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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별이 된 딸, 폰엔 2년반 기다린 ‘취업 문자’…이태원서 멈춘 꿈

by 무궁화9719 2022. 12. 7.

“우리 애기, 보고 싶다” 엄마는 오늘도 딸에게 카톡을 보낸다

등록 :2022-12-05 06:00수정 :2022-12-10 09:15

신다은 기자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①오지연
배우 꿈꾼 스물넷…마약 검사하잔 검찰, 부모는 억장 무너져

오지연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작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미안해, 기억할게 신청,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어릴 때 지연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엄마 아빠가 지연이 중학교 3학년 때 일부러 연기학원에 보냈다. 처음엔 영 흥미 없어 하는 듯 보였다. 아빠는 “한 달만 더 다녀보자”고 구슬렸다. 연기학원 선생님은 지연의 목소리가 “밝고 예쁘다”며 칭찬했다.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칭찬에 일주일 내내, 하루 6시간씩 학원을 다녔다. 그 뒤로 지연은 연기에 “푹 빠져 지냈다”.

엄마와의 통화로 하루를 끝내던 딸

연기를 접하면서 성격이 달라졌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독립영화도 여러 편 찍었다. 친구들은 “반전 매력이 있는” 지연을 좋아했다. 연기학원이 주최한 첫 발표회 날, 지연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청아한 목소리로 연기하고 노래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 대학 진학 뒤에도 학교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현대무용을 배우는 등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세계를 지연은 계속해서 그려나갔다.
 
마음만은 늘 연기 한길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지연은 올해 2월 서울에 있는 은행에 취직했다. 배우로 발탁되기까지 험난한 길을 우려하는 부모 마음을 헤아린 결정이었다. 그래도 지연은 퇴근하면 틈틈이 연습실에 들러 무용을 연습했다. 까만 무용복을 입고 음악에 맞춰 능숙하게 춤사위를 펼쳤다.
 
배우지망생이자 은행 직원이던 스물네 살 오지연.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오래 기다리고 지원해준 엄마 아빠에게 지연은 고마워했다. “엄마 아빠는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것 다 해줬어.” 지연이 자주 하던 말이다. 월급을 받은 뒤론 이따금 값비싼 카드지갑이며 신발을 선물로 불쑥 내밀었다. 다섯 살 터울 동생에겐 잊을 만하면 “엄마 아빠한테 잘하라”는 잔소리를 했다.
 
지연의 일과는 늘 엄마와의 전화 통화로 끝났다. 매일 저녁 6시, 늦으면 밤 10시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전화했다. “퇴근했니? 밥은?” “먹었어. 엄마는?” “이제 먹어야지.” 짧고 무뚝뚝한 대화에도 중요한 안부는 다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통화를 못한 날이면 지연은 엄마에게 귀갓길 사진을 찍어 보냈다. “걱정하지 마”라는 메시지와 함께였다.
 
‘그날’로부터 일주일 전, 지연은 직장에서 정규직 전환 시험을 봤다. “나 공부 안 했으니 기대하지 마.” 엄마 아빠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지연은 열심히 공부했다. 지연의 휴대전화 메모장에는 금융 관련 용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뒤 첫 주말. 지연은 친구와 이태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엄마는 시험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딸이 안쓰러웠다. “잘 놀고 와.”

은행 정규직 필기시험 합격 일주일 뒤에

10월29일 그날 밤, 지연의 엄마 아빠는 광주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 속보를 봤다. “이태원 난리 났다니까 지연이한테 전화 한번 해봐.” 아빠는 문득 불안해져 엄마에게 말했다. 열 통 넘게 전화를 걸어도, 카톡을 보내도 지연에겐 답이 없었다. 새벽 2시, 엄마 아빠는 파출소에 가서 실종신고를 했다.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니 ‘서울 원효로3가 다목적실내체육관 인근’이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이태원은 아니니,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밤을 꼬박 새운 엄마 아빠는 새벽 5시15분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기차 안에서 다시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경찰이 받았다. 이태원에서 분실된 휴대전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딸 지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 7시 무렵, 지연과 이태원에 같이 간 친구 집의 초인종을 쉴 새 없이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용산경찰서에 들러 사상자 수라도 알려달라고 했지만 ‘전혀 아는 게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가까운 병원부터 들러보자며 택시를 잡았을 즈음 “경기 용인세브란스병원에 아이가 있다”는 경찰 전화를 받았다. 택시로 1시간10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였다. “왜 우리 아이를 그렇게 먼 곳에 떨어뜨려놨는지” 엄마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검사와 경찰은 아빠에게 “부검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태원에 마약이 돌았다더라’는 행인의 방송 인터뷰가 나왔으니 이를 확인해보자는 취지였다. “혹시 마약 때문에 아이들이 쓰러진 게 아니냐면서 마약 검사를 해보자는 거예요. 아무 근거도 없는 말 한마디로 아이를 두 번 죽이는 거잖아요.” 지연의 가족 말고도 부검을 권유받았다는 유가족이 더 있었다. 이에 대해 경찰은 “개별 사안을 확인해봐야겠지만 지침상으론 부검을 권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행정 처리를 이유로 엄마 아빠를 수시로 채근했다. “상중에 무슨 구청, 시청 다 전화 와서 ‘장례비 지원해줄테니 영수증 챙기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 그랬다. 그런 전화가 발인하고도 또 왔기에 제가 ‘당신 같으면 지금 그러고 싶겠냐’고 하니까 ‘죄송하다, 행안부가 집행을 서두르라고 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왜 그 밤 전전하다, 왜 그곳까지 갔나”

‘국가’는 정작 지연의 죽음에 대해선 아무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해밀톤호텔 앞 노상. 10.29. 22시15분 이전 사망 추정’이라고 적힌 검안서가 전부였다. 지연을 맡은 장의사는 “아이 손이 잘 펴지지 않더라”고 했다. 양손을 꼭 쥐고 몸을 막는 자세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엄마는 그래서 궁금하다. 지연이 차가운 도로에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던 건지, 왜 다목적체육관으로 다시 용인세브란스병원으로 저 멀리 옮겨졌는지, 희생자를 제각기 흩뜨려놓으라고 지시한 이유가 뭐였는지.
 
엄마는 경찰서, 병원, 서울종합방재센터 등에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어렵사리 지연을 옮긴 구급차량의 번호판을 확인하고 지연을 옮겼다는 구급대원과 통화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날 밤 지연이 왜 여러 장소를 전전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참사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초적인 정보도 모으지 못하는데 윗선까지 올라가는 수사를 언제, 어떻게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숨기지 말고 진실을 알려달라는 겁니다.”
 
퇴근 후 연습실에서 현대무용을 연습하는 지연씨의 모습. 유가족 제공
 
지연이 직접 받아야 했을 은행 정직원 사령장은 장례식장 위패 옆에 놓였다. 지연의 휴대전화엔 오늘도 메시지가 온다. 그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의 연락이다. 엄마 아빠는 ‘첫째공주’로 저장한 지연의 휴대전화 번호를 지울 수 없다. 평생 해지하지 않고 그 번호를 지연의 번호로 남겨둘 생각이다. “난 죽을 때까지 우리 애기를 못 놓을 것 같아요.” 아빠는 길을 걸을 때 “우리 딸 또래를 마주칠까봐 얼굴도 못 든다”. 엄마는 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딸에게 카톡을 보낸다. “지연아, 보고 싶다.”(11월1일) “지연아 드디어 동생 수능 끝났네.”(11월17일) “지연아, 뭐 하고 있니? 엄마는 지연이 생각…”(11월22일)신다은 <한겨레21> 기자 downy@hani.co.kr
 
12월3일 오지연씨 어머니가 딸에게 쓴 편지글
지연아, 엄마가 오늘 너의 일로 서울에 왔다가 내려가는 길이야.
너는 왜 그리 서울이 좋았니? ㅠ.ㅠ
엄만 네가 없는 서울이 이제 증말 싫다.
내려가는 동안 유튜브를 소리 없이 잠깐 보았는데 차마 볼 수가 없구나.
너의 고통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지연아, 엄마가 미안해.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너를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지연아.
 

별이 된 딸, 폰엔 2년반 기다린 ‘취업 문자’…이태원서 멈춘 꿈

등록 :2022-12-06 11:00수정 :2022-12-06 23:40

류석우 기자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②이상은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 발표 두 달 만에…
“신고 있었다는데 왜 조치 없었나, 왜 사과도 없나”

이상은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작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상은은 1997년 6월29일에 태어났다. 올해 스물다섯. 어릴 때부터 밝고 예쁜 아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잘 웃었다. 사진 찍을 때면 으레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상은과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2014년 상은과 같은 나이의 단원고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뒤로.
 
잘 웃던 상은이 펑펑 울음을 터뜨린 날이 있었다. “아빠, 나… 합격했어!” 합격이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상은은 휴대전화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올해 8월23일,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날이었다.
 
재수 끝에 원하던 곳이 아닌, 다른 대학에 입학한 상은은 한동안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숫자에 친숙하기보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상은이 막연하게 선택한 전공은 마케팅과 영상이었다. 대학교 3학년, 상은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한 시골 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뒤 꿈이 생겼다.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 도전

“엄마, 나 직장을 다니든 뭘 하든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 회사에서 재무 쪽 일을 하는 엄마 강선이(52)씨는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을 추천했다. “상은아, 미국 공인회계사 공부를 해보는 건 어때? 한국 공인회계사 시험보다는 덜 어려울 거야. 물론 언어가 문제지만 그것도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19년 12월, 한국에 돌아온 상은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상은과 엄마는 ‘삼식이 파트너’가 됐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하는 엄마와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와서 식사하던 상은은 매일같이 아침·점심·저녁 세끼를 함께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은 뭐 먹을까?’ 둘이 함께 고민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상은과 엄마 아빠 세 식구가 모여 고기와 맥주를 먹는 ‘고기데이’ 날도 가졌다. 그런 날이면 상은은 시험 이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취업하면 먼저 연애부터 할 거야. 결혼도 빨리 하고 싶어. 결혼식은 성당에서 올리면 좋겠다. 아, 친구들이랑 해외여행도 가고 싶어.” 2년6개월 동안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차곡차곡 쌓은 상은의 ‘버킷리스트’는 차고 넘쳤다.
 
상은은 대학 졸업 전에 시험에 합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시험 합격은 쉽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숫자에 약한 걸까’ ‘영어가 문제일까' 고민하다 중간에 몇 개월 동안 공부를 포기하기도 했다. 기약 없이 길어지는 공부에 결국 졸업부터 했다. 그리고 8월23일, 졸업식 나흘 뒤에 합격 소식을 들었다.
 
합격 이후, 상은은 어릴 때 배운 발레를 다시 시작했다. 독서모임에도 들어갔다. 주말엔 평양냉면 먹으러, 매운탕 먹으러 엄마 아빠와 맛집 여행을 떠났다.

버킷리스트엔 취업, 연애, 여행

핼러윈 며칠 전부터 상은은 엄마에게 계획을 말했다. “친구랑 이태원 가서 놀고 올게.” 상은은 이태원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종종 이태원에서 어울렸다. 회계사 온라인 시험 장소도 이태원 근처 한남동이었다. 시험을 치른 날이면 엄마랑 같이 이태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와 홍콩에서 1년가량 살았던 상은에게 핼러윈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교환학생 시절 미국에서 친구들과 핼러윈을 즐길 때 입었던 원피스 의상을 이번에도 준비했다.
 
그날 새벽, 강선이씨는 남편 이성환(56)씨와 일찍 집을 나섰다. 딸은 아직 잠든 시간. 부부는 지인들과 함께 등산하러 강원도로 향했다. 아침에 상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은 먹었어?” ”이태원 가면 재밌게 놀아야 하니까, 엄마 저녁엔 전화하지 마.” 상은이 즐겁게 핼러윈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에, 엄마는 평소처럼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날 밤 10시, 엄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6시가 넘어, 강원도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켠 엄마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수백 명이 넘어져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정신없이 상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 ‘사랑하는딸’이라는 이름이 뜨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용산경찰서였다. “우리 딸은 어디에 있어요?” “저희는 현장에서 물품만 수거해와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디에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고 집에 가서 자고 있겠지.’ 이웃에게 부탁해, 상은이 집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전 모습 그대로인 상은의 방. 유가족 제공
 
엄마 아빠는 그길로 서울로 향했다. 한남동 주민센터에서도, 순천향대병원에서도 상은을 찾을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다시 찾아보자고 하던 찰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동대문경찰서입니다. 1997년 6월29일생 이상은씨 부모님 휴대전화 맞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상은이인 줄 어떻게 알아요?” “지문으로 확인했습니다.
 
”강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 이씨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동대문구의 한 병원으로 안내했다. 안치실에 딸이 누워 있었다.
 
그 뒤로 어떻게 장례식장이 차려졌는지, 엄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경찰에서 두어 번 더 전화가 와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서울시 쪽은 빈소를 찾아 장례 절차와 관련한 이야기를 했다. 보건소는 정신상담 도움을 원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장례 어찌 치렀나 기억도 나지 않아

빈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딸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수십 명의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이건 거짓말이라고, 우리 상은이가 아직 안 갔다고….’ 엄마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인하고 나서야 머릿속에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오후 6시부터 112 신고가 있었다는데 왜 아무런 조치가 없었는지, 왜 이태원역은 무정차 통과를 하지 않았는지, 직장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최고책임자가 책임지는데 왜 대통령은 사과도 없는지.
 
얼마 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주최로 열린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상은의 아빠는 외동딸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상은아, 잘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이승에서 아픔, 슬픔 모두 버리고 힘내서 잘 가거라. 우리 딸이어서 너무 고마웠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아직 엄마 아빠는 마음으로는 보내지 못했다. 상은의 방도 치우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는 상은이 보던 책이 놓여 있다. 벽 한쪽엔 ‘TOEIC 945' 등 목표를 적은 쪽지 13개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다. 하나씩 이뤄갔던 목표는 마지막 13번째 ‘취업’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방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게 많던 상은의 버킷리스트도 10월29일 이태원에서 멈췄다.
류석우 <한겨레21> 기자 raintin@hani.co.kr
 

눈감은 널 2시간 쓰다듬었어, 엄마랑 얘기하는 거 좋아했잖아

등록 :2022-12-08 05:00수정 :2022-12-10 09:16

신다은 기자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③박가영
패션디자이너로 무대 만들기 꿈꿨던 열아홉살
“지금 분위기로는 우리 아이가 희생자 아닌 가해자 같아”

박가영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작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열아홉 살 가영은 ‘옷으로 엮어내는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목원대 섬유·패션디자인학과 2학년 박가영. “엄마, 나 패션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어. 그러려면 옷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아.” 잊혀졌던 독립운동가가 21세기 도시 한복판에 재현되고 발달장애인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일들이, 옷과 패션 무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가영은 믿었다.
 
학원에선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다. 엄마도 미술 말고 공연기획을 권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가영은 옷을 향한 자기 마음을 믿었다. 패션디자인과가 있는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친구들이 3시간씩 받는 수업을 6시간, 9시간씩 받았다.
 
대학 진학 뒤에도 가영은 패션쇼를 더 배우고 싶어 했다. 캐나다 유학을 꿈꿨다. 방학마다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했다. 그렇게 세 번의 방학을 거쳐 모은 돈이 1400만원. “많은 것을 보고 싶어. 유학도 가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 가영이 입버릇처럼 가족에게 하던 말이다.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100㎞가량 떨어진 대전에 있는 대학을 가면서도 가영에겐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더 커 보였다.

엄마에게 잊지 못한 겨울 선물, 눈사람

가영의 모험심은 타고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차를 타고 홍성에서 천안까지 병원에 다녔는가 하면, 중학교 3학년 때는 혼자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부산 여행을 떠났다. 오히려 엄마 아빠가 불안해 자동차를 몰고 가영을 뒤따라갔다가 들키고 말았다. “이제부턴 혼자 다닐게”라는 가영의 선언에 엄마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마음은 가족과 늘 이어져 있었다. 가영은 수시로 엄마에게 전화해 종알종알 일상을 이야기했다. 친구들과 어딜 갔는지, 자신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엄마랑 이야기하는 게 좋아.”
 
엄마는 휴대전화 너머 가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집안일을 하거나 산책하곤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콜라 한잔하러 치킨집 가기’, 집에 늦게 들어오는 동생을 놀리는 ‘상황극 하기’ 등 모녀 사이에는 “둘만의 개그 코드”가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던 2021년 겨울, 가영과 동생은 엄마 몰래 밤에 나가 사람 키만 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엄마는 다음날 가영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눈사람 사진을 보곤 “어디 한번 보자”며 현관문을 나섰다. 아침 햇살에 절반 가까이 녹아버린 눈사람. 가영과 동생, 엄마 셋이 깔깔대며 웃었다. “이게 뭐야, 너무 웃기게 생겼다.” 엄마에겐 잊지 못할 “겨울 선물”이었다.

 

박가영씨와 동생이 만든 눈사람. 유가족 제공
 
대전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가영은 집에 들를 때면 낙지젓갈, 무말랭이 같은 반찬을 양손 가득 들고 돌아갔다. 주변에 자취하는 친구들이나 밤샘 작업하다 기숙사에 못 들어간 친구들이 가영의 자취방에 와서 밥을 얻어먹곤 했다. “(친구들 챙겨주려) 항상 냉장고가 꽉 차 있어야 하는 아이였어요.”
 
가영의 엄마 최선미(49)씨는 한 달이 지났지만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가영은 “친구가 이태원 근처에 사는데 함께 전시회를 보고 오겠다”고 했다. 10월30일 새벽 1시30분께, 엄마가 설핏 잠이 들었을 때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났어요.” 가영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그 친구한테 ‘왜?’ ‘얼마나 다쳤는데?’ 물으니 ‘사망’이라는 거예요. 얘가 너무 당황해서 잘 모르나보다, 내가 가야겠다 싶어서 아빠랑 옷도 제대로 못 챙겨입고 홍성에서 서울로 갔어요.”
 
엄마 아빠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장례식장 너머로 구급차에 희생자들이 실려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병원은 아직 신원 파악이 안 됐다며 부모의 장례식장 출입을 막았다. “경찰이 아이 찾으면 연락 준대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었어요. 결국 저희가 아이를 직접 찾아나섰다가 (동주민센터 같은 데서) 아이가 강동성심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갔죠.” 엄마는 병원 앞에 도착한 지 12시간 만인 오후 1시30분께 겨우 가영의 행방을 알게 됐다.
 
가영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가영이었다. 엄마는 바로 딸을 데리고 집에 오고 싶었다. 하지만 각종 행정 절차가 엄마 아빠를 괴롭혔다. 검시 절차가 늦어져, 병원에서 다시 반나절 가까이 대기했다. 그 와중에 구청 공무원은 아빠에게 전화해 “장례비 지원되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경찰은 통화에서 쾌활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첫인사를 건넸다. 사건 조서를 쓰라는 안내 전화였다. “애기 아빠도 저도 너무 기가 막혀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 상황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싶더라고요.”

엄마는 지금도 그 구급차 안에

기다림 끝에 10월30일 오후 5시 가영을 홍성으로 데리고 내려오는 길. 엄마는 구급차 안에서 2시간 동안 딸의 얼굴을 쉼 없이 어루만졌다. “차가운 얼굴만 만지고 있었어요. 아이가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멈춘 거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 구급차 안에 있어요.”
 
11월 초 가영의 소지품을 챙기러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체육관에 간 엄마 아빠는 ‘다른 아이들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분향소 쪽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건, 두 평도 안 되는 좁은 분향소와 희생자 위패도, 영정도, 이름도 없는 단상이었다. “얼마나 초라했는지 아세요? 일반 장례식도 위패 하나, 영정 하나를 다 상의하는데 어떻게 정부가 분향소를 그렇게 둘 수 있는지. 우리 아이들 이름을 가린 건, 말이 좋아 비공개지 은폐 아닙니까.”
 
박가영씨가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그린 그림. 유가족 제공
 
가영이 세상을 떠난 뒤 한 달 가까이 모든 만남을 끊었던 엄마는 지금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국가가 가벼이 여긴 죽음의 무게를 알리기 위해서다. “지금 분위기로는 우리 아이가 희생자가 아니라 사회를 우울하게 만들고 세금을 더 많이 나가게 한 가해자처럼 느껴져요. 대통령의 진심 어린 담화문 사과를 받고 싶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싶어요.”
 
가영의 엄마 아빠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체 준비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늦은 밤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유가족들이 남긴 메시지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쌓여간다. 새벽 3~4시라도 누군가 메시지를 올리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읽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빠르게 사라지는, 읽지 않음을 나타내는 ‘숫자’엔 매일 밤 잠들지 못하는 가영의 엄마 아빠도 포함돼 있다.
 
요즘 엄마는 가영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뇐다. “엄마가 그날 용돈을 줘서 미안하고, 그곳에 엄마가 없어서 미안해. 엄마가 같이 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많은 꿈을 꾸었던 열아홉 살 가영은, 만 스무 살이 된 생일인 2022년 11월1일 발인을 마치고 하늘로 떠났다.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선별진료소 근무 자원한 청춘, 이태원서도 누군가 지키려다

등록 :2022-12-12 07:00수정 :2022-12-13 18:03

방준호 기자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④김의현
코로나19 진료소 근무 자원했던 친절하고 품 넓은 방사선사

김의현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그날 이후, 엄마 김호경(58)씨 꿈에 처음 나타난 의현은 친구와 함께였다. “엄마, 세웅이(친한 친구)한테 내 검은 점퍼 줬어?” 엉뚱했다. 의현다웠다. “꿈에 갑자기 나와서 ‘엄마 보고 싶어’도 아니고, 친구한테 뭘 줬냐니. 의현이가 그런 애이기는 했어요.” 빈소를 내내 가득 채운 동네, 대학, 군대, 직장에서 만난 이들이 저마다 의현에게 받은 것을 엄마에게 털어놨다. “웃기고 편해서 고민 들어주는 친구라고, 그래서 친구가 이렇게나 많다고, 병원 방사선사로 일하면서 환자한테도 그렇게 친절했다고 해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멋있는 녀석이었어.”
 
의현은 어린 시절부터 사랑스러워서 더 미안한 아이였다. 엄마 혼자 일하며 키웠다. 그런 일로 투정 부린 적은 없다. 기특하고 울컥했던 기억만 있다. “초등학생 때 엄청 추운 날이었어요.” 누나 김혜인(32)씨가 기억했다. “‘엄마 회사에 가서 놀라게 해주자’ 했더니 김의현이 ‘웅, 그래!’ 하더라고요.” 남매는 어른 걸음으로 30분쯤 걸리는 엄마 회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벌써 퇴근해버렸어요. 사무실 직원이 택시 타고 가라고 몇천원을 줬는데, 그 돈으로 붕어빵을 사 먹으면서 둘이 집에 걸어왔다는 거예요. 나는 그 일이 정말 미안했어요. 의현이는 기억도 잘 못했지만.”(엄마 김호경씨)

동네 친구에게도, 친척들에게도 ‘웃음 코드’

청소년이 된 의현은 방황하는 사춘기를 겪었는데 그조차 묘한 따뜻함을 동반했다. 밤늦게까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잦았다. 엄마는 잔소리하는 대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의현의 친구를 발견하면 “이리 와, 같이 밥 먹자” 외쳤다. “한 애만 붙잡고 나면 어찌 알고 우르르 와서 밥을 먹고 있어요. 의현이도 저기 끝에 와 있고.” 엄마가 사주는 밥을 나눠 먹던 동네 친구들이 서른이 된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만나서 놀았다. 친구 정용(30)은 “(의현이는) 어릴 때부터 뭘 해도 옆에서 같이 하고 있는 게 당연한 친구, 당연하다는 말밖에 표현할 말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어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고, 군에 입대하고, 취업하고, 일하는 모든 과정이 “평탄했다”고 엄마는 말했다. 사실 그 이상이었다. 한 동네 사는 친척 14명이 몰려다니며 의현을 예뻐했다. 군대 면회를 갈 때 “따뜻한 밥 먹여야 한다”며 할머니는 밥솥을 짊어졌고, 이모들은 서른이 된 요즘도 “아이구, 내 새끼”를 외치며 의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의현은 질겁하는 척 애정 표현을 다 받아줬다. 가족은 많이 웃었다.
 
그렇게 맞은 10월29일 토요일 아침, 의현은 ‘다녀올게’ 하고 집을 나섰다. 2022년 방사선사 6년차인 의현은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업무를 자원했다. 매일 아침 6시30분, 토요일도 출근했다. 힘든 내색은 안 했다. 일하고, 퇴근하고, 그날 이태원에 갔다. 이튿날 새벽 4시, 가족은 친구들에게 참사 소식을 들었다. 엄마는 사고가 났다는 말을 “싸움했다”로 잘못 들었고, 누나는 “무슨 말이지?” 생각했다.

“의현이, 자기가 사람을 막아보겠다고 했대요”

의현을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모든 사람이 그날 새벽 합심했다. 역부족이었다. 동네 친구 다섯이 의현을 찾아 낯선 이태원 거리를 울면서 뛰어다녔는데 현장에서 친구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집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친척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지독한 무력감 속에 ‘세심한 유족 지원’을 발표하는 정부 발표만 텔레비전으로 봤다. 낮 12시가 되어서, 동국대일산병원에 의현이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호텔 부주방장이 된 누나는 울면서 비행기를 탔다. 내내 너무 울어서 옆 사람이 휴지를 건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현 또한 끝까지 누군가를 위해 곁에 있었다. “의현이 옆에서 낯선 사람이 소리 지르는 걸 보고 도와줘야 한다고, 자기가 사람을 막아보겠다고 했대요.” 일상의 모든 관계가 여물었던 김의현은 10월29일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각, 서울 이태원 길가 어딘가에서 서른 삶을 마쳤다.
 
김의현씨 엄마 김호경씨가 아들이 남긴 은반지를 끼고 누나 김혜인씨와 손을 포개고 있다. 유가족 제공
 
서로를 더할 수 없이 예뻐했던 사람들이 꾸린 세계는 의현의 공백 앞에 비틀린 채 멈췄다. 새벽 5시55분 울리는 엄마 휴대전화 알람은 40여 일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울린다. 의현의 기상시간에 맞춘 알람을 바꾸지 못했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서 멍하니 울어요. 이제 깨울 아들이 없으니까. 그냥 울어요.” 방 화장대에 놓인 달력은 10월에 멈췄다. 사망신고도 못했다. 누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생활과 일을 포기하고 한국에 남기로 했다.
 
일생 가장 참혹한 사건의 기본적인 사실조차 ‘왜’와 ‘어떻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 또한 처음 소식을 들었던 날과 같다. 검안서에 적힌 사망 추정 시각은 밤 10시15분이다. 공식적인 사고 발생 시점(10시15분)과 동시에 목숨을 잃었을까. 엄마는 설명하려 애썼다. “추정이라 정확히 알 수 없어요.” 그날 아들의 몸은 어떻게 이동해 동국대일산병원에 안치됐을까.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찾아다니다 정보 몇 개를 얻었지만 아직 불확실해요.” 엄마는 무엇보다 의현의 마지막 인사가 지켜지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날 아침 의현이가 ‘다녀올게’ 하고 갔어요. 분명히 ‘온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당연한 인사잖아요. 158명이나 못 ‘왔는데’ 모두가 몰랐다, 우리 일은 아니다, 책임은 없다고 해요.”

누나가 “다시는 이런 일 생기지 않도록 할 거야”

남은 이들은 의현이 만들어준 풍성한 관계에 기대어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의현의 친구들은 밤에도, 새벽에도 봉안함 앞에 의현이 좋아했던 커피를 두고 온다. 엄마 집 문에 조용히 빵봉지를 걸어두고 간다. 조를 나눠 엄마와 누나를 불러 밥을 먹인다. 의현은 다른 참사 유가족과의 관계도 남기고 갔다. “고립감이 너무 컸는데 정부가 유가족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아서 제가 직접 수원에 사는 가족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정부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가족들은 모두 모일 거예요. 다른 가족들과 이야기하면 위로가 돼요.” 엄마가 말했다.
 
12월13일은 의현의 서른 번째 생일이다. 누나는 의현에게 편지를 썼다. 누군가를 위하는 게 의현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적었다. “자꾸 손이 떨려서 글씨가 못났다”고 걱정했다. “엄마랑 누나는 이제부터 (…)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거야. 누나가 의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의현이가 곁에서 지켜줘.”
 
의현이 남긴 유품인 은반지를 손에 낀 엄마와, 엄마의 쌍가락지를 나눠 낀 누나가 문득 손을 포갰다.
 
방준호 기자whorun@hani.co.kr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누나 김혜인씨가 의현씨에게 남긴 편지. 유가족 제공
 

영안실에서 입은 웨딩드레스…예비신랑이 입혀 떠나보낸 날

등록 :2022-12-13 10:00수정 :2022-12-13 23:58

류석우 기자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⑤김옥사나
고향 연해주에서 간호학 공부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 와 살다
차가운 몸으로 4년 만의 귀향

김올리아나, 김엘레나, 예고르씨가 직접 고른 김옥사나씨의 웨딩드레스. 유가족 제공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그는 2018년 한국에 왔다. 이제 막 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한 스물한 살이었다. 어려서 친구처럼 지낸 두 언니를 따라온 한국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그에겐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 미래를 약속한 애인 예고르(27)씨와, 반려묘 살라몬이다. 스물다섯 김옥사나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다.
 
옥사나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43㎞가량 떨어진 스파스크달니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옥사나와 다섯 살 위 언니, 엄마, 아빠는 이곳에서 4대째 살고 있는 고려인 가족이다.
 
옥사나의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네 살 위인 사촌언니 김올리아나씨의 집이 있었다. 사촌이지만 옥사나에게 올리아나씨는 친언니나 다름없었다. 같은 마을에 살며 대학교 입학 전까지 같은 학교에 다녔다. 어딜 가든 함께였다. 옥사나는 항상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가장 먼저 두 언니를 소개했다. “여기는 내 언니들이야.”

피아노 잘 치고 케이팝 사랑한 소녀

옥사나는 남을 잘 도왔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유쾌했다. 주변에 늘 친구가 많았다. 생일 때면 마을 파티가 열린 듯 사람들이 모였다.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도움을 줬어요. 정말 친절했어요. 누구와도 갈등이 없었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모두가, 그를 사랑했어요.”(사촌언니 김올리아나씨)
 
언니들이 먼저 대학에 간 뒤, 옥사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간호전문대에 진학했다. 주사와 피를 무서워하지 않고,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옥사나에게 ‘딱 맞는' 전공이었다.
 
소녀는 음악도 좋아했다. 노래를 곧잘 불렀고, 피아노 연주에도 소질이 있어 연주회에 나갈 때마다 입상했다. 케이팝(K-Pop)에도 푹 빠졌다. 그룹 비스트의 양요섭과 제이와이제이(JYJ)의 김재중을 가장 좋아했다. 옥사나는 언젠가는 한국에 가는 것을 꿈꿨다. 먼저 대학을 졸업한 올리아나씨가 2015년 한국으로 향했다. 이듬해 옥사나의 친언니 엘레나씨가 출국했다. 옥사나는 2018년 11월, 한국에 발을 디뎠다.
 
한국에 온 뒤 언니들과 함께 휴대전화 판매점에서 일했다. 1년 뒤부터는 서로 떨어져 일하는 곳도 사는 곳도 달랐지만 한 달에 두세 번은 만났다. 서울 동대문에서 일한 올리아나씨와 서울 용산에서 일한 옥사나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22년 여름 퇴근길이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함께 퇴근했다. 부평역에서 올리아나씨가 먼저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본 옥사나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올리아나씨는 상상도 못 했다.

결혼 약속한 애인이 안치실에서 입힌 드레스

10월29일, 옥사나는 핼러윈을 좋아하는 친구가 저녁을 같이 먹자는 말에 이태원에 갔다. 옥사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싫어했다. 이태원처럼 사람 많은 곳에는 잘 놀러 가지도 않았다. 핼러윈은 좋아하지도 않았고, 즐겨본 적도 없었다.
 
그날따라 우연이 겹쳤다. 그날 옥사나가 만난 친구가 핼러윈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태원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옥사나 남자친구 예고르씨가 허리가 아프지 않아 함께 갔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올리아나씨는 참사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되감아보며 의미 없는 가정의 질문을 거듭한다.
 
그날 밤 11시40분, 올리아나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옥사나와 이태원에서 만난다는 친구였다. “옥사나 남자친구 전화번호 알아요?” “왜?” “옥사나가 숨을 안 쉬어요. 한 시간 동안 도로에 누워 있어요.
 
”올리아나씨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사람이 너무 많아요. 엄청 몰려 있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숨을 안 쉬어요.” 정신없는 상황에 전화가 끊겼다. 20분가량 흐른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구급차가 왔는데, 너무 늦었어요… 옥사나가… 죽었어요.”
 
올리아나씨는 바로 이태원에 갔다.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 갔지만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병원 앞에서, 다시 오전 11시까지 한남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다렸지만 누구도 옥사나의 행방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올리아나씨는 구급차가 갔다는 병원 목록을 받아 엘레나, 예고르씨와 같이 하나씩 하나씩 찾아다녔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와서 강동경희대병원에 옥사나가 있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10월30일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경찰은 옥사나가 해밀톤호텔 뒤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밤 10시께 나왔다고 했다. 인파에 눌려 40분가량 옴짝달싹 못했던 옥사나는 넘어졌다가 구조됐다. 이후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김옥사나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10월31일, 올리아나와 엘레나, 예고르씨는 옷가게를 돌았다. 옥사나에게 입힐 웨딩드레스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자란 동네에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숨지면 땅에 묻기 전 웨딩드레스를 입히는 전통이 있다. 죽음이 아직 믿기지 않는데 옥사나가 입을 하얀색 드레스를 골라야 했다. 울면서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모습에 가게 직원이 “왜 그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었다. 때마침 가게 텔레비전에서 이태원 참사 뉴스가 흘러나왔다. 올리아나 일행은 대답 대신 목놓아 울었다.
 
2023년 미국이나 러시아로 이주해 결혼하자고 약속한 예고르씨가 병원 안치실에서 직접 옥사나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혔다. 예고르씨는 일 때문에 러시아로 함께 갈 수 없었다. 올리아나씨와 엘레나씨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옥사나와 함께 배를 탔다. 동해항에서 출발한 배는 24시간이 꼬박 지나 러시아에 도착했다. 옥사나는 11월5일 밤에야 스파스크달니의 집에서 엄마 아빠를 만났다.
 
아빠 김이고리(56)씨와 엄마 김주안나(52)씨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누워 있는 옥사나를 처음 봤을 때의 마음을 말로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고통스럽다. 다음날, 옥사나를 추모하기 위해 수백 명이 집을 찾았다. 옥사나의 친구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넌 천사였어.” “정말 그리울 거야.”

말 잇지 못한 아빠 “거기선 행복하렴”

그 뒤 아빠 김이고리씨는 홀로 한국에 와서 이태원을 찾았다. 막내딸이 눈감은 장소를 직접 보고 싶었다.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나오자, 역 앞에서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해밀톤호텔 옆골목에 다다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옥사나의 사진이 골목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러시아에 있는 김옥사나씨의 아빠 김이고리(오른쪽)씨와 엄마 김주안나씨가 <한겨레21>과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데 너무 안타까워요. 한국에도 희생자가 많은데 유가족들에게 추모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12월7일 화상으로 만난 김이고리씨가 말했다. “옥사나야, 거기선 자기 자신을 잘 챙겼으면 좋겠어. 늘 행복하렴.
 
”1997년 5월7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김옥사나는 2022년 10월30일 대한민국 서울 이태원에서 눈을 감았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류석우 <한겨레21> 기자 raintin@hani.co.kr

 

연재 연재미안해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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