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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 - 손기정,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민족이었다

by 무궁화9719 2021. 8. 5.

1936년 베를린 올림픽 - 손기정,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민족이었다

2005. 6. 22.

 

 

무쇠 다리의 마라토너, 그는 평생 이 순간을 꿈꿨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6-2] 1984년 마침내 '손기정 코리아' 울려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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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 - 손기정,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민족이었다

2005. 6. 22.

손기정,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민족이었다

 

 ■손긔졍 “Me Korean, Not Japanese.”

1936년 8월10일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영국의 하퍼가 2시간31분23초로 2위로 골인했고 남승용이 그보다 19초가 뒤진 2시간31분42초로 동메달을 땄다. 세계 27개국에서 56명이 출전한 가운데 거둔 쾌거였다. (관련 영상 보기)

둘 모두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지만 유니폼에 그려진 국기는 일장기였다. 현재 공식기록도 일본인 이름으로 돼 있다. 손기정은 Son Kitei, 남승용은 Nan Shoryu다. 손기정은 시상식부터 일본 국적임을 부인했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월계수로 상의에 그려진 일장기를 가렸다.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똑같았다. 사인요청이 들어올 때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적었다. 옆에 한반도 모양까지 그렸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자격으로 독일 국빈 방명록에 이름을 적힌 이름도 ‘손긔졍’이다. 일본 취재진은 왜 한문으로 이름을 적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때 손기정은 "한문으로 쓰는 것보다 한글의 횟수가 적어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손기정은 외국 기자들이 자신의 국적을 물을 때도 "Me Korean, not Japanese"라는 말로 한국인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상황을 표현한 손기정의 말이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일본 대표로 참가한 김은배 선배가 현지에서 사인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써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따라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글로 사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육상경기연맹은 마지막까지 일본인 혈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기권으로 탈락한 시오아쿠와 우승한 내 혈통이 뒤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이 열망하는 마라톤 우승자는 일장기를 가슴에 단 일본인 선수였지 조선인이 아니었다."

<나치올림픽>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만델은 "손기정은 조선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사인요청을 받으면 언제나 조선 이름으로 썼으며 그 옆에서 한반도 지도를 그려 넣었다.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에 언제나 코리아에서 왔습니다고 답했다. 마라톤 시상식 때 손기정과 남승용은 기자들에게 자기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고 적었다.

<올림픽 역사의 100가지 위대한 순간>이라는 책에서 버드 기린스팬은 “미국의 전설적인 마라토너로서 손기정과 친한 존 켈리는 손기정은 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밝혔다”고 적었다.

<일장기와 마라톤-베를린 올림픽 손기정>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가마다는 여러 기록과 베를린올림픽 전후 찍은 사진 30장을 살펴봤지만 손기정이 일장기를 단 옷을 입은 장면은 본선 레이스 이외에는 찾지 못했다. 이후 손기정은 가마다에게 “나는 조선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니었으니 일장기 달린 옷을 입고 싶지 않았다.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는 본 경기 한차례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도 일장기를 지웠다.

동아일보는 시상대에 오른 사진을 쓰면서 손기정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웠다. 1936년 8월25일 사건이었다. 손기정이 우승한 지 16일이 지난 때였다. 그걸 발견한 조선 총동부는 동아일보에 들이닥쳤고 동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동아일보 사원을 집어넣었다. 당시 주요 용의자로 꼽힌 사람이 체육부 주임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제판기술자 서영호 등 다섯 명이었다. 이들은 40일 동안 엄청난 고문에 시달렸다. 이길용 기자의 아내 정희선씨의 말이다.

"저희 바깥양반은 몸집이 작아 몸무게가 35~36kg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남달리 튼튼해 그때까지 병이라고는 한 번도 앓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모진 고문으로 몸이 완전히 상해버렸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품을 유치장 안에 들여보내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름이었으니까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지요. 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 피투성이였습니다."
 


동아일보는 8월29일자로 무기한 간행 정지처분을 받았고 이길용 등 다섯 명은 언론계로부터 영구 추방당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체육기자연맹은 연말 체육기자연맹의 밤 행사에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손기정, 남승용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냈을 때 심훈이 쓴 시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그대들의 첨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의 한 사람이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 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다음은 조선일보가 1936년 8월11일 ‘조선 남아의 의기’라는 사설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손, 남 두선수의 승리로서 민족적 일대 영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일대 자신을 얻게 됐다. 즉 조선의 모든 환경이 불리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민족적으로 타고난 자질은 어느 다른 민족보다 앞설지언정 뒤지지 않으며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스포츠에 있어서 세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거니와 우리는 이번 승리를 계기로 문화적, 도덕적, 기타 온갖 분야에서도 세계 수준에 도달할 날이 올 것을 믿게 된다."

■손기정, 그리고 남승용

손기정과 남승용은 똑같이 1912년생이다. 손기정은 평북 신의주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아버지 슬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남승용은 전남 순천 농부 아버지에게서 낳다. 기록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기록으로 보면 손기정이 생일이 빠르다.


손기정은 그래도 남승용을 선배로 모셨다. 남승용이 1931년 서울로 올라와 협성실업학교에 다니다가 19세 때 양정고보(지금 중학교) 1학년으로 편입했다. 손기정은 이듬해 스무 살 나이로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손기정은 선배들이 쓴 교과서 등을 물려받고 육상부 선배 부잣집 아들 집에 가정교사고 들어가 숙식을 해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기정은 이른 새벽 삼청동을 돌아 북악산 꼭대기를 오르며 훈련을 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었고 기록을 줄이기 위해 팬티 등 속옷까지 달라냈다. 남승용은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 유우배달로 학비를 마련하며 생활했다.

둘은 1936년 5월21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일본마라톤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섰다. 당시 일본은 상위 3위까지 올림픽에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조선인은 1명으로 국한시킨다는 규정도 마련했다. 그건 앞선 1932년 LA올림픽에서 일본대표로 출전한 츠다가 5위에 밀린 게 계기가 됐다. 당시 우리 민족인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를 각각 차지했는데 일본은 이들 두 명이 초반 레이스에서 츠다를 앞서 나가 츠다의 컨디션을 떨어뜨린 게 패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발전에 앞서 손기정은 선발전 결과와 크게 상관없이 올림픽 출전이 사실상 결정돼 있었다. 앞선 대회에서 세계기록을 세우는 등 워낙 기록과 페이스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승용 처지는 달랐다. 남승용이 올림픽에 나가려면 반드시 1위를 해야 했다. 대회를 치른 결과, 남승용이 1위를 차지했고 손기정이 2위를 했다. 3,4위는 일본선수였다. 손기정과 남승용이 서로 1,2위를 나눠갖자고 작전을 짰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어쨌든 결과는 둘이 원한 대로 됐다. 손기정과 남승용 둘 다 베를린올림픽 출전권을 얻은 것이다.

이 후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다만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손기정에 비해 관심도와 파급력이 떨어진 남승용이 함께 하기를 꺼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손기정 아내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남승용 아내에게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한 게 둘 사이를 더 소원하게 만들었다는 전언도 있다. 어쨌든 손기정은 주로 한국에서 머물며 최고 영웅 대우를 받은 반면 남승용은 좀체 대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손기정 딸의 전언에 따르면 손기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 산책을 다갔다가 넘어진 뒤에는 울고 집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그 후 의사는 하루 500m 이상 걷지 말라고 했다. 손기정은 자서전 <손기정과 남승용 ‘빛과 그림자’>에서 죽음을 앞둔 심정을 아래와 같이 썼다.

"권태하 선배는 1971년 65세로 생애를 마감했고 김은배 선배도 1980년 70세로 인생을 마쳤다. 나는 때때로 42.195km 긴 마라톤 코스 위에 나 혼자만이 남은 것 같은 외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골을 향해 초조해할 것도 없겠다. 나를 위해 아직 결승 테이프가 걸려 있다면 터벅터벅 걸어서라도 도달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제 새삼 늙은 몸에 더 이상 채찍질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손기정은 2002년 11월15일 90세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남승용은 그보다 앞선 2001년 2월20일 89세로 타계했다.

글/사진=대한체육회 90년사(대한체육회 발행)

스포츠 전문 컬럼니스트 김세훈 기자

 

#6. 눈물로 빚어낸 대한민국 올림픽 도전사

 

대한민국 이름으로 하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한 것은 제14회(1948년) 런던 올림픽이다. 물론 그에 앞선 10회(1932년) LA올림픽, 11회(1936년) 베를린올림픽에도 우리 민족은 올림픽에 나섰다. 그러나 그 때는 안타깝게도 우리 선수들은 일본 국적이었고 그 때 성적 또한 지금도 일본 것으로 돼 있다. 우리 민족이 쓴 올림픽 역사를 정리해본다. 사진은 대한체육회가 발생한 <대한체육회 90년사>에서 발췌했다.
 


■1932년 LA 올림픽=마라톤 김은배 권태하, 복싱 황을수 등 3명이 출전했다. 김은배는 6위, 권태하는 9위였다. 인도가 1900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영국 식민지였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무대를 밟은 필리핀도 미국 식민지였다. 자국 국기를 앞세워 출전한 두 국가가 우리는 너무 부러웠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마라톤에서 1·3위가 나왔다. 1위는 손기정, 3위는 남승용이었다. 손기정은 시상식에서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를 숙여 일본에 대한 반항을 표현했다(손기정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농구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 김용식, 복싱 이규환 등 5명도 우리 민족이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았고 그해 11월26일 조선체육회가 재건됐다. 그러나 런던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IOC 총회로 가던 전경무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항공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여운형 뒤를 이어 체육회장이 된 유억겸은 취임 50일 만에 유명을 달리하는 등 체육계 분위기는 나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조선올림픽위원회는 IOC에 가입했고 런던올림픽에 대한민국으로 처음 출전했다. 당시 출전비용이 부족해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운동도 진행됐다. 역도 김성집, 복싱 한수안이 동메달을 땄다. 무려 18일 동안 배, 기차, 비행기를 갈아타고 런던까지 간 뒤 거둔 대단한 성적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전쟁 중에 어렵게 출전했다. 역도 김성집, 복싱 강준호가 동메달을 따 국민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마라톤 최윤철은 4위에 머물렀다. 2년 전인 1950년 보스톤 마라톤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6·25 전쟁만 없었다면 올림픽 마라톤 메달도 가능했을 것이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올림픽 첫 은메달을 복싱 송순천이 따냈다. 독일 선수와 맞붙은 결승에서 판정만 제대로 나왔다면 첫 금메달리스트도 될 수 있었다. 역도 김창희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마라톤 이창훈은 헬싱키 올림픽 최윤철처럼 다시 4위에 그쳤다. 레슬링에서는 이상균이 4위를 했다 이상균은 왼손 엄지부터 가운데까지 손가락 3개가 없었다(진한 감동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멜버른 올림픽 세부내용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1960년 로마 올림픽=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이은 4·19혁명 등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체육회도 올림픽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다. 노메달이었다. 최고 성적은 레슬링 봉창원, 역도 김해남이 기록한 4위. 아쉬운 건 복싱 김득봉이다. 김득봉은 8강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하고도 2-3으로 판정해했다. 공교롭게도 59-60으로 김득봉이 진 걸로 판정한 게 일본 심판이었다. 김득봉이 이겼다면 준결승 상대가 부상으로 기권했기 때문에 최고 은메달이 가능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광복 후 일본에서 열리는 올림픽. 우리가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는 건 당연했다. 도교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우수선수강화훈련단도 집중적인 훈련을 소화했다. 대회는 10월10일부터 열렸지만 우리 1진은 9월18일, 2진도 당초 일정을 앞당겨 9월23일 일본으로 갔다. 당시 재일동포들도 900만 엔을 모금해 대표팀에 전달했다. 참고로 당시 올림픽 출전예산이 2700만 엔에 불과했다. 복싱 정신조, 레슬링 장창선이 은메달을 땄고 유도 김의태가 동메달을 보탰다. 세선수가 모두 결승 또는 준결승에서 일본선수에게 패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도쿄대회 3분의 1수준으로 선수단이 줄었다. 금메달은 없었고 지용주가 은메달을 따는 등 복싱에서 은 1, 동 1개가 나왔다. 여자배구는 5위로 선전했지만 남자농구는 필리핀에게도 패해 14위에 그쳤다. 70년 방콕,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2연속 우승한 여자 포환던지기 백옥자는 메달권가 무려 5m 안팎에 뒤져 13위에 머물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유도 오승립이 은메달만 1개 따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에게 뒤진 걸 만회해야한다는 요구가 강했다. 75년부터 76년 초까지 선수 198명이 총 426일 동안 훈련했다. 당시 ‘선 체력, 후 기술’이라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혹독한 훈련 때문에 여자배구 주전 박인실이 선수촌을 이탈해 제명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한민국 올림픽 첫 금메달이 나왔다. 레슬링 양정모는 숙적 몽골의 오이도프에게 패했지만 벌점차로 금메달을 따냈다. 여자배구는 헝가리를 물리치고 3위에 올랐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이자 한국 여자 선수가 올림픽에서 따낸 1호 메달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불참했다.

■1984년 LA 올림픽=1981년 9월, 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뒤 차기 개최국으로서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선수와 임원 등을 모두 합해 288명의 대규로 선수단이 파견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로 사상 최초로 종합 10위에 진입했다. 유도가 금메달 2개(하형주 안병근),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효자노릇을 했다. 레슬링도 금 2개(김원기 유인탁), 은 1개, 동 4개로 잘 했고 복싱도 금·은·동을 한 개씩 보탰다. 유도·레슬링·복싱 등 투기 삼형제가 전체 19개 메달 중 16개를 책임졌다. 양궁은 금 1개, 동 1개를 획득했다. 박찬숙이 이끈 여자농구, 여자핸드볼은 값진 은메달을 따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금메달 12개 등 33개 메달로 종합 4위에 올랐다. 총 메달수와 순위 모두 역대 최고. 양궁이 남자 개인전만 빼고 금메달 3개를 따냈다. 김수녕이 올림픽 최초 2관왕이 됐다. 격투기 삼형제 유도, 레슬링, 복싱이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를 합작했다. 한국이 따낸 금메달 12개 중 절반을, 전체 33개 메달 중 42%를 책임졌다. 탁구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와 김기택이 1·2위를 차지했다. 구기 종목에서는 여자 핸드볼이 금메달, 남자핸드볼과 여자하키가 은메달을 따냈다. 축구는 소련과 0-0, 미국과 0-0으로 비긴 뒤 아르헨티나에 1-2로 패해 8강에도 못 갔다(올림픽 유치와 대회 개최 등 서울 올림픽 세부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종합 7위에 올랐다. 88년 대회에서 거둔 좋은 성적이 홈 어드밴티지만이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 서울체고 2학년 사격 여갑순이 금메달을 땄다. ‘작은 거인’ 역도 전병관이 체급을 올려 금메달을 획득했다. 레슬링 박장순, 안한봉도 정상에 섰다. 처음으로 정식종목이 된 여자유도에서는 김미정이 초대 챔피언이 됐다. 여자핸드볼은 단체 구기종목 최초로 올림픽 2연속 정상에 섰다. 폐막일에는 마라톤 황영조가 금메달을 보탰다. 대회 마지막 금메달이었다. 56년 전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기정은 당시 스탠드에서 황영조의 우승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여갑순은 대회 1호 금메달리스트, 황영조는 최종 260호 금메달리스트였다. 대회 처음과 끝을 한국이 장식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금메달은 줄었지만 종합 순위 10위를 유지한 게 의미가 있었다. 레슬링 심권호가 첫 금메달을 땄다. 이 금메달은 한국이 동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딴 100번째 메달이었다. 여자 유도 조민선은 5경기 연속 한판승으로 1위에 올랐고 전기영도 한판을 제외한 4판을 한판승으로 장식하며 금메달을 보탰다. 양궁 김경욱은 2관왕이 됐다. 가장 아쉬운 장면은 마라톤 이봉주였다. 이봉주는 1위 조시아(남아공)에게 불과 3초 뒤진 2위에 만족해야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사상 최초로 남북한 공동 입장이 이뤄졌다. 양 팀을 합해 180명 선수단이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KOREA’라는 이름으로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96번째로 메인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사격 강초현이 마지막 발을 실수해 은메달에 그쳤다. 남자 펜싱 이상기는 한국 펜싱 사상 첫 메달을 동메달로 장식했고 나흘 후 김영호는 그걸 금빛으로 바꿨다. 처음으로 정식정목이 된 태권도에서는 3개 금메달이 나왔다. 야구가 동메달을 따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종합순위 톱 10에 다시 진입했고 메달도 서울올림픽 이후 최다인 30개를 따냈다. 유도 이원희, 양궁 박성현, 태권도 문대성, 남자탁구 유승민, 배드민턴 김동문-하태권조, 레슬링 정지현이 금메달을 따냈다. 김대은은 한국 남자 체조 역사상 개인종합에서 처음으로 은메달을 획득했고 양태영은 마지막 철봉종목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저조한 점수를 받아 안타까운 은메달에 그쳤다. 여자핸드볼은 덴마크와 2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이어진 승부던지기에서 2-4로 패해 은메달에 만족했다. ‘우생순’이 나온 계기가 된 장면이다. 남자축구는 처음으로 8강에 들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금메달 13개로 최다 금메달을 따냈다. 수영 박태환은 한국 최초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다. 자유형 400m에서 우승한 박태환은 200m에서도 은메달을 추가했다. 역도 장미란은 세계기록을 거푸 갈아치우며 정상에 올랐다. 여자역도 종주국격인 중국 한 복판에서 거둔 통쾌한 금메달이었다. 진종오는 16년 만에 사격 금빛 과녁을 적중시켰고 태권도는 4개 종목을 싹쓸이했다. 야구는 9전 전승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대회 개막전 영화 <우생순>이 개봉되면서 관심을 끈 여자핸드볼은 안타까운 동메달을 따냈다. 문대성은 대회 기간 중 IOC 선수위원투표에서 29명 중 1위로 선수위원으로 선임됐다. 스포츠 전문 컬럼니스트 김세훈 기자
 

#8. 한국이 따낸 가장 값진 올림픽 메달은?

올림픽 메달.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다. 모두 선수의 땀과 노력이 배어있고 고통과 고뇌를 이겨낸 훈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열악한 상황,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우리나라 국가적인 위상, 그리고 우리나라 스포츠의 수준 등을 감안하면 다른 메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어치가 있는 메달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따낸 메달 중 그런 메달은 어떤 것일까.


■전쟁 중에 온갖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최대 올림픽 유산으로 꼽는 대회는 어떤 것일까. 그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6·25 전쟁 포화 속에서도 출전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952년 2월 오슬로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이어 헬싱키올림픽 출전도 체육계 각 단체가 온갖 잡음만 일으킬 뿐 진전이 없었다. 그해 1월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해달라”는 IOC 브런디지 위원장의 요구도 무산되는 듯 했다. 그 때 여기저기에서 올림픽 출전을 위한 움직임이 생겼다.

UN군으로 참전한 미군이 한국 선수단 파견비용을 모금했다. 해외동포도 돈을 보내왔다. 국회의원도 세비 중 10%를 갹출했다. 5사단 장병들은 480만원을 모았고 미8군 사령관은 1만4000달러를 내놨다. 서울대학교는 140만원을 내놨고 내무부도 78만원을 모으는 등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우리 선수단 44명은 6월12일 부산에서 항공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30일 비행기로 헬싱키에 도착했다. 우리는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승마, 사이클 등에 출전했다. 역도 김성집, 복싱 강준호가 귀한 동메달을 따냈다. 김성집은 한국 선수 처음으로 올림픽 2대 대회 연속 메달을 따낸 선수가 됐다. 마라톤에서는 최윤철이 올림픽 기록을 깨뜨리고도 4위에 머물렀다.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일어났던 광복 후 첫 올림픽인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은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정식 가입국으로 승인받았다. 이듬해인 1948년 런던올림픽은 대대적인 모금 운동 덕분에 출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육상, 축구, 농구, 복싱 등 7개 종목에 67명을 파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종목 단체들 간 알력이 심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선수단을 올림픽에 보내야했기 때문에 미군정이 비용을 대줘야 출전이 가능했다. 그 때 우리는 친일파로 배척받아온 이상백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체육계 고위임원을 역임했고 1932년 LA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일본 선수단 고위직을 맡은 사람이었다. 이상백씨는 맥아더를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맥아더는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을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그 후 2년 동안 미국올림픽위원장까지 맡은 체육인이다. 그와 함께 올림픽 출전 후원금 마련을 위해 올림픽 후원권이 판매되기도 했다.

 

<올림픽 후원권>


그해 6월21일. 67명 선수단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배편으로 후쿠오카로 간 뒤 다시 기차편으로 요코하마로 이동했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갔고 홍콩에서 두 개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해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당시 마라톤에 참가한 함기용(82)옹은 “약 열 여드레 동안 배, 기차, 비행기를 갈아타고 런던까지 갔다”면서 “가는 동안 배 갑판에서, 비행기가 주유하러 잠시 내린 공항에서도 훈련하다 보니 정작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우리는 동메달을 두 개나 따냈다. 역도 김성집과 복싱 한수안이다. 대한민국 이름으로 따낸 첫 메달이었다.

 

<김성집 동메달 획득 사진>

■노골적인 편파판정 속에 금메달이 은메달로 바뀐 1956년 멜버른 올림픽

한국은 7개 종목에서 선수 48명을 파견했다. 당시 따낸 메달 중 가장 안타까운 게 복싱 송순천이 따낸 은메달이었다. 당시 송순천이 결승에서 만난 선수는 독일 베렌트였다. 송순천은 베렌트를 압도했지만 판정은 베렌트 승리로 나왔다. 송순천은 당시 “졌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나뿐 아니라 동양 선수들은 모두 억울한 대접을 받았다. 나와 싸운 대부분 선수들이 KO되지 않은 건 심판 때문이었다. 그렇게 붙잡고 늘어져도 실격시키거나 벌점을 주지 않은 건 분명히 규정에 어긋난 처사였다”고 분개했다.

 

<송순천 시상식>

금메달리스트 베렌트도 패배를 인정했다. 7년이 지난 1963년 베렌트는 대한체육회로 송순천에 편지를 보내왔다. 베렌트는 편지에서 “그날의 결승전, 그리고 당신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게임은 당신이 이긴 것이다. 서독 친구를 통해 당신이 최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리 알았다면 선물이라도 보냈을 것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꼭 만나고 싶디“고 적었다. 우승자도 편파판정을 인정한 것이다. 당시 판정만 제대로 나와 송순천이 이겼다면 한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양정모가 아니라 송순천이었을 게다.

<송순천이 훈련한 한국체육관>

34세 노장 역도 선수 김창희는 동메달을 따냈다. 김창희는 메달을 따낸 뒤 “올림픽 선수촌 식사가 좋아서 멜버른에 도착한 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한 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또 다른 감동을 안겨다준 선수는 레슬링 이상균이었다. 이상균은 4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거둔 4위라는 성적표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이상균은 왼손 엄지손가락부터 가운데 손가락까지 3개가 없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1951년 수류탄 뇌관을 잘못 뽑으면서 터져 손가락이 날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슬링 선수가 손가락이 없으면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 그가 차지한 4위는 메달 못지않게 소중한 이유다. 이후 이상균은 지도자가 돼서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장창선 등을 길러냈다.

마라톤도 너무 안타까웠다. 당시 이창훈은 2시28분45초, 4위로 골인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이은 2개 대회 연속 4위. 국제대회 경험 부족 때문에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한 게 뒤늦게 알려졌다. 이창훈은 “오후 3시18분 출발을 앞두고 날씨가 너무 더워 선수들은 주경기장 안에 냉방장치가 잘 돼 있는 곳에서 기다렸다”면서 “기온이 너무 낮아서 벌벌 떨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창훈은 이어 “나는 나이가 어려서 대회 본부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하는 걸로 알고 꾹 참고 있다가 출발시간이 다 돼 밖으로 나가라고 할 때 나왔다”면서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다른 선수들은 미리 나와서 몸을 풀고 난 이후였다”고 덧붙였다. 이창훈은 37km에서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토펙을 제치는 등 있는 힘을 다 했다. 그러나 그는 3위보다 58초 뒤진 기록으로 4위로 골인했다. 제대로 워밍업만 했으면 메달도 가능했다. 스포츠 전문 컬럼니스트 김세훈 기자

 

오늘의 우표 11/15 - 손기정(孫基禎)

 

  

 

2002 -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孫基禎) 사망

손기정 [孫基禎, 1912.8.29~2002.11.15]

 

'마라톤 영웅'손기정씨 별세

 

일제 치하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쳤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15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손 옹은 노환인 폐렴 증세가 악화돼 갑자기 의식을 잃은 채 13일 서울 일원동삼성서울병원에 실려왔지만 끝내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15일 오전 0시40분께 별세했다.

 

임종을 지켜본 아들 정인(59)씨는 "그동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닥치고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라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중환자실의 위유미 당직 레지던트는 "자정을 넘어가면서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다가 심전도의 변화가 없어 사망을 확인했었다"면서 "편안한 상태에서 가셨다"고 전했다.

 

지난 몇 년간 노환에 따른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고생해 온 손 옹은 지난 9월부터는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믿기지 않을만큼 건강했던 손 옹은 지난 98년 다리에 동맥경화 증세를 보이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생명과도 같은 다리에 이상이 생기면서 2000년부터는 치매 증세가 찾아왔고 신부전증을 비롯한 각종 합병증에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지난해부터는 일체의 외부접촉을 끊고 집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신이 또렷할 때면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이봉주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등 후배들의 근황을 물어올 정도로 마라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구멍가게와 행상을 하던 부모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난 손 옹은 한국마라톤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산 증인이었다.

 

암울했던 시절 베를린마라톤에서 우승하며 핍박받던 민족에 커다란 긍지와 용기를 안겨줬고 이는 20세기 한국 스포츠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기미가요가 울리는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었으며 금메달은 영광보다 큰 상처로 가슴속에 박혔다.

 

손 옹은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에는 지도자로 나서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키워내며 한국이 마라톤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부터는 대한육상연맹 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 등을 맡으며 행정가로 한국 체육 발전을 위해 이바지해 왔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태극마크의 한'도 무려 56년이 지난 92년, 공교롭게도 같은날 같은시에 열린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면서 풀렸다. 당시 팔십 노구를 이끌고 직접 바르셀로나를 찾았던 손 옹은 태극마크를 단 황영조가 1위로 결승선을 넘자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주저 앉았었다. 하지만 쌓인 한이 풀려서인지 손 옹은 이후 눈에 띄게 늙어갔고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손 옹은 국민훈장 모란장(70년)을 수상했으며,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인씨와 딸 문영(61)씨가 있다.

 

이정진 기자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2.11.15(금) 01:01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11/005000000200211150101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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