는 두 전찻길, 그리고 1866년 고종의 경복궁 중건 이전까지 궁 바로 앞까지 다닥다닥 들어섰던 백성들 집 민가의 기초부 흔적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세기 반 전의 현장으로 들어온 듯한 감회를 느끼게 했다.
 
문제는 앞으로의 복원 방향이다. 일제의 공간 침탈상이 도드라진 선로에 짓눌린 월대 남쪽 돌출계단과 서쪽 기단부분에 대해 문화재청은 일단 동쪽 편 기단과 계단과 대칭을 이루는 만큼 침목 등 선로 부분을 철거하고 월대를 온전하게 되살려 경복궁 복원의 취지를 살리겠다는 게 기본 방침이다.
 
가운데 어도 부분의 경우 일단 침목을 뜯어내고 그 아래 구조를 보고 세부 복원 방향을 문화재위원들과 논의해보겠다는 토를 달기는 했지만 월대의 100% 전면복원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공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듯이 현장이 주는 시각적 참상의 강렬함 때문에 선로 일부는 남겨 식민지시절 폭압적 공간사를 일러주는 역사교육장 활용하자는 주장이 적지 않게 나오는 상황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어 보인다.
 
정궁으로서 경복궁의 상징성은 물론 중요하다. 일제에 훼철된 월대의 온전한 복원도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절반 가까이 깨어져 사실상 새로 만들어야 하는 복원이 좀 더 국민에게 확실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유적이 일제의 전차 선로 아래 깨어진 생생한 단면 자체를 살리는 공존의 철학과 복원 디자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문화재청은 광화문 월대 유적 발굴 복원과 관련한 전문가 협의를 문화재위원회 궁릉분과와 수리기술위원회 복원 분과만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사안은 근대기 일제의 궁궐 공간에 대한 침탈사와 깊은 연관이 있고 토층의 보존상의 문제와도 떼어놓을 수 없다. 근대분과, 매장분과, 사적분과 등 다른 여러 분과 전문가들과의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복원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일본이 파묻은 광화문 ‘왕의 계단’ 1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등록 2023-04-25 08:58수정 2023-04-25 14:46

노형석 기자 

광화문 앞 월대 터 발굴…일제 전차선로에 훼손

최근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광화문 앞 월대 유적 현장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휘어진 브이(V)자 모양으로 갈라진 일제강점기 부설 전차선로의 자취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선로가 갈라지는 중앙부 지점 바로 아래에 월대의 어도와 남쪽 계단 돌출 부분이 확인된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왕의 계단’이 나타났다.
 
100년 전 전차 철로에 뭉개진 채 땅속에 파묻혔던 존귀한 계단이 다시 땅 위의 햇살을 받는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법궁 건축물로 1866년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이 궁궐의 위엄 어린 존재감을 정문인 광화문 앞쪽 들머리에서 가장
 
문화재청 산하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 광화문 문루 앞 대로 아래 땅속을 파헤쳐 집중 조사한 끝에 문루 들머리로 진입하는 인공통로 얼개의 구조물인 월대의 주요 자취를 찾아냈다고 25일 발표했다.
 
조사 내용을 보면, 월대 전체 규모는 남북길이 48.7m에 동서 너비 29.7m에 달한다. 유적의 핵심인 어도는 광화문 중앙문과 잇닿는 너비 약 7m의 통로로 밝혀졌다. 비교적 원형이 남은 월대 동쪽 유적을 발굴하면서 고종의 경복궁 중건 당시 월대의 전체 모습 등도 재구성할 수 있게 됐다. 월대 복원을 위한 실물자료를 다량 확보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
 
광화문 앞 월대 유적을 설명하기 위한 합성사진. 누렇게 표시된 부분이 월대 권역이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1923년께 찍은 것으로 추정하는 광화문과 그 앞 월대의 풍경. 난간석을 둘렀지만, 남쪽 들머리 왕의 어도는 대부분 경사로로 바뀌었고 서쪽과 동쪽 끝부분에만 계단 얼개를 남겨놓았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1917년께 촬영한 광화문과 앞 모습. 월대의 난간석은 있으나 계단은 사라지고 어도와 좌우 계단은 모두 경사로로 바뀌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리건판 사진이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1865~1868년 3년 3개월간의 경복궁 중건 공사 과정을 담은 <경복궁 영건일기> 기록과 1890년대 이후 사진자료를 보면, 광화문 월대는 장대석을 다듬어 만든 길쭉한 기단석과 계단석, 난간석을 두르고 내부를 흙으로 채운 건축구조물이었다. 국내에서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사례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실제로 발굴 조사한 결과도 기록과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월대 터의 세부 구조는 간단치 않았다. 우선 동쪽과 서쪽 외곽에 다듬어진 장대석(길이 120~270㎝, 너비 30~50㎝, 두께 20~40㎝)을 써서 2단의 기단을 쌓았다. 기단석 하부에 여러 개의 지대석을 놓고 붉은 점토와 깬돌을 보강해 기초를 다진 뒤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번갈아가면서 쌓는 뒷채움 방식으로 주변보다 높게 대를 이룬 시설물을 구축했다. 월대 남쪽에도 장대석을 써서 계단을 만들었다. 어도와 연결되는 중앙부는 소맷돌을 써서 동쪽 서쪽 계단과 분리한 것이 특징적이다.
 
하지만, 어도계단 터는 일제강점 초기인 1923년 전차선로에 의해 훼손되고 파묻혔고 부재들도 흩어졌다. 다행히도 조사과정에서 소맷돌을 받친 지대석이 나와 월대 원형을 복원하는 데 소중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월대 남쪽 계단터. 어도의 시작인 돌출 계단터가 왼쪽에 일부분 보이는데, 그 위를 일제강점기 부설한 전차 선로의 자취가 덮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월대 남쪽 어도 계단터를 측면에서 본 모습.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1860년대 고종 년간에 처음 쌓은 뒤 1920년대 일제에 의해 묻힐 때까지 월대에는 크게 4단계의 변화과정이 있었다는 점도 이번 조사과정에서 명확해졌다.1단계는 월대 축조 당시의 양상이다. 남쪽에 경계가 나누어진 3개 계단이 있었고 월대를 위에서 내려다본 평면형태는 역철자형(凸)이었다. 2단계에선 중앙의 어도계단 터가 경사진 길로 바뀌었고, 3단계에서는 경사로 범위가 확장되고 계단이 동·서 외곽으로 축소 변형됐으며 처음 외줄 모양의 전차선로가 놓여진다. 4단계는 1920년대 상황으로 전차선로가 겹줄이 되어 월대 시설이 본격적으로 파괴되면서 난간석 등도 철거됐다. 광화문 문루가 경복궁 궁역 동쪽 담장으로 이전할 때 월대의 시설 파편들 또한 근대 도로의 부재로 쓰였다는 추정이 나온다.
 
광화문 앞 월대 유적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휘어진 브이(V)자 형으로 전철 선로가 갈라지는 시작 지점 아래에 월대 남쪽 어도 중앙계단의 돌출부가 깔려있는 모습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어도의 흔적, 남쪽 계단 양옆 동서 계단 부분의 자취가 보인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월대 유적을 설명하기 위해 어도계단지, 어도흔적, 동서편 계단지 등 각 구역별로 색을 입힌 합성사진.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문 앞 월대가 복원됐을 때 모습을 상상해 그린 예시도. 문 앞에 월대 권역 공간이 생기면서 차량이 다니는 대로는 월대 공간을 비켜나 그 아래로 휘어진 형상을 띠게 된다. 사진도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 훼손된 뒤 동구릉 등에 옮겨졌던 난간석, 하엽석 등의 월대 부재를 다시 써서 월대를 복원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쓰는 장인들의 작업을 통해 월대를 진정성 있는 역사 유적으로 되살리겠다고 본부 쪽은 밝혔다.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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