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파 공작원, 암호명은 ‘흑금성’…남북합작 애니콜 CF광고 성사시켜
입력 : 2018-08-30 22:38 ㅣ 수정 : 2018-08-31 13:30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북파 공작원을 소재로 한 영화 ‘공작’의 실제모델 박채서(64)씨를 만났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북한 핵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채 중국과 북한을 무대로 활동한 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이다. 1997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으며 이효리, 조명애가 나온 최초의 남북합작 광고도 성사시켰다.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과 영화 등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27일 본사 9층 대회의실에서 했다.

▲ 2005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애니콜 CF에 출연한 이효리(왼쪽)와 북한의 조명애.
→영화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아내와 큰딸이 교도소로 면회 와서 내 얘기를 CJ에서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고 하더라. 처음에 거부했다. 단순 용기만 갖고 할 수 없는 일 아니냐. 그런데 이미경 부회장이 원치 않던 외유를 나가야 할 정도로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도 영화 제작을 하겠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수감 중 작성한 노트기록이 토대가 됐다.
→리 참사(영화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의 실재 인물)는 어떤 사람인가.
-리철은 북한의 몇 안 되는 자본주의 전공자다. 김일성대를 졸업했으며 박사논문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다. 1954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라 쉽게 친구가 됐다. 리철은 아들이 둘이고, 나는 딸만 둘이다. ‘사돈 맺자’는 농담도 했다.
→2005년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나오는 남북합작 광고인 애니콜 사업 전에 추진하던 ‘남남북녀 결혼작전’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지금 못지않게 힘들었다. 대량 탈북자가 나오고, 이에 북한이 반발해 미사일을 쏘는 등 대화가 안 됐다. 햇볕정책을 계승했는데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자문요청이 오더라. 북측은 미사일 쏘다가 평화 모드로 가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며 이벤트를 만들자고 하더라.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에 북측 기수단으로 와 한국에서 인기 있던 조명애를 내 지인 중 한 분이 며느리 삼고 싶다고 말한 게 생각나 추진하게 됐다. 베이징에서 양가 상견례도 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방해했다. 신랑 어머니를 만나 ‘조명애는 기쁨조인데 결혼이 웬 말이냐’고 한 것이었다. 이벤트 무산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 3일 뒤 고영구 원장이 기관보고를 했던 것 같다. 비슷하게 나를 비난하는 보고에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이 사건으로 원장은 강력경고 조치를 받고, 나머지 주요 간부들은 인사조치됐다.
→결혼 무산으로 애니콜 광고는 힘들었겠다.
-공작 실패에 대비해 늘 예비 계획을 세운다. 남남북녀 결혼작전이 무산되면서 내가 하면 또 국정원이 방해하니 청와대가 나서야 한다고 해 애니콜 광고는 성사됐다. 삼성을 소개받았다. 다 돼 있더라. 감독이 차은택씨였다. 모델은 이효리고. 최고기업, 최고상품, 최고모델 콘셉트였다. 나머진 북한 몫이었다. 그런데 제동이 걸리더라. (광고 촬영지인) 상해로 갔는데 조명애가 도저히 촬영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 결혼이 미뤄진 충격으로 밥도 안 먹고 말이 없더라. 마음병을 앓은 것이다.
조명애는 ‘평양의 신데렐라’였다. 갑자기 남쪽으로 시집가야 하는 상황에 가족회의를 열고 “나 하나 시집가서 우리 가족이 잘산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더라. 그런데 남자를 만나 보니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딱딱한 북한 남자와 달리 함께 놀러 갈 때 손도 잡아주는 등 싹싹한 매너남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 될 사람은 핸드백, 신발, 바바리 코트 등 온갖 명품을 다 사줬다. 가족 용돈도 따로 준비하고 예술단 단장, 부단장 선물도 따로 줬다. 조명애가 예비 시아버지를 만난 다음날 무용단에 출근하면 그날 오전 업무는 마비된다고 하더라. 서로 옷 입어 보느라고 말이다. 예술단 부탁으로 20인승 출퇴근 버스도 사줬다. 2년간 쓸 타이어와 유류비도 지원했다. 촬영이 힘들 것 같아 시아버지가 될 뻔한 사람을 급히 오라고 했다. 이 양반이 오자,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던 조명애가 벌떡 일어나 달려가 우는데,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우리도 다 울었다. 촬영은 일주일 동안 약 먹이고, 알로에 바르고, 얼굴 뾰루지 등은 화장술로 커버해서 끝냈다.

▲ 박채서씨와 조명애씨.
→조명애는 그 이후 결혼했나.
-소설 잘 쓰는 언론에서 북한군 장교와 결혼했다는데 거짓말이다. 완전히 폐인 됐다. 원래는 광고 찍고 나서 식당 같은 것을 마련해 중국에서 살게 할 계획이었다. 제가 2010년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들은 얘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떤가.
-1997년 6월에 만났다. 유순한 편이다. 예능을 좋아해서인지 독하지 못하다. 김정일이 후계자를 정할 때, 자기 닮아 순한 김정철 대신 독한 김정은을 시켰다.
→한·미 합동부대 있을 때 미군과 업무 협조는 잘됐나.
-처음 3개월간은 많이 싸웠다. 양주 선물 등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한·미공조의정서에 따라 원칙대로 일했다. 오산공군기지는 통제가 안 된다. 전용기가 아무거나 싣고 온다. 나 보고 골프용품 거저 줄 테니까 하라고 하더라. 당시 골프채 등은 비쌌다. 안 했다. 결국 미군이 나를 인정해 미 대사관 등 우리나라의 어떤 미국시설도 24시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통행카드를 주더라. 이게 네 장뿐인데 대통령, 국방부 장관, 안기부장과 내가 받았다. 미국이나 북한을 나쁘게 버릇 들인 건 우리다. 우리나라에 ‘까만 눈 미국인’이 많더라. 미국에 가지도 않고 시민권은 갖고 있더라. 거래하기 위해서다. 각계각층에 다 있더라. 대학원 석사과정 때 일인데 조선 주둔 일본대위가 쓴 일본어로 된 비망록을 봤다.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회유작전에 바로 서약서 쓰고 넘어와 실망하게 되는 반면,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굽히지 않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존경한다고 적고 있더라.

▲ “공작은 상대국 지도부의 머리를 읽어 오는 일이며, 이를 통해 국가 정책에 반영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흑금성 박채서씨의 공작관이다. 박씨는 인터뷰 내내 투철한 애국관, 원칙과 소신을 강조했다. 지난 27일 본사 대회의실에서 박씨가 공작원으로서의 생활, 남북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북한의 정보수집력은 어떤가.
-신상옥·최은희가 1978년에 납북됐다가 8년뒤 탈북했는데 당시 수사관들이 물었다. 베를린영화제 참석 때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북 정보력에 겁이 나 애기 못 했다고 했다. 하루 전 남한 대통령이 결재한 것이라며 서류를 보여 주는데 실제로 그 날짜에 결재한 서류였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를 믿어야 할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는 거다. 사례를 더 들자면 1999년 평안북도 금창리에 숨겨진 지하 핵시설이 있다고 보도되면서 난리 난 적이 있다. 우리 공작원이 조선족을 시켜 흙을 파니, 우라늄이 검출됐다는 것인데 미국도 이를 믿은 것이다. 미국이 현장사찰을 했으나 핵 관련 움직임은 찾지 못했다. 빈 동굴뿐이었다. 왜 그랬냐. 북한 역공작에 당한 거다. 북한에서 돈 주고 우라늄을 넣어준 거다.
→1994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사업에 미국의 공작이 있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북 핵무기 개발 자료를 1992년에 내가 입수했다. 미국 장비 등의 지원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이라 미국에 보고했다. 난 당연히 그 사항이 김영삼(YS) 대통령에게도 보고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안 됐더라. 당시 YS는 북한에 쌀을 주려고 난리 칠 때였다. 만약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았다면 막았다고 본다. 이어 1994년에 북핵 위기가 벌어진다. 북한의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 2기를 건설하는데 재원의 70%인 32억여 달러를 우리가 부담한다. 여기엔 미 중앙정보국의 공작이 있었다. 평양을 다녀왔다는 한 재미목사가 YS에게 긴급 보고를 한다. 북이 서해 5도를 잠수함으로 봉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YS는 재미목사를 잘 만났다. 대통령이 놀라 해군참모총장을 긴급호출하고 제주도가 제일 취약하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어 북측의 회담 요구를 받아들여 경수로 건설사업비를 떠안는다. 미국이 YS가 재미목사를 잘 만나주고 위기의식, 안보 개념이 없다는 걸 알고 공작한 거다. 서해 5도는 수심이 낮다. 잠수함 봉쇄가 말이 안 된다. 첩보 가치도 없었다. 보안이 최고 생명인데 어떻게 재미목사가 기습공격을 아느냐.
→이명박 정부 시절, 북에서 대남파에 대한 공개 처형이 많았는데 우리 측에서 움직임이 있었나.
-대남파는 빨치산세력에 맞설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30~40명씩 공개 처형 등 다 숙청됐다. 숙청 자료를 우리 정보기관에서 줬다. 과거 10년 동안 남북교류하면서 뒷돈 준 자료를 다 준 거다. 한 예로 본명이 권민인 권영욱이라는 김일성대 나오고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항상 북측 대표단장으로 나온 유연한 사고의 실용주의자, 그 친구도 날짜별로 돈 받은 게 나와 숙청됐다. 사는 아파트 바닥을 파 보니 비닐에 쌓인 8만 달러 꾸러미들이 나왔다. 그런 식으로 대남파들이 결딴나면서 북한 내 강경파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난 절대 국정원이 자의적으로 그런 자료를 주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무대책·무대응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을 통한 정책이었다.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전에 북한에서 정책실패는 한 번도 없었다. 화폐개혁은 가진 자들의 돈을 뺏으려고 한 거다. 장성택도 모르게 말이다. 20분의1로 화폐가치를 낮췄다가 한 달 만에 원상복귀했다. 기득권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다. 개혁 전에는 베이징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김정일이가~”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반발했다. 그러데 화폐개혁이 되자 “개XX” 등 욕이란 욕은 다하더라. 뭘 의미하느냐. 화폐개혁 실패라지만, 기득권이 흔들린 거다. 볼셰비키 혁명, 중국 공산당 혁명 주도세력은 노동자나 농민이 아닌 엘리트다. 모택동은 호남성 제일갑부였다. 형식만 노동자, 농민이지 가진 사람, 엘리트 그룹이 주도했다. 북한의 엘리트 변화를 우리가 뒷받침해야 한다.
→3차 남북 정상회담 전망은.
-미국은 북이 비핵화하면 제재를 풀겠다는 것인데 북은 점진적으로 비핵화하자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못 받겠다고 한다. 일방적 행동 강요는 강압이다. 북 강경파들이 절대 받지 않는다. 김정은이 맘대로 못한다. 김정일은 아버지로부터 정식 후계자 교육을 받고 17년간 당 지도부를 장악했다. 당·정·군의 인사를 다 했다. 그런데도 김일성 사후 주석궁에 바로 못 들어갔다. 왜냐하면 호위총사령부는 자기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후계자 내정 2~3년 만에 아버지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권력을 승계해 지지기반이 약하다. 빨치산 세력은 손 못 대고 군부, 문화계 등 분야별로 중간층 중심으로 100인 그룹을 만들어 자신의 호위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그룹이 200인으로 늘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이들 눈에 벗어나면 김정은은 죽는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스브스타] 北 미녀 조명애와 함께..이효리 영화출연 이끈 '바로 그 광고'
입력 2018.08.13. 15:27

가수 이효리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공작'에 특별 출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과거 찍은 광고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이효리는 최근 남북 고위층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다룬 첩보영화 '공작'에 '이효리' 역할로 특별 출연했습니다.
영화에서 이효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지난 2005년 이효리와 북한 미녀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찍은 한 휴대전화 광고 촬영장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해당 광고에서 이효리는 조명애와 만나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춤을 배우는 등 다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두 사람은 중국 상하이의 거리를 걸으며 여행을 하는가 하면, 한 무대에 올라 손을 잡고 평화를 꿈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 섹시 스타였던 이효리와 북한의 내로라하는 미녀 무용수 조명애의 만남에 광고는 엄청난 화제를 모았습니다. 조명애는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에 북측 기수단으로 참가해 뛰어난 미모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처럼 화제가 된 광고 장면을 재구성해 영화 '공작'에 넣기 위해 윤종빈 감독은 이효리를 직접 캐스팅했습니다.
이효리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 부담을 느끼고 출연을 거절했지만, 윤 감독의 설득에 출연을 확정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효리는 "18년 전 당시에 설레면서 긴장됐던 순간을 떠올리며 촬영에 임했다"고 출연 소감을 밝혔습니다.
(출처=유튜브 'aska0510x')
공작 영화
영화 '공작'은 90년대 있었던 '흑금성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흑금성사건은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북풍 공작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흑금성(암호명), 박채서씨는 실제로 대북사업가로 활동하다가
MB정권에 들어와 국가보안법으로 5년을 복역하고 2년전 출소되었다고 합니다.
2010년 7월 20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흑금성 박채소
'공작' 김정일 특수분장에 1억6000만원, 땀나면 떨어질라 '냉동텐트'
양승준 입력 2018.08.18. 04:44 수정 2018.08.18. 12:31
이효리-조명애 13년 전 만남 재현 위해
6개월 오디션으로 닮은꼴 조주희 찾아내

tvN 드라마 화제작 ‘미스터 션사인’과 극장가 여름 대작 ‘공작’. 구한말 이병헌과 김태리의 로맨스를, 북한을 주요 배경으로 황정민과 이성민을 통한 남북 긴장을 보여준다. 배우들의 멋진 연기 못지 않게 눈길을 사로잡는 건 완벽에 가까운 시대 재현. 구한말, 그리고 북녘땅의 풍경와 인물들을 어떻게 되살려냈을까. 제작 뒷얘기를 들었다.
400대 1 경쟁 뚫고 이효리 만난 ‘조명애’
“어, 진짜 비슷해요!”. 지난해 7월 광주광역시. 가수 이효리는 영화 ‘공작’ 촬영장에 갔다 깜짝 놀랐다.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에 반 묶음으로 허리까지 내려온 칠흑 같은 긴 생머리. 함께 연기할 배우가 북한 무용수 조명애를 쏙 빼닮아서였다. 이효리와 조명애는 2005년 국내 통신사 광고를 함께 찍었다. 이효리는 영화에서 10여 년 전 그 만남을 재연했다. 조명애를 연기한 배우는 조주희. 영화사가 6개월에 걸쳐 400여 명이 넘는 배우 오디션을 보고 찾아 냈다.
조주희는 ‘북한 무용수 단역 구함’이란 공고를 보고 지원해 조명애 역인 줄 몰랐다고. 그는 “촬영 1년 전부터 연기 선생님과 만나 북한말과 북한식 한복 옷고름 매는 법까지 배웠다”며 “촬영장에선 ‘이효리가 뭐 대단하냐, 넌 조명애다’라며 당당하게 대하란 주문을 받았다”며 웃었다. 조주희의 연기 선생은 영화 ‘베를린’에서 전지현에 북한말을 지도했던 군인 출신 한 탈북자였다.

2억 원+@... 김정일 특수 분장에 2년 들여
‘공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재현한 대상은 단연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었다. 2년에 걸쳐 태평양 건너 ‘억’ 소리 나는 준비 과정이 이뤄졌다. 후보에 올랐던 세 중견 배우 중 얼굴형이 가장 닮아 뽑힌 기주봉은 2016년 11월 미국 뉴욕으로 갔다. 얼굴을 포함해 배까지 본을 떴다. 특수 가면은 물론 체형 보정 슈트를 만들기 위해서다. 김정일 특수분장은 미국의 ‘프로스테틱 르네상스’가 맡았다. ‘맨 인 블랙3’와 ‘나는 전설이다’ 등을 작업한 할리우드 특수 분장 제작팀이다. 영화사 월광의 국수란 PD는 “본을 뜬 뒤 이듬해 미국 제작진이 한국으로 건너와 두 번의 시험 촬영 등을 하고서야 촬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정일 특수 분장에 들어간 비용만 약 1억6,000만 원. 더 큰 난관은 관리였다. 특수 분장 접착 성분 유효 기간은 5시간. 김정일 촬영은 지난해 6월 초여름에 시작됐다. 땀 때문에 특수 분장이 떨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촬영장엔 ‘김정일 냉동 텐트’가 마련됐다. 대형 에어컨이 설치된 텐트였는데, 사람들이 몰리면 행여 온도가 오를까봐 ‘기주봉 전용’으로 운영됐다 한다.
김정일 안경과 옷도 특별 제작됐다. 채경화 스타일리스트는 “인터넷 해외 중고 사이트에 북한 행사 풍경이 담긴 소책자를 사 북한 의상을 연구했다”며 “중국 단둥에 실제 북한 옷을 파는 곳에서 옷을 사 오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구두 굽도 12㎝ 높이로 제작됐다. 김정일은 생전 키높이 구두를 즐겨 신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촬영하느라 기주봉이 적잖게 애를 먹었다는 후문.

완벽한 재연에는 디테일이 중요한 법. 촬영장엔 ‘김정일 반려견’, 하얀색 몰티즈까지 투입됐다. 몰티즈는 김정일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윤종빈 감독은 “탈북 시인 장진성 씨가 쓴 ‘친애하는 지도자에게’를 보면 ‘김정일을 만나러 가 각 잡고 서있는 데 하얀 몰티즈가 발을 핥았다’는 내용이 있어 영화에 활용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두 마리의 몰티즈를 입양, 반려견 훈련소에서 4개월을 맡겼다. 기주봉은 몰티즈와 이틀 동안 합숙도 했다. 반려견을 안는 장면 촬영을 위해서였다. ‘로열패밀리’의 반려견인만큼 세련된 외모 관리는 필수. 훈련사 비용 및 털 관리 및 샴푸 비용 등에 2,500만 원이 들었다. 윤 감독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 제작비 2,000만 원보다 많다.

평양 영상 구입 ‘007 작전’… “북한 세트 제작 신고 촬영 중단”
김정일의 으리으리한 대형 별장은 관객을 압도한다. 세트는 경기 안성에 지어졌다. 높이 7m에 1,200㎡(360평)의 큰 규모였다. 제작에 50일이 걸렸다.
김정일 별장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극비 중의 극비. 박일현 미술감독은 북한의 벽화, 건축 양식을 책으로 보고 만들어야 했다. 북한 정권의 신격화를 표현하기 위해 기둥도 신전 양식을 택했다. 벽화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어린이들과 함께 웃는 장면을 넣었다. 북한의 기괴함을 부각하기 위한 콘셉트다. 북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평북 영변군 장마당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장면은 강원도 동해 인근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막사처럼 보이는 옛 건물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곳이어서다.
휴전선 너머 땅이라 접근이 어렵고 자료가 없다 보니 곡절도 많았다. 평양 시가지 모습 재현을 위해 시내 촬영 영상을 해외에서 샀다. 북한 영상을 파는 외국인을, 한국이 아닌 ‘제3국’에서 만나야만 했다. 누가 팔았냐고? 엔딩 크레디트에 영상 제공자를 숨기는 게 판매 조건이었다. ‘007 작전’이 따로 없다.
북한 초대소 촬영 세트에 적힌 표어 때문에 주민 신고가 들어온 적도 있다. 박 미술감독은 “한 대학에서 촬영을 했는데 경찰에서 찾아왔다”며 “나중에 오해가 풀려 촬영을 마쳤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공작', 북미·오세아니아·유럽 등 전세계 줄줄이 개봉
정유진 기자 입력 2018.08.09. 15:18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영화 '공작'(윤종빈 감독)이 북미와 유럽 등 전세계에서 개봉한다.
9일 CJ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공작'은 10일(현지시간) 북미를 필두로 전세계 각국에서 개봉을 확정했다.
'공작'은 1990년대 중반,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파헤치던 안기부 스파이가 남북 고위층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극이다.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 8일 개봉해 웰메이드 한국형 첩보물의 탄생을 알린 이 영화는 국내에 이어 북미, 오세아니아, 아시아,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개봉을 확정했다. 10일 북미지역에서 해외 관객들과 첫 만남을 갖고 23일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개봉한다.
이어 9월 6일에는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7일엔 대만에서 줄줄이 개봉한다.
10월부터는 유럽에서도 '공작'을 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10월 12일로, 프랑스에서는 11월 7일로 개봉일을 확정했다. 이 밖에 폴란드와 일본에서도 개봉 스케줄을 조율 중에 있다.
'공작'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뜨겁다. 8월 2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되는 오세아니아의 최대규모의 영화제인 제67회 멜버른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이후 23일 오세아니아 현지 극장 개봉 예정이다.
앞서 이 영화는 제71회 칸국제영화제 필름마켓을 통해 전세계 111개국에 판매된 바 있다. 해외 바이어들은 "긴장감 넘치는 줄거리와 시의적절한 메시지!"(Signature Entertainment), "'공작'은 영화사 속 진주"(Borsalino Films), "황정민-이성민 배우의 연기는 최고다!"(Twin) 등의 극찬을 쏟아낸 바 있다.
eujenej@news1.kr
매거진
<공작>의 북한 장면은 북한가서 찍었나요?
안성민 입력 2018.08.28. 12:01 수정 2018.08.28. 14:08
영화 <공작>의 주무대는 90년대 중국 북경과 북한이다. 제작진은 흑금성 사건이라고 불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만큼 가능한 ‘리얼’하게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과연 <공작>의 북한 장면들은 어디서 또 어떻게 촬영한 것일까?
초대소

북측에서 박석영의 방북을 환영하기 위해 연회를 연 초대소 장면은 충북 괴산에 위치한 중원대학교 캠퍼스에서 촬영하였다. 한국적인 양식이 가미된 회색조의 육중한 건물은 평양에 있는 금수산 태양궁전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할 정도로 북한 같은 느낌을 주는데, 2014년 방영된 드라마 <닥터 이방인> 역시 북한 배경의 장면을 이 곳에서 촬영한 바 있다. 2017년 <공작> 촬영 당시 미술 세팅의 일환으로 김일성 찬양 플래카드를 걸고 인민군복을 갖춰 입은 보조출연자들을 배치했다가 인근 주민들이 실제 상황으로 오인해 경찰에 신고를 해서 촬영이 중단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장마당

박석영이 고구려 능을 발굴한다는 핑계로 방문한 영변 구룡강 장마당 역시 국내에서 촬영하였다. 동해시 동부메탈 부근에 위치한 한 탄광소 사택을 개조한 것인데 무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었다고 한다. 광장 인근에 약 50m 정도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나무를 뽑아낼 수 없어 고심 끝에 이를 가리기 위한 긴 구조물을 만들고 벽화와 선전문구 등을 그려 넣었다. 궁여지책으로 내린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모습과 배경의 원색적인 프로파간다 이미지가 대비되어 당시의 북한 사회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김정일 별장

영화 후반부 긴장감 있는 장면이 연출되는 중요한 장소가 바로 김정일 별장이다. 높은 천장, 화려한 대리석 바닥에 육중한 기둥, 거대한 벽화 등 보는 이를 압도하는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안성에 위치한 세트장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어 낸 것이다. 세트 제작에만 50여일이 소요되었고 정중앙에 위치한 벽화는 약 4개월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라고. 이러한 미술팀의 노력 덕에 북한 최고지도자의 부와 과장된 권위 등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인상적인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김정일 별장 선착장

극중 박석영이 배를 타고 김정일 별장에 도착하는 장면은 경북 안동시 안동호 도목 선착장에서 찍었다. 수백명의 인민군 병사들이 열을 맞춰 대기하는 외진 선착장의 경관은 김정일 별장이라는 곳이 북한 내에서도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얼마나 비밀스러운 장소인가 하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민군복을 입은 300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의 각 잡힌 모습이 아무리 봐도 수상해 보였는지 이곳 역시 영화 촬영을 사전에 공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진 바람에 영화의 프로듀서가 주변 주택을 일일이 방문해 영화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고 한다.
평양 시내

박석영이 평양에 처음 도착하는 부분에서 항공샷을 포함한 다양한 앵글로 평양 시내의 전경이 보여진다. 이 장면이 진짜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제 평양의 이미지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북한의 풍경을 찍어서 판매하는 업체를 통해 영상 소스를 구입해온 것과 연변에서 드론을 날려 필요한 샷을 촬영한 것을 편집하여 만들어냈다고. 아쉽지만 옥의 티를 하나 꼽자면, 박석영이 평양 시내로 차를 타고 진입할 때 창 밖으로 보이는 류경호텔의 모습이다. 평양의 랜드마크 격인 105층 건물 류경호텔은 1987년 착공 후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극중 시대배경인 90년대 후반에는 황량한 유령 건물 같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공사가 재개되어 영화 속에 등장한 모습으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흑금성' 아닌 '박채서'로 "국가는 비겁했으나 난 후회 없다"
김지은 입력 2018.09.07. 09:03 수정 2018.09.07. 11:22
최후 공작 목표 ‘김정일’을 만난 성공한 공작원
97년 ‘북풍’ 막고, 이명박 정부 ‘대북 비선’ 역할

이 남자에게는 ‘국가’가 신념이고, ‘국익’이 사명이었다. 종교조차 없는 그는, 나라를 위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등치 시킨 삶을 살았다. 국군 장교로, 국군정보사령부 공작관으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공작원으로, ‘이중스파이’로, 흑금성으로, 세상은 그를 달리 불렀지만, 인간 박채서(64)에게는 그 모두가 국익을 수행하는 공직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성공한 공작원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 북의 ‘최고 존엄’이자 최후의 공작 목표를 만난 남한의 공작원은 그가 유일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안기부의 윗선이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현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에 북한을 끌어들이려 한 ‘북풍’ 공작을 감지하고 이를 막는 ‘맞공작’을 폈다. 민심이라는 국익을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이 그를 이끌었다. 영혼이 없는 것을 넘어 영혼을 판 공작원이었다면, 자신이 속한 안기부의 국내 정치 공작에 맞서지는 못했을 테다. 고비마다, 적군과 아군 사이의 외줄에 설 수 있게 한 건 ‘국익’이라는 그의 신념이었다.
그런 그를 국가는, 정보기관은, 버렸다. 그가 보고한 기밀을 짜깁기해 만든 문서인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흘려 사실을 왜곡했다. 국가가 숨겨줘야 할 대북 공작원으로서 신원을 노출했고, 방출시킨 것이다. 이후엔 급기야 ‘이중간첩’으로 몰아 법정에 세웠다. 남북 대치 상황이니 존치돼야 한다고 믿었던 국가보안법이 자신을 폐기하는 도구가 될 줄은 그도 몰랐다.
그래도 억울하지 않다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조차 내 신념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길의 결과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요. 우리(공작원)는 국가나 조직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공작 수행을 후회한다는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어요. 다만, 국정원이 비겁한 거지요. 타국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정보기관의 공작원을 규정이 아닌 다른 수단을 동원해 법정에 세웠어요. 이것만큼 치욕이 어디 있나요?”
그도 한때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이 봉직했던 국정원의 수사관들이 2010년 6월 1일 새벽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다. 국정원에 끌려간 뒤부터 그는 곡기를 끊었다. 모진 마음을 먹고 8일을 버텼다. 그때 생을 붙잡은 건 아내의 한 마디였다. “여보, 난 당신 믿어.”
스스로 꺼버리려 했던 책임감의 불씨가 그 말에 다시 살았다. ‘아, 내가 이 사람을 두고 가선 안되겠구나.’
2016년 5월 31일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다.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크기,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서 6년 형기를 꽉 채우고. 국가는 그를 폐기 처분하려 했으나, 그의 정신은, 신념은 다시 그를 국가 앞에 세웠다.
그리고 이 부활의 수기에는, 기자가 있었다. 22년을 함께 한 이 인연은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뛰어 넘어 자신의 양심을 믿게 한 버팀목이었다. 감옥에서 꾹꾹 눌러 쓴 4권의 기록은 김당 UPI뉴스 선임기자의 손을 거쳐 책 ‘공작 1ㆍ2’로, 윤종빈 감독의 각색을 거쳐 영화 ‘공작’으로 탄생했다. 이제는 세상이 그를 대신해 억울해 한다. 이는 그가 곧 국가를, 국정원을 상대로 시작할 재심 청구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직 공작원으로서 억울함도, 후회도 들여 놓지 않는 박채서, 그 신념의 원천은 무엇인가.
◇새벽길 4시간 걸어 청주중 몰래 응시한 ‘독종’

-어린 시절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앞서는 성격이었나요?
“그 시절 시골은 다들 그랬듯 우리집도 엄청나게 가난했지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지게를 지거나 손에 삽, 호미를 든 걸 본 적이 없어요. 대신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다 하셨죠.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너 공부하지 마라.’ 이해가 안됐어요. 남들 부모는 공부하라고 회초리를 드는데. 그 이유를 (철이 좀더 든) 4학년 때 알았어요.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돼서 그렇다는 것을. 그런데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이 시골에서 농사꾼이 된다는 게 억울했죠. 내 꿈은 그게 아니니까.”
-그때 꿈이 있었어요?
“죽어도 농사꾼은 되기 싫은 거였죠. 저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국어책을 다 외웠어요. 형들 공부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글을 깨쳤죠.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국민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칠판에 ㄱ, ㄴ, ㄷ 적어놓고 가르치는데 저는 뒤에 앉아서 ‘괴도 루팡’, ‘칭기즈칸’, ‘나폴레옹’ 이런 소설이나 위인전 단행본을 읽고 있었으니. (웃음) 국민학교 내내 반장을 하고, 6학년 때는 학생회장도 했죠.”
-그래도 당시 명문이었던 청주중학교에 진학했는데요.
“그때부터 사실 고생이 시작됐죠. 6학년 때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시절인데, (충북 청원군의) 우리 학교에서는 청주중에 들어간 예가 없었어요. 저한테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너희 집 형편상 중학교에 가기 어렵다는 걸 알지만, (부모님) 몰래 내가 원서를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예비소집 전날 집 마당 짚더미 속에 고무신하고 옷을 숨겨놓고 밤새 안 잤어요. 깜빡 잠들면 그걸로 끝이니까. 졸리면 나와서 찬바람 쐬고 들어가고 졸리면 또 나왔다 들어가고. 집에 무슨 라디오고 시계고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닭이 세 번째 울면 그게 새벽 5시예요. 그때를 기다렸다가 몰래 나와서 짚더미 속에서 옷가지를 들고 동구 밖까지 나가 옷을 입고 청주까지 걸어갔지요.”
-얼마나 걸렸나요?
“한 4시간 걸었을 걸요.”
-4시간이요? 그 겨울에 초등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서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거죠. 청주가 나올 때까지. 제가 가진 한 가닥 희망은 청주 살던 작은 아버지네 사촌 형이었어요. 그 형이 그때 청주중 3학년이었거든요. 학교로 가서 형을 찾았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형한테 사정 얘기를 하고 함께 손 잡고 운동장에 가서 수험표를 받았죠. 124번.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합격하셨을 때 좋으셨겠네요.
“그런데 그 때는 떨어졌어요.”
-왜요, 공부도 잘 했는데…
“음악, 미술 때문이었어요. 음악 시간엔 풍금에 맞춰서 노래 부르고, 미술 시간엔 들로 나가 그림이나 그렸지 무슨 4분의 3박자가 어떻고, 계이름이 어떻고, 보색 대비가 어떻고… 이런 건 배운 일이 없거든요. 심지어 음악, 미술이 시험 과목인 줄도 몰랐어요. 시험지를 보고 너무 당황했죠. 결국 다 찍었어요. 그러니 떨어졌죠. 정말 선생님들이 원망스럽더라고요.”
그는 이를 악물고 1년을 더 버텼다. 배우지 않은 과목은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래도 불안하니 시험 전 5, 6개월은 작은 집에 신세를 지며 사촌들에게 묻기도 하고 작은 어머니를 졸라 청주 시내 국민학교에 찾아가 모의고사도 봤단다. 모르는 문제가 거의 없었으니 그때 합격을 예상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애한테 그런 강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웃었다.
“중학교 때는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했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주말에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있으면 어머니가 슬며시 사라져요. 편한 표정으로 돌아오시면 돈을 빌린 것이고,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시면 못 구한 것이니 다시 나가시곤 했죠.”
◇어머니와 약속… 술ㆍ담배 입에 댄 적 없어
그는 예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입에 댄 적도 없다. 어머니와 약속 때문이다. 아버지는 술을 달고 살다 위암을 얻어 그가 고1때 세상을 떴다. 아버지의 모습에 질렸던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나는 절대 술, 담배를 안 할게요.” 어머니는 올해 아흔 셋이다. 그는 이 약속을 북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그가 술을 권했을 때도 지켰다. “그게 제 성격인 거죠. 나이 들어 어디서 술 한잔 마시거나 담배 한대 피운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요? 다만 내 의지가 깨지는 거죠. 저는 그게 제일 두려운 사람이고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위암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서, 저에게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죠. 고1 밖에 안된 저를 병원으로 부르시더니, “채서야, 어머니를 부탁한다. 그리고 너는 꼭 공부해서 대학에 가라. 그리고 대학 나온 여자 만나 결혼하고, 자식들도 대학에 모두 보내거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형제가 4남 3녀인데, 제가 가운데예요. 위로 형들도 있는데, 저에게 어머니를 책임져달라는 말씀을 하신 거죠.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부모는 자식의 본질을 어쩌면 자식보다도 잘 꿰뚫고 있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리 제 생각에 아버지 노릇을 못한 분이었어도 말이죠. 커서 결국 형제들 중에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챙겼거든요. 대학에 가라는 당부는, 아버지의 형제들과 달리 당신은 대학을 다니지 못한 게 평생 한이 되었기 때문이었나 봐요.”
-대학에 결국 가셨나요?
“가긴 했는데, 형편상 끝까지 다닐 수가 없었어요. 대학 2학년 때 군에 입대하려고 보니, 졸병으로는 가기가 싫더라고요.
그때 우연히 육군3사관학교 생도 모집 포스터를 봤어요. 장교가 되고 나중에 대학도 갈 수 있다고 하기에 지원했죠. 3사관학교는 (2년제) 초급대학 학력으로 인정했거든요. 들어가보니까, 4년제 정규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군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정 받지 못해)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겠더군요.”
◇3사관학교 출신 ‘벽’ 절감해 전역, 공작원으로

그의 학구열은 군에서도 계속됐다. 대위 시절 OAC(고등군사반) 교육을 받을 때는 대학 편입시험 준비까지 병행해 치렀다.
OAC 성적은 진급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동기들은 그에게 ‘OAC에만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너 미쳤느냐’고 했다. 그래도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질주했다. 출ㆍ퇴근이 가능한 근처의 대학을 찾아 일어교육과에 응시했다. 그는 면접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편입 시험을 보니 영어와 역사는 다 맞았을 것이고, 국어는 논술이니 채점에 맞기겠습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떨어지면 이유를 확인하러 오겠습니다.” 교수가 물었다. “일어는 할 수 있나?” “한 글자도 모르지만, 입학만 시켜주시면 군인정신이 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입학할 때 히라가나도 몰랐던 그는 졸업식 때는 일어로 답사를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엔 장교 영어반 교육과정에도 합격해 이수했다. 비록 육사(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동기 중에 상위를 달리면 진급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1986년) 10월에 3사관학교 출신 1, 2기 중령들의 첫 대령 진급 심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단 한 명도 진급이 안되더군요. 그때 나도 꿈에서 깼어요. 그래도 나는 소령 진급이 됐지만, 노력해서 (더 이상) 안 되는 거라면 빨리 접어야지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죠. 국방대학원(국제관계)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는 국방대학원 시절을 두고 “그 때 인생이 바뀌었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부터 육군대학을 3등으로 졸업해 정보사 공작단 본부로 발령 난 뒤, 1994년 소령으로 전역하고 안기부 공작원으로 채용되기까지 내막을 두고는 구체적인 언급을 삼갔다. ‘흑금성’으로 만들어지는 복잡하고 지난한 시간으로 이해됐다. 영화에서는 이 시기가 군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고, 제대로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신분세탁’ 과정으로 그려진다. 그는 “영화이니 극적인 요소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더욱 치밀한 머리 싸움의 과정이었다”며 “대통령의 친ㆍ인척이나 측근 정치인들과 일을 도모하거나 교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남한 내 고정간첩이나 북한의 정보기관을 속이기 위한 공작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와 안기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군 조직에 불만을 품고 뛰쳐나왔으나 남한 내 권력의 핵심부와도 통하는 엘리트 장교 출신 인사’였다. 1995년 안기부는 이른바 ‘흑금성 공작’을 인가했고 그의 대북 공작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3년 뒤 안기부 수뇌부가 의도적으로 노출(‘이대성 파일’ 사건)하기 전까지는 그도 자신의 공작명을 알지 못했다.
공작원으로서 그의 목표는 북한의 핵개발 첩보수집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권력 핵심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실세였던 장성택(김정일의 매제)의 형인 장성우 인민군 중장의 아들 장현철에게 줄을 댔다. 이른바 ‘포대갈이 사업’이 발판이었다. 이후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의 전무로 위장해 남북 합작 CF 사업을 추진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관심을 갖고 있던 묘향산의 국보급 골동품 매각 문제를 해결하면서 북측의 신뢰를 얻었다. 영화에서도 흥미롭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시기 김정일 위원장과 ‘30분 면담’도 이뤄진다.
-김정일 위원장도 만나셨죠?
“네, 영화에서는 두 번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론 한 번이에요.”
-직접 만나본 김 위원장은 어땠나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사람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예술, 문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독한 심성이 없다잖아요. 김 위원장도 그랬죠. 또 당시 면담은 (남북 합작 광고, 골동품 처분 등을) 격려하는 자리이기도 했고.”
-영화에서처럼 김 위원장이 술을 권하기도 했나요?
“그랬죠. 그렇지만 마시지 않았어요. 이미 (그간 교류해온) 북한 고위직에는 (어머니와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내 강한 의지를 말한 상태였고요. 하지만 당시 상대는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이니 기분 나쁘지 않게 상황을 모면해야 했죠. (김 위원장이 술을 권하니) 옆에 있던 김영룡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이 ‘박 선생이 어머니와 약속 때문에 지금까지 술을 안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김 위원장이 (미리 보고를 받았다는 듯) ‘알고 있어’라고 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위원장님이 주는 술은 통일이 되면 받겠습니다.’ 그 말에 김 위원장이 껄껄 웃었지요. ‘호기가 있구만’ 하더니 더 이상 권하지 않더군요.”
◇최면 테스트는 허구… 순발력 덕 위기 넘겨
영화 얘기를 좀더 물었다.
-영화에서는 최면 상태로 북측에서 공작원 여부를 검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화인가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죠. 김영룡 부부장이 밥을 먹다가 갑자기 ‘6ㆍ25는 남침이요, 북침이요’라고 물은 일이 있긴 했어요.
순간적으로 ‘아, 나를 테스트하는 구나’ 싶었죠. 그 때 ‘네?’라고 반문만 해도 안 돼요. 0.5초 만에 의도를 판단하고, 0.5초 만에 답을 해야 하죠. 제가 그랬어요. ‘남침, 북침 뭐가 중요합니까? 6ㆍ25는 한반도 통일 전쟁 아닙니까. 당신들이 한반도를 통일하려고 했으면 남침인 거죠.’ 한 달쯤 지나서 김 부부장이 그러더군요. ‘그 때 박 선생이 북침이라고 했으면 우리하고 끝났시요.’ 북침이라고 했다면 오히려 신뢰하지 않았을 거란 의미인 거예요. 공작원으로 내가 선택된 이유가 결국은 순발력 아니었나 싶어요. 이건 교육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타고 나야 하는 거니까.”
1998년 이른바 ‘이대성 파일’ 건으로 그 해 8월 안기부에서 해고된 뒤에도 노무현ㆍ이명박 정부에서 그는 위기 상황마다 ‘대북 비선’으로서 정부를 측면 지원했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덮쳤다. 이명박 정권 3년 차인 2010년이다.
-2010년 6월 1일 상황 기억이 나시나요.
“그럼요. 새벽 6시 25분쯤이었을 거예요. 집 사람은 안방 침대에서, 나는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었죠. 누가 초인종을 누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여니까 열댓 명이 밀고 들어오더라고요. 관할 파출소 경찰을 앞세워서 국정원 수사관들이 온 거죠. 뭐라고 떠드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일 먼저 서재로 가더군요. 바로 찾아가는 걸 보니 몇 번 우리 집에 드나들었구나 싶었죠. 군사교범을 찾더니 바닥에 쭉 깔아놓고는 사진을 찍더라고요.”
50일 간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를 받은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군사교범과 작계 5027-04(북한과 전면전에 대비한 한ㆍ미 군사작전계획)의 일부를 탐지ㆍ수집했다는 죄목이었다. 북 수뇌부에 ‘위장 포섭’돼 안기부의 공작을 수행한 흑색요원이던 그를, 졸지에 진짜 간첩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2011년 10월 대법원은 북한 작전부(현 정찰총국) 공작원의 부탁을 받고 2003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군사기밀을 입수해 넘긴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징역 6년 형을 확정했다.
“나한테 뒤집어 씌운 혐의는 대부분 2004~2005년에 했던 (대북 관련) 일과 관련됐어요. 더구나 군사교범은 국가 기밀도 아니에요. 결국 작계 5027-04 때문인데, 전혀 범죄요건이 성립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건 김인동(박채서씨에게 작계 5027-04의 일부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 지목된 인물로, 당시 6군단 참모장) 장군의 인생도 걸린 일(김 전 참모장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이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야 해요.”
그는 국정원과 검찰이 미리 짜둔 시나리오대로 수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옥중수기를 바탕으로 김당 기자가 취재와 검증을 거쳐 쓴 ‘공작 1ㆍ2’는 이 사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과거 정보사 공작관과 안기부 공작원을 지낸 대북 비선으로서 북한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온 박채서와 현역 육군 소장인 김인동 장군이 단지 ‘작계 5027-04’와 관련된 대화를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눈 사실 자체만으로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유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물론 북의 지령을 받은 바도, 작계를 수집ㆍ탐지해 제공한 사실도 없다는 게 박채서씨의 일관된 주장이다.
◇MB정부 3년차,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충격’

-국정원이 의도적으로 그랬다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마 1997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한 일 때문에 내가 걸리적거렸겠죠. 97년 대선 때 의도적으로 개입하려 한 시도를 막고, 국정원은 하지 못했던 (대북 관련 비선) 일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구속시킨 데는 더 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어요.”
그는 “당시 내가 (더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히지 않은 건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불순한 의도, 정치적 목적을 갖고 나를 통해 누군가를 저격하려고 했다면, 내가 (대신)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내게 주어진 운명일 테니까요.”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97년 대선 때도 나는 순수하게 국가의 이익만 생각했어요.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이 선출돼야 할 선거에, 내ㆍ외부의 불순한 영향력이 개입해 민심을 훼손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내 원칙대로 했어요.”
97년 대선 때의 일이란, 당시 안기부의 수뇌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선이 흘러가도록 개입하려 한 ‘북풍’ 공작을 말한다. 당시 3인의 대선 후보 중 김대중의 당선을 가장 기피했던 북한의 의중을 역이용해 다른 특정 후보의 당선을 꾀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김대중 후보 쪽에 이 같은 움직임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렸고 북풍 공작은 미수로 끝났다.
“그때 고민스러웠죠. (96년부터 알고 지낸) 김당 기자에게 고민을 털어놨어요. 북측이 남한 선거를 좌지우지 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어요. 결정적으로 그의 이 말이 내가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어요.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6년간 독방 수감… 생각 안 해야 살 수 있었다
그 양심이란, 그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국익이었다. 이것이 결국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이듬해 3월 권영해 부장과 이대성 해외공작실장은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흘렸다. 김대중 정부와 거래하거나 협박할 목적으로 ‘해외공작원 정보 보고’를 짜깁기해서 만든 것으로 의심됐다. 이 파일로 흑금성의 신원도 공개됐다. 박채서씨도 자신의 공작명이 ‘흑금성’이란 사실을 그 때 알았고 결국 그 해 8월 안기부를 그만 뒀다.
-누구보다 국보법의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셨을 텐데요.
“그게 참 아이러니해요. 우리 큰 아이가 북경대에 다닐 때 일주일에 한번씩 국내(한국) 이슈를 주제로 토론하는 스터디 모임을 했거든요. 유학생들끼리 고국의 시사 문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기 위해 만든 거죠. 그때 국보법이 주제라면서 제게 의견을 구하더라고요. 노무현 정부 때였고 국보법 존폐가 논란이었거든요. 제가 그때 ‘국보법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을 볼 때는 아직까지는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몇 년 뒤에 그 법에 내가 걸린 거예요.”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의 외압으로 의심되는 일들을 장시간 상세하게 말했다. 변호인조차 제대로 선임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그가 도움을 요청해 변호를 맡으려다 무산된 변호사의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기자와 통화에서 “(변호해달라는) 부탁은 받았던 것 같다”면서도 “상황이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당하고 보니까 이 법이 그야 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이더라고요. 만나자고 연락하면 (국보법상) ‘통신’이 되고, 도움 주면 ‘편의 제공’이 되는 거죠. 사실 저를 정말 (법 위반으로) 걸 의도였으면, 남북교류협력법을 잣대로 삼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받아들였죠. 재판정에서 내가 판사한테 선언도 했어요. 변호인에게 ‘북한 체제에 동조하느냐’는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요. ‘나는 지금까지 국가 위해 일한 사람이고, 애국자다. 북한은 우리 동족임과 동시에 유사 시에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할 적이다. 나는 북의 체제나 사상에 동조한 적도 없다.’ 나는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내가 안 한 걸 했다고 할 수는 없었어요.”
-2010년 6월 잡혀갈 때까지 공작 활동을 하면서 혹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한 적이 있나요?
“단 한번도 못했어요. 그랬으면 대비를 했겠죠. 전혀 생각조차 못했어요. 왜? 그간 국가를 위한 일을 하면서 어떤 사리사욕을 챙긴 적이 없었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있다면 비난을 달게 받겠지만, 그건 내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는 일이기에 하지 않았어요. (쉽게 말해) 북에서 어떻게 돈을 받습니까? 굶어 죽는 사람들한테 뭘 받겠어요. 그런 나를 국가를 배신한 배신자로 낙인 찍어 버리니 참을 수가 없는 거죠.”
-수감 생활은 어떻게 견뎠나요.
“6년을 독방에서 살았어요. 원래 징벌 받을 때나 가는 방인데 말이죠. (탁자를 가리키며) 방 길이는 내가 누우면 한 뼘이 남고, 너비는 벽에 기대 앉으면 한 뼘이 남는 크기였어요(그의 키는 174㎝다). 나는 출역(교도소 내 노동ㆍ작업)도 안 시켜주더라고요. 화병이 안압으로 올라오더군요. 왼쪽 눈은 녹내장이 생겼고, 오른쪽 눈은 망막에 문제가 생겼어요. 치아도 주저 앉기 시작하더라고요. 생각을 하면 미치니까, 아무 생각을 안 했어요. 멍하니 있는 거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요. 무협지에 빠져서 무협지를 생각 없이 읽거나.”
-가족도 힘이 됐지요.
“정말 컸죠. 특히 내 집사람은 처가의 극렬한 반대에도 나를 선택한 사람이에요. 고교 수학 교사인 딸이 가진 것 없는 3사관학교 출신 대위와 결혼하겠다니 부모님이 결사 반대했죠. 아내는 (부모를 상대로) ‘단식투쟁’을 하면서까지 나라는 사람 하나를 보고 자기 인생을 결정한 사람이에요. 결혼하면서 아내한테 딱 하나를 부탁했어요. ‘내 어머니한테 잘해달라.’ 정말 잘 지켜줬죠. 나중에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보다 더 잘 헤아리고, 어머니와 더 잘 통하더라고요. 나도 아내에게 도리와 의리를 다 했죠. ‘평생 여자는 당신 하나다’라는 약속을 지켰으니까요. 처음 국정원에 잡혀갔을 때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었어요. 8일을 단식하니까 수사관들이 아내를 부르더라고요. 미음 같은 걸 쒀오게 한 거죠. 그때 아내한테 ‘여보, 한국에서 살지 마. 다 정리해서 (국외로) 나가라’고 했어요. 사실 유언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돌아서는데 아내가 손을 딱 붙잡고는 ‘난 당신 믿어’ 하더군요. 그날로 단식을 풀었어요. 나를 믿어준 그 한 사람 때문에 생을 놓지 않은 거죠.”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주니 그나마 위안”

-이달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만나죠.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텐데, 남북 문제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을 듯 한데요.
“두 사람이 마주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날 거라고 봐요. 지금 북한은 유엔 제재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죠. 내 단편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이번 3차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에 이산가족 개별 교류만이라도 확 트기로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북한에는 제일 급한 게 외화일 거예요. 만약에 남북 간에 교류를 풀면, 이 문제도 해결 되겠죠. 지금도 탈북자들이 중간 브로커에게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북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잖아요. 이건 남북 지도자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죠. 교류 활성화에 따른 걱정?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요? 북한과 우리는 여러 면에서 이미 대학원생과 유치원생의 차이예요. 이산가족 상봉이나 교류의 제한을 푸는 문제는 미국도 막지 못할 거예요. 역사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죠.”
-김당 기자와 인연도 특이해요. 전직 공작원이 자신의 활동 내용과 구속 수감되기까지 일대기를 기자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한다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무슨 공작원이 기자하고 저렇게 친하냐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1996년 김당 기자가 (‘시사인’으로 갈라져 나오기 전의) ‘시사저널’에 있을 때 처음 알게 됐어요. 시사저널이 ‘청와대가 월드컵 남북한 공동개최를 추진하려고 현대그룹이 제공한 돈으로 구입한 밀가루를 북한에 지원했다’는 특종 보도를 했거든요. 주간지 기자들이 청와대에 민감한 내용을 보도하는 용기가 대단해 보였어요. 시사저널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서 ‘지원 시점 등이 좀 틀릴 뿐 보도 내용은 사실’이라고 말해줬죠(당시 박씨는 자신을 중국을 오가며 대북사업을 하는 ‘장 선생’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 때 추가 제보를 하려고 김 기자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시간을 두고 보니, 정도를 걷는 기자더군요. 그때도 지금도, 만나기 어려운 기자죠. 있는 거 없는 거 다 쓰는 기자들도 많잖아요.”
두 사람의 인연은 아마도 기자와 공작원이 상대를 대하는 공통의 불문율인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옥중에 있어) 우리 가족의 곁을 지킬 수 없을 때도 김 기자는 내 아내와 딸들을 챙겼어요. 간첩 혐의로 구속되니 친형제도 등을 돌렸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죠. 기자와 취재원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인생의 버팀목이에요.”
출소 전 옥중에서 써내려 간 수기를 김 기자에게 ‘알아서 해달라’며 맡긴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중국에서 만난 친구들도 나를 도와줬죠.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 딸들에게 연락을 했다고 해요. ‘네 아버지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친구니까. 이 일이 중국에서 벌어졌으면 도왔을 텐데 한국이라 그러지 못하니, 아버지가 출소하는 대로 연락 달라고 전해주거라’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이 나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국가는 나를 버렸는데, 타국의 친구들은 나를 돕겠다고 6년을 기다렸다니.”
-공작원으로 산 삶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이런 말 하면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후회란 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얘기예요.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죠. 국가에서 강요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정도의 투철한 사명감이 없다면 이 험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재심 청구해 치욕 씻고 명예 되찾을 것”
-재심을 청구할 생각은 없나요?
“해야죠! 내가 북한에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국가에 해를 끼치는 정보를 넘길 정도로 사상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지요. 내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은 혐의를 덮어 씌운 건, 내가 내 목숨을 걸고 밝혀야 할, 견딜 수 없는 문제예요. 특히 작계와 관련한 혐의는 꼭 재심을 청구해서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해요. 나뿐 아니라 김인동 장군의 명예 회복도 걸려있으니까요.”
-‘인간 박채서’를 지켜온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내 신념과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려서 이걸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장교로서, 공작원으로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 신뢰가 깨지는 건 단 한번이에요. 내가 한번 국가를 배신한다? 그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쉽게 갈 수 있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그 한번을 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진짜 억울하지 않은가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존재할 수 없어요.”
그 속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억울하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총체를 부정하는 게 돼버리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짐작했다. 대신 그는 요즘 위안이 된다고 했다. “책으로 영화로 자신의 사연을 접한 시민들이 알아주어서.” 인터뷰 말미, 그는 실은 속병이 들어서 위험한 지경이라는 말을 했다. 정신과 의사가 상담을 하더니 이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인데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느냐고 되물었단다. 지금 자신을 지키는 건 가족을 떠난 6년의 공백을 채우려는 책임감이라고 했다. 박채서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을 걸고 한 점 부끄럼 없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런 국가에 배신 당해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않는 사람. 그에게 이제는 국가가 답해야 할 차례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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