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의 일갈 "백선엽은 가짜 영웅"
한설 예비역 준장, 페이스북 통해 백선엽 강도 높게 비판
23.08.30 12:34l최종 업데이트 23.08.30 12:45l
▲ 한설 예비역 준장, 전 육군역사연구소장. | |
ⓒ 민병래 | 관련사진보기 |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의 한 예비역 장군이 육사의 독립투사 흉상 이전 방침을 지적하면서 백선엽 장군 동상을 육사에 세우려는 움직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육군역사연구소장을 지낸 한설 예비역 육군 준장(육사 40기)은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한국전쟁을 알기나 하고서 백선엽 운운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육사가 독립투사 흉상을 철거하고 백선엽 동상을 세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성토했다.
한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전쟁영웅 동상을 왜 육사에 세우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다들 백선엽을 이야기한다"며 "백선엽은 가짜 영웅이면서, 진짜 영웅들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매장해 버린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백선엽을 왜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백선엽은 한국전쟁 초기 제1사단의 붕괴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단장이었다. 부대를 버려두고 농부옷으로 갈아입고 사라졌다 3일 만에 나타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전쟁 초기 단계에서 부대가 철수하고 무너지는 상황에서 백 장군이 자신이 지휘해야 할 1사단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것이다.
백 장군의 최대 전공으로 꼽는 다부동 전투에 대해서도 한 장군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부동 전투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다부동 전투는 실패한 전투"라면서 "백선엽의 제1사단이 방어를 잘못해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 종심 깊게 들어와서 위기가 발생했다. 결국 그 해결은 미군이 했다. 그런데 실패한 전투가 한국을 위기에서 구한 전투로 탈바꿈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백선엽은 조소의 대상이었지 영웅이 아니었다"면서 "백선엽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친일파 비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니고 있다"고 짚었다.
▲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 |
ⓒ 권우성 | 관련사진보기 |
한 장군은 "전쟁 중에 초개처럼 목숨을 던진 용사는 잊혀지고 가짜 영웅이 판치는 국가가 한국"이라며 "가짜 영웅을 진짜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국가의 정기를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그는 또 "한국전쟁의 영웅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며 "한국전쟁에 대해서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백선엽만 나오면 게거품을 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 장군은 "어제 90대 중반의 노장군이 전화를 해왔다. '백선엽이 죽어서도 만행을 부린다'고 말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네네' 하기만 했다"면서 "초급장교 당시 백선엽이 죽어야 한국전쟁을 다시 쓸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제 백선엽이 죽었는데 한국전쟁을 다시 쓰기도 어려운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언젠가 다시 한국전쟁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하려 한다. 그런 각오를 잊어버리지 않고자 여기에 글로 남긴다. 노장군의 왜곡된 역사에 대한 분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라며 글을 맺었다.
백선엽 혼자 나라 구했나? [한겨레프리즘]
등록 2023-07-30 18:21수정 2023-07-31 02:39
권혁철 기자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
지난 5일 오후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의 동상 제막식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 백선엽 장군의 장녀 백남희씨, 이철우 경북도지사, 이종섭 국방부 장관 등이 제막하고 있다. 연합뉴스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호국의 별”,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최고의 전쟁영웅”….
지난 5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있었던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쏟아진 고인에 대한 칭송들이다.
이명박 정권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2010년 한국전쟁 60주기 기념행사의 하나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시도했다. 2009년 3월 국방부도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백 장군을 명예원수에 추대하는 것은 국군 건군 이념을 훼손한다’는 기사를 썼다. 하지만 국방부는 내부 문건에서 “일부 언론이 부정적인 의견을 제기하고 있지만, 6·25 참전용사의 대표로서 군 내외의 존경을 받는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를 통해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높이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 차원에서 적극 추진하는 게 필요하다”고 밀고 갔다.
순항할 듯하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가 뜻밖의 ‘암초’에 부닥쳤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 원로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국회 국방위에서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명예원수 추대와 관련해 “군 관련 인사들의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며 “일부 (군) 원로들이 백 장군의 6·25전쟁 공과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 국방부는 “원로들이 군 생활을 하며 생긴 백 장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라며 반대 의견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같은 군내 신망이 두터운 원로까지 반대에 동참하자, 국방부도 더 이상 ‘일부의 사감’으로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당시 군 원로들의 반발은 거셌다. 한 인사는 김태영 장관을 찾아가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그만두어라”고 직언했고, 명예원수 추대가 건군 이념을 훼손한다며 헌법 소원을 내겠다는 인사도 있었다. 반대하는 군 원로들의 자필 편지 수십 통이 ‘이명박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 중에는 “백 장군의 비열한 과거를 폭로하겠다”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국방부가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들었다.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백 장군 혼자 나라를 구했느냐는 반론이었다.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이 사단장이던 육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파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상징적인 전투라고들 한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는 240㎞ 낙동강 방어 전투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다. 다부동 전투에는 한·미 8개 사단이 참여해, 육군 1사단은 8개 사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백 장군의 공적이 부풀려진 것이다. 한 원로는 “북한군의 남침 때 개성과 38선을 경계하는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은 제대로 응전도 못 하고 거의 모든 장비를 버리고 패주해 서울 조기 함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며 ‘한국전쟁의 영웅’이란 평가에도 의견을 달리했다.
둘째,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운동을 토벌했던 백 장군의 친일 행적이었다. 일제 앞잡이가 국군의 첫 명예원수가 되면 항일독립운동에 뿌리를 둔 국군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자칫 북한에 6·25 남침을 ‘일제 잔재 소탕 전쟁’으로 정당화하는 핑계를 주게 된다는 우려였다. 독립유공자 단체인 광복회까지 반대하자, 국방부는 “갈등 조장과 백 장군 명예 실추 우려”를 이유로 명예원수 추대 계획을 접었다.
윤석열 정부는 해묵은 ‘백선엽 논란’을 다시 꺼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24일 국립현충원 누리집에서 백 장군의 ‘친일 문구’를 삭제하면서 “최대 국난인 6·25전쟁을 극복한 최고 영웅인 백 장군의 명예를 지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13년 전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에 반대했던 군 원로들이 상당수 숨졌으니, 눈치 안 보고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인가. ‘백선엽 논란’의 공연한 재론이 고인의 명예 실추인지 명예 수호인지 헷갈린다.nura@hani.co.kr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2023년 6월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 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훈부는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은 사이버 참배 서비스 등을 제공하여 안장자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오히려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다른 안장자에 대해서는 범죄경력 등 안장자격과 관계없는 다른 정보는 기재하지 않으면서 특정인에 대한 특정 사실만 선별하여 기재하도록 한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백선엽 장군을 욕보이고 명예를 깎아내리려 했다는 강한 의심과 함께 안장자 간 균형성도 간과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보훈부는 또 “유족의 명예훼손 등 여지가 있음에도 관련 유족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고, 면밀한 법적 검토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 역시 확보되지 못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결정을 유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법적 검토 결과 문구 게재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여 해당 내용을 삭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24일 이전까지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비고에 ‘무공훈장(태극) 수여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란 문구(왼쪽 붉은 테두리 )가 적혀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24일부터 이 기록을 삭제했다.(오른쪽)
이와 관련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객관적 자료는 없다”며 “백선엽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할 당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 것인데, 위원회의 결정이 곧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백선엽 장군은 최대 국난이었던 6‧25전쟁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은 최고 영웅으로, 친일파 프레임으로 백 장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군사편찬연구소 서상문 전 책임연구원의 ‘고백’
종신 자문위원장 꿰차고 공적 미화
입다문 과오들, 재평가 필요
“폐쇄적 분위기에 비판적 질문 못해
편향된 이야기 대중에 확대 재생산”
연구소쪽 “특정인 미화 의도 없어”
죽기 전까지 30여년 ‘자문위원장’
서상문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백선엽씨가 사망 전까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해 자신을 영웅화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8월, 자신의 막사 앞에서 포즈를 잡은 백선엽 육군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먼저 서 박사는 백선엽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된 데는 역사적 사실을 균형 있게 기록하는 역할을 망각한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구원들이 백 장군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할 수 없는 폐쇄적 분위기였고, 결과적으로 균형 잡힌 사실이 기록되지 않아 편향된 이야기들이 대중에게 전파된 결과를 낳았다. 전직 연구원으로서 부끄럽다”며 “지금이라도 연구소가 백 장군과 한국전쟁 당시 역사적 사실을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상문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연구소가 발간한 책을 보며 잘못 기록된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실제 군사편찬연구소가 2005년에 발간한 한국전쟁사 2편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전투’를 보면, 전쟁 발생 전날 밤 장교구락부 파티 내용과 전방이 북한군에 밀리는 상황이 열악한 국군의 상황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언급됐을 뿐, 당시 1사단장으로서 백 장군의 책임 등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반면 5편인 ‘낙동강 전선 방어작전’ 부분에선 백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부동 전투가 서술되는데 백 장군의 회의 사진과 독사진, 사단사령부로 사용된 동명초등학교에 세워진 ‘백선엽 전적비’ 사진도 실리는 등 그의 업적에 집중해 서술돼 있다.
이와 관련해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라 백 장군의 이전 과오까진 서술할 수 없었다. 전체적 관점으로 사실을 서술한 것이지 특정 사건이나 개인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5편에서 ‘백선엽 공적비’ 사진 등이 실리는 등 백 장군의 공적이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 취재 결과, 백 장군은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도 자문위원장직을 유지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 30여년간 이어진 ‘종신직’이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지난 6월 한국전쟁 70주년 행사 때문에 자문위원장직 유지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백 장군에게 연구소 내 사무실과 접견실, 관용차량, 중령급 개인비서, 활동비 등을 제공했다. 차량은 필요하면 배차해 이용했고, 활동비는 업무량에 따라 월 200만원 한도로 지급했다는 게 연구소 쪽 설명이다. 백 장군은 건강이 악화하기 전까지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자문에 응하고 외부 인사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서 박사는 백선엽씨가 죽기 전에라도 친일 활동을 사과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백 장군은 ‘이이제이(적을 이용해 적을 제거한다)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빠져든 것’이라는 변명으로 간도특설대 활동을 합리화했다”며 “한 평생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이 죽기 전까지 치명적인 잘못을 사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범죄”라고 비판했다.옥기원 기자 ok@hani.co.kr
“백선엽은 조작된 영웅” 참전군인이 말한다
등록 :2020-07-20 05:00수정 :2020-07-20 08:38
송인걸 기자
6·25 참전 장성 박경석 예비역 준장
“군사편찬 개입…스스로 전쟁영웅돼”
”반민족행위 따라 법대로 대우해야”
박경석 장군은 19일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백선엽은 조작된 가짜 영웅이어서 용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조작된 전쟁영웅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박경석(88) 예비역 준장은 단호했다. 육사생도 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인 그는 백선엽씨가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했다. 19일 오전 대전 유성 자택에서 만난 박 장군은 “백선엽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백선엽 가족은 그의 주검을 가족묘지로 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백선엽이 일본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장이었으니 공적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죠.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장군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박경석 장군이 대대장 시절 당시 강재구 대위 등 중대장, 소대장 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강 대위는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날 순직했고 이 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됐다.
”그는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다.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무산됐다.
진짜 한국전쟁의 영웅은 누구일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1984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선정한 4대 영웅인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이라고 밝혔다. 김홍일 장군은 개전 초기 국군 패잔병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3일을 버텼고,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은 제6사단장으로 3일 동안 춘천을 방어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해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전황을 뒤집는 인천상륙작전 등을 이끌었고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사수했다. 당시 정부는 김홍일, 김종오 장군의 일대기를 펴내고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다큐멘터리도 제작해 방송했다.
박경석 장군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고,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화 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강재구 당시 대위가 참 군인 정신을 지킨 재구대대의 첫 대대장입니다. 영원한 재구대대장으로서 전사를 왜곡해 진짜를 밀어내고 영웅이 된 가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시절 반공 투사였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800명 단위의 간도특설대는 중국 팔로군과 전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전투부대가 아니라 공작부대로 봐야 합니다.” 강재구 대위는 1965년 10월4일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대원이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에 몸을 던져 부대원의 생명을 구하고 본인은 장렬히 산화한 인물이다. 순직 후 1계급 특진이 이뤄졌다.
그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반민족 주의자 문제는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가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했잖아요?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나쁜 짓 했으면 사후라도 그 죗값을 물어야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여생을 왜곡된 군사를 바로 잡는데 바치겠습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사진 이은덕 사진가 제공
백선엽, 참군인 청빈한 삶?…강남역 수천억대 건물 아들명의 소유
등록 :2020-07-16 05:01수정 :2020-07-16 11:29
오승훈 기자
백인엽과 백희엽까지…백씨 집안 치부사
2018년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생일파티 도중 생각에 잠긴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연합뉴스
등기부등본을 보면, 백씨는 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년 12월 역시 장남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당시 장남 나이는 41살이었다. 백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한 전필건 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5·16 쿠데타 당시 미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은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서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백선엽. 한겨레 자료사진
차명 소유는 백씨 가족이 2007~2010년 사이 벌인 재산다툼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2007년 4월 백씨 장녀, 둘째 딸, 둘째 아들 3남매는 장남을 상대로 부동산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인용 결정을 받았다. 장남이 자신 명의의 건물의 매매, 증여, 전세권, 저당권 등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3남매는 이어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등기부상 주인은 실제 주인이 아니니, 실제 주인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해달라는 주장이었다. 2008년 8월 서울중앙지법이 3남매의 손을 들어주자 장남은 서울고법에 항소했고, 2010년 1월 다시 3남매가 일부 승소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산다툼 결과, 해당 건물은 장남과 백씨 부인이 절반씩 소유하게 됐다가, 2012년 백씨 부인이 지분을 350억원에 장남에게 매각하면서 지금은 온전히 장남 소유가 됐다. 재산을 장남 명의로 해놓았던 게 사달이 난 셈이다. 장남을 뺀 3남매는 미국 시민권자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과정에서 장남과 척을 진 백선엽은 말년에 아내 노씨와 둘이서 지냈다고 한다.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덕흥빌딩. 시가로 2천억원이 넘는다. 카카오맵 거리뷰 갈무리
이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부패군인의 대명사였던 백인엽을 처단하고 싶었으나, 1948년 여순사건 뒤 숙군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백인엽의 형 백선엽을 생각해 선처했다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의 책(<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적었다. 숙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이 남로당 활동으로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구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12연대 연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한 백인엽은 구례지역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과정의 최고책임자였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백인엽을 직접 조사해, 그가 구례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책임이 있다고 진실규명한 바 있다.
죽다 살아난 백인엽은 교육자로 변신, 이후 인천지역에 선인학원이라는 학교법인을 설립한다. 형과 자신의 이름을 더해 만든 그 사학재단에서 백인엽이 벌인 비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약 5700명의 학생을 정원 외로 부정입학 또는 편입시키고, 졸업장을 팔아 61억원을 받아 챙겼다. 지금 20억원(31평)에 거래되는 서울 강남 은마아파트가 1847만5천원에 분양되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짓는다며 월남 피란민 판자촌을 철거해 원성을 샀고 확장을 이유로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외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교직원들을 무조건 해고하고,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총 14개, 학생 수만 3만6400여명에 이르던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사학에서 벌어진 비리는 동양 최대였다. 당시 신문은 백인엽을 두고 ‘인천의 무법자’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선인학원 사학비리로 악명을 떨친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의 육군 중장시절 사진(1956년). 한겨레 자료사진
백선엽의 사촌누이인 증권가의 큰손 백희엽씨도 돈으로 한국사회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1975년 중동건설붐을 타고 건설주가 폭등하면서 증권가에 이름을 날리게 된 백씨는 동아건설을 비롯, 해외 건설주를 대량매집해 거액을 벌었다. 백씨가 한창 명성을 날릴 때에는 단순히 어떤 주식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관련 주식이 폭등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사망한 백씨는 40년대 후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고 박용학씨의 부인이기도 했다.
천수를 누린 백선엽씨를 마지막으로 치부(致富)의 한 획을 그은 백씨 집안 내력도 한 대가 마무리됐다. 여전히 백씨가 청빈하다고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은, 미군도 그를 극진히 예우한다며 전쟁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러나 백씨가 군인이었을 때, 미국의 평가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5·16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은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서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며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백선엽 관련 영상] 백선엽 부대가 우리 가족을 죽였다
백선엽 회고록,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이이제이였다”
등록 :2020-07-13 14:36수정 :2020-07-14 11:38
길윤형 기자
[정치BAR ㅣ 길윤형의 알고싶어]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의 일제 시기 굴곡된 삶
창씨명 ‘백천의칙’은 윤봉길이 죽인 일본 대장과 같아
간도특설대의 대게릴라전 “특필할 성과 거둬”
“한국인 토벌…비난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
일부서 주장하는 ‘야스쿠니 합사’는 불가능한 일
아직 건강하던 시절의 백선엽 장군(왼쪽). 2005년 6월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이 맞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0일 작고한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은 일제 시기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단죄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간도특설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지금껏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백천의칙’을 일본어 이름을 읽는 관행대로 읽으면,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됩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요?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홍구, 지금은 루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죽은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입니다. 둘의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이 일치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무언가 깊은 곡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1920년에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영명한’ 백선엽이 당시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윤봉길의 의거와 그 희생자의 이름을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백선엽이 왜 자신의 이름을 백천의칙으로 바꿨는지 너무 궁금하지만, 100살의 나이로 숨지는 순간까지 백선엽은 자신의 창씨명은 물론, 창씨명을 그렇게 정한 이유에 대해 철저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숨졌다.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
1941년 12월 2년제인 펑톈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이후 1942년부터 1943년 1월까지 만주 북부의 자무스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 1943년 2월 만주 간도성에 있던 항일독립군 탄압부대인 간도특설대에 배치됐습니다.
백선엽은 이후 여러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시절 생활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인(본문에선 한국인)으로 여러 민족적 모순을 느끼면서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던 젊은 시절 백선엽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펑톈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하여 자무스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뒤 간도특설대의 한인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과 베이징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는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충근, 박창암 등과 함께 근무했다.
나는 45년 8월9일 소-만 국경을 돌파해서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1989년)
간도성 옌지현에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 일부가 일계 군관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다.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독립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 임부는 잠임,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김일성이 포함된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9~11월 사이 관동군과 만주군의 토벌 작전에 못 이겨 ‘고난의 행군’을 거쳐 소련 영토로 피신했다-편집자 주)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 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 특설대였다.<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 회고록>(2000년, 일본어판)
1939년 3월에 촬영한 간도특설대 간부 사진.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1993년, 일본어판)
야스쿠니신사는 1868~1869년 보신전쟁 이후 일본 내외의 여러 전쟁에서 일왕을 위해 숨진 이들을 모시기 위해 만든 신사입니다.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된 여러 전쟁에서 숨진 이들이 합사돼 있습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이들은 246만6000여명으로 이 가운데 2만1000여명이 조선인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백선엽은 자연사했으니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대상이 아닙니다. 재미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순직한 자위대 대원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성격의 신사인지 잘 보여줍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한 여러 침략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이런 시설에 전후 순직한 자위대원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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