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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25때 민간인 최소 5천291명 미군에 희생”

by 무궁화9719 2022. 9. 14.

“6·25때 민간인 최소 5천291명 미군에 희생”

2017. 1. 5.

 

 

 

 

“6·25때 민간인 최소 5천291명 미군에 희생”

 

국가기관 첫 통계…피난민·지역 폭격 등이 원인

 

6·25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5천명을 넘는다는 국가기관의 첫 통계가 나왔다. 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작성한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부터 1950년 9·28 수복 무렵까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141건을 조사한 결과 4천91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141건 중 공중 폭격 90건(63.8%)의 희생자가 3천608명에 달했다.

서울 수복 이후에도 미군과 관련한 31건에서 1천200여 명이 희생된 사실이 진실화해위에서 확인됐다. 6·25전쟁 발발 이후 최소 5천291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숨진 사실이 국가 기관의 조사를 통해 공식 집계된 것이다. 국가기관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해 전국 단위로 이런 통계를 내기는 처음이다.

미군에 의한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아이, 노인 비율이 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복 전 미군에 의한 희생자 1천218명 가운데 541명(44.4%)이 여성이었고, 10대 미만 223명(18.3%), 50대 이상 228명(18.7%)으로 집계됐다. 수복 이후 미군에 의한 희생 사건 31건 중 21건은 1951년 1∼2월 사이에 발생했으며, 이들 사건은 피난민 폭격과 지역폭격 또는 초토화 작전 목적의 폭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난민 폭격 중 대표적인 것은 1951년 1월 강원도 홍천 삼마치고개 사건으로 당시 이동 중이던 3천여명의 피난민 사이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미군 판단에 따라 수백 명이 공중 폭격으로 희생됐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또 지역폭격 또는 초토화 작전용 폭격은 북한군 병력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민간인 마을에 대한 군사적 필요와 참전한 중공군의 보급선 등을 차단하지 않는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 등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했다.

희생자들은 거주지에서 일상생활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가 숨진 사례가 많았으며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살당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신청 사건에 한해 민간인 희생 통계를 냈지만 신청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희생자가 훨씬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05년 12월 발족한 진실화해위는 2006년 4월25일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를 시작했으며, 신청 사건 등 1만1천175건을 모두 처리하고서 지난해 12월31일 활동을 종료했다.  연합뉴스

 

 

 

 

 

 

 

 

 

 

 

 

 

 

 

 

 

 

 

 

 

 

 

 

 

                     

6.25 미군범죄 고발 - 1. 양민학살

 

2013.06.28 13:23 글모음/칼럼_기고

[원문출처] 우리사회연구소


6월 25일이다. 우리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한국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관계를 밝히는 일은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양민학살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강정구 교수는 당시 양민학살을 1) 전쟁 발발 이전 남측 빨치산 진압과정에서 양민학살 2) 한국전쟁 초기 이남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3) 미군의 북한점령시기 북한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4) 전선이 휴전선에 교착된 이후 미군 폭격에 의한 북한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이렇게 4가지 구분으로 분석하고 있다.

 

모든 과정에서 미군이 주도적으로, 체계적으로 관여하였지만 이 글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시기적 특성상 강정구 교수의 논문에 의거, 1950년 6월 25일 이후의 양민학살을 재정리해보겠다.

 

전선 후퇴시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은 아직까지 남북간에 남침이냐, 북침이냐 라는 국제공방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벌어졌던 양민학살은 남침이냐 북침이냐란 논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전쟁의 주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그 지휘를 받는 한국군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다른 일방으로 한다고 할 때, 한국전쟁 초기 후퇴시기는 주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 맥아더에게 이양된 것이 7월 14일이므로 7월 14일 이후 한국군의 양민학살도 사실은 미군의 책임 하에 있다고 살펴볼 수 있다.

 

 

[마산 여양리에서 발굴된, 보도연맹원들로 추정되는 유골]


이 시기 바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다. 1950년 후퇴시기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모두 25만-3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게 넘어간 7월 14일 이후에도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일각에서는 당시 사진자료를 통해 미군이 보도연맹의 집단학살에 개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과정에서 미군의 개입 여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양민학살로 노근리와 이리역 폭파사건 등을 들 수 있다.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지휘명령체계를 통해 내려진 피난민 사살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로버트 게이(Robert R. Gay)가 지휘하는 미 제1기갑사단 본부는 1950. 7. 24. 예하 제8기갑연대에 “어떠한 피난민의 전선통과도 불허”하며 “전선 통과를 시도하는 모든 사람을 사살하라.”는 민간인 학살 명령을 하달하였다. 위와 같은 취지의 명령서는 1950. 7. 26. 미 제8군사령부에 의해 한국에 파병된 모든 전투단위에 내려졌다. 또한 1950. 7. 26.과 27. 미 제25사단의 윌리암 킨(William B. Kean)은 예하부대에 “전투 구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던 노근리 쌍굴터널]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 사이에 미국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통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현재까지 사망자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미군 기병연대에는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김.”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며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는 당시 정황에 대해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이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전라북도의회'는 1999년 10월 20일자 '익산시 폭격 진상규명 대 정부 촉구결의안'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1950년 7월 11일 미군기의 오폭으로 익산역 직원과 승객 등 54명이 현장에서 전원 숨졌고, 300여명의 중경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익산역 철도시설 전부를 산산히 부셔버렸다는 기록이 있고 그를 입증하는 증언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익산 송학동 주변일대를 미군전투기가 30-40분 동안에 걸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하게 발사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이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다.

 

강정구 교수는 이뿐 아니라 후퇴시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전 전선에 걸쳐 보편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에서도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1950년 8월초에 마을 뒷산 비들재 고개에서 인민군 2명이 나타나자 미군이 1시간 동안 마을에 총격을 가해 피난민 100여명이 숨지고 40여채가 불탔다는 것이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에서도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숨지거나 다쳤다는 주장이 나와 사천시가 진상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1950년 7월29일 새벽 인민군을 태운 트럭 20여대가 위장하고 있던 서포~단성 국도에서 폭격기 20여대가 폭탄을 떨어뜨려 마을주민 54명이 숨지고 47명이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강정구 교수는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황점순(74·여)씨들도 “지난 50년 8월11일 오전부터 주민 100여명이 모여 있던 재실을 향해 미군들이 집중 총격을 가해 83명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북한 점령 시기 자행된 미군의 양민학살

 

1950년 하반기 미군의 공세기로 전황이 변경되었을 시기 북한주민에 대한 양민학살은 광기의 극을 이룬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기까지의 기간동안 북한 전역에서 양민학살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의 양민학살에 모티브를 얻은 파블로 피카소의 조선에서의 학살(1951)]

 

북한당국의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북한양민은 총 17만 2,000명이라고 한다. 강정구 교수는 이 숫자가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 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군의 학살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곳이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다. 북한당국은 신천군의 경우 군내의 총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이 무려 16,234명이나 된다고 주장한다.

 

북한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군의 학살방법은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집단적 생매장, 통풍이 되지 않는 건물에 감금하는 질식사, 굶겨 죽이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기, "눈알을 빼며 귀와 코를 도려내며 산채로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며 피부를 벗기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며 산 사람을 탱크로 깔아 죽이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야수적 학살방법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 고 한다.

 

북한당국의 이러한 주장은 유럽의 진상조사단의 활동내용과 대체로 유사하다.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였는데 강정구 교수는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황해도 안악군에서는 수백명의 북한주민들을 통풍할 창문도 없이 밀폐된 농가의 창고에 누울 자리도 없을 만큼 몰아넣고 며칠동안 물과 음식을 일체 공급하지 않아 대부분이 절망적 상황에서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특히 안악군 세산리 172번지에 사는 김산연노인은 위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아들과 며느리가 밧줄로 함께 묶여서 죽어 있었다. 아무런 상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산채로 매장 당한 것 같다.“고 증언하였다.

 

황해도 신천의 창고수용소에 갇혀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28살의 양연득 여인은 다섯 어린이와 남편을 가진 7식구였으나 미군이 강점하자 남편은 즉시 살해되고 그녀와 다섯 어린이는 어떤 창고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 창고는 약 300여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이 좁은 수용소에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두 살난 어린이가 밟혀 죽었다고 한다. 며칠 뒤 미군 두 명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차례로 성폭행했으며 그녀는 겨우 도망쳐 나와 신천이 다시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는데 후에 그녀의 네 자녀들이 모두 그곳 창고수용소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펠톤은 또한 황해도 신천에는 완전히 어린이만 수용했던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가 최근 미군의 고성능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나중에 주위의 주민들에 들으니 이 수용소와 묘지들 주위의 모든 지역을 미군들이 자주 폭격했다고 한다.

 

유럽 진상조사단의 상세한 보고

 

뿐만 아니라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는 미군의 범죄행위를 아래와 같이 더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서는 미군들이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으며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고 한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11명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고 한다. 증인의 며느리는 미군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묶은 다음 유방을 베고 국부에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 범죄에는 약 20명의 미국장병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25일 황해도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군은 칼을 가지고 김창두라는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또한 진상조사단은 황해도 해주시에서 지방여맹위원장인 조옥희라는 젊은 여성과 함께 구금되어 있던 증인들에게 진술들은 바, 미군이 조옥희 여성을 장시간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여성의 눈을 뽑고 얼마 뒤에 그의 코를 베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유방을 베었다고 한다.

 

1950년 11월 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군들에게 강간당하였는데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고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고 한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양민학살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 극동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나는 전부,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습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으니까.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오도넬이 밝힌 바와 같이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인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가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6·25때 민간인 최소 5천291명 미군에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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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25. 일제시대(이승만)

2017. 1. 5.

 

 

 

“6·25때 민간인 최소 5천291명 미군에 희생”

 

국가기관 첫 통계…피난민·지역 폭격 등이 원인

 

6·25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5천명을 넘는다는 국가기관의 첫 통계가 나왔다. 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작성한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부터 1950년 9·28 수복 무렵까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141건을 조사한 결과 4천91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141건 중 공중 폭격 90건(63.8%)의 희생자가 3천608명에 달했다.

서울 수복 이후에도 미군과 관련한 31건에서 1천200여 명이 희생된 사실이 진실화해위에서 확인됐다. 6·25전쟁 발발 이후 최소 5천291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숨진 사실이 국가 기관의 조사를 통해 공식 집계된 것이다. 국가기관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해 전국 단위로 이런 통계를 내기는 처음이다.

미군에 의한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아이, 노인 비율이 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복 전 미군에 의한 희생자 1천218명 가운데 541명(44.4%)이 여성이었고, 10대 미만 223명(18.3%), 50대 이상 228명(18.7%)으로 집계됐다. 수복 이후 미군에 의한 희생 사건 31건 중 21건은 1951년 1∼2월 사이에 발생했으며, 이들 사건은 피난민 폭격과 지역폭격 또는 초토화 작전 목적의 폭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난민 폭격 중 대표적인 것은 1951년 1월 강원도 홍천 삼마치고개 사건으로 당시 이동 중이던 3천여명의 피난민 사이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미군 판단에 따라 수백 명이 공중 폭격으로 희생됐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또 지역폭격 또는 초토화 작전용 폭격은 북한군 병력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민간인 마을에 대한 군사적 필요와 참전한 중공군의 보급선 등을 차단하지 않는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 등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했다.

희생자들은 거주지에서 일상생활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가 숨진 사례가 많았으며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살당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신청 사건에 한해 민간인 희생 통계를 냈지만 신청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희생자가 훨씬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05년 12월 발족한 진실화해위는 2006년 4월25일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를 시작했으며, 신청 사건 등 1만1천175건을 모두 처리하고서 지난해 12월31일 활동을 종료했다.  연합뉴스

 

 

 

 

 

 

 

 

 

 

 

 

 

 

 

 

 

 

 

 

 

 

 

 

 

                     

6.25 미군범죄 고발 - 1. 양민학살

 

2013.06.28 13:23 글모음/칼럼_기고

[원문출처] 우리사회연구소


6월 25일이다. 우리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한국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관계를 밝히는 일은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양민학살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강정구 교수는 당시 양민학살을 1) 전쟁 발발 이전 남측 빨치산 진압과정에서 양민학살 2) 한국전쟁 초기 이남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3) 미군의 북한점령시기 북한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4) 전선이 휴전선에 교착된 이후 미군 폭격에 의한 북한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이렇게 4가지 구분으로 분석하고 있다.

 

모든 과정에서 미군이 주도적으로, 체계적으로 관여하였지만 이 글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시기적 특성상 강정구 교수의 논문에 의거, 1950년 6월 25일 이후의 양민학살을 재정리해보겠다.

 

전선 후퇴시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은 아직까지 남북간에 남침이냐, 북침이냐 라는 국제공방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벌어졌던 양민학살은 남침이냐 북침이냐란 논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전쟁의 주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그 지휘를 받는 한국군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다른 일방으로 한다고 할 때, 한국전쟁 초기 후퇴시기는 주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 맥아더에게 이양된 것이 7월 14일이므로 7월 14일 이후 한국군의 양민학살도 사실은 미군의 책임 하에 있다고 살펴볼 수 있다.

 

 

[마산 여양리에서 발굴된, 보도연맹원들로 추정되는 유골]


이 시기 바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다. 1950년 후퇴시기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모두 25만-3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게 넘어간 7월 14일 이후에도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일각에서는 당시 사진자료를 통해 미군이 보도연맹의 집단학살에 개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과정에서 미군의 개입 여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양민학살로 노근리와 이리역 폭파사건 등을 들 수 있다.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지휘명령체계를 통해 내려진 피난민 사살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로버트 게이(Robert R. Gay)가 지휘하는 미 제1기갑사단 본부는 1950. 7. 24. 예하 제8기갑연대에 “어떠한 피난민의 전선통과도 불허”하며 “전선 통과를 시도하는 모든 사람을 사살하라.”는 민간인 학살 명령을 하달하였다. 위와 같은 취지의 명령서는 1950. 7. 26. 미 제8군사령부에 의해 한국에 파병된 모든 전투단위에 내려졌다. 또한 1950. 7. 26.과 27. 미 제25사단의 윌리암 킨(William B. Kean)은 예하부대에 “전투 구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던 노근리 쌍굴터널]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 사이에 미국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통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현재까지 사망자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미군 기병연대에는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김.”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며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는 당시 정황에 대해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이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전라북도의회'는 1999년 10월 20일자 '익산시 폭격 진상규명 대 정부 촉구결의안'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1950년 7월 11일 미군기의 오폭으로 익산역 직원과 승객 등 54명이 현장에서 전원 숨졌고, 300여명의 중경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익산역 철도시설 전부를 산산히 부셔버렸다는 기록이 있고 그를 입증하는 증언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익산 송학동 주변일대를 미군전투기가 30-40분 동안에 걸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하게 발사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이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다.

 

강정구 교수는 이뿐 아니라 후퇴시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전 전선에 걸쳐 보편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에서도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1950년 8월초에 마을 뒷산 비들재 고개에서 인민군 2명이 나타나자 미군이 1시간 동안 마을에 총격을 가해 피난민 100여명이 숨지고 40여채가 불탔다는 것이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에서도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숨지거나 다쳤다는 주장이 나와 사천시가 진상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1950년 7월29일 새벽 인민군을 태운 트럭 20여대가 위장하고 있던 서포~단성 국도에서 폭격기 20여대가 폭탄을 떨어뜨려 마을주민 54명이 숨지고 47명이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강정구 교수는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황점순(74·여)씨들도 “지난 50년 8월11일 오전부터 주민 100여명이 모여 있던 재실을 향해 미군들이 집중 총격을 가해 83명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북한 점령 시기 자행된 미군의 양민학살

 

1950년 하반기 미군의 공세기로 전황이 변경되었을 시기 북한주민에 대한 양민학살은 광기의 극을 이룬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기까지의 기간동안 북한 전역에서 양민학살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의 양민학살에 모티브를 얻은 파블로 피카소의 조선에서의 학살(1951)]

 

북한당국의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북한양민은 총 17만 2,000명이라고 한다. 강정구 교수는 이 숫자가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 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군의 학살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곳이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다. 북한당국은 신천군의 경우 군내의 총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이 무려 16,234명이나 된다고 주장한다.

 

북한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군의 학살방법은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집단적 생매장, 통풍이 되지 않는 건물에 감금하는 질식사, 굶겨 죽이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기, "눈알을 빼며 귀와 코를 도려내며 산채로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며 피부를 벗기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며 산 사람을 탱크로 깔아 죽이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야수적 학살방법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 고 한다.

 

북한당국의 이러한 주장은 유럽의 진상조사단의 활동내용과 대체로 유사하다.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였는데 강정구 교수는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황해도 안악군에서는 수백명의 북한주민들을 통풍할 창문도 없이 밀폐된 농가의 창고에 누울 자리도 없을 만큼 몰아넣고 며칠동안 물과 음식을 일체 공급하지 않아 대부분이 절망적 상황에서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특히 안악군 세산리 172번지에 사는 김산연노인은 위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아들과 며느리가 밧줄로 함께 묶여서 죽어 있었다. 아무런 상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산채로 매장 당한 것 같다.“고 증언하였다.

 

황해도 신천의 창고수용소에 갇혀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28살의 양연득 여인은 다섯 어린이와 남편을 가진 7식구였으나 미군이 강점하자 남편은 즉시 살해되고 그녀와 다섯 어린이는 어떤 창고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 창고는 약 300여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이 좁은 수용소에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두 살난 어린이가 밟혀 죽었다고 한다. 며칠 뒤 미군 두 명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차례로 성폭행했으며 그녀는 겨우 도망쳐 나와 신천이 다시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는데 후에 그녀의 네 자녀들이 모두 그곳 창고수용소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펠톤은 또한 황해도 신천에는 완전히 어린이만 수용했던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가 최근 미군의 고성능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나중에 주위의 주민들에 들으니 이 수용소와 묘지들 주위의 모든 지역을 미군들이 자주 폭격했다고 한다.

 

유럽 진상조사단의 상세한 보고

 

뿐만 아니라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는 미군의 범죄행위를 아래와 같이 더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서는 미군들이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으며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고 한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11명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고 한다. 증인의 며느리는 미군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묶은 다음 유방을 베고 국부에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 범죄에는 약 20명의 미국장병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25일 황해도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군은 칼을 가지고 김창두라는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또한 진상조사단은 황해도 해주시에서 지방여맹위원장인 조옥희라는 젊은 여성과 함께 구금되어 있던 증인들에게 진술들은 바, 미군이 조옥희 여성을 장시간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여성의 눈을 뽑고 얼마 뒤에 그의 코를 베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유방을 베었다고 한다.

 

1950년 11월 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군들에게 강간당하였는데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고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고 한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양민학살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 극동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나는 전부,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습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으니까.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오도넬이 밝힌 바와 같이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인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가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6·25때 민간인 최소 5천291명 미군에 희생”

 

국가기관 첫 통계…피난민·지역 폭격 등이 원인

 

6·25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5천명을 넘는다는 국가기관의 첫 통계가 나왔다. 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작성한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부터 1950년 9·28 수복 무렵까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141건을 조사한 결과 4천91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141건 중 공중 폭격 90건(63.8%)의 희생자가 3천608명에 달했다.

서울 수복 이후에도 미군과 관련한 31건에서 1천200여 명이 희생된 사실이 진실화해위에서 확인됐다. 6·25전쟁 발발 이후 최소 5천291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숨진 사실이 국가 기관의 조사를 통해 공식 집계된 것이다. 국가기관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해 전국 단위로 이런 통계를 내기는 처음이다.

미군에 의한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아이, 노인 비율이 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복 전 미군에 의한 희생자 1천218명 가운데 541명(44.4%)이 여성이었고, 10대 미만 223명(18.3%), 50대 이상 228명(18.7%)으로 집계됐다. 수복 이후 미군에 의한 희생 사건 31건 중 21건은 1951년 1∼2월 사이에 발생했으며, 이들 사건은 피난민 폭격과 지역폭격 또는 초토화 작전 목적의 폭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난민 폭격 중 대표적인 것은 1951년 1월 강원도 홍천 삼마치고개 사건으로 당시 이동 중이던 3천여명의 피난민 사이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미군 판단에 따라 수백 명이 공중 폭격으로 희생됐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또 지역폭격 또는 초토화 작전용 폭격은 북한군 병력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민간인 마을에 대한 군사적 필요와 참전한 중공군의 보급선 등을 차단하지 않는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 등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했다.

희생자들은 거주지에서 일상생활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가 숨진 사례가 많았으며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살당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신청 사건에 한해 민간인 희생 통계를 냈지만 신청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희생자가 훨씬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05년 12월 발족한 진실화해위는 2006년 4월25일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를 시작했으며, 신청 사건 등 1만1천175건을 모두 처리하고서 지난해 12월31일 활동을 종료했다.  연합뉴스

 

 

 

 

 

 

 

 

 

 

 

 

 

 

 

 

 

 

 

 

 

 

 

 

 

                     

6.25 미군범죄 고발 - 1. 양민학살

 

2013.06.28 13:23 글모음/칼럼_기고

[원문출처] 우리사회연구소


6월 25일이다. 우리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한국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관계를 밝히는 일은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양민학살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강정구 교수는 당시 양민학살을 1) 전쟁 발발 이전 남측 빨치산 진압과정에서 양민학살 2) 한국전쟁 초기 이남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3) 미군의 북한점령시기 북한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4) 전선이 휴전선에 교착된 이후 미군 폭격에 의한 북한민중에 대한 양민학살 이렇게 4가지 구분으로 분석하고 있다.

 

모든 과정에서 미군이 주도적으로, 체계적으로 관여하였지만 이 글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시기적 특성상 강정구 교수의 논문에 의거, 1950년 6월 25일 이후의 양민학살을 재정리해보겠다.

 

전선 후퇴시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은 아직까지 남북간에 남침이냐, 북침이냐 라는 국제공방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벌어졌던 양민학살은 남침이냐 북침이냐란 논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전쟁의 주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그 지휘를 받는 한국군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다른 일방으로 한다고 할 때, 한국전쟁 초기 후퇴시기는 주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 맥아더에게 이양된 것이 7월 14일이므로 7월 14일 이후 한국군의 양민학살도 사실은 미군의 책임 하에 있다고 살펴볼 수 있다.

 

 

[마산 여양리에서 발굴된, 보도연맹원들로 추정되는 유골]


이 시기 바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다. 1950년 후퇴시기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모두 25만-3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게 넘어간 7월 14일 이후에도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일각에서는 당시 사진자료를 통해 미군이 보도연맹의 집단학살에 개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과정에서 미군의 개입 여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양민학살로 노근리와 이리역 폭파사건 등을 들 수 있다.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지휘명령체계를 통해 내려진 피난민 사살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로버트 게이(Robert R. Gay)가 지휘하는 미 제1기갑사단 본부는 1950. 7. 24. 예하 제8기갑연대에 “어떠한 피난민의 전선통과도 불허”하며 “전선 통과를 시도하는 모든 사람을 사살하라.”는 민간인 학살 명령을 하달하였다. 위와 같은 취지의 명령서는 1950. 7. 26. 미 제8군사령부에 의해 한국에 파병된 모든 전투단위에 내려졌다. 또한 1950. 7. 26.과 27. 미 제25사단의 윌리암 킨(William B. Kean)은 예하부대에 “전투 구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던 노근리 쌍굴터널]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 사이에 미국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통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현재까지 사망자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미군 기병연대에는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김.”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며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는 당시 정황에 대해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이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전라북도의회'는 1999년 10월 20일자 '익산시 폭격 진상규명 대 정부 촉구결의안'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1950년 7월 11일 미군기의 오폭으로 익산역 직원과 승객 등 54명이 현장에서 전원 숨졌고, 300여명의 중경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익산역 철도시설 전부를 산산히 부셔버렸다는 기록이 있고 그를 입증하는 증언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익산 송학동 주변일대를 미군전투기가 30-40분 동안에 걸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하게 발사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이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다.

 

강정구 교수는 이뿐 아니라 후퇴시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전 전선에 걸쳐 보편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에서도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1950년 8월초에 마을 뒷산 비들재 고개에서 인민군 2명이 나타나자 미군이 1시간 동안 마을에 총격을 가해 피난민 100여명이 숨지고 40여채가 불탔다는 것이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에서도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숨지거나 다쳤다는 주장이 나와 사천시가 진상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1950년 7월29일 새벽 인민군을 태운 트럭 20여대가 위장하고 있던 서포~단성 국도에서 폭격기 20여대가 폭탄을 떨어뜨려 마을주민 54명이 숨지고 47명이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강정구 교수는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황점순(74·여)씨들도 “지난 50년 8월11일 오전부터 주민 100여명이 모여 있던 재실을 향해 미군들이 집중 총격을 가해 83명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북한 점령 시기 자행된 미군의 양민학살

 

1950년 하반기 미군의 공세기로 전황이 변경되었을 시기 북한주민에 대한 양민학살은 광기의 극을 이룬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기까지의 기간동안 북한 전역에서 양민학살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의 양민학살에 모티브를 얻은 파블로 피카소의 조선에서의 학살(1951)]

 

북한당국의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북한양민은 총 17만 2,000명이라고 한다. 강정구 교수는 이 숫자가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 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군의 학살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곳이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다. 북한당국은 신천군의 경우 군내의 총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이 무려 16,234명이나 된다고 주장한다.

 

북한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군의 학살방법은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집단적 생매장, 통풍이 되지 않는 건물에 감금하는 질식사, 굶겨 죽이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기, "눈알을 빼며 귀와 코를 도려내며 산채로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며 피부를 벗기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며 산 사람을 탱크로 깔아 죽이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야수적 학살방법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 고 한다.

 

북한당국의 이러한 주장은 유럽의 진상조사단의 활동내용과 대체로 유사하다.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였는데 강정구 교수는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황해도 안악군에서는 수백명의 북한주민들을 통풍할 창문도 없이 밀폐된 농가의 창고에 누울 자리도 없을 만큼 몰아넣고 며칠동안 물과 음식을 일체 공급하지 않아 대부분이 절망적 상황에서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특히 안악군 세산리 172번지에 사는 김산연노인은 위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아들과 며느리가 밧줄로 함께 묶여서 죽어 있었다. 아무런 상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산채로 매장 당한 것 같다.“고 증언하였다.

 

황해도 신천의 창고수용소에 갇혀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28살의 양연득 여인은 다섯 어린이와 남편을 가진 7식구였으나 미군이 강점하자 남편은 즉시 살해되고 그녀와 다섯 어린이는 어떤 창고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 창고는 약 300여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이 좁은 수용소에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두 살난 어린이가 밟혀 죽었다고 한다. 며칠 뒤 미군 두 명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차례로 성폭행했으며 그녀는 겨우 도망쳐 나와 신천이 다시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는데 후에 그녀의 네 자녀들이 모두 그곳 창고수용소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펠톤은 또한 황해도 신천에는 완전히 어린이만 수용했던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가 최근 미군의 고성능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나중에 주위의 주민들에 들으니 이 수용소와 묘지들 주위의 모든 지역을 미군들이 자주 폭격했다고 한다.

 

유럽 진상조사단의 상세한 보고

 

뿐만 아니라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는 미군의 범죄행위를 아래와 같이 더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서는 미군들이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으며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고 한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11명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고 한다. 증인의 며느리는 미군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묶은 다음 유방을 베고 국부에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 범죄에는 약 20명의 미국장병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25일 황해도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군은 칼을 가지고 김창두라는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또한 진상조사단은 황해도 해주시에서 지방여맹위원장인 조옥희라는 젊은 여성과 함께 구금되어 있던 증인들에게 진술들은 바, 미군이 조옥희 여성을 장시간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여성의 눈을 뽑고 얼마 뒤에 그의 코를 베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유방을 베었다고 한다.

 

1950년 11월 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군들에게 강간당하였는데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고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고 한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양민학살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 극동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나는 전부,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습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으니까.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오도넬이 밝힌 바와 같이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인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가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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