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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끝나지 않은 전쟁' '38선'은 한국전쟁의 도화선이었다

by 무궁화9719 2022. 9. 14.

'끝나지 않은 전쟁' '38선'은 한국전쟁의 도화선이었다

 

2017. 6. 20.

'시루떡 분할' 38선, 미국·소련이 서로 놀란 이유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③] '38선'은 한국전쟁의 도화선이었다

 
17.06.20 05:10l최종 업데이트 17.06.20 10:29l
글·사진: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38선ⓒ NARA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 인민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했다. 이 전쟁은 3년 남짓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1953년 7월 27일, 그 총성이 멎었다. 그런데 그때 북한, 미국, 중국의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내는 강화(講和)나 평화 협정이 아닌, 잠시 전투를 쉰다는 미봉책의 협정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The Unended War)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자유·공산 두 진영 간 대립 충돌한 국제전이었다. 자유진영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미국 등 16개국이, 공산진영은 북한, 중국이 참전했다. 이 전쟁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날 '6·25사변' '6·25동란'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이즈음에 와서는 외국 문헌에 나오는 'Korean War'를 직역한 '한국전쟁' 또는 '6·25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또는 '조선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또는 그들이 미국에 대항해 조선인민군을 도왔다는 뜻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 이웃 일본은 '조선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전쟁은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도 부른다.

한반도 휴전선에서는 아직도 남과 북 병사들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 정전협정 이후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금세기에 와서도 연평도해전과 같은 돌출사건도 일어났다. 또한 이즈음도 북핵문제나 사드 문제로 남북뿐 아니라 이웃 중국, 일본까지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화약고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은 자유, 공산 양측 150만여 명의 전사자와 350만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군 미조리 함상에서 시게미스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이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시게미스 마모루는 1932년 주중대사로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의거 때 폭탄 파편에 중상을 당한 인물이다. ⓒ NARA

 

내가 이 글을 쓰는 근본 취지는 지난날 한국전쟁의 참상을 사실 그대로 보여드리고,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먼저 한국전쟁의 원인(原因)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다. 50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에 어찌 그 원인(原因)이 없겠는가. 그래서 이번 3회 기사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遠因)을 살펴 보고자 한다.

 

 
1949. 9. 8. 미군이 상륙하자 시민들이 연도에서 환영하고 있다. ⓒ NARA
 

임자 없는 포도밭

조선(朝鮮)은 예로부터 '고요한 아침, 은자의 나라'였다. 건국 이래 중국을 큰 나라로 받들며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심취한 채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지구 반대편 서구 여러 나라들은 시민혁명으로 왕조국가에서 공화제 국가를 세우고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그들 서구 열강들은 자원 확보와 상품 수출시장을 마련하고자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나섰다. 그 대상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약소국이었다. 이런 가운데 18세기 말부터 한반도 연해에는 그제까지 볼 수 없었던 낯선 모양의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의 군함이거나 무장 상선들이었다.

이 이양선 출현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먹구름으로, 조선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위기로 내몰렸다. 곧 조선은 그들의 눈에는 한낱 먹잇감으로 '임자 없는 포도밭'이었다.

하지만 이웃 일본은 세계 조류를 재빨리 체득하고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로 지향함)로 서구의 문물을 미친 듯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본은 단시일 내 부국강병을 이룬 뒤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일본이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는 배은망덕하게도 지난날 자기들에게 문물을 전해준 이웃 조선이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대륙정벌의 발판으로 한반도를 자기네 손아귀에 넣으려는 '정한론'(征韓論)을 품고 있었다.

 
1945. 9. 9. 서울 시민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미군이 도심으로 입성하고 있다. ⓒ NARA
 

한편 조선과 국경이 맞닿은 러시아 역시 마땅한 부동항이 없었기에 오래 전부터 남진정책으로 한반도를 자기네 판도에 넣으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과 러시아의 이런 음흉한 야욕과 오래 전부터 조선과 주종관계였던 중국 간의 충돌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피할 수 없는 형국에 이르렀다.

게다가 아시아 대륙에 새로운 먹잇감에 찾고자 군침을 흘리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 열강들도 대륙진출의 긴요한 교두보 조선에 마구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국제 정세를 전혀 읽지 못한 채 수백 년간 쌓인 적폐로 조정이나 사대부들은 계속 백성 수탈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 곳곳에서는 민란이 일어나는 등, 민심의 이반으로 조선은 나약한 국가가 됐다.

18세기말 한반도는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운이 감돌더니 마침내 1894년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먼저 중국과 일본 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가뿐하게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우위권과 랴오둥반도 등을 차지했다. 그러자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3국은 보고만 있지 않고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이에 화가 난 일본은 1904년 삼국 간섭의 주동국인 러시아와 건곤일척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애초 열강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미국과 영국의 조력도 컸다.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를 통째로 꿀꺽 삼키는 것을 멀거니 그저 구경하면서 절치부심하기만 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중앙 홀에서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NARA
 

38선 분할

일본은 조선을 꿀컥 삼키고도 그들의 야욕이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탐욕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이듬해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의 탐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듯이 중국대륙을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슬그머니 중국을 지원하자 일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힘에는 버겁지만 겁도 없이 그들에게도 도전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함대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과 동시에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의 판을 크게 키웠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은 파죽지세로 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버마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확대해 갔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로는 그 전세가 반전됐다. 미국은 그곳에 비행기지를 마련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한편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전대미문의 가공할 이 원자탄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8월 9일에 나가사키(長崎)에 떨어뜨리자 두 도시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게다가 그해 8월 8일 소련의 참전으로 만주 관동군조차 허물어지자 최후의 항전까지 불사하던 일본은 다급하게 미국에게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뜻을 밝혔다.

 
1945. 9. 9.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 ⓒ NARA
 

그때부터 미국은 다급했다. 그 무렵 미군은 한반도에서 1000km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군은 곧 한반도를 통째로 점령할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은 어쩌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묘안을 짜기에 급급했다.

미 국무성·전쟁성·해군성 등 전쟁관련 3성조정위원회는 1945년 8월 10일 밤 일본의 항복조건이 담긴 '일반명령제1호' 초안 작성 임무를 러스크와 본스틸 두 대령에게 맡겼다. 그러자 이들은 30분 만에 한반도 지도를 보고 북위 38선을 미소 양국 분할 선으로 그은 보고서를 입안했다.

이 보고서가 합참과 3성조정위원회, 국무장관, 전쟁성장관, 해군장관을 거쳐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마침내 한반도를 분할하는 이 보고서는 미국의 '일반명령제1호'로 확정돼 8월 14일 소련 측에 전달됐다.

미국은 소련이 38선 분할점령 안을 수락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우려했지만, 이외로 다음날 소련은 이를 수락한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그래서 한반도 허리를 자르는, 이 겨레에게는 두고두고 비극의 단초가 됐던 원한의 '38선'이 생겨난 것이다.

이 분할에 대해 애초 미소 양국은 모두 놀랐다는 후문이다. 미국은 소련이 쉽게 수락한 데 놀랐고, 소련은 미국이 그은 분할선이 후하게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튼 '38선'은 우리 백성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어진 마른하늘의 벼락과 같은 단장의 선이었다.

 

 
1945. 9. 9. 미군들이 경례를 하는 가운데 조선총독부 광장에 미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 NARA
 

이 '38선'은 미소 두 나라가 일본이 게워내놓은 한반도라는 전리품을 시루떡처럼 절반씩 사이좋게 나눠가진 '황금 분할선'이었다. 하지만 두 세력 간 한반도에서 충돌은 그때부터 잠복돼 있었다. 일본과 대항할 때는 미소가 동지 관계였지만 그 싸움이 끝나자 그때부터 두 나라는 점차 적대관계로 변해 갔다. 국제간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는 정글의 세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자 자기네 몫에 불만이 생겨났다.

이로 미뤄볼 때 한국전쟁의 원인은 38선에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나약했던, 무능 무지했던 우리에게 있었다. 장님이 개천 나무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이번 회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원인이 된 해방 후 북위 38도선 분단과 미군 주둔 장면, 그 무렵 북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일부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사진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 수집한 것이다.)

 
일제의 패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귀환되는 귀국선 갑판에서 미군들에게 소지품 검색을 당하고 있다.ⓒ NARA
 
 
1946. 1. 16.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이 연설하고 있다(왼쪽에 앉은 이는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이다).ⓒ NARA
 
 
날짜 미상. 북한 군중대회(왼쪽부터 김두봉, 김일성, 구모조 중국대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 ⓒ NARA
 

[이전 기사] "골로 간다"의 어원,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다

[리워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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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진행될 '박도 기자와의 차 한잔' 초대권과 강원도 횡성군에서 열릴 '작가와의 대화' 초대장도 리워드로 마련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독자분들께서는 기자에게 쪽지로 성함과 우편물을 받을 주소,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워드 발송 기준은 스토리펀딩 기준과 동일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박도

 

한국전쟁, 한반도의 엄마는 이렇게 살았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⑤] 전쟁과 삶

 
17.06.27 10:13l최종 업데이트 17.06.27 10:13l

    

1951. 9. 20. 수풀 속에 숨어있던 한 인민군 병사가 총구 앞에서 짐승처럼 기어 나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NARA
 

백암 박은식 선생의 유훈

내가 2004년, 2005년, 그리고 2007년 세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를 방문해 1800여 점의 한국전쟁 사진 자료를 입수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재미동포 박유종 선생 덕분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 영어로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할 줄 모른다. 그런데도 그분이 곁에서 온갖 것을 다 불편 없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다.

 
박은식 선생ⓒ 자료사진
 

그분은 상해 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의 막내손자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달랐다.

그분 할아버지 백암 박은식 선생은 대역사학자로 <한국통사> <한국독립지혈사> 등의 저서를 남긴 독립운동가다.

백암 선생은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우리 겨레가 우리말과 우리 역사만을 지니면 언제든 나라는 다시 세울 수 있다고, 국어와 국사 교육을 매우 강조하셨던 분이다.

그런 탓인지 "Time is money"(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매우 바쁜 미국 사회에서 70여 일 줄곧 나를 도와준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유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분도 때때로 그런 말씀을 했다.

"박 선생은 국어 교사로, 역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가 매우 좋아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돕는 겁니다."

 

NARA 서고의 문서 상자들. 세계 현대사의 보물창고다. 2004. 2. 5. 그곳 아키비스트 리차드 보이런의 안내로 서고 내부를 견학할 수 있었다.

왼쪽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했던 고 권중희 선생, 오른쪽 필자.ⓒ 박도

 

아무튼 내가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NARA에 드나들었던 기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날마다 가장 먼저 출근했고, 가장 나중에 퇴근했다. 우리는 NARA 서고 자료 상자를 대출받아 초등학교 시절 소풍지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 자료들을 샅샅이 살폈다.

특히 2004년 2월 12일에는 한국전쟁 관련 상자번호 RG(Record Group) 186, 192, 195, 201 등 네 박스를 개봉했는데, 거기 갈무리된 사진들에는 그 시절 고단한 삶들이 속속들이 드러나 있었다.

 

 
1951. 10. 21. 평양. 총구 앞에서 목숨은 구차하다. 학생은 태극기를 그려 들고, 인민군은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NARA

 

전란 속에서 고단한 삶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이 가장 큰 수난을 당하는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가족이나 후방 사람들도 전투 군인들 못지않게 고생하기 마련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게 군인 우선으로 전시 군인들은 그래도 특권을 누린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전공을 세우면 훈장과 포상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면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설령 전사를 하더라도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등, 국가로부터 전몰장병으로 상당한 예우를 받는다.

하지만 자식을 남편을 군에 보낸 부모나 아내는 늘 불안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행여 전세가 뒤집히면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적 치하 죄인처럼 살아가기 마련이다. 또 그들은 전란을 피하려면 피란봇짐을 지고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식구들의 양식을 위해 피란민으로 갖은 수모를 겪으며, 고된 수고를 해야 한다.

 
 
1954. 3. 3. 미군부대 근처 천막에서 한국의 여인들이 미군의 세탁물을 빨래하고 있다. ⓒ NARA

 

한국전쟁 당시 피란지에서 심지어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과 양식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 치마를 걷어올린 여성들도 없지 않았다. 전선에서 남편이 유골상자로 돌아오면 아내는 그때부터 가장으로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육까지 모두 떠안게 마련이다. 

영국의 극작가 T 모어는 한 작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랜 전쟁 중 쌍방이 모두 피곤하여 이윽고 평화가 왔다. 그런데 국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금, 남편을 잃은 부인, 의족(義足), 그리고 빚 등이다."

또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조금만 덜 돌았더라면 전쟁으로부터 생기는 비극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전쟁은 가장 미친 짓이 아닐까? 더욱이 동족끼리 강대국의 사주로 전쟁놀이를 한다는 것은. 나의 고교시절 한 교사는 수업시간 눈밖에 벗어난 두 학생을 앞으로 불러낸 뒤 서로 뺨을 때리게 했다. 처음 두 학생은 마지못해 슬쩍 슬쩍 상대의 뺨을 쳤다. 그러자 그 교사는 시범으로 한 학생의  뺨을 세게 치고는 그렇게 하도록 사주했다.

그때부터 두 학생은 결사적으로 서로 상대를 팼다. 마침내 두 학생은 코피를 흘리는 등, 기진맥진 쓰러졌다. 지난날 한국전쟁은 그런 게 아니었는지….

남북의 지도자들은 지금 내가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으면 좋겠다. 그게 겨레를 살리는 길이고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이런 일을 앞장 서서 하는 게 후세 역사에 남을 진정한 겨레의 지도자일 것이다.

 
 
1951. 6. 18. 강원도 양구. 북한군에 협조한 혐의가 짙은 한국 여인들이 군 수사기관으로 연행되고 있다.ⓒ NARA

 

분단의 장막을 걷자

2017년 6월 25일 아침, 강원도에 사는 한 훈장은 다음의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

"우리 서로 손잡고 잘 살아보자. 왜 그게 안 되나. 누가 우리를 방해한다는 말인가?"

다음은 1948. 4. 19. 남북연석회의에 앞서 남북동포에게 남긴 백범 선생의 성명서 일구다.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분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1948. 4. 19. 남북연석회의 차 평양으로 가는 길에 38선 표지 앞에선 백범(가운데, 왼쪽 선우진 비서, 오른쪽 아들 신)ⓒ 백범기념관


70년이 지난 지금도 어디 한 자 틀림이 있는가. 분단 100년이 다가오기 전에 평화적으로 분단의 장막을 걷어야 할 것이다. 그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가장 시급한 책무다.

이번 회에서는 한국전쟁 전란 속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들로 골라 보았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NARA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자 포토샵을 하지 않은 스캔 원본 그대로입니다.)

 

 
1950. 11. 16. 서울. 한 할머니가 폐허의 잿더미에서 땔감으로 석탄을 골라내고 있다. ⓒ NARA
 
 
1950. 9. 27. 경인가도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유엔군의 서울 수복 대열을 환영하고 있다. ⓒ NARA
 
 
1953. 한 아낙네가 아이를 업은 체 땔감을 머리에 이고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 NARA
 
 
1951. 2. 4. 경찰이 지게에 군수물자를 지고 나르는 노무자들을 통제하고 있다. ⓒ NARA
 
 
1951. 11. 15. 서울. 구두닦이 소년인 슈 샨 보이들로 당시에 도심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 NARA
 
1951. 8. 20. 서울. 한국전쟁 이후 청계천변의 판자촌 집들. ⓒ NARA
 
1951. 8. 20. 서울 영등포. 한 어머니가 피란봇짐 곁에서 아이들에게 참외를 깎아주고 있다. ⓒ NARA
 
 
1951. 1. 8. 부산. 담배와 껌을 목판에 담고 파는 소년.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이런 장사꾼 소년들이 대도시에는 숱하게 많았다.ⓒ NARA

 

[이전 기사]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 눈도 감지 못하였구나

[리워드 안내]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는 '한국전쟁 사진 2매'를 메일로 랜덤 전송합니다. 그 견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또 후원자 분들을 위해 기자의 저서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준비했습니다.

종로에서 진행될 '박도 기자와의 차 한잔' 초대권과 강원도 횡성군에서 열릴 '작가와의 대화' 초대장도 리워드로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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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반에 100명, 운동장 수업까지... 뜨거운 교육열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⑧] 한국전쟁 속 학교 교육

 
17.07.07 10:19l최종 업데이트 17.07.07 10:19l

    

1953. 10. 22. 서울, 전쟁으로 학교 교실이 잿더미가 되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불탄 교실 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책보로 모래를 나르다

교사였던 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할 때 학교 관련 자료에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더욱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그 시절 초등학교 학생들의 생활 사진은 내 경험과 일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내 고향 구미는 다부동 전투 지역 배후지로 폭격이 매우 심했다. 건물 대부분은 그때 전란으로 불타버렸다. 구미초등학교(전 구미국민학교) 교실 역시 전파 또는 반파됐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긴급히 보수했으나 1학년과 2학년 저학년 학생들은 급조된 초가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곧이어 교실을 새로 지었는데 당시에는 불도저나 트럭과 같은 장비가 매우 귀했다. 게다가 정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터라 학생들도 교실을 짓는 데 앞장섰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시냇가에 가 책을 싸서 들고 다니던 보자기에 모래를 담아 학교 운동장으로 날랐다. 마치 일개미 행렬처럼 말이다. 그 모래에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시멘트를 섞어 교실을 새로 지었다.

그때는 의무교육이라고 했지만, '월사금'(일종의 육성회비)을 일률적으로 거뒀다. 그러자 월사금을 낼 형편마저 되지 않는 집 아이들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내 친구 가운데는 월사금을 마련하고자 한밤중에 지게를 지고 금오산에 올라간 이도 있었다. 몰래 소나무를 베어낸 뒤 몇 날 며칠을 말렸다. 친구는 소나무 둥치를 도끼로 쪼개 장작을 만든 다음 그걸 내다 팔아 월사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것이다.

겨울철 교실 난로 땔감은 학생들 몫이었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장작을 한두 개씩 지참하고 등교했다. 이따금 미군이 트럭에 분유를 싣고 오면 학교는 그걸 아이들에게 나눠주거나 가마솥에 끓여 주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 분유를 집에 가져가 쪄서 먹기도 하고, 끓인 분유 한 캔을 얻어 마셨다. 물론 분유를 마시고 복통을 일으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시절은 모두 이렇게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1952. 7. 동구 밖 밭에다가 임시로 천막을 친 초등학교의 애국 조회시간. ⓒ NARA
 

뜨거운 교육열

20세기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교육열의 역사는 깊다. 한국전쟁 직후 교육열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전쟁 중의 뜨거운 교육열' 중 일부를 통해 가늠해보자.

"한국인들은 학력이 그 어떤 재산보다도 안전하다는 것을 전쟁 중에 뼈저리게 체험했다. 다른 건 (전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할 수 있지만, 학력은 사라지지 않는 재산이었다. 1950년대의 교육열은 '교육 기적' 또는 '교육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뜨거웠다.

그 교육열은 38선을 넘어온 피란민들에 의해 더욱 뜨거웠다. 그들에게는 자녀 교육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 있었겠는가. 월남한 북한 주민들의 자녀교육열은 남한 주민들의 자녀교육열을 자극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6.25 전쟁 중에도 2부제, 3부제 수업은 물론, 한 학급에 100명 이상 수용하는 것도 불사해 가면서 교육은 계속 이루어졌다. 1951. 4. 23. <뉴욕 타임스>의 한 구절이다.

 
1954. 3. 9. 경기도 문산. 한 중학교의 초가 교실 ⓒ NARA
 

'어떤 초등학교는 교외 어떤 산 위에서, 그 전 일본 신사(神社)에서, 개천 자리에서, 그리고 한 중학교는 산골짜기에서 각각 수업을 받고 있다. 남한의 어디를 가든지, 정거장에서, 약탈당한 건물 안에서, 천막 속에서, 그리고 묘지 부근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교과서 있는 학생은 일부로, 교과서가 없는 학생은 없는 대로, 지리·수학·영어·미술 그리고 공민 등의 교과를 배우고자 교실로 몰려들고 있다. 여학생들은 닭을 치고, 계란을 팔아서 학교를 돕는다. (경북) 안동에서는 학생들이 흙벽돌로 교사(校舍) 세 채를 건축하였다.' - <뉴욕 타임스> 보도

서울의 학교들은 전쟁 중 피란지에서 학교 문을 열었다. 서울대와 연희대(연세대)는 부산에서, 고려대는 대구에서 임시학교를 설치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263~266 발췌 요약정리.

이번 기사에서는 '전란 속의 학교 교육'이라는 주제로 NARA의 사진들을 골라 봤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포토샵을 하지 않고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합니다.)

 
1951. 부산.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 관계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NARA
 
1950 부산. 초등학교 학생들이 국제적십자사로부터 초콜릿 등 선물을 받고 있다. ⓒ NARA
 
 
1951. 미국의 원조로 만든 초등학교 교과서들.ⓒ NARA
 
 
1954. 3. 9. 경기도 문산. 한 중학교 임시 천막 교실 내부ⓒ NARA
 
 
1950. 11. 1. 원산, 한 초등학교 학생들과 담임선생님 ⓒ NARA
 
 
1950. 11. 1. 전쟁 중이지만 원산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 ⓒ NARA
 
 
1954. 5. 13. 어느 초등학교의 수업시간.ⓒ NARA
 
 
1950. 10. 서울. 은평. 교실이 불타버린 빈 터에서 수업을 받는 어린이들.ⓒ NARA
 
 
1953. 6. 5. 서울.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이 모자라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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