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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세 송해의 소원 "내 고향 해주서 전국노래자랑 하고파"

by 무궁화9719 2022. 9. 29.

92세 송해의 소원 "내 고향 해주서 전국노래자랑 하고파"

[장수 프로 ⑩-1] 데뷔 64년차 방송인, KBS <전국노래자랑> 최장수 MC 송해를 만나다

 
18.07.07 16:53최종업데이트18.07.07 16:53

 

 

 

송해는 무대에 오르며 관중들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띄웠다.ⓒ 이희훈

 

인천 미추홀구 주민들이 막대풍선과 노란색 모자를 쓰고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의 노래에 맞춰 흥겨워하고 있다.ⓒ 이희훈

 

송해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자 시작된 밴드의 연주에 관중석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희훈


"전구우우우우욱!"

구성진 송해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장이 크게 들썩였다. 모인 관객들은 그제야 "노래자랑!"이라고 힘차게 합창했다. 송해의 한 마디에 사방이 술렁댔다.

"전국에 계신 전국노래자랑 가족 여러분 한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전국노래자랑> 사회 담당,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안녕하세요! 많이들 오셨네요, 모두들 건강하시죠?"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크게 손을 뻗어 인사를 건네자 관객들도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어마어마한 무대 장악력이었다. 한 관객은 송해를 두고 "송해 오빠"라 부르면서 환호하고 수줍게 웃었다.

오로지 송해를 보기 위해 전국노래자랑 녹화장을 찾은 관객들도 많았다. 중년의 남성 관객 이상헌씨는 "송해 선생님 얼굴 보러 왔다, TV에서 보는 것 보다야 실물로 보는 게 낫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송해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녹화 현장에 온 팬들의 특권이다.ⓒ 이희훈

 

전국노래자랑의 숨은 상징 '딩동댕 실로폰'ⓒ 이희훈

 

초대가수 성진우가 노래를 하는 동안에도 송해는 관중들과 소통을 하고 있다.ⓒ 이희훈

 

분위기를 띄운 초대가수 홍진영과 송해가 무대 위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이희훈


전국노래자랑이 곧 송해이고, 송해가 곧 전국노래자랑이다. 1988년 5월부터 사회를 시작해 올해로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잡은 지 꼭 30년이 된 그다. 그는 녹화 시작 전, 현장 관객들만을 위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띄웠다. 송해가 준비한 사전 무대는 '비방용'이다. <전국노래자랑> 현장에 온 사람들만 볼 수 있는 특권이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송해의 노래를 따라 일어서서 슬렁슬렁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되는 녹화지만, 송해는 한결같이 오전 8시면 현장에 도착해있다. 보통 9시부터 시작되는 리허설을 꼼꼼히 살펴보고 참가자들과 교감하기 위함이다.

송해는 "참가자들 모두 만나서 오늘 어떤 노래를 할지도 물어보고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고 안정시켜놓아야 한다, 무대에 오르면 생각했던 것도 잊어버린다"며 "마음 놓고 놀게 해야 재밌는 게 나온다"고 말했다. 30년의 진행 관록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지 30년이 넘었고 어느덧 92세로 방송계의 최장수 MC가 됐지만 그 열정만큼은 변함없다. <전국노래자랑> 녹화장에 있던 한 스태프는 "여름에 녹화장에 비가 올 때도 있는데 송해 선생님께서 '다들 밖에서 비 맞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비 좀 맞으면 안 되냐'면서 비를 맞고 녹화를 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고 언급했다.

전국노래자랑 인천광역시 남구편 본선 녹화가 있던 지난달 16일 리허설 한 시간 전, '영원한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를 만났다. 송해는 간이 대기실로 꾸려진 관광버스에 타서 대본을 미리 보고 있었다. 그는 "해질 정도로 이거를(대본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가 직접 200자 원고지에 자필로 써놓은 원고를 든 송해는 파란색 펜으로 원고에 줄을 그으면서 숙지하고 있었다.

"전국노래자랑은 공부하는 프로그램"

리허설 도중 출연자들의 노래를 듣던 송해는 노래 가락에 젖어 생각에 잠겼다.ⓒ 이희훈

 

리허설을 지켜보며 200자 원고지에 파란색 펜으로 직접 원고를 만지며 방송 순서를 꼼꼼히 챙기고 있는 송해.ⓒ 이희훈

 

리허설을 보며 원고를 정리하던 송해는 출연자들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손발을 맞췄다.ⓒ 이희훈


- 평소에도 이렇게 녹화 현장에 일찍 오시나.
"우리는 일찍 다닌다. 녹화 장소가 중요하다. 오늘은 문학경기장 북문에 특설무대를 만들었는데, 주변 분위기를 다 봐둬야 한다. 리허설도 봐야 하고, 내가 하는 진행은 그런 거다. 나는 큐시트만 갖고 진행을 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과 행동도 같이 해야 한다."

- 몇 년 전 기사를 보면 녹화 전날 동네 목욕탕에 직접 가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신다던데.
"체험을 한다. 사람 많이 모이는 데가 어디냐 하면 시장통과 목욕탕이다. 거기서 지역 사람들을 만난다. 그쪽 상황을 묻는 거다. 서로 벌거벗고 이야기하는 걸 상상해보라. (웃음) 얼마나 재밌나. 재래시장도 가서 판자로 만든 의자 위에 딱 앉아서 돼지고기 한 점 굽고 먹으면서 지역 사정도 알아본다. 그 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 요즘도 그렇게 하시나.
"지금도 그렇게 한다. 목욕은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한다. 피로 푸는 데 목욕 이상 좋은 게 없다. 노폐물도 빠지고! 뜨거운 물에서 땀 한 번 내고 5분 정도 쉬었다가 냉탕에 들어가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 한 프로그램을 30년 동안 변함없이 하셨는데, 사실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전국노래자랑>을 공부한다고 (생각하면서) 한다. 시대 상황이나 세상의 변화나 천태만상 아닌가. 사람들의 성격도 다 다르고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재능도 다르다. 그런 걸 발굴하는 공부를 한다. 내 나오는 분들에게 늘 '예심 통과하신 분들은 어떤 재능이든 당신만큼 하는 사람이 없으니 특수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하라'고 말한다."

- 맨 처음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시던 게 기억이 나시나.
"아직도 환하다."

-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어떤 게 달라졌을까.
"그때는 여성들이 다 한복을 입고 나왔다. 파마도 하고. 요즘은 한복 입고 나오라고 사정을 해야 나온다. 옛날처럼 파마한 사람 봤나. 못 보셨을 거다. 또 지금은 무대에 나오면서부터 몸을 흔든다. (웃음) 그렇게 동적(動的)이 됐다는 거다."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방송인 송해ⓒ 이희훈


- '진행자 송해'는 그 시절과 비교해 어떤 것이 달라졌나.
"나는 출연자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춤추면 나도 춰야 하고, 아이돌 노래도 잘 모르지만 할 땐 또 해줘야 한다. <전국노래자랑>은 남녀노소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다섯 살짜리도 나오고 90대도 나온다. 또 직업의 높낮이가 없다. 똑같은 자격으로 나와서 실력 발휘하고 들어간다. 국회의원이 나와도 다 똑같은 자격이다. 높다고 봐주지 않는다. 이런 무대가 어딨나. 나와서 수많은 관객들을 웃기고 감동을 주고 그런 사람이 이 프로그램의 스타다. 사회자는, 그 자리에 죽은 고목이 나와도 꽃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 출연자가 말을 잘 못해도 잘 풀어주는 게 사회자지, 흉보고 그런 건 사회자가 아니다. 사회자가 웃기는 것도 좋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웃겨줘야지."

- 대상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게 있더라, 하는 비법이 있을까.
"이건 콩쿨 대회가 아니고 재밌어야 하니까, 재미 안에 노래도 좋아야 한다. 물론 노래의 기본은 갖춰야 하지만 명가수를 뽑는 게 아니다 보니 재미있고 자유롭게 마음 놓고 하라고 한 다음 대상을 뽑는다."

- <전국노래자랑> 하면 또 특산물 아닌가. 각지에서 출연자들이 가져온 특산물이 참 많은데, 그 중에서 못 먹는 음식이 있진 않았나.
"갖고 나오는 특산물을 우리가 소개도 해준다. 그걸 프로그램에서 정말 명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실 먹는 것을 갖고 나오면 꺼려진다. 바닷가에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가면 30도가 넘는 날씨에 회 같은 걸 많이 가지고 나오신다. 30분만 있어도 상할 수 있는데, 그런 걸 줄 때 정말 아찔하다. 만인이 다 보고 있는데 먹지 않을 수도 없고 뱉어낼 수도 없다. 그냥 마음 놓고 다 먹는다. 그런데 그렇게 먹어서 지금껏 탈이 난 적이 없다. 이것도 하나의 기록이지. 탈이 난 적도 없고 주는 걸 먹지 않은 적도 없다. 아! 특산물 질문 중에 뭐가 제일 많냐면 '그거 다 받아서 혼자 집에 가져가냐'고 하는데, 여기 일행이 한 70명 정도 된다. 다 골고루 나눠 먹는다. 녹화할 때 내 입으로 들어오는 것만 내 것이다. (웃음) 나머지는 다 나눠준다."

뜨거운 날씨가 계속된 녹화 현장에서 송해씨가 잠시 땀을 닦고 있다.ⓒ 이희훈


"북한에서 노래자랑 열 거다"

-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시지 않나. 최근 북한과 분위기가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 북한판 <전국노래자랑>도 꿈꾸실 것 같다.
"해주에서 한 160리 정도 더 가면 재령군이라고 있다. 거기가 내 고향이다. 사실 그 질문은 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2003년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했다. 벌써 15년이 됐다. 그때 개성공단, 원산, 충진, 신의주, 그리고 내 고향 해주! 그렇게 다섯 군데서 <전국노래자랑>을 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내 고향에 그저 무대 세워두고 '전국노래자랑 고향에 왔습니다!'하면 얼마나 좋나. 그런데 그동안 분위기가 악화되지 않았나. 요즘은 희망이 있는 분위기다. 이번에는 가자, 약속한 데 꼭 가자 싶고, 이렇게 다섯 군데는 꼭 갈 거다. 어떤가? 아아, 정말 좋겠지."

- 2003년에 평양에 가셨을 때는 어떠셨나.
"그때는 출연자랑 말도 못하게 했다. 아니, 출연자랑 말을 못하게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감시원이 좌측에 있으면 내가 우측 무대로 몰래 뛰어나가고 그러기도 했다. (웃음) 두세 번 뛰어나가니 '나가지 말라니까 왜 나갔어요' 그런다. 몰래 뛰쳐 나가니 또 재미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마음 놓고 웃었지."

- 고향 해주에 가시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너무 세월이 오래 돼 어머니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가족들 생사도 모른다. 내가 이만큼 살았으니 세상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눈물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엎드려서 울고 싶지. 70년이 넘는 통한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이 이야기만 하면 글썽글썽한다. 만일 세상을 떠나셨다면 무덤 앞에 가서 절이라도 한 번 해야 할 것 아닌가. 남아 있는 식구들이 있다면 그동안 살면서 나누지 못했던 정도 나눠야 한다. 난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출연자들 함께 무대에서 인터뷰를 하며 방송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송해.ⓒ 이희훈


- 지난번 아이돌 가수를 비롯해 남측 예술단들이 북한에 다녀올 때 가고 싶으셨을 것 같다.
"<전국노래자랑>이 2003년에 평양을 갔을 때 준비 기간만 7년을 끌었다. 우리는 밖에서도 공연을 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니 '그게 사실입네까? 자료 좀 보내달라요' 해서 또 몇 년을 끌었다. '에이 안 되나 보다' 싶었던 게, 나는 한국전쟁 당시 일반 시민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군에 들어갔고, 저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특급 반역자다. 그 사람이 사회자를 한다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사회자는 안 와도 된다'는 거다. 그래서 '아니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을 10년을 넘게 했는데, 꼭 가야한다'니깐 또 '생각해봅시다'하면서 1년이 넘어갔다. 그러고 있다가 남쪽 사회자 송해, 북쪽 사회자 전성희, 이렇게 못박고 갔다. 여기서는 한 번 방송되고 말았지만 북한에서는 네 번이나 재방송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 놓고 '껄껄' 대는 프로그램이 없었으면 그러겠나. 이런 저런 고충을 겪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번에 가게 되면 적어도 5~6군데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을 열 것이다."

- 북한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여는 것 말고 송해의 다른 꿈이 궁금하다. 더 하고 싶은 건 없나.
"걸어온 길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끼리 놀아도 내가 놀이대장을 많이 했다. 그때부터 음악도 해보고 연극도 해보다가 이게 주업이 돼버렸다. 그런데 사실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땐 부러워하는데 우리 직업이 사실 위험할 때가 많다. 지금껏 3년 계획을 세워보질 못했다. <전국노래자랑> 초기에는 춘하추동, 이렇게 4번 개편을 했다. '여름 넘어가면 개편에 살아남을까' 이 고민을 계속 했지."

- 지금은 그런 고민을 안 하실 거 아닌가.
"그렇지. 연예인이라면 가수도 있고 코미디언도 있고 진행도 있고 분야가 아주 다양한데, 난 아주 진땀이 물씬 나는 드라마, 이걸 한 번 해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 줄거리가 있고, 감정 연기를 하는 그런 '진짜' 드라마! 지금도 그 꿈은 갖고 있다."

- 드라마 같이 하자고 제안 오는 데가 있었을 것 같다.
"있다. 있는데 또 내가 생각을 해봐야지. (웃음) 저걸 해서 득이 있겠느냐 실이 많겠느냐 생각하다가 '하던 거나 계속 하자' 이렇게 되기도 했고."

초대가수를 소개하며 무대를 내어준 송해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희훈


- <전국노래자랑>이 송해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인지 궁금하다.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라 좋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토막토막 인생사가 다양하게 섞인 프로그램이 또 없다. 즐거워서 나온 사람, 슬퍼서 나온 사람, 노래 잘 해서 나온 사람까지 답답할 때 쭉 보면 어딘지 모르게 속이 트인다. 만인이 다같이 공감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덕분에 난 영원히 공부하는 사람이 됐다. 그건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아까 고향에 대한 시큰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사람들의 서린 애환도 다 풀어줘야 한다. 응어리를 풀어주고 너도 풀고 나도 풀고. 이북에 이번에 가게 된다면 고향 분들을 앞에 앉혀놓고 '오랫동안 우리가 아픈 세월을 보냈다'고 '이제 빨리 건강해지자'고 소리치면 좀 좋나.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싸우고 있느냐고도 말해야 한다. 빨리 (북한에) 가야 한다."

태어난 고향 해주 이야기를 하면서 송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따뜻했던 인터뷰 시간도 잠시, 이내 리허설 시간이 되자 송해는 녹화장으로 향했다. 그는 '매의 눈'으로 리허설을 지켜보고는, 녹화를 앞두고 긴장한 출연자들을 만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데뷔해 64년차 '현역 방송인'으로 지내는 송해의 모습은 '프로'의 그것이었다.

"송해를 복귀시켜라"... 전국노래자랑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장수 기획⑩-2] 변함없는 38년의 기둥 KBS <전국노래자랑> 현장에 가다

 
18.07.09 10:46최종업데이트18.07.09 12:23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방송인 송해ⓒ 이희훈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하!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 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 어딨어? 깎아 달라고 졸라대니 아이고 내 팔자!"

"수고했어. 이제 빨리 학교로 가!"

웃음이 와르르 터졌다. <전국노래자랑> 예심 첫 무대, 두 명의 중학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쑥스러운지 연신 꺄르르 대다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노래 '서울구경'을 부른다. 몇 마디 부르기도 전에 심사위원이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자 이들은 웃으면서 다급히 무대 아래로 내려간다.

<전국노래자랑> 1차 예심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20초에서 30초 사이, 무반주로 불러야 하는 1차 예심에서 참가자들은 노래를 잘 하면 30초 이상 노래를 부를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대체로 여지없이 "수고하셨습니다!"는 소리를 듣고 무대 아래로 내려간다.

'땡' 대신 '수고하셨습니다'로 불합격 통보

리허설을 보며 원고를 정리하던 송해는 출연자들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손발을 맞췄다.ⓒ 이희훈


지난달 14일, 인천 남구청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예심에는 약 400팀의 참가자가 무대에 올랐다. 이 중 방송에 참여하는 팀은 약 15팀. 약 27:1의 높은 경쟁률이다. 한 번은 예심에만 2300팀이 모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웬만큼 노래 좀 한다 싶은 사람도 어김없이 "수고하셨습니다" 행이다. 그냥 떨어뜨리기 아쉽거나 떨려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경우 즉석에서 심사위원이 다른 노래를 추천해주기도 한다.

"'불합격!'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니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일단 볼거리가 많고 눈에 띄어야 해요. 노래를 잘하지만 떨어지는 분들도 계시고 간혹 소주 잔뜩 들고 와서 '나 왜 떨어트렸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기분 나빠하지 말고 즐기세요."

5살부터 90살이 넘는 참가자까지 남녀노소 모두 온갖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나와 자신의 기량을 뽐낸다. 비록 1차 예심에서 떨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한 참가자에게는 관객들의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진다. 간혹 심사위원의 불합격 판정에 납득하지 못하는 관객들은 "아니 목소리도 좋고 잘 하는구만 (왜 떨어트려)" 하면서 탄식하기도 한다.

지난 14일 인천광역시 남구청에서 KBS <전국노래자랑> '인천 남구편' 예심 심사가 열렸다. 참가자들이 예심 시작에 앞서 번호표를 발급받고

있다. 이날 인천광역시 남구편 1차 예심에는 총 400팀의 참가자가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유지영

 

지난 14일 인천광역시 남구청에서 KBS <전국노래자랑> '인천 남구편' 예심 심사가 열렸다. 이날 인천광역시 남구편 1차 예심에는 총 400팀의

참가자가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유지영


웬만큼 노래를 잘 해서는 힘드니 다른 장기를 갖고 나와 승부를 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1차 예심에서는 장기나 사연을 뺀 채로 오로지 무반주 노래와 퍼포먼스로만 승부를 본다. 노래에는 영 자신이 없는지 하던 노래를 멈추고 심사위원들을 향해 "여기서 팔굽혀펴기하면 안 돼요?"라고 묻던 한 참가자는 "노래를 마저 하라"는 말에 성급히 '태세 전환'을 해 노래를 끝마쳤다.

1차 예심을 통과한 참가자는 어떨까? 예심에서 합격하면 '딩동댕' 실로폰 소리 대신 '2차 예심지'를 한 장 준다. 종이를 받자마자 기뻐서 다리를 동동 구르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참가자들을 두고 무대 아래서는 다시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미 다른 민요 대회에서 3번 이상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어느 90대 '실력파' 남성 참가자는 예심에 합격했다면서 환하게 웃어보인다.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얼마든지 <전국노래자랑>에 참여할 수 있다. 실제로 이날 현장에는 2차 예심을 위해 적어야 하는 인적 사항 및 노래 곡명을 적지 못해 현장 자원가의 도움을 받은 참가자도 있었다. 가히 '전국민의'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풍경이다. 예심은 총 2차까지 하루종일 치러진다.

변장하고 3번이나 예심에 참가하기도

1차 2차 예심을 치른 며칠 뒤, 근처 야외 무대에서 <전국노래자랑> 본선이 개최된다. 녹화가 시작되는 오후 1시가 되면, 준비된 의자가 동날 정도로 붐빈다. 관객들에게는 <전국노래자랑> 마크가 새겨진 종이 선캡과 응원용 풍선이 제공된다. 이런 풍경은 몇 십년 동안 이어져온 <전국노래자랑>만의 고유한 '트레이드 마크'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전국노래자랑> 팬들은 리허설 때부터 무대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진을 친다.  한글로 '전국노래자랑'이라고 수를 놓은 모자를 쓴 한 관객은 태극기를 펄럭이면서 리허설 때부터 격한 응원을 한다. 어떤 관객은 그간 <전국노래자랑>에 나왔던 초대가수들과 찍은 사진을 붙여둔 커다란 사진첩을 양 팔로 들고 무대 아래를 활보한다. 먼 곳에서부터 오로지 <전국노래자랑> 무대를 보기 위해서 모인 '골수' 관객들이다.

인천 남구에 산다는 이경임씨는 <전국노래자랑> 무대가 보이는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는 온가족을 데리고 <전국노래자랑> 본선 현장에 구경을 왔다. 이씨는 "내 나이가 <전국노래자랑> 볼 나이지 않나. 평소에 즐겨본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상헌씨는 "교회에 가지 않을 때는 <전국노래자랑>을 악착같이 보려고 한다"면서 "오늘 근처에서 녹화한다길래 송해 선생님 얼굴 보러 왔다. 91세인데 너무 정정하시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원조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호출되는 엠넷 < 슈퍼스타K >에 버금가는 끼와 재능을 가진 참가자들로 <전국노래자랑> 무대는 한층 풍성해진다. <전국노래자랑>은 1950년대 < KBS배 라디오 전국노래자랑 >을 거쳐 1980년 11월부터 TV를 통해 38년째 방송되고 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숨은 '노래' 고수들을 찾아내 이들의 노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전국노래자랑>. 2009년 처음 시작한 < 슈퍼스타K >에 비하면 이 프로그램은 오디션 프로그램계의 '원조의 원조의 원조'쯤 될 것이다.

실제 방송 출연만 3만여 명, 예심 심사에만 85만 명, 총 녹화 관객수 천만 명 이상을 자랑하는 이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은 여전히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위용을 자랑한다. 그만큼 세대별로 폭넓은 사랑을 받다 보니 출연자 경쟁도 치열하다.

지난 3월 KBS <전국노래자랑> '광주광역시 남구' 편에 최초로 외계인 백댄서가 나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송해는 방송에서 "누구나 다

<전국노래자랑>에 나오고 싶어한다. 진행을 하다 보니 외계인이랑 이야기할 기회도 온다"며 웃었다.ⓒ KBS


1991년에는 "안경을 쓰고 옷을 바꿔입는 등 나름대로 변장을 하고 하루에 세 번이나 예심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고 1993년엔 출연자가 키우는 흰사슴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등 이른바 <전국노래자랑> '진기록'도 있다. 지난 5월에는 3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국노래자랑> 최초로 '외계인'(분장을 한 출연자)이 무대에 올라 베테랑 진행자 송해의 눈길을 사로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매주 같은 방송처럼 보이지만 <전국노래자랑>의 역사는 해가 거듭할수록 새로 쓰이고 있다.

"송해를 복귀시켜라" 송해의 존재감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녹화 현장에 인천 미추홀구 주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이희훈


1988년 5월 진행자 송해가 처음 무대에 오른 이후로 30년이 넘게 이 프로그램은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 그대로다. 1994년 송해에서 다른 진행자로 한 번 교체가 되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시청자들의 "복귀시키라"는 강력한 항의 끝에 송해는 진행자 자리에서 내려온 지 반 년만에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 돌아왔고, 그 후로는 명실상부 <전국노래자랑>을 대표하는 MC로 자리잡게 된다. 현장에서 만난 대다수의 시민들은 "오늘 송해를 보러 왔다"고 답했을 정도다.

"사회자 송해씨가 무대에서 녹화 시작을 알린 직후 첫번째 출연자인 20대의 정윤미씨가 민속주인 머루주를 송씨에게 건네주며 "못 부르더라도 '땡'하지 말아달라"고 청탁, 노래를 불러 합격신호인 '띵똥땡' 소리를 듣고 퇴장했다." (1990년 <동아일보>)

"남녀노소가 똑같이 맨땅에 앉아서 공연을 즐기다 흥에 겨우면 아무때나 일어나 어깨를 들썩일 수 있는 '열린 마당'에서 진행하는 덕분이다. 더구나 한낮이므로 굳이 조명도 필요없다. 그런 무대에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또 올해 일흔을 맞는 원로 코미디언 송해씨가 횟수로 10년째 지키고 있는 격의 없는 무대에는 근엄한 표정의 기관장이나 유명 인사는 결코 어울리지 못한다. 물론 이 '유랑극단'이 가는 곳마다 '높은 분'들의 출연 요청이 쇄도하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프로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가수'들이기 때문이다." (1996년 <한겨레>)

몇십 년간 이어진 안정된 진행은 <전국노래자랑>을 어쩌다 한 번씩 돌아오는 지역(마을) 축제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또 변하지 않는 구성 덕분에 시청자들은 보다 출연자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나날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폐지되는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비해 간단하기 짝이 없는 <전국노래자랑>이 폐지되지 않고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비결이 무엇일까. 몇십 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쌓아둔 단단한 팬층, 10대부터 90대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통합, '악마의 편집'이 없는 예측 가능한 경쟁, 또 안정적인 진행이 결합한 것이 아닐까.

송해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자 시작된 밴드의 연주에 관중석은 곧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희훈


현존하는 한국 최장수 MC인 송해는 여느 때처럼 이른 아침 결선 현장에 나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진출한 참가자들을 격려한다. "예심에 통과하신 분들은 모두 다 1등"이라는 송해의 찬사 한 마디에 긴장한 채 있던 결선 참가자들은 모두 반색했다. 송해는 '사랑의 배터리'를 부르기로 한 참가자를 보면서 "오늘 초대 가수로 홍진영이 오니까 '사랑의 배터리'로 한 번 겨루어 봐"라면서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콩트를 준비한 참가자는 송해의 바로 앞에서 직접 리허설을 하고 조언을 얻기도 한다. 출연자들이 무대 위에서 아낌 없이 제 실력을 발휘하도록 긴장을 풀어주는 진행자 송해의 방식이다.

리허설이 모두 끝났다. 해가 높이 떴다. 녹화 시간으로 예정된 오후 1시가 되자 송해가 무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 외쳤다. "전구우우우우욱!" 그 다음은 시청자들이 모두 아는 그대로다.

논문으로도 나왔던 ‘전국노래자랑’ 그리고 송해

송해가 정의한 ‘전국노래자랑’은 ‘흥취’
다른 경연과 달리 ‘아마추어적’ 구성으로 사람에 주목

기자명금준경 기자
고인이 된 방송인 송해와 그가 진행해온 ‘전국노래자랑’은 미디어학계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다. 연구 인터뷰 과정에서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의 정체성에 관해 ‘흥취’라는 말을 강조했다. 논문은 ‘전국노래자랑’이 ‘지역성’은 물론 ‘민족’을 지향하고,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임종수 세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2011년 ‘일요일의 시보, ‘전국노래자랑’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임종수 교수는 문헌, 제작진 및 사회자 인터뷰, 심사 및 녹화현장 참여관찰 등을 통해 ‘전국노래자랑’의 의미를 짚었다. 

 

▲ '전국노래자랑' 홈페이지 갈무리
 

논문은 “무한경쟁 시대에 가장 먼저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이 프로그램이 오히려 가장 장수한 콘텐츠로 살아남는 것은 왜인가?”라며 ‘전국노래자랑’을 이웃과 노래하고 춤추며 때때로 해학 넘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아마추어적인 놀이축제를 통해 지역과 민족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장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 “노래나 춤이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이라고 했다.

 

송해가 정의한 ‘전국노래자랑’은 ‘흥취’

 

연구에는 송해의 생전 인터뷰가 등장한다. 논문은 “송해의 진술은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긴 세월 동안 전국노래자랑과 송해는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라며 “특히 송해의 엔터테인먼트 전략이 전국노래자랑의 진화, 미학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논문은 ‘전국노래자랑’이 당대의 생활인들의 ‘흥취’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흥취’는 연구 인터뷰 과정에서 송해가 여러차례 강조한 표현이다.

 

임종수 교수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송해 선생님이 정의하는 ‘전국노래자랑’은 무엇인지 물었을 때 ‘흥취’라고 답하셨다”며 “각각의 형식화되지 않은 노래와 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멋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춤의 형태로, 노래의 형태로, 촌극 형태로 나타내는 게 흥취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생님은 흥취를 끄집어내는 게 자기 역할이라고 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방송에서 업체명을 가리는 게 원칙이지만, 전국노래자랑은 참가자의 가게 이름, 회사 이름 등을 그대로 자막으로 썼다. 이 역시 흥취를 보여준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송해는 ‘흥’을 끌어내기 위한 역할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람풀’이라는 게 있어요. 시골에 가면 농토에 가만히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따라서 흔들리는 풀이 있다고. 이런 게 흥이야. 이제 그런 거를 내가 터득을 안 하면 못하죠. 흔들리는 것을 모른 다면 내가 답변을 못하니까. 그래서 나로서는 점점 어려워지는 게 내 진행입니다. 점점 어려워져요. 그걸 내가 느끼니까. 이제 급변하는 세대들이 풍기는 감성이라든가 또 얻고자 하는 것을 내가 파악 못하면 안 되잖아요.”

 

▲ '전국노래자랑' 갈무리
 

논문은 “‘전국노래자랑’ 고유의 콘텐츠 양식은 출연자와 지역의 고유한 특성부터 기인하는 독특한 스토리텔링 요소를 송해와의 주고받음 과정에서 구체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내가 사회를 능숙하게 본다, 이런 게 아니고 무대 나오는 사람의 흐름을 맞춰 주다보니까 나도 변했던 거야. 우스개 시장판에 가면 생선 파는 사람도 재밌다, 그러면 또 출연시키고, 이러다 보니까 연출 방향도 넓어지고, 출연자도 넓어지고, 지역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고.” - 송해

 

연구는 송해의 오프닝 멘트에도 주목했다. 지역 주민과 시청자를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 근로자, 원양어선 선원, 해외 자원봉사자, 국군장병 등을 호명한다. 논문은 “대상자들은 ‘전국노래자랑의 적극적인 시청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타지에서 외롭고 힘들게 보내는 자신들을 응원해달라는 부탁을 수용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연구에서 송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말했다. “내가 원양선원 이야길 많이 하죠? 괜히 하는 게 아니고 그 선장이 벌써 한 20년 (전) 그때 일부러 찾아왔었어요. (중략) 선원들을 대표해서 배 타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이 정말 어디 가 있는 사람들이 외롭단 말이야. 그런데 우리 얘기 한 번만 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걸 해줬더니 그 감사패 가지고 왔어요.”

 

‘딩동댕’ 아닌 ‘땡’이 핵심 콘텐츠인 이유

 

논문은 전국노래자랑이 말하는 전국은 지역성, 축제성, 민족성 등의 개념으로 진화해왔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만 해도 주로 지역성을 강조한 데 반해, 1990년대엔 해외동포 혹은 해외 근로자,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는 북한동포, 지금은 모두를 아우르는 한민족을 브랜드화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 11월 첫 방영 당시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부터 심사를 맡은 임종수 작곡가의 전언에 따르면 고 윤재경 PD는 ‘새로 부임한 이원홍 사장이 한국일보 동경 특파원으로 있을 때 ‘노도지마’를 참 감명 깊게 봤는데, 그런 걸 한번 만들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종수 작곡가는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오락프로가 시청자들에게도 좋았겠지만, 위쪽에서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겠어?”라고 덧붙였다.

 

▲ '전국노래자랑' 갈무리
 

초기에는 ‘대중동원’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이후 ‘대중참여’ 프로그램으로 바뀐다. 프로그램 설명만 보더라도 1980년대초엔 ‘국민화합’을 강조한 반면 1991년에는 ‘지역주민들의 흥겨운 잔치와 재미 추구’를 강조한다. 

 

‘전국노래자랑’은 일본의 유사 프로그램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겠지만 내용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논문은 “일본의 노래자랑은 실내공연을 원칙으로 하고 가끔씩 민속의상을 입고 지역의 유적지나 특산품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전국노래자랑처럼 무대에 직접 가져오거나 진행자, 연주자에게 먹이는 경우는 없다. 또한 출연자는 율동을 하지만 이에 맞춰 방청객이 춤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경연 프로그램으로 양식화된 일본과 달리 지역축제라는 오락성과 지역성을 강하게 띤, 이른바 지역의 난장 양식으로 정착했다”고 했다. 

 

전국노래자랑은 ‘아마추어리즘’ 측면에서도 다른 가요 프로그램과 차이가 있다. 논문은 아마추어리즘의 개념을 “스스로 아마추어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즐기고 느끼는 문화”라고 정의한다. 이는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반영하는 요소다. 

 

논문은 “노래 잘하는 사람을 무대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잘 노는 사람’을 무대에 세웠다. 그것은 ‘전국노래자랑’이 30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이라며 “송해나 임종수는 모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지역에서 한정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5년 혹은 길어도 10년이면 노래자랑의 자원은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성격은 편집과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양동일 PD는 ‘전국노래자랑’을 ‘컷 구상’을 하지 않는 유일한 음악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쇼프로그램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풀샷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노래를 부르는 사람 외에 송해의 몸짓, 악극단의 연주모습, 대기자 모습, 관객의 반응 등이 화면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참여자가 아마추어인 것만큼이나 미장센과 컷도 아마추어적”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양동일 PD는 잘 차려진 식당음식이 아니라 엄마가 준비한 가정음식과 같다고 빗댔다.

 

논문은 전국노래자랑의 통속적인 모습도 조명한다. “경연방식이지만 ‘땡’을 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며 “경연대회에서 탈락을 웃음의 요소로 승화시킨 것은 ‘전국노래자랑’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딩동댕’ 그 이상으로 ‘땡’은 ‘전국노래자랑’의 핵심 콘텐츠인 것이다. 따라서 ‘전국노래자랑’이 겨냥하는 것은 노래실력의 선후이기보다 통속적인 웃음과 해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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