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6.
"엎드려"...미군에 잡혀 6일을 굶다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인제 GO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30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주
얼마쯤 가니 길가에 콩더미가 있었는데 누군가 불을 질러 콩이 타고 있었다. 나는 콩때기에서 탄 콩을 허겁지겁 주워 먹었다. 고소한 콩으로 실컷 요기를 한 후 다시 길을 걸었다. 한나절쯤 되어 양덕군 온천면에 도착했다. 이름처럼 온천과 별장이 있었다. 주변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 마을 입구 검문소도 치안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나는 고향에 간다고 했더니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천이요"라고 답했다.
치안대원이 나에게 "당신 부모는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모르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일주일 늦게 가나 빨리 가나 마찬가지 아니요? 물론 집에 빨리 가고 싶겠지만 우리 치안대에 사람이 많이 부족하니 우리를 도와주다 가는 것이 어떻소?" 라고 말했다. 그는 부탁조로 말했지만 사실상 협박으로 느껴졌다. 만일 내가 거절한다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무서워 협조하겠다고 했다.
치안대에 붙들려 허드렛일을 하다
처음에 한 일은 돼지를 잡는 일이었다. 큰 돼지를 잡아 온천으로 가서 물에 씻기고 털을 뽑았다. 온천은 노천 온천으로, 논 가운데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 나왔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온천물에 손을 담그니 추위가 씻은 듯 가셨다.
나는 조석으로 밥도 나르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치안대 뒷바라지를 하였다. 밤에는 뜨거운 온천물에 두 시간씩 몸을 담그며 몸을 풀었다. 그렇게 오륙일 동안 온천욕을 하였다. 그 덕분으로 맹산과 양덕읍에서 맞은 상처가 말끔히 나았다.
치안대에서 일한 지 일주일 만에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온천면을 떠나 다시 마전을 향해 길을 걸었다. 가는 길은 큰 바위와 산줄기가 이어져 아름다웠다. 고개 밑에 이르러 사람들을 만나자 산속 곳곳에 잠복한 인민군이 불시에 출몰한다는 말도 들렸다.
그날 밤은 불안한 마음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같이 일어나 산세가 험준한 마식령산맥을 넘어 임진강 상류를 향해 길을 걸었다. 아흔 아홉 구비를 돈다는 아호비령 고개는 이름 그대로 매우 험했다. 그 가파른 굽이굽이 길마다 교전으로 전복된 차량과 주검들이 산재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저녁에야 고개를 넘어 마전리에 도착했다. 마전에는 비행장이 있고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비행기로 원산 함흥 일대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실어 나른다고 했다.
나는 한 농가를 찾아 하룻밤 숙박을 부탁하였다. 여기서부터 우리 집까지는 근 백리 길 이었다. 내일이면 그리운 집에 도착할 생각을 하니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밖에는 세찬 비가 오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다음날 길을 나서며 생각하니 나는 전쟁이 난 후 모진 고생을 했지만 어디에 가더라도 밥과 잠자리를 흔쾌히 마련해주는 따뜻한 인정을 만났다. 모두 하늘이 보살핀 덕분이었다.
'이제 하루만 참자. 고향까지는 백리 길,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고향을 향한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나는 마전 비행장에 이르러 난생 처음 헬리콥터를 봤다. 잠자리 모양을 한 헬리콥터가 활주로도 없이 뜨고 내리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비행장에 이착륙하면서 이 산 저산 골짜기에 기총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비행장 위로는 커다란 수송기가 낙하산으로 떨어뜨리는 물자들이 내려 앉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도 곳곳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이천으로 가려고 하니 그 길은 인민군이 많다고 하여 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전에 계속 머물 수도 없고 평양 방면으로 갈 수도 없었다. 곰곰 생각한 끝에 원산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얼마쯤 가니 미군이 포대로 진을 치고 있었다. 미군 병사 한 명이 날 발견하고 나에게 총을 겨눴다. 그는 땅을 향해 손짓하며 "Down!" 하고 소리쳤다. 난생 처음 보는 미군이었고 말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손짓을 보니 엎드리라는 표시 같았다. 나는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잠시 후 미군 한명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엎드린 내 몸을 구석구석 수색하였다. 미군은 일어서라는 손짓을 하며 "Up!" 하고 외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군은 내게 "Hands Up!" 이라고 소리쳤다.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자 그는 양손을 머리 위에 얹는 흉내를 냈다. 나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눈앞에 두고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미군 4명이 내 뒤에서 총을 겨누고 날 연행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비행장으로 끌려갔다. 비행장에는 큰 창고가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어림잡아 수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붙잡혀 있었다.
▲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시신 | |
ⓒ NARA, 눈빛출판사 | 관련사진보기 |
"엎드려"...고향 바로 앞에서 미군포로가 되다니
끼니가 되어 배가 고파도 미군은 밥을 주지 않았다. 단지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드럼통 하나만 달랑 주었다. 처음 사흘은 배가 몹시 고팠으나 곡기를 끊고 물만 마시다보니 속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나는 엿새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들이 우리를 트럭에 태웠다. 휘장을 덮은 트럭 한 대마다 오십 명 남짓씩 올랐다. 포로를 실은 차는 스무 대 정도였고 우리를 호송하는 차는 앞뒤로 오십 대가 넘었다. 칠십 여대나 되는 트럭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원산을 향해 출발했다. 공중에서도 두 대의 비행기가 떠서 차량을 엄호했다.
태백산맥을 넘는 큰 고개에 가끔 인민군이 출몰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 병력으로는 산을 넘어 가지 못한다고 했다.
아침에 출발한 트럭이 고개 밑에 이르러서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무리 기다려도 차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비좁은 차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으려니 몸도 결리고 지루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멈춘 차량 행렬 주변에는 미군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차는 다시 출발했다. 차가 고개 마루에 올랐는데 방금 전투가 끝났는지 수많은 미군들이 길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미군들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를 실은 차량 행렬을 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총의 대검을 차량의 휘장 속으로 마구 찔렀다. 포로를 실은 차량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포로를 실은 차량 앞뒤에 타고 있던 미군들이 황급히 뛰어 내려와 대검을 휘두르는 동료들을 제지하였다. 덕분에 내가 탄 차량은 무사했다.
나중에 들으니 원산에서 평양을 향해 이동하던 미군 부대가 고갯길에서 예상치 못한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미군 지원부대가 원산에서 급파되어 다시 인민군과 미군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 때 죽은 미군의 복수를 우리에게 한 것이었다.
헬리콥터들이 부상당한 미군 병사와 사망한 미군들을 헬리콥터로 쉴 새 없이 실어 나르고 있었고 길가에는 기관총으로 중무장을 하고 사주경계를 하는 미군 차량들이 즐비하였다.
산마루에 올라가니 격추된 비행기 두 대의 잔해가 보였다. 한 대는 기체가 불에 타 형체가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다른 한 대는 겉보기에도 멀쩡한 동체가 참나무 숲에 거꾸로 쳐 박혀 있었다. 주변에서는 불도저가 동원되어 흙을 깎고 밀면서 간이 헬기장을 만들어 미군 부상병을 이송하고 있었다. 멀리 푸른 동해 바다도 훤히 보였다.
우리를 실은 트럭은 격전지를 무사히 지나 서행을 하다 오후 4시경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러나 고개 너머 산골짜기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는지 총소리, 포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어둠이 깊어지자 불꽃놀이를 하는 듯이 골짜기마다 예광탄이 수 없이 터졌다. 예광탄이 펑펑 터질 때 마다 산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밤이 되자 산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인민군의 공세로 다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전투지역을 통과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량 행렬은 밤 열 시경에야 겨우 무사히 원산에 도착했다. 미군은 우리를 원산형무소에 수감시켰는데 "Hurry! Hurry!" 라고 소리치며 방으로 등을 떠밀었다.
그날 밤 형무소의 좁은 방 하나에 서른 명이나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새웠다. 이 방은 북한정권이 우익 인사들을 정치범으로 수감했다가 후퇴할 때 몰살시켰던 방이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식사로 주먹밥이 배식되었다. 흰쌀에 콩을 약간 섞은 콩밥에 반찬으로는 고등어 한 토막씩을 주었다. 엿새를 굶었던 탓인지 밥맛이 꿀맛이었다.
낮이 되자 포로들에 대한 개별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관은 군복을 입었는데 생김새가 우리처럼 생겨 미군으로는 보이질 않았다. 그가 내게 일본말로 일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 그렇다고 답하니 일어로 질문하였다.
그는 "당신은 어디서 왔고 부대가 어디요?" 라고 물었다.
나는 "인민군 45사단 소속으로 영원서 탈출해서 왔소" 라고 대답했다.
그가 탈영할 때 부대의 규모와 도망 당시의 상황을 물어봐 나는 겪은 사실 그대로 설명을 했다. 나는 미군에 일본인이 근무하는 것이 이상하여 일본도 연합군으로 참전했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은 하와이에 사는 미국 국적의 일본인으로 미군이지, 일본군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내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일단 모두 부산으로 데려 간 후 사회가 안정이 되면 각기 고향으로 보내 준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조만간 집에 돌아갈 희망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산 포로수용소에 갇히다
11월 14일이 되었다, 우리는 원산 형무소에서 나와 다섯줄씩 서서 원산항을 향해 걸었다. 번화했던 시가지는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큰 도로에는 수많은 정찰기들이 내려 앉아 있었다. 항구에 도착하니 미군 함정들이 바다 여기저기에 엄청나게 많이 떠있었다. 수 백 척의 함정들과 수송선들이 항구를 꽉 메우고 먼 바다에도 수없이 많은 대형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우리는 부산행 상륙함 LSD를 타기 위해 원산항으로 갔다. 그곳 함상에서 난생 처음 흑인을 보았다. 나는 말로만 들었지 흑인이 그렇게 까말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저렇게 까만가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무섭게 보였다. 함정을 타면서 예전에 '명심도'라는 전도지에서 보았던 마귀의 소굴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LSD 한 척에는 무려 삼천 오백여 명의 포로가 승선했다. 배의 공기를 환기 시키느라 환풍기를 쉴 새 없이 돌려대는 바람에 사람들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선내는 몹시 춥기만 했다.
배가 출발하고 몇 시간이 지나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높은 파도가 치는 먼 바다에 나온 모양이었다. 배 멀미를 하여 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여기저기에서 악취가 풍겨났다.
배에 있는 동안에 식사로 증기로 찐 주먹밥 한 덩어리씩을 주었다. 남들은 멀미를 하여 밥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멀미를 전혀 안 했기 때문에 주는 밥을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원산서 출발한 배는 꼬박 이틀이 걸려 11월 16일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배에서 바로 내리지 못했다. 선상에서 하루 밤을 더 지낸 후 이튿날이 되어서야 배에서 하선하였다.
부산항 제 2부두에 도착해서 창문으로 내다보니 부산항 부두에는 많은 배가 정박하여 물자를 하역하느라 붐비고 있었다. 바로 옆 제 1부두에 관부연락선 흥안호가 정박해 있는 것도 보였다. 말로만 듣던 관부연락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는 '많은 한국 사람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수많은 곡절을 남긴 게 저 배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차에 실려 부산 수용소로 갔다. 입감 수속으로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카키색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앞과 뒤에 POW(Prisoners Of War)라고 적혀 있었다. 말 그대로 전범자가 된 것이다.
개인 사물로 밥사발, 나무젓가락 그리고 담요 한 장씩을 배급 받았다. 식사로 밥을 주는데 쌀알이 가늘고 길며 풀기가 전혀 없어 한 그릇을 다 먹어도 밥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이 베트남 쌀로 지은 알량미 밥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 날 서면 수용소로 갔다. 그때 군번이라며 내 번호를 알려주는데 63849라고 했다. 나는 그 때부터 포로수용소의 몸이 되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천막생활을 했다. 천막 하나에 80명씩 수용되어 매우 비좁았다. 잠은 맨 땅위에 가마니를 덮은 후 그 위에서 담요 한 장을 깔고 덮어 잤다. 겨울이라 날씨가 추웠지만 사람들이 부대끼는 온기로 견딜 만했다.
아침이 되면 천막 안에서 5열로 앉아 기상 점호를 받았다. 그 후 몇 백 명씩 짝을 지어 인근의 돌을 주워 마대에 담아 가지고 와서 수용소 영내 기반을 다지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일을 하는 동안 운동도 되고 부산 구경도 할 수가 있었다. 부산 서면 부산진 일대는 부산의 외곽으로 사방을 바라보니 산들이 큰 산은 아니나 제법 높았다. 산에는 나무가 없고 벌거숭이였다. 부산항에 가보니 절영도가 보였는데 산이 제법 높았다. 들에는 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부산 제3부두와 제 2부두로 가서 하역 작업도 하고 밖에서 풀을 나르는 작업도 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했다. 방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과를 보내던 어느 날 인천 쪽에서 포로들이 수용소에 새로 들어왔다. 나는 그들 가운데 뜻밖에 형 친구 윤준섭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민주당에 근무하면서 형과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고 시간이 늦으면 자고 가기도 했었다.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형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그도 잘 모른다고 대답하여 실망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형님은 서면 민주당에 근무하다가 국군이 들어 온 후 집으로 갔다고 했다. 당시 국군이 서면 일대를 장악한 후 서면과 인근 지역에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치안유지에 나섰다고 했다. 그래서 아마 형님도 치안대 활동을 하려고 집으로 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산골인 판교면에 들어갈 때는 국군으로 가장하고 태극기를 들고 면에 들어갔다고 했다. 판교 사람들은 멀리서 태극기를 보고 국군이 오는 줄 알고 치안대가 앞장서 인민군을 환영했다고 했다.
인민군은 치안대를 모두 붙잡아 면사무소에 가둔 후 집단 사살했다고 했다. 그래서 판교면 치안대 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기독교 신자로 노동당에 가입했다가 탈당을 하셨다. 형이 치안대로 활동했다면 아마도 형과 함께 반동으로 처형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에게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서면 치안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인민군에 밀려 연천까지 후퇴했다가 미군에게 잡혀 포로로 취급당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억울한 사정이 내 처지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우리 형님이 집에 돌아간 후의 소식은 전혀 들은 바가 없지만 아마 치안대 활동을 했다면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가족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부모님, 형님 내외. 누이동생 셋, 조카 생각에 그만, 참았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붉은 옷 안 입어"... 알몸이 된 남자 1만 2천명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 말
▲ 포로들의 급식을 만드는 거제수용소의 취사장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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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보급소에 가 일하면서 중공군이 일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네들이 일하는 모습에 놀랐다. 중공군은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사상 교육이 확고해선지 몰라도 농땡이를 피우거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꼬박꼬박하였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우리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과의 민족의 척도를 재는 데 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의 수준과 양심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며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단체 행동에 순응해가는 것이 대륙 민족의 기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둑질을 하고 농땡이를 부리면서도 도리어 '이것이 요령이며 이것을 못하는 것이 바보이므로 나는 너보다 낫다'라며 양심의 뉘우침이 없는 동포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미군들은 보급소 일을 중공군이나 자신들이 직접 했지, 한국 사람에겐 잘 안 시켰다.
새벽 동이 튼 뒤에도 주변은 깜깜했지만, 일어나서 천막 내부와 주위 청소를 했다. 분대별로 인원 파악을 한 후 식사시간이 되면 식판을 들고 밥을 타러 광장에 나가 다섯 줄로 길게 늘어섰다. 그리고 차례차례 밥을 타가지고 자기 천막에 와서 밥을 먹었다.
앞에 선 사람들은 "밥을 왜 조금씩 푸냐?"라고 하였고 또 남으면 "누구에게 주려고 하냐?"라며 욕을 했다. "밥을 많이 퍼! 많이!"라고 소리를 질러 밥을 조금이라도 많이 주면 "야! 아무개"라며 "밥을 잘 푸네, 잘 퍼"하고 칭찬하며 좋아했다.
맨 뒷줄에 선 사람들은 "밥을 조금씩 퍼줘라, 모자란다"며 야단이었다. 만약 밥을 퍼주다 모자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밥을 퍼주는 사람이나 줄을 섰다 밥이 모자라 먹지 못한 사람은 한 끼를 굶어야 했다. 배식하는 데만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수용소에 있을 때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철조망 밖에 있는 중공군에게 '당신들도 배가 고프냐'고 물었더니 그들도 항상 배가 고플 정도의 배식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어딜 가든 총을 들고 따라다닌 군인들
밥을 먹고 나면 일동 점호를 했다. 다들 나와서 오열 종대로 앉았다가 구령에 맞춰 운동도 하고 행진 연습도 했다. 그리고 영내나 밖에서 일이 있으면 동원되었다. 수용소에서 먼저 500명, 1000명을 요구하면 그 수만큼 세어서 미군에게 인도하였다. 포로 인계가 끝나면 모두 50명씩 나누어 걸어갔는데, 총을 든 군인이 두 사람씩 따라다녔다. 그들은 우리가 어딜 가든지 옆에서 거총을 한 채로 따라 다녔다.
우린 병원 건축하는 데 쓰이는 돌을 산에서 주워 마대에 담아 어깨에 메고 걸어서 돌아왔다. 이렇게 오전에 10번 정도하면 오전 일과가 끝났다. 점심 때가 되면 모두 모여서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을 쉰 뒤 다시 오후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 영내로 돌아오면 영내에서 다시 인원수를 센 뒤 인수인계하였다. 그 후 저녁밥을 먹었다.
밤이면 동료들끼리 모여 각자 자유 시간을 보냈다. 고향 얘기도 하고 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나 동료들이 죽은 이야기, 이북에서 살던 이야기 등등. 별별 이야기가 다 오갔다. 나는 황해도 사람과 평북 사람들과 매우 친해졌다. 철산과 선천, 정주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자유 시간이 지나 오후 10시가 되면 전부 고요히 꿈나라로 갔다.
어떤 날은 일이 없어 종일 영내에 있었는데, 그때는 앉아 노는 게 일이었다. 날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예수교를 전도하였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가서 성경 말씀도 듣고 찬송가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5월 하순이 됐고, 날은 몹시 더워졌다. 수용소 건설도 어느 정도 다 되어 갔고 부족했던 식수 공급 사정도 조금 나아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의정부 근방에서 시도했던 미군의 1, 2차 총공세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수만 명의 병력 손실만 보았다고 했다. 언젠가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 원수가 워싱턴 공항에 내릴 적에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는 벽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맥아더가 있었으면 아마도 철원까지도 너끈히 밀고 올라갔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루는 똥통을 둘러메고 제방 둑에 있는 똥 버리는 장소에 가게 되었다. 드럼통 반을 자른 똥통에 철사로 끈을 만들어 묶고 막대기를 끼워 짝과 함께 나란히 어깨에 멨다. 똥이 7부 정도 찼기 때문에 짝과 발을 잘 맞추어 걸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한눈을 팔고 걸으면 똥이 출렁 넘쳤다. 똥이 넘치면 땅에 쏟아지고 옷에도 묻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했다.
다른 사람과 짝을 맞춰 걸어가는 건 매우 힘들었다. 나는 땀을 흘리며 간신히 2km 떨어진 제방 둑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배가 똥을 싣고 있었다. 오전 9시께 출발했는데 수용소로 돌아오니 낮 12시가 다 되었다. 나는 그날 똥지게 일이 힘들어 아주 혼쭐이 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앞으로 될 수 있다면 똥통 메는 작업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미군이 나눠준 붉은색 옷 거부한 한국인들
▲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 |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 관련사진보기 |
그러던 중 휴전회담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유엔 소련 대표 말리크가 휴전 회담을 제의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전쟁이 어떻게 되나 하고 결과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며칠 있으니까 미국 측에서 협상을 원산항 미주리함상에서 하자고 제의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소련 측에서는 개성에서 회담하자 제의했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개성서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을 때마다 과연 앞으로 회담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기대를 하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하루는 76포로수용소 전원을 광장으로 모이라고 하더니 현재 입은 옷을 벗으라고 한 후 붉은 색 옷을 한 벌씩 주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주는 대로 빨간 옷을 입고 들어왔으나 나중에는 기분이 상했다. 어떤 사람이 먼저 "나는 이런 옷은 안 입어!"라고 소리 지르며 옷을 훌훌 벗어 마당에 내던졌다. 그러자 너도 나도 뒤질세라 붉은 색 옷을 다 벗어 던져 버렸다. 1만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모두 옷을 벗어 던지니까 천막 밖에는 붉은 색 옷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다음날 미군들이 붉은 색 옷을 모두 실어갔다. 수용소 안에서 우리 모두가 속옷도 없이 알몸이 되어 홀딱 벗고 지냈다. 처음에는 볼썽사납고 흉측하여 다소 서먹서먹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전부 벗고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져 어색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들 나체가 된 서로를 보고 웃으며 "아프리카 깜둥이가 따로 있나"라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러던 그날 오후였다. 모두 입을 옷을 줄줄이 찾았지만 아무 옷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반미 구호를 외치며 인민군 행진곡을 불렀다. '장백산 붉은 깃발' 등 온갖 군가가 쏟아져 나왔지만 철조망 밖에 있는 한국군 군인들은 개입을 못했고 단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들은 날마다 발가벗고 살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수용소 안에서 밥 먹고 노는 게 일이었다. 어떤 천막에서는 공산군 노래도 흘러나왔다. 중공군 포로들은 북한군 포로와 달리 발가벗지 않고 미군이 배급한 빨간 옷을 잘 입고 다니며 미군에 잘 순종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공군이나 인민군이나 같은 포로 처지인데 왜 우리는 빨간 옷을 입기 싫어하고 중공군은 왜 빨간 옷을 입고 좋아할까?'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빨간 옷을 거부한 이래 옷이라곤 전혀 입지 않았으므로 날이 좋으나 비가 오나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몸 생활을 했다. 우리는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다 심심하면 서로 불알 잡기를 했다. 서로 "요이 땅!" 하면 재빨리 상대방의 고추나 불알을 먼저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나는 동작이 느려 먼저 잡히기 일쑤였다.
수용소로 꽉 찬 거제도 수월리 넓은 벌판
나는 이천군 동면에 사는 '윤아무개'라는 사람과 무척 친해졌는데 그는 치안 사업을 하다 남으로 월남하는 도중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산내면 수월리에 사는 나보다 초등학교 1년 후배인 김아무개와도 자주 만나 이야기하며 놀았다. 그는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사람과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은 직접 겪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밤이면 철조망 밖에서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에도 이 나라에서 전쟁이 빨리 끝나고 통일이 되어 그리운 부모 형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힘을 모아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거제도는 여름 기후는 내륙 지방보다 덥지 않았다. 그 때는 1951년 7월이어서 논의 모내기도 마치고 보리농사도 이미 모두 끝냈다. 나는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길에 나는 풀, 나무, 산과 들에 있는 돌까지 고향 땅과 비교하곤 하였다.
거제도 수월리 넓은 벌판은 어느새 수용소로 꽉 찼다. 수용소 밖에 있는 냇가에서 인부들이 돌로 제방을 쌓고 있었다. 이는 수용소에서 나오는 오수를 처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싸는 오줌의 흐름에 놀랐다. 수용소에서 나오는 오줌이 큰 논도랑에 물 흘러가듯 꽉 차서 냇가로 흐르는 것을 보고 "사람의 오줌 양이 굉장하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북송을 거부하다
[전쟁포로 12] 포로 수용소의 좌우익 싸움과 포로 심사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포로들에게 빨간 옷을 입혔다가 거부 투쟁이 발생했던 그 날 이후부터 수용소 안에서는 좌익 우익이 나뉘어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수용소 안에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면 우익 수용소,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면 좌익수용소가 되었다. 내가 있던 76 포로수용소는 좌익이 가장 득세한 곳으로 유명했다.
수용소에서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죽였다. 이를 눈치 챈 우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좌익과 피할 수 없는 싸움이 계속돼 하룻밤에도 수십 명씩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제네바 포로협정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포로수용소 안으로 절대로 무기를 들고 들어오지 않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좌우익의 이전투구... 사람 죽어나간 포로 수용소
76 수용소에서 처음 예배를 볼 때 교인들이 천명 이상씩 모이던 것이 좌익이 주도권을 잡으며 차츰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오십여 명, 신교 신자는 백여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남은 신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CIE '유엔민간공보교육처'에서 발행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책을 가지고 하는 강의를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서구와 일본, 미국과 남미 등 여러 나라의 제도와 생활 등을 배웠는데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사상을 전환 시키려는 세뇌 공작이라고 반대하며 이 교육을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교육은 중도에 중지되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친공포로들이 국군 보초병과 말다툼을 하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보초가 총을 발사해 포로 몇 사람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소요가 확산되자 미군들이 장갑차를 몰고 와 포로들을 전부 천막 속으로 들여보내고 진압에 나섰다.
내 동료 한 사람은 변소 안에서 대변을 보다 총에 맞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피를 흘리는 그를 보고 "야 너 총 맞았어!" 했더니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는 정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숨졌다. 나는 몹시 애통했다. 그 후부터 수용소 안은 점점 소란해졌다.
나는 미국인 '보켈' 선교사의 말을 들으며 성경 공부도 했다. 그러는 동안 8월 하순경이 되었는데 드디어 새로운 옷이 나왔다. 우리는 다시 옷을 입었다. 의복이 다시 나오고 가을이 되자 인민군 복장을 하고 인민군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인민군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9월 중순이 되었다. 보켈 선교사가 급히 전하길 신자들은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담요를 들고 갔더니 천주교 신자 오십여 명과 기독교 신자 백여 명이 모두 모였다. 우리는 그날 전격적으로 좌익인 76 수용소에서 우익인 82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가게 되었다. 나는 82 수용소에서 신자소대로 들어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 공부를 했는데 김건호 목사님의 사도행전 강의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다시 '유엔민간공보교육처'에서 가르치는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나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민주주의란 다 옳은 말과 옳은 사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신자소대는 예수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여서 참 재미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예배를 보고 낮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엔 쉬며 자유 시간을 가졌다. 저녁에는 암거래 시장인 '사바사바' 시장으로 가곤 했는데 거기에는 서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 가서 주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는데 없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구두 밑창 쇠로 칼을 만들기도 하고 반지도 만들었으며, 심지어 수저도 만들었다. 옷이나 천도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뜨개질도 하였고 천막 끈으로 뜬 양말도 있었다. 나는 반지를 가지고 가서 양말로 바꿔 신기도 했다. 사바사바 시장의 물건들은 보면 볼수록 그 기술들이 놀랍기만 했다. 때때로 자유 담배가 지급되었지만 나는 담배를 안 피워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오징어로 바꿔 먹기도 했다.
가을이 되자 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데 때는 10월 하순경이 되었다. 나는 이북 우리 고향보다 '철이 매우 늦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고향에선 9월 하순이면 단풍이 들고 서리가 내려 9월 20일경이면 벼의 수확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수용소에 '리지웨이' 장군이 왔는데 나는 이 때 미군 장군을 처음 보았다. 여흥시간에 한국 아가씨와 사귀던 미군들이 아리랑을 마치 한국 사람이 부르는 것처럼 잘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우리 82 수용소와 81, 83, 74 수용소는 우익수용소였지만 76 수용소와 78, 77 수용소는 좌익 세력권 안에 있어서 매일 좌우익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82 수용소에서는 좌익운동을 하면 그들을 색출해서 따로 가두고 감시를 하다 좌익 수용소에 넘겨주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왔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모두 성탄 준비를 했다. 성탄절에는 밥을 곱이나 먹을 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우리는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인사를 한 후 성탄예배를 드렸고 낮에도 대예배를 보았다.
벽보판에는 신문이 붙어 있는데 철원 평강 김화에서 전투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사상자의 수가 매일 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나는 전투소식을 보며 '언제 전쟁이 끝나 통일이 되어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고향을 그리워했다.
거제도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겨울이 되자 따뜻한 옷이 배급되어 우리들은 좋은 겨울옷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동료들과 '거제도는 겨울에 눈이 오나 안 오나?' 하는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거제도엔 눈이 안 온다'라고 했고 나도 '눈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2월초가 되자 거제도엔 눈이 많이 왔다. 우리는 그때서야 '한반도엔 어디나 눈이 오는구나'하고 신기한 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송반대 시위... "저는 이남에 남겠습니다"
3월 1일이 다가오자 우리는 '기미년 3월 1일 정오'라는 삼일절 노래를 배웠다. 남한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운 노래다. 그리고 '전우가'를 비롯해서 많은 군가도 배우게 됐다. 3월 1일에는 처음으로 영내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판문점에서 정전회담 때 포로교환 문제가 큰 의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포로 가운데에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고 북송반대 시위를 크게 벌였다. 그날 나는 지붕 위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사다리를 딛고 내려오다 사다리가 넘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때 가슴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정신은 멀쩡하였지만 심장이 잠시 멎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위생병이 나를 흔들며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들이 또렷이 보이고 하는 말도 들을 수는 있었으나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몇 분이 지난 후 하늘이 노래지고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 때 위생병이 내 가슴을 두들겨주고 막 문지르니 심장이 움직이고 조금 후 내 호흡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 |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 관련사진보기 |
3월 25일경 거제도 포로수용소중 제일 먼저 우리 82 수용소에서 북으로 송환을 원하는 사람과 송환을 반대하는 사람을 구별하는 개인별 심사가 열렸다.
포로 전원이 자기의 소지품을 갖고 심사 장소로 갔는데 천막이 대여섯 개 쳐 있는 곳으로 가서 오륙 명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 차례가 되면 한 사람씩 천막 안으로 들어가 헌병이 한 사람씩 심사대로 보냈다. 책상에 앉은 심사원은 "고향으로 가길 원하십니까? 이남에 남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북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카드에 'G'라고 써줘서 내보내고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카드를 주며 나가라고 하였다. 심사원은 "되도록 고향으로 가서 부모형제를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가야 되지 않겠냐는 말을 하였다. 나는 이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했다. "왜 남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어 "공산주의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이남에 남겠습니다" 했더니 그냥 나가라고 하였다.
천막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오면 거기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북으로, 하나는 남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나오자마자 헌병에게 빈 카드를 보여주었더니 남으로 가는 길로 가라고 하였다. 나는 자유를 택했다. 나의 운명을 결정한 길이었다.
심사를 마친 사람들이 심사를 아직 안한 사람과 섞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를 이중 철조망 안으로 분리 수용하였다.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결정한 친구들을 보며 "야! 잘 가거라"하고 손을 들어 인사도 하고 서로 이별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줄을 세워 놓았다가 즉시즉시 트럭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보였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묘한 일이 벌어졌다. 고향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소리쳐 욕을 하였다.
"미제의 앞잡이들아! 양키새끼들아! 고향으로 가면 네 부모 형제들을 그냥 둘 것 같으냐? 반동 놈들아! 너희 부모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두고 봐라. 인민을 배반한 놈들아!"
이 말을 들은 반공포로들은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며 '저 놈들이 고향으로 가 우리 부모 형제들을 처단하면 어쩌나?'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눈에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는 북으로 가는 사람들이 탄 차가 지나가면 돌을 들어 마구 던지고 때리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송환되는 포로들이 원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이북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이북으로 가기를 거절한 것은 이남이 이북보다 살기 좋아서도 아니고 남한이 북한보다 더 잘 살아서도 아니었다. 인간에게 주는 자유, 이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남을 택한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형수, 여동생들을 언제 만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생이별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나는 마음속으로 '부모님을 배반한 게 결코 아닙니다. 북한의 동포를 배반한 게 아닙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배반했습니다. 부모님 용서하세요'하고 되뇌이며 몇 번이나 울었다. 83 수용소에 형님과 한 동창생인 '김 아무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큰 소리로 "거기 이천군 사람들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이천군 유대포리 사람들이 많이 있다"라는 대답이 왔다.
82 수용소 안에서 고향 친구 '박 아무개'와 석정동에 사는 '김 아무개'를 만났다. 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하자고 굳게 결의했던 고향 용포리에 사는 '김 아무개'는 결국 북을 선택했다고 했다. 남에 남는다고 하더니 끝내 북으로 간 것이었다. 북으로 간 친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이 그리워서 북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남에 남기로 한 것이 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북으로 송환되더라도 "포로가 되어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하고 위로하며 우릴 가족의 품으로 절대 돌려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피 한 방울 남지 않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인민군 군인선서를 했는데 거기에 보면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우지 않을 때는 인민의 심판을 달게 받겠다는 선서를 했기 때문에 인민군을 이탈하여 귀순한 나를 그냥 놔 둘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돌아가지 않으면 그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재판에 회부되면 어떤 심판이 닥칠 것이 분명하였고 우리 가족에게도 결국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 틀림없었다.
내 몸은 예전에 맞은 상처가 깨끗이 낫지 않아 계속 좋지 않았다. 우리 수용소에 대한 포로 송환심사가 끝나자 81 수용소의 심사가 시작되었다. 또 다시 동료들이 갈라지고 북으로 가는 동료들이 탄 차들은 돌팔매를 맞았다.
81 다음은 83 수용소였다. 등에 '반공'이란 큰 글자를 쓴 옷을 입은 사람들은 글자 표시와는 다르게 북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다리를 절룩거리며 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문에 의하면 수용소 내에서 동료들끼리 사전에 집으로 갈 생각이냐 물어보고 집이 그리워 고향으로 간다고 대답하면 그를 끌어다가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북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그냥 가도록 놔두지, 왜 매를 때리나, 어차피 북으로 가려고 결심한 사람이 가지 못해 남한에 남게 되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남은 우리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텐데…'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신사답게 보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로 때리고 욕설을 해서 보내면 북한에 남은 우리들의 가족들에게도 그만한 보복이 돌아올지 몰라 걱정도 되고 마음이 아파왔다.
거제도에 봄이 돌아왔다. 들에는 또 다시 꽃들이 피고 산천이 푸르러졌다. 우리는 날마다 수용소 안에서 놀며 세월을 보냈다. 나는 그때에 성경책을 읽고 성경공부, 영어공부, 기타 공부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수용소 안은 매우 조용하고 친근함이 넘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를 광주로 옮긴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우리보다 81 수용소가 먼저 육지로 이동했다. 우리 82 수용소는 5월 10일경 고현리로 와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 날 배로 떠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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