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해결’ 미국의 환호가 적절치 않은 이유
2023.03.07 18:01 입력
한·일 갈등 뒤엔 미국···쌍수 들 제3자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6일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한국이 독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내용의 발표를 내놓자마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미국 시간 심야에 이뤄진 한국 정부의 발표임에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물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웬디 셔먼 부장관·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 대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환영 입장을 내고 한·미·일 협력 강화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한국의 이번 결정은 미국이 가장 원하던 것이었으며, 이로 인한 최대 수혜자이자 승리자는 바로 미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이 이번 한·일 협의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환영 입장을 내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번 사안은 엄중하고 복잡해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단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미국의 ‘신속한 환호’는 경솔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의 일방적 양보 언급 안 한 미국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당국자들의 환영 메시지 속에는 이번 결정이 한국의 일방적 양보로 이뤄졌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본 정부 당국자가 “이번 한국 측의 조치는 일본의 입장에 어떤 모순도 없다”고 평가한 것처럼 이번 결정은 한국이 일본의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이 이를 두고 마치 한·일이 공정하고 상호 만족스러운 합의를 이룬 것처럼 축하하는 것은 많은 한국민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또 아시아의 두 동맹국 중 하나가 일방적으로 양보함으로써 갈등을 푸는 것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위험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고 있다.
한국의 이번 결정은 동북아시아에서 증가하는 위협에 대응하고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선 측면이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이를 ‘주도적 결정’ ‘대승적 결단’ 등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에 요구했던 것들을 관철시키지 못해 포기한 것임을 미국이 모를 리 없다. 한국의 이 같은 결정 배경에는 미국이 행사해온 유·무형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과거 위안부 합의에서 드러난 것처럼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한 한·일 과거사 문제 합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적이 많다. 한국 정부의 강제징용 배상 해법은 이제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국내정치적 이슈로 변하고 있다. 0.7% 차이의 대선 승리로 집권한 윤석열 정부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이 한국의 여론과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공개적으로 환호하는 것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이 진정으로 한·일 협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를 원한다면, 결과에 환호하기에 앞서 이번 협의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면서 한국민들의 공분을 산 일본에 전향적인 조치를 서두르라고 종용하는 것이 먼저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일 갈등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미국
한·일 과거사 갈등에 관한 한 미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 미국이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국이 일본과 전쟁을 치른 교전국임을 인정하지 않은 미국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후속 조치인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식민지배의 피해를 논의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국 주도의 전후 질서에 끌려가야 했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못한 채 덮어 버려야 했으며, 이는 강제징용·위안부·독도 문제 등 모든 한·일 과거사 갈등의 원인이 됐다. 반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전쟁과 침략 범죄에 대해 면책을 받았다. 미국은 일본에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대신 주권을 회복시켜 안보 파트너이자 소련과 공산권에 맞서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한국이 일본과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배경에는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서둘러 일본에 면죄부를 준 원인도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충고하거나 중재해야 할 제3자가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당사자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균형감 없는 강제징용 판결 문제 해결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환호가 적절치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미·일 군사협력 봉인 해제?
미국이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반기는 가장 큰 이유는 한·미·일 협력 특히 군사 안보 분야의 협력을 가속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미·일 협력의 ‘약한 고리’인 한·일 간 갈등 해소는 윤석열 정부 출범과 동시에 미국이 강력히 추동했던 사안이다. 미국은 이번 결정으로 안보 분야에서의 3국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제거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여전히 위험 요소가 남아 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대중 견제의 전면에 세우는 아시아 전략을 펴왔다. 이에 편승한 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은 미국의 용인 아래 우경화·군사 대국화로 치달아 한국을 긴장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와 바이든 정부를 거치면서 미국의 이 같은 전략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한·일관계가 2012년 이후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 한·미·일 군사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한·일 갈등을 증폭시키는 구조적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미·일 협력은 한국에도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는 매커니즘이지만, 이를 단기간에 미국이 원하는 수준으로 높이는 것은 어렵다. 또 기능과 역할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강제징용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해서 한·미·일 군사협력에 ‘그린라이트’가 켜진 것은 아니다. 강제징용 해결책 발표는 정부 표현대로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 미국이 이 문제를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한국을 과도하게 압박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가 빚어질 수도 있다
바이든·블링컨, 이례적 한밤 성명 내놔
바이든 “획기적” 반색…‘강제동원 해법’ 한밤중 환영성명
등록 :2023-03-06 15:31수정 :2023-03-06 22:17
이본영 기자
바이든·블링컨, 이례적 한밤 성명 내놔
대중국 견제 한미일 전략 의식한 듯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 밤(현지시각)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과 일본 정부 반응에 대해 성명을 내어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두 나라의 협력과 파트너십에서 획기적으로 새로운 장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일 정부 발표에 대해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더 안전하고 더 번영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결정적 조처를 취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은 새 합의를 지속적 진전으로 바꾸려는 일본과 한국 지도자들을 계속 지원하겠다”며 “(합의가) 완전히 실현되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라는 공통의 비전을 수호하고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미·한·일 삼자 관계가 강화되고 향상되기를 고대한다”며 “단결을 통해 세 나라는 강해지고 세계는 보다 안전하고 번영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도 ‘한국과 일본 정부의 역사적 발표’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어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는 “민감한 역사 문제 논의의 결론에 관한 한·일 정부의 역사적 발표를 환영한다”며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그들 정부의 용기와 비전에 박수를 보내며, 국제사회가 중대한 성취를 칭찬하는 데 동참하기를 요청한다”고 했다. 또 “미·한·일 삼자 관계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에 대한 공통의 비전에서 중심이 되는 것으로, 그래서 나와 국무부 고위급 동료들은 이 중대한 관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주력해왔다”고 했다. 블링컨 장관은 윤 대통령의 방미 계획 확정 등을 이유로 미국을 방문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을 6일 만난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이 아닌 제3자 국가들 간의 관계에 대해 그것도 한밤중에 환영 성명을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일 관계 개선으로 한-미-일 결속을 강화해 중국에 맞선다는 전략적 고려를 반영한 반응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과 블링컨 장관이 한 목소리로 한-일 관계 강화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에 도움이 된다고 밝힌 게 이런 속내를 잘 보여준다.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은 미국이 중국에 맞서 동맹국들을 하나로 모을 때 내세우는 구호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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