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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독도이야기] 그해 여름, '독도 수호'의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딛다

by 무궁화9719 2022. 9. 16.

[독도이야기] 그해 여름, '독도 수호'의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딛다

2020. 6. 15.

입력 2020.05.03 10:52 | 수정 2020.05.10 12:26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1]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상)
광복 후 첫 대규모 조사…각계 전문가 등 80여명 참가
독도에 영토 표목 설치, ‘심흥택 보고서’ 발견 등 성과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1947년 8월 18일 오전 7시,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의 전신)가 조직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경상북도 포항항을 출발했다. 해안경비대 소속의 경비정 대전호에 탑승한 학술조사대는 대장을 맡은 조선산악회장 송석하(민속학자)를 비롯해서 국어학자 방종현, 고고학자 김원용, 한학자 임창순, 언론인 홍종인 등 사회과학반, ‘나비박사’로 유명한 곤충학자 석주명, 식물학자 이영로 등 동식물학반, 농림반·지질광물반·의학반·보도반·전기통신반 등 63명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남조선과도정부에서 파견한 국사관 관장 신석호,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 수산국 기술사 한기준 등 공무원 4명이 합류했다. 그리고 도중에 들른 대구와 포항에서 경상북도와 경찰 직원들이 추가돼 총 80여명으로 불어났다.

울릉도와 독도에 광복 후 처음으로 대규모 학술조사대가 파견된 것은 그해 4월 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이 일본 어선의 공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1947년 6월 20일 대구에서 발행되는 『대구시보(大邱時報)』에 ‘왜적일인(倭賊日人)의 얼빠진 수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 사실이 보도되고, 이어 7월 하순 중앙 일간지들도 관련 기사를 싣기 시작하면서 독도 문제는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독도 부근에서 일본 어선이 한국 어선을 공격한 사실을 보도한 '대구시보' 1947년 6월 20일자.

 

마침 일본에서도 독도 문제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국 일본에 대한 관리를 맡은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13개 국으로 구성)는 1947년 7월 11일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북해도·큐슈(九州)·시코쿠(四國)의 제도(諸島)와 금후 결정될 수 있는 주위의 제소도(諸小島)에 한정될 것”이라는 ‘대일(對日)기본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일본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이 1945년 9월 5일 ‘대일방침’을 통해 “일본의 주권은 혼슈·북해도·큐슈·시코쿠의 사대도(四大島)에 한(限)한다”고 밝혔던 것과 달랐다. ‘주위의 제소도’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싶었던 일본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당시 38도선 이남 지역의 행정책임자였던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한·일간의 갈등 요인인 독도 문제가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회의를 거쳐 독도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군정 아래서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조선산악회가 조사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일제시기에 활동하던 조선인 산악인들이 중심이 돼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15일 발족한 조선산악회는 단순한 등산 동호인 조직이 아니라 국토 조사와 탐험을 통해 되찾은 나라와 민족 사랑을 실천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창립 후 첫 과제로 일제가 유린한 국토를 탐사하는 ‘국토구명(究明)사업’을 시작해 한라산, 오대산, 소백산을 차례로 찾았다. 울릉도·독도 조사대 파견은 이들이 벌인 네 번째 국토구명사업이었다.

8월 18일 오후 6시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 학술조사대는 하루를 쉬며 강연회와 환담회 등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20일 새벽 다시 대전호를 타고 독도로 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독도 상륙 가능 여부는 날씨에 좌우된다. 바람이 세거나 파도가 일면 가까이 가기 어렵다. 더구나 당시는 접안시설도 없던 때라서 더욱 독도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날은 날씨가 맑고 바람이나 파도가 강하지 않았다. 천행이었다.

 

1947년 8월 18일 울릉도에 도착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한국산악회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독도 부근에 도착한 학술조사대는 동도와 서도 사이에 대전호를 멈춘 후 작은 배로 갈아타고 동도에 상륙했다. 동도의 서쪽 해변에 짐을 풀고 동식물 표본 채집, 목측 측량, 지형 파악, 사진 촬영 등 조사 활동을 벌인 뒤 다시 작은 배를 타고 서도로 향했다. 이들은 서도에서 바다사자 새끼 세 마리를 잡았다. 울릉도 주민들이 ‘가제’라고 부르는 바다사자는 독도 주변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학술조사대는 독도의 동도에 ‘朝鮮 鬱陵島 南面 獨島’ ‘鬱陵島 獨島 學術調査隊 紀念’이라고 쓴 두 개의 표목을 세웠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표시한 최초의 시설물이었다. 오후 3시 반 무렵 독도 조사 활동을 마친 일행은 다시 울릉도 도동항으로 돌아왔다.

조선산악회가 1947년 8월 독도에 처음 설치한 한국 영토 표목.

 

기본 과제인 독도 조사를 마친 학술조사대는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울릉도에서 성인봉 답사, 의료 진료, 특별강연회 등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남조선과도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은 훗날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학자인 국사관 관장 신석호가 울릉군청에서 발견한 ‘심흥택 보고서’와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의 울릉도 노인 홍재현의 독도 관련 증언 채록이었다.

‘심흥택 보고서’는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 때 울릉도 군수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정부에 보낸 보고서다. 앞서 언급한 『대구시보』 기사에는 “한말 당시 국정이 극도로 피폐한 틈을 타서 광무 10년 음력 3월 4일 일인(日人)들이 이 도서를 삼키려고 도근현(島根縣)으로부터 대표단이 울릉도에 교섭 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동도사(同島司)는 도(道)당국에 이 전말을 보고하는 동시 선처를 청탁해온 문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어 2월 22일 ‘죽도(竹島)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고시는 시마네현의 『현보(縣報)』와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에 조그맣게 게재됐을 뿐 중앙정부가 발행하는 『관보(官報)』에는 공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우리 정부가 이를 알지 못했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독도 침탈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의 관리 일행이 독도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했고, 관리 책임자가 시찰했다”고 통보했을 때였다. 이 사실을 들은 울도군수(鬱島郡守) 심흥택은 바로 다음날 직속 상사인 강원도관찰사에게 “‘본군(本郡) 소속 독도’를 일본이 영지(領地)로 편입했다고 한다”는 긴급 보고서를 올렸다. 『대구시보』 기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가 40년이 지난 그때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울릉군청을 찾은 신석호는 옛날 문서 더미 속에서 ‘심흥택 보고서’의 부본(副本)을 찾아냈다. 195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일간의 독도 분쟁에서 우리 쪽의 유력한 증거로 사용되는 ‘심흥택 보고서’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실린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 내용을 공개했다.

‘심흥택 보고서’는 한국 쪽 문서로는 ‘독도’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고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를 우리 영토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신석호가 확인한 이 보고서의 부본은 그후 언제인가 사라져 연구자들이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1978년 8월 서울대 규장각에서 독도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송병기 단국대 교수가 심흥택의 보고를 받은 강원도관찰사가 다시 의정부참정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를 발견했다. 그 안에 ‘심흥택 보고서’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심흥택 보고서’는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왔다.

1906년 3월 강원도관찰사가 의정부에 올린 독도 관련 보고서. 울도군수 심흥택이 일본의 독도 침탈을 보고한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다.

 

당시 85세이던 홍재현의 독도 관련 증언은 한국 외무부가 1955년 간행한 자료집 『독도문제개론』에 수록돼 있다. 홍재현은 오랫동안 공도(空島) 정책을 쓰던 울릉도에 다시 주민 이주가 재개된 1880년대 중반에 아버지를 따라 일가족이 강릉에서 건너왔다. 이주 당시 20대 초반이던 그는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이었다. 그의 증언 내용 가운데 독도와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것은 울릉도 개척 당시부터 도민(島民)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1903년부터 네다섯 차례 미역 채취나 바다사자(가제) 사냥을 위해 독도에 갔다 왔다.
▲ 독도는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볼 수 있고, 동해에서 표류하는 어선은 독도에 표착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울릉도민의 관심은 매우 크다.
▲ 광무 10년에 일본 관리 일행이 울릉도에 와서 독도를 일본 소유라고 무리하게 주장한 사실은 나도 안다. (…) 당시 이를 전해들은 도민이나 어업자들은 크게 분개했다.

홍재현의 증언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분쟁이 시작될 무렵 독도에 대한 울릉도 주민들의 인식을 보여주어 증언으로서 가치가 높았다.

울릉도에서 9박10일의 일정을 보내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큰 성과를 거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는 1947년 8월 26일 아침 도동항을 떠나 그날 밤 포항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포항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8월 28일 서울로 돌아왔다.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3/2020050300295.html

 

[독도이야기] ‘독도는 한국땅’ 큰 자취 남긴 지식인 3인방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20.05.10 11:05 | 수정 2020.05.10 12:30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2]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하)
언론인 홍종인, 사학자 신석호, 국어학자 방종현
독도 관한 국민 인식 높이고 학술연구 초석 놓아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독도이야기] [1] 그해 여름, ‘독도 수호’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다 바로가기(bit.ly/2WG6vLQ)

서울로 돌아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는 조사 결과를 알리는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1947년 9월 2일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홍종인·방종현·김원용·석주명 등이 발표를 맡았다. 그리고 11월 10일부터 18일까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전람회가 개최됐다. 울릉도·독도 사진, 동식물·광물 표본, 고고학·민속학 자료 등이 전시됐고 8만5000명이 관람했다. 서울에 이어 부산(11월 30일~12월 4일)과 대구(12월 6일~10일)에서도 전람회가 열렸다.

학술조사대에 참가한 인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언론인 홍종인, 역사학자 신석호, 국어학자 방종현 등 세 명의 지식인이 두드러졌다.

조선산악회 부회장이자 학술조사대 부대장 홍종인(1903~1998)은 한성일보에 1947년 9월 21일자부터 26일자까지 네 차례에 걸쳐 「울릉도 학술조사대 보고기」를 실었다. 조사대의 임무·편성·일정·사업·결론·보호시책 등을 담은 이 보고서는 “울릉도에서 동남향으로 해상 46해리에 있는 무인도로 그 귀속이 문제되리라고 전해지는 독도 행은 실행 전까지는 외부 발표를 시종 보류하고 있었으나 이는 우리가 당초부터 계획해온 기습적인 여정이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1953년 10월 '제3차 울릉도 독도 조사대'의 대장으로 독도에 화강암 표석을 설치한 뒤 살펴보는 홍종인 /한국산악회

 

홍종인은 석 달 전까지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맡았던 중진 언론인이었다. 당시도 조선일보에서 일하던 그가 다른 신문에 보고기를 실은 것은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파견이 남조선과도정부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창간된 한성일보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이 사장이어서 미군정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사대의 공식 보고서라고 할 홍종인의 글이 이 신문에 실린 것이었다.


홍종인은 보고기 외에도 독도에 관한 많은 글을 써서 국민의 인식을 높였다. 그는 이듬해인 1948년 6월 17일자 조선일보에 ‘동해의 내 국토/ 슬프다 유혈의 기록-답사 회고’라는 글을 실었다. 주일 미 공군기(機)가 독도를 연습 폭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직후였다. 독도 사진이 붙은 이 글은 “내 민족을 사랑한다는 정신은 국토를 사랑한다는 정신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며 “지금도 독도 동편 섬에서는 우리 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가 세운 뚜렷한 푯말이 서 있을 것”이라고 했다.

1948년 6월 조선일보에 실린 홍종인의 1년 전 독도 조사 회고 기사

 

홍종인은 여러 차례 더 독도를 찾았다. 1952년 9월 17일~28일 한국산악회가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을 때는 단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직책은 조선일보 주필이었다. 이번에도 정부 부처들이 총동원돼 후원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였다. 하지만 조사대가 독도 부근에 접근했을 때 미 공군기들이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산악회는 1953년 10월 11일~17일 세 번째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다. 이번에도 단장은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이었다. 조사대는 10월 13일 독도에 도착했지만 날씨가 급변하는 바람에 철수했다. 10월 15일 다시 독도를 찾은 조사대는 하루 밤을 야영하면서 일본이 세워놓은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는 표목을 뽑아내고 그 전 해에 만들었다가 설치하지 못한 화강암 표석을 세웠다. 표석은 앞면에 ‘독도 獨島 LIANCOURT’, 뒷면에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Alpine Association’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측량 작업을 벌였다. 독도의 동도(東島)는 높이 99.4m, 둘레 800m, 면적 5만㎡, 서도(西島)는 높이 174m, 둘레 1㎞, 면적 6만5000㎡였다.

홍종인은 이번에는 조선일보에 1953년 10월 22일자부터 27일자까지 네 차례 ‘독도에 다녀와서’라는 답사기를 연재했다. 그는 또 1956년 7월 고등학교 산악부 학생 197명을 이끌고 독도를 찾은 뒤 8월 22일~30일자 조선일보에 ‘항해 1000마일/ 학도해양훈련기’를 여덟 차례 연재했다. 10월 24일자 조선일보에는 학생해양훈련보고전이 열리는 것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라는 칼럼을 실었다.

국사관 관장인 역사학자 신석호(1904~1981)는 한 해 뒤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독도 문제를 처음 학술적으로 다룬 이 글의 머리말은 “필자는 작년 8월 16일부터 약 2주일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의 명령을 받고 독도를 실지(實地) 답사한 일이 있으므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었던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도의 지세(地勢)와 산물(産物)’ ‘독도의 명칭’ ‘삼봉도(三峰島)와 독도’ ‘울릉도 소속 문제와 독도’ ‘울릉도 개척과 독도’ ‘일본의 독도 강탈’ ‘일본 영유 이후의 독도’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독도를 역사적·자료적·연구사적으로 고찰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독도는 (조선시대) 성종 때의 삼봉도와 동일한 섬으로 15세기부터 우리나라의 영토가 됐다
▲ 숙종 때 일본은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승인했으니 그 속도(屬島)인 독도도 조선 영토로 승인한 것이다
▲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탈한 후에도 일본 정부 및 준(準)정부기관의 기록과 일본 학자들은 독도를 조선의 속도로 인정했다
▲ 현재 연합군사령부가 그은 맥아더 라인도 독도는 한국 어구(漁區)에 속해 있다

신석호가 1948년 12월 발표한 '독도 소속에 대하여' 논문에 첨부된 지도. 독도가 맥아더라인에서 한국 구역에 포함된 것을 표시했다.

 

신석호가 이 논문에서 고증하고 주장한 내용은 195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 측 논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2010년·돌베개)에서 “신석호의 글은 1947~1948년의 시점에 작성된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근거의 집대성이었으며, 독도 연구의 시원을 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외교부에 제공했다. 그는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에서 중요 의제로 떠오르자 『사상계』 1960년 8월호에 ‘독도의 내력’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조치에 대해 ‘강도행위가 아니면 사기행위’라고 질타했다.

또 하나 울릉도·독도 조사대원이 쓴 중요한 글은 서울대 교수였던 국어학자 방종현이 1947년 『경성대학 예과 신문』 제13호에 실은 「독도의 하루」이다. 그 전해 여름 독도를 찾은 날 쓴 일기였다. 일제시기 조선일보에 근무하며 국어학 관련 논설을 많이 발표했던 그는 당시 함께 일했던 홍종인과의 인연으로 조사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제의 독도! 궁금한 독도! 우리는 울릉도를 돌아보기 전에 먼저 독도부터 탐사하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독도 조사의 전 과정을 실감나게 그렸다.

국어학자 방종현. 독도라는 명칭이 한자어 '석도'와 관련 있는 사실을 밝혔다. /조선DB

 

학술적인 성격이 아닌 이 글이 훗날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독도’라는 이름이 한자어 ‘석도(石島)’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방언 전문가였던 방종현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는 ‘석(石)’을 ‘독’으로 발음한다며 독도라는 명칭이 ‘독섬’ ‘돌섬’ ‘석도(石島)’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에는 추정이었던 이런 해석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게 됐다. 1900년 10월 반포된 이 칙령은 울릉도의 관할구역을 ‘울릉전도(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로 규정했다. 독도가 석도(石島)로도 표기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송병기 단국대 교수는 칙령 제41호를 보지 못하고도 이런 추정을 한 방종현의 해석을 ‘탁견(卓見)’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방종현의 해석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된다. 울릉도에 주민 이주가 재개된1880년대 중반 이전 그 곳을 드나들던 사람의 많은 수는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17세기 말 이래 울릉도를 왕래하며 어업·채취 활동을 하던 그들은 돌이 많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독도’ ‘석도’로 표기됐다.

언론인·역사학자·국어학자로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독도 탐구와 인식 확산에 앞장선 지식인들이 1947년 8월 첫 독도 조사대에 포함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다음 회에 살펴보는 것처럼 이 무렵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키운 막강한 외교 역량을 투입해서 독도를 넘보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0/2020051000399.html

 

[독도이야기] 허위 선전물 만든 日 정부, 이를 퍼뜨린 美 외교관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20.05.17 11:07 | 수정 2020.05.17 14:43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3] 일본, 다시 독도를 노리다
일본 외무성 “울릉도·독도는 일본 영토” 팸플릿 제작
‘주일 미국대사’ 시볼드가 미국과 맥아더사령부 배포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독도이야기] [1] 그해 여름, ‘독도 수호’의 위대한첫걸음을 내딛다 바로가기 (bit.ly/2WG6vLQ)
[독도이야기] [2] ‘독도는 한국땅’ 큰 자취 남긴 지식인 3인방 바로가기 (bit.ly/2yWvx1w)

 

1951년 1월 도쿄의 한 리셉션장에서 자리를 함께 한 덜레스 미국대통령특사, 시볼드 주일미정치고문, 요시다 시게루 일본총리(왼쪽부터). 친일적이었던 시볼드는 독도 문제에서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다.

 

독도 부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국 어선을 일본 어선이 공격한 것이 한국에 알려져 독도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던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은 『일본 본토에 인접한 소도서(小島嶼)(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제4권(Part IV)』이라는 영문(英文) 팸플릿을 간행했다. 1946년 11월 제1권, 1947년 3월 제2·3권이 각각 간행된 이 팸플릿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연합국과 일본의 평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이 주변 섬들의 영토 귀속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연합국 측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밝힌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 제8항은 “일본국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큐슈(九州)·시코쿠(四國) 및 우리들이 정하는 작은 섬들(Minor Islands)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연합국에게 바로 그 ‘작은 섬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알리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의도는 지리적 인접성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지는 영문 팸플릿의 제목보다 함께 간행된 일본어 팸플릿의 제목 『일본의 부속소도(付屬小島)』에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팸플릿의 제1권은 소련과 영토 분쟁이 있는 쿠릴열도 남단의 ‘북방 영토’, 제2권은 오키나와 등 중국해의 섬들, 제3권은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諸島) 등 일본 남쪽의 섬들을 다루었고 제4권은 태평양과 동해의 섬들을 수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의 부속소도』 제4권에 울릉도와 독도가 들어있었다. 일본이 연합국에게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까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팸플릿에 함께 수록된 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동해는 ‘일본해(Japan Sea)’로 표기하고 울릉도는 ‘Utsuryo’, 독도는 ‘Take’라는 일본 이름을 붙였다.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만든 '일본의 부속소도' 제4권에 첨부된 지도.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했다.

 


팸플릿의 본문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울릉도) 일본은 1004년부터 울릉도를 우루마섬으로 불렀다. 한국 정부는 1400년 이래로 이 섬에 대해 공도(空島) 정책을 고집했다. 그 사이 일본인이 이 섬에 진출하여 일본 어업기지가 됐다. 17세기 초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 섬의 소유권을 둘러싼 협상이 벌어졌고, 1697년 일본 막부(幕府)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후에도 공도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일본인은 울릉도 개발을 주장하며 건너갔고, 한국 정부도 스스로 개발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했다.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으로 울릉도는 일본 땅이 됐다.


(독도) 일본은 고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904년 시마네현 오키섬 주민들이 울릉도를 기지로 활용해서 독도에서 바다사자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울릉도는 한국 명칭이 있지만 독도는 한국 이름이 없으며, 한국에서 만든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서술은 울릉도에 대해서는 사실과 허위를 교묘히 섞어서 전체적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인식되도록 만들었다. 독도에 대해서는 대부분 허위 기술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이런 엉터리 내용을 담은 팸플릿을 만든 것은 당시 일본이 울릉도는 물론 독도 부근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뒤집어보려는 안간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Supreme Commander for Allied Powers)를 통해 일본을 점령 통치했다.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이름을 따서 맥아더사령부로도 불린 SCAP은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SCAP Instruction)으로 구체적인 행정 지시를 내렸다. 1946년 1월 29일 발표된 SCAPIN 제677호는 SCAP이 관할하는 일본과 남한의 행정구역을 지정하면서 독도를 제주도·울릉도와 함께 한국에 포함시켰다. 이어 1946년 6월 22일 발표된 SCAPIN 제1033호는 일본 선박이 독도 12해리 이내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불린 이 해양선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공식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발표한 SCAPIN 제677호에 첨부된 지도.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한국의 행정 구역으로 명시했다.

 

 

SCAPIN 제677호에 첨부된 지도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 부분을 확대한 것.

 


이처럼 명백하게 한국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팸플릿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광복 직후 독도 문제에 정통한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에서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영토 문제를 전담했던 가와카미 겐조를 지목했다. 전후(戰後) 일본의 독도 연구와 대응에 핵심 인물이었던 그가 1906년 시마네현이 울릉도와 독도 조사 결과를 담아서 펴낸 『죽도(竹島) 및 울릉도』라는 책을 참조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1909~1995)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본부와 대동아성(省)에서 근무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체질이몸에 밴 그는 패전 후 외무성에 들어가 인접국들과의 영토 분쟁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다. 그는 훗날 소련공사를 역임했고, 퇴임 후에도 외무성 일을 도왔다.

해박한 역사·지리·국제법 지식을 토대로 ‘조약 문제의 권위자’로 활동한 가와카미는 독도 문제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1950년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분쟁이 발생하자 일본 측 성명 작성을 주도했다. 그가 1953년 8월 펴낸 『죽도의 영유』는 당시까지 일본이 축적한 독도 관련 사실과 논리를 일본 측 입장에서 종합 정리한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독도 문제에 관한 탐구를 계속해서 1966년 『죽도의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다시 펴냈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가와카미 겐조는 앞으로 독도 문제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 연재물의 곳곳에 등장할 것이다. 비록 적진(敵陣)의 이론가이고, 많은 부분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했지만 나름대로 자기 나라의 국익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그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외무성이 만든 팸플릿은 3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국 국무부에 20부가 발송됐다.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에도 10여부가 배포됐다. 일본의 영토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력 기관들에 일본 측의 입장을 담은 책자가 뿌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도쿄에 있던 미국 외교관 시볼드였다.

윌리엄 시볼드(William Sebald·1901~1980)는 미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군인과 변호사를 거쳐 1945년 12월 외교관으로 변신했으며 그때부터 1952년 4월까지 도쿄에서 근무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부인이 일본계 영국인이었으며 많은 일본인 유력인사를 친구로 두었던 그는 대표적인 지일(知日)·친일(親日) 미국인이었다. 하급 외교관으로 출발한 그는 맥아더의 신임을 바탕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중국통(通)이자 반일(反日)적 인물로 연합국최고사령부에서 매우 중요한 직책이던 주일(駐日)미정치고문과 SCAP 외교국장을 겸임하던 조지 앳치슨이 1947년 8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그 자리를 경력과 나이가 부족한 시볼드가 물려받은 것은 일본에게는 다행이었고 한국에는 불행이었다.

일본 외무성 간부들은 사실상 주일 미국대사 역할을 하던 시볼드를 수시로 방문해 일본이 만든 보고서를 전달했다. 그들은 한밤중에 은밀히 만나기도 했다. 시볼드는 일본 측 공식 문건을 본국에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다. 그는 1949년 11월 미국 국무부가 대일(對日)평화조약 제5차 초안에서 독도를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일본 영토에서 배제하자 “리앙쿠르암(다케시마)에 대한 재고를 건의함.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됨”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 문제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쟁점으로 부상했을 때도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독도는 일본 영토가 맞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아직 정부도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이념 대립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독도를 다시 노리는 일본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문제에 큰 영향력을 가진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 중심에는 친일적인 미국 고위 외교관이 버티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국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일 간의 한판 대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는 연합국과 일본의 평화회담이 열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7/20200517005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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