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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태극기’ 두르고 온 홍범도 장군…‘백두산 호랑이’ 백년만의 귀향

by 무궁화9719 2023. 8. 27.

태극기’ 두르고 온 홍범도 장군…‘백두산 호랑이’ 백년만의 귀향

등록 :2021-08-15 20:59수정 :2021-08-16 01:18

서영지 기자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대통령 특사단'의 황기철 단장(국가보훈처장)이 14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홍범도 묘역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하여 정부를 대표해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보훈처 제공

 

한평생 조국 해방을 위해 온몸을 바치며 ‘봉오동 전투’(1920)를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1868~1943)이 광복절인 15일 태극기와 함께 고국으로 귀환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태운 특별기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를 출발해 이날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훈 국가안보실장, 서욱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공항에서 장군의 유해를 직접 맞이했다. 이날 특별기는 방공식별구역(KADIZ) 진입 뒤에는 우리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 비행을 받으며 착륙했다. 1921년 연해주 이주 뒤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장군을 최고의 예우로 맞이하기 위해 대한민국 공군이 운영하는 전투기종이 모두 투입됐다. 홍 장군의 유해는 군악대 성악병이 ‘올드 랭 사인’을 독창하는 가운데 의장대 호위를 받으며 특별수송기에서 내려졌다. ‘올드 랭 사인’은 스코틀랜드 민요에 애국가 가사를 붙인 곡으로,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합창하기 시작하면서 이후 나라 잃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국가’처럼 불렸던 노래다.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은 2019년 4월 한국-카자흐스탄 정상회담 당시 문 대통령이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요청하면서 본격 추진됐고, 16일 토카예프 대통령 방한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황기철 보훈처장을 단장으로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의원, 극중 독립투사 역할을 자주 맡은 인연으로 ‘국민대표’에 선발된 영화배우 조진웅씨 등이 포함된 대통령 특별사절단은 14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추모식 뒤 국방부 유해발굴단과 장례지도사가 장군의 유해를 수습한 뒤 입관했다. 유해가 수습되자 고려인협회 주관으로 제례의식을 했다. 장군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거리, 문화회관 등을 거쳐 크즐오르다주 병원에 임시 안치됐다. 이후 태극기로 관포돼 수송기에 실려 수천 ㎞를 비행해 고국에 도착했다.

 

장군의 유해는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뒤,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국가보훈처는 15일부터 20일까지 국가보훈처 누리집(www.mpva.go.kr)에 ‘장군의 귀환’이라는 표어로 온라인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또 대전현충원에 16일부터 이틀간 제한적으로 ‘국민분향소’를 운영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연설 앞머리에서 “광복 76주년을 맞은 오늘 마침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에 도착한다”며 “독립 영웅들을 조국으로 모시는 일을 국가와 후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이자 영광으로 여기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일제 치하에서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올라 간도와 연해주에서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며 일본군을 토벌했다. 홍 장군은 1937년 옛소련 스탈린 정권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해 현지에서 7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서영지 기자 yj@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007782.html?_fr=mt2#csidx526f251bc77c34e9c7b00bd6a9877cc 

[영상] 장군의 유언 이제야..봉오동 전투 영웅 홍범도 유해 고국으로

서정인 입력 2021. 08. 15. 12:10 

 

(서울=연합뉴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이 마침내 귀환 준비를 마치고 머나먼 길을 돌아 고국 품으로 돌아옵니다.

 

대통령 특별사절단은 지난 14일 오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 앞에서 추모식을 열고 유해를 수습해 현지병원에 임시 안치했습니다.

 

우선 유해 수습에 앞서서는 특사단과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 고려인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묘역 앞에서 추모식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봉환 실무지원단은 홍범도 장군 묘역의 반신 흉상 아래에 있는 기단부 석재 해체 작업 등을 진행한 뒤 지하에 묻혀있던 유해를 수습했습니다.

 

수습된 유해는 소관에 담아 카자흐스탄 국기로 관포했으며, 묘역을 나선 유해는 홍범도 거리, 문화회관(구 고려극장), 계봉우 지사 거주지 등 16km가량을 경유한뒤 크즐오르다 주 병원에 임시 안치됐습니다.

 

홍범도 장군 유해는 15일 특별수송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 이날 저녁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후 16일과 17일 이틀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됩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뒀습니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무찌른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성사됐습니다. 영상으로 보시죠.

<제작: 김건태·서정인>

 

<영상: 연합뉴스TV·카자흐스탄 김상욱 통신원 촬영>

봉오동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가 왜 78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2021. 8. 13. 23:25

 

 영애야놀자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오는 광복절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홍범도 연보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남

1892년 북청으로 이사

1896년 혼자서 의병활동 시작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함

1921년 부하 700명을 이끌고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

1943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세상 떠남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홍범도 장군

평민출신 1907년부터 함경도 지역에서 의병활동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일본군 157명 전사, 독립군 4명 전사로 압도적 승리

독립전쟁사 '첫 승리'로 기록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이억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실수 있는데요 왜 독립전쟁의 영웅이 어떻게 낯선땅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지 왜 이제서야 내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승리를 이끈 독립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생전 영상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3.1운동 이후인 일제 강점기 1920년 6월 7일 두만강과 인접산 만주 봉호동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의 첫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은 높은지대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의 집중 사격으로 100여명의 전사자를 낸채 퇴각합니다 이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던 대한민국 총사령관 홍범도장군 한일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로 기록 되었습니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이후 만주 한인들을 수천명 학살한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자 홍장군은 만주를 떠나 1921년부터 연해주에 정착했다가 다시 옛소련에 고려인 강제이주정착 탓에 1937년 중앙아시아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다시한번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혈연단신 아내는 이미 일제 고문에 숨졌고 두 아들도 의병활동중 숨진상태였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의 노년은 쓸쓸했습니다

 

극장의 수위로. 정미소 노동자로 여생을 보냈고 조국의 승리를 불과 2년 앞둔 1943년 10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유족도 없이 숨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78년 그토록 바랐던 독립된 고국에 이제서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오는 15일 광복절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지난 2019년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대통령이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양국협의와 코로나 19로 인한 연기끝에 봉호동 전투 101년 만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합니다 특사단에는 여천 홍범도 장국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의 조진웅 배우가 참여합니다

홍장군유해는 16일과 17일 국민추모기간을 거쳐 오는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됩니다

 

[출처] 봉오동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가 왜 78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작성자 영애야놀자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78년 만에 고국으로

14일 카자흐 현지로 보훈처장 등 정부 특사단 파견
15일 광복절에 공군 특별수송기 편으로 국내 봉환

(서울=뉴스1) 장용석 기자 | 2021-08-12 16:32 송고 | 2021-08-12 17:05 최종수정

 

여천 홍범도 장군 (국가보훈처 제공) © 뉴스1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의 주역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12일 청와대와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정부는 제76주년 광복절(15일)을 맞아 홍 장군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해 황기철 보훈처장이 이끄는 특사단을 오는 14일 홍 장군 유해가 묻혀 있는 카자흐스탄으로 파견할 계획이다.


당초 우리 정부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은 작년에 키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 대통령 방한과 함께 홍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하려 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 때문에 올해로 연기됐다.

홍 장군은 1878년 평양에서 태어나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활동을 이끌었다.

1910년 일제의 한일강제병합 뒤 만주로 건너간 홍 장군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국내 침공 작전을 벌였고,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700여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해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봉오동 전투)를 올렸다.

봉오동 전투는 당시 독립군 연합부대의 첫 승전으로서 이른바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린다.

홍 장군은 봉오동전투 이후 같은 해 10월엔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지린성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재차 대승(청산리 대첩)을 거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극동지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소련은 한인들의 '스파이' 활동을 경계, 극동지역 내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고, 이 시기 연해주에 거주하던 홍 장군 또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야 했다.

홍 장군은 이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숨졌다.

이런 가운데 우리 정부는 1994년부터 카자흐스탄 현지의 홍 장군 묘소를 조사하고 현지 당국과 유해 봉환 협의를 진행했던 상황. 그러나 당시엔 북한과 현지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관련 논의가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보훈처를 통해 홍 장군 묘역 정비 사업을 지원하고, 묘소 주변에 강제이주 기념비 등을 건립하는 등의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정부는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스흐탄 방문 및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한·카자흐 정상회담을 계기로 홍 장군 유해 봉환을 카자흐 측에 정식 요청했다.

카자흐 정부 역시 같은 해 12월 토카예프 대통령 방한 당시 홍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하겠단 의사를 밝혔고, 이후 양국 정부 간은 물론 현지 고려인 단체 등과의 협의 또한 원만히 진행되면서 유해 봉환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홍 장군 유해는 14일 카자흐 현지에서 국방부 유해발굴단에 의해 수습된 뒤 입관 절차를 거쳐 제76주년 광복절인 15일 공군 특별수송기편으로 국내로 옮겨진다.

유해 수습에 앞서 크즐오르다 홍 장군 묘역에선 추모식이 엄수된다. 추모식엔 우리 특사단을 비롯한 양국 정부 관계자, 고려인협회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홍 장군 유해 봉환에 따라 대전국립현충원 현충문 앞에 추모분향소를 설치, 16~17일 이틀간 일반국민을 상대로 하는 추모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온라인상에서도 15~20일 추모페이지가 운영된다.

홍 장군의 유해는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ys4174@news1.kr

내 남편 홍범도…일본 ‘불 심지’ 고문에 혀 끊어 저항한 아내

등록 2023-08-28 15:00수정 2023-08-28 18:02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 끼워…고문 후유증 순국
비구니 이씨 부인, 승려 홍범도가 독립투사 되기까지

1909년 즈음 러시아 연해주 망명 직후 42살의 홍범도(왼쪽 사진). 1912년 즈음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광산·철도 노동자로 생활하던 44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
 
한국 주둔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야마모토 대좌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폭도’들의 귀순 공작을 강화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군사작전만으로는 그들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폭도’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개마고원의 넓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제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던 이들이었다. 사냥꾼 출신 한국인 의병들의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 남편에게 투항하라는 편지 쓰란 협박…“아니 쓴다”
 
사령관은 1908년 4월30일 자로 예하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출몰하는 ‘홍범도 폭도 무리’를 유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귀관은 순사대를 인솔하고 5월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이르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여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방법도 제시했다. “홍범도의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사용할 것”을 명시했다.
 
임재덕과 김원흥(金元興)은 일본군 103명과 한국인 순사보조원 8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갑산군 창평리 산간 마을에 주둔했다. 총기와 탄약을 넉넉히 지녔고, ‘속사포’라는 기관총 공용화기까지 갖춘 막강한 토벌대였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용문동 더뎅이 산골짜기가 지척이었다.
 
제3순사대장 임재덕은 일진회 간부이기도 했다. 907년 7월 일진회 간부 송병준이 고종 폐위를 주도한 것과 관련해,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진회를 타도 대상으로 간주했다.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 의병에게 처단된 일진회원은 무려 9260명을 헤아렸다. 마치 내전 양상과 같았다. 의병과 일진회는 총을 맞대고 겨누는 적대세력이었다.
 
또 한 사람 지휘관 김원흥은 대한제국의 고급 장교 출신이었다. 옛 한국군 참령 계급장을 달았던 고위 군사간부로서 북청진위대 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기꺼이 일본군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통감부 예하 경찰 조직에서 경시 계급을 부여받고 반일 의병운동을 탄압하는 최일선에 서게 됐다.‘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끔찍한 짓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의병 지도자를 전향시키려는 술책이었다. 해방운동의 투사를 정신적·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는 행위였다.
 
홍범도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인필골, 깊은 산중 마을이었다. 처가 동네였다.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아내와 두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 마을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을 토벌대 주둔지로 압송해 왔다.
 
홍범도의 귀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질이었다. 홍범도여,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와 같이 위협하는 데 쓸모 있는, 인질들이었다.
 
■ 노년의 홍범도는 아내의 마지막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홍범도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쓰라고 했다. 공작은 일본제국의 귀족 시스템 속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최상층 귀족이었다. 망국 이후 일본 귀족으로 편입된 조선인 고관대작 중에서 어느 누구도 공작 작위까지 오르지 못했다.
 
회유에다 협박도 덧붙였다. 임재덕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 모자를 어육 내겠다고 위협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글을 쓸 줄 모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씨 부인이 글을 깨쳤다는 사실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할까, 거절할까. 두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랴.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이씨 부인은 결심했다.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그날 아내가 입에 담았던 말을 홍범도는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었던 것 같다. 평생토록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렇게 말했노라고, 노년의 홍범도는 또박또박 기억해냈다.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놓는 등,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거듭되는 악행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처참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하지만 머잖아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향년을 정확히 댈 수는 없지만, 아마 30대 후반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일부 학자는 이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전한다. 북간도 조선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 하니 전혀 불신할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 비구니였던 이씨 부인과의 만남
 
이씨 부인이 홍범도와 부부가 된 것은 기이한 인연 덕분이었다. 처녀 때 그녀는 비구니였다. 동기는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찍부터 북청 산골의 친정집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도 승려였다. 금강산 유명한 사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 출신으로, 제지 수공업자로 일하던 그는 산중 사찰에서 은신 중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죽인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됐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했음을 알게 됐다. 바로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했다. 가정을 이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여인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 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 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아들 둘을 얻었다.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이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성화에 힘입어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나 노년기의 일이었다. 
 
1929년 재혼한 아내 이인복과 함께, 62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
 
이씨 부인의 협력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물러설 인간들이 아니었다. 토벌대는 가짜 편지를 만들어냈다. 이씨 부인이 남편에게 직접 쓴 글인 듯 꾸민 편지였다.
 
그 편지를 몸에 지닌 채 심부름꾼이 의병부대 주둔지 용문동 더뎅이로 파견됐다. 하지만 산속으로 올라간 사자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틀 동안 여덟 차례나 사람을 들여보냈는데,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 ‘17살 의병’ 장남 홍양순의 전사
 
토벌대 집행부는 홍범도의 맏아들 홍양순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홉 번째 사자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가짜 편지를 지니게 한 채 산속으로 올려 보냈다.
 
홍양순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의병 지휘부로 쓰는 집의 문 앞에 섰다. 홍범도는 격분했다. 아버지를 망치는 일에 아들이 가담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홍범도는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 소리가 났다. 부관이 급히 뛰어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총알은 귓바퀴를 맞히고 지나갔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아니었던가. 500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그만 동전을 맞히는 귀신같은 사격술을 익힌 홍범도였다. 격발 순간에 손가락이 떨렸음이 틀림없다. 결정적 순간에 아버지의 고뇌가 작동했던 것 같다. 총알은 미세한 각도로 빗나갔다.
 
상처를 회복한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 대열에 합세했다. 17살짜리 소년 의병이 됐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함흥 신성리 전투, 통패장골 쇠점거리 전투, 하남 안장터 전투, 갑산 간평 전투, 구름을령 전투, 괴통병 어구 전투, 동사 다랏치 금광 전투 등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홍양순은 1908년 6월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홍범도는 그 전투를 잊지 못했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이씨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운명은 길지 않았다. 임재덕과 김원흥이 이끄는 토벌대 200여 명은 용문동 더덩 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짜놓은 매복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결과 토벌대 지휘부를 포함해 군경 209명이 포로로 잡혔다.
 
■ 친일파 처단하며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① ‘폭도토벌경황 제83호’ 1908년 5월12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의병편 4), 국사편찬위원회, 174~175쪽, 1982년② 김종준,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 신구문화사, 219쪽, 2010년③ 이인섭, ‘조선 인민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 장군을 추억하면서’, 1959년, <이인섭과 독립운동자료집> 3,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11년④ <홍범도 장군>, 강용권·김택, 장산, 75쪽, 1996년⑤<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81쪽, 1992년⑥ 장세윤, 위의 책, 146쪽⑦ ‘탈초 홍범도 일지’, 반병률, <홍범도 장군>, 한울, 70쪽,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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