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성폭력범 혀 깨문 최말자씨 ‘무죄’ 구형…“61년 고통 드려 사죄”
최씨 재심서 검찰 “정당방위 인정”
김영동기자
- 수정 2025-07-23 16:43
- 등록 2025-07-23 14:04

“이겼습니다! 이겼습니다! 이겼습니다!”
23일 오전 11시40분께 법정을 나선 최말자(79)씨가 왼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보라색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최씨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61년 만의 재심, 최말자는 무죄다!”로 답했다. “법원 복도에서 정숙해야 한다”고 말하던 법원 청원경찰관도 최씨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날 오전 11시20분께 부산지법 형사5부(재판장 김현순)는 부산지법 352호 법정에서 1964년 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 유죄 판결을 받은 최씨의 재심 첫 공판을 열었다.
그때도 무죄, 지금도 무죄
검찰은 증거조사와 피고인 심문을 생략한 뒤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 이후 빈틈없이 사건을 재검토했고, 당시 급박하고 현저한 침해에 대한 소극적 방어 등 성폭력 피해자로서 위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검찰은) 차별적 편견을 걷어내고, 법률적 시각으로 범죄사실을 판단해야 했다.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2차 가해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자로 보호받아야 할 최씨에게 (검찰이) 고통을 줬다. 사죄드린다”고 했다.
검찰은 “이 사건에서 피고인(최씨)의 행위는 정당하다. 과하지도, 위법하지도 않다. 피고인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구형했다.
최씨 변호인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무죄가 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죄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 검찰과 법원의 잘못으로 오판됐던 것이다. 고통의 시작은 가해자였지만, 이를 가중하게 한 것은 검찰과 법원이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법원이 응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최 선생 “후손은 성폭력 없는 세상서 인권을 살아가길”
최씨는 최후 진술에서 “국가가 1964년 생사를 넘어가는 악마 같은 그날의 사건을 어떤 대가로도 책임질 수 없다. 피해자 가족의 피를 토하는 심정을 끝까지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고 꼭 부탁하고 싶다”며 “61년간 죄인으로 살아온 삶, 희망과 꿈이 있다면 후손들이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인권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대한민국 법을 만들어 달라고 두손 모아 빌겠다”고 말했다.
첫 공판이 끝난 뒤 최씨는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이라도 (검찰이) 잘못을 인정하니, 대한민국 정의는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저를 위해 이렇게 여러분들께서 헌신해 주셔서 뭐라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최씨의 변호인 김수정 변호사는 “가장 의미 있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검찰 쪽에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최씨를 보호하지 못한 것에 사과하고, 정당 방위를 인정하면서 무죄를 구형했다는 점이다. 법원도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해 최씨에게 깊은 사과와 위로를 전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1964년 5월 최씨(당시 18살)는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려고 집을 나섰다가 노아무개(당시 21살)에게 성범죄를 당했다. 노씨가 최씨를 쓰러뜨리고 입을 맞추려고 달려들자, 최씨는 ‘숨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의 혀를 깨물어 저항했다. 노씨 혀는 1.5㎝ 정도 잘렸다. 1965년 1월 법원은 중상해죄로 최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성범죄에 저항한 정당방위라는 최씨의 주장은 배척됐다.
사건 발생 56년 만인 지난 2020년 5월 최씨는 검찰 수사 당시 불법 구금 등 불법수사가 이뤄졌다며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1심과 2심은 객관적이고 분명한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해 12월18일 “별다른 사실 조사도 없이 ‘재심청구인 진술’ 외에 다른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최씨 사건을 파기환송했고, 부산지법은 지난 2월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최씨의 선고 공판은 9월10일 열린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올해의 여성운동상에 최말자·온지구씨
한국여성단체연합 선정
김효실기자
- 수정 2025-03-06 20:26
- 등록 2025-03-06 17:26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은 3·8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지난 한해 우리 사회의 성평등과 여성운동 발전에 공헌한 개인·단체에게 주는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에 최말자(79)씨와 온지구(활동명)씨를 선정했다고 6일 밝혔다.
최말자씨는 1964년 자신을 강간하려는 가해자에 저항하다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중상해죄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수사·사법기관은 “결혼하면 끝나는 일”이라며 최씨에게 가해자와 결혼할 것을 강요하는 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최씨는 성차별이 공고했던 시대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로 60살이 넘어 여성 인권 공부를 시작했고, 사건 발생 56년 만인 2020년 한겨레 인터뷰로 ‘미투’에 나섰다. 같은 해 청구한 재심 신청이 2021년 기각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항고와 재항고를 거쳐 5년여 만에 재심 개시를 이끌어냈다. 여성연합은 “국가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되는 피해를 입은 지 60년 만에 재심 개시의 길을 열어 반성폭력 운동의 큰 이정표를 세웠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온지구씨는 일명 ‘진주 편의점 여성혐오 폭행 사건’ 피해자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쇼트커트를 했다는 이유로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며 폭행했다. 그는 사건 직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며 그저 불운한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쇼트커트 인증 릴레이를 하고 재판 방청 등 연대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변화했다. 여성연합은 “온지구씨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범죄를 ‘묻지마’ 범죄로 호도하는 사회에 여성혐오범죄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분투했고, 지난해 국내 최초로 여성혐오를 비난할 만한 범행 동기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판례를 이끌어냈다”고 했다.

여성연합은 ‘성평등 디딤돌’로 부당해고와 맞서 1년 넘게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정혜 수석부지회장과 소현숙 조직2부장,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판결을 끌어낸 소송 당사자 김용민·소성욱 부부와 변호인단, 공교육 체계에서 구조화된 젠더폭력에 맞선 지혜복 교사, 돌봄 일자리 안정화를 위한 투쟁을 이끌어나가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를 선정했다. 시상식은 8일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열리는 제40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진행된다.
한편, 올해의 ‘성평등 걸림돌’에는 여성혐오를 산업화하고 성차별 통념을 강화하는 ‘사이버렉카’ 유튜버, 화성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23명 사망자 중 여성이 17명)를 일으킨 박순관 아리셀 대표이사, 경기 동두천 낙검자 강제수용소(성병관리소) 보존 문제와 관련해 국가에 의한 여성 착취 역사를 부정하고 철거를 강행하려한 박형덕 동두천시장, 성폭력 가해를 두 차례 저지르고도 의정활동을 이어가는 송활섭 대전광역시의원과 그의 시의원 제명안을 부결시킨 대전광역시의회 의원 14명, 성평등 도서를 폐기하고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추진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건의안’을 채택하며 혐오 정치를 조장한 경상남도 창원특례시의회, 반여성·반인권적 망언 등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사명을 무너뜨린 김용원 상임위원과 이충상 전 상임위원, 음성·영상 합성기술(딥페이크) 성범죄에 제대로 된 대응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는 교육부가 뽑혔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성폭력 저항하다 가해자 된 최말자씨, 61년 만에 재심 열린다
김영동기자
- 수정 2025-02-13 15:54
- 등록 2025-02-13 15:44

1964년 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 유죄판결을 받은 최말자(79)씨의 재심이 열린다.
부산고법 형사2부(재판장 이재욱)는 최근 대법원 파기환송심에 따라 부산고법으로 다시 돌아온 최씨의 재심청구에 대해 “지난 10일 원심 결정을 취소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고 13일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재심청구를 하면서 최씨가 제출한 진술서를 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된다. 진술 자체로 모순되거나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나 사정과 특별히 모순되지 않으며, 허위로 진술할 뚜렷한 동기나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재심 청구의 의도나 동기 등에서 부자연스럽고 비합리적이라거나 재심제도를 악용한다고 볼 만한 사정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최씨 진술 외에는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 등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거나 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피고인의 진술 신빙성을 배척하는 것은 재심청구인인 최씨의 귀책사유라고 볼 수 없다. 재심사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위법하므로, 이를 지적하는 최씨의 주장은 이유 있다”고 덧붙였다.
1964년 당시 18살이던 최씨는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고 21살이던 노아무개씨에게 성범죄를 당했다. 노씨가 느닷없이 최씨를 쓰러뜨리고 입을 맞추려고 달려들자, 최씨는 ‘이대로 숨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혀를 깨물어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노씨 혀는 1.5㎝ 정도 잘렸다. 최씨는 이 사건으로 1965년 1월 중상해죄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성범죄에 저항한 정당방위라는 최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건 발생 56년 만인 지난 2020년 5월 최씨는 검찰 수사 당시 불법 구금 등 불법수사가 이뤄졌다며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1심과 항소심 모두 최씨 주장을 증명할 객관적이고 분명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등 이유로 기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해 12월18일 “별다른 사실 조사도 없이 ‘재심청구인 진술’ 외에 다른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불법 구금에 대한 최씨의 일관된 진술과 그에 부합하는 직간접적 증거들이 제시됐고, 이를 탄핵할 수 있는 다른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며 최씨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검사가 욕했다, 성폭행 하려던 남자 깨문 내가 가해자라고”
인터뷰ㅣ‘56년 만의 미투’ 최말자씨
“검사는 ‘남자 불구 됐으니 책임’ 판사는 ‘결혼해’”
전형적 2차 가해…사건보다 검찰·법원에 더 분노
재심 개시 촉구 탄원서 1만5685명 온라인 서명

“재심 청구 기각 이유가 너무 화가 난다. 곱씹어 읽어 보려고 직접 썼다.”
지난 15일 부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은발의 여성이 가방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 종이 앞면 가득 펜으로 쓴 글의 제목은 ‘이 사건 재심 청구, 기각, 이유’다.
2021년 부산지방법원이 그의 재심 청구를 기각하며 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청구인에 대한 공소와 재판은 반세기 전에 오늘날과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뤄진 일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여 사회문화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순 없다.’
“반세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재심을 열 수 없다고 한다.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다.” 그는 법원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세 차례 내리쳤다. 그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된 최말자(77)씨다.
최씨는 3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그는 자필로 쓴 탄원서에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제 삶을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다”며 “재심을 다시 열어 명백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다시 정의하고 정당방위를 인정하여 구시대적인 법기준을 바꿔야만 여성 성폭력 피해자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며 더이상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최씨가 법원에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자필 탄원서를 제출한 날, 1만5685명의 시민들이 최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며 온라인 서명에 동참했다. 또 부산에 사는 최씨를 대신해 지난 3~30일까지 19명의 여성들이 대법원 앞에서 최씨의 재심을 촉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이어왔다.
최씨는 이런 연대의 손길에 대해 “여기까지 오게끔 해줘서 정말 너무 고맙다”며 “내가 무엇을 어떻게 보답을 할 수 있을지, 죽을 때까지 숙제”라고 말했다.
최씨는 이른바 ‘김해 혀 절단 사건’의 ‘가해자’다. 18살이던 1964년 5월6일, 최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 노아무개씨(당시 21살)에게 저항하다가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혐의(중상해)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최씨를 성폭행하려던 노씨는 고작 징역 6월형(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강간 미수 혐의는 적용되지 않고, 혀가 잘린 뒤 최씨의 집으로 찾아와 칼을 들고 행패를 부린 혐의(특수협박·특수주거침입)만 인정된 것이었다. 검찰과 법원은 최씨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56년 만인 2020년 5월, 최씨는 법원의 판단을 바로잡으려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이를 기각했다. “(최씨의) 무죄를 인정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경찰은 정당방위라고 했는데, 검찰은 나를 가해자로 뒤집어씌우고, 가해자가 성폭력을 저지른 걸 쏙 빼버렸다. 판사는 내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건 법대로 한 게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한 것이지 않나.” 최씨가 또다시 가슴팍을 내리치며 말했다.
최씨를 가장 분노케 하는 대상은 검찰과 법원이다. 검사는 오히려 최씨를 가해자로 몰았다. 최씨는 “조사 당시 검사는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면 책임져야지’라고 내게 윽박질렀다”며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고 눈을 감았을 뿐인데, 검사는 ‘눈을 감았다’고 욕을 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때를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판사도 다르지 않았다. 1964년 10월22일 〈부산일보〉가 보도한 결심 공판을 보면, 재판장은 최씨를 향해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이 없냐”고까지 물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전형적 ‘2차 가해’다.
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서 “소리를 지르면 주위 집에 들릴 수 있었다” “범행현장까지 따라나섰다”며 최씨에게 탓을 돌리기도 했다. 재판부는 최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가해자인 노씨를) 일생 말 못 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했다”며 최씨에게 죄를 물었다. 최씨는 이 일로 6개월여 동안 구금됐다.
“1월 밤중에 출소하는데, 대기실에 아버지가 혼자 있었다. 구속 당시 입었던 옷과 고무신으로 갈아입었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또 5리를 걸어 집에 갔다. 아버지가 두부를 줬던 것 같은데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최씨가 말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최씨를 지배해온 감정은 “억울함”이다. 최씨는 사건에 대해 부모와 형제, 친구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1988년, 한 여성이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 피해자가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도 최씨는 함구했다. “혼자 담고 있다가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최씨가 재심 청구를 결심한 이유다.
최씨는 “재심을 청구하려고 준비하면서 유죄 판결문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뒤늦게 판결문을 보니 대성통곡할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어떻게 국가가 나를 가해자로 만들 수가 있느냐. 사건 당시보다 이 판결문을 보고 더 억울하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최씨는 2020년 재심을 청구하며, 1964년 재판부의 판단과는 달리 노씨에게 언어 구사 능력이 있었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제시하지 않은 채 구속한 점 등을 사유로 들었다. 재심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핵심인 ‘새로운 증거’로 노씨가 중상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을 든 것이었다.
최씨는 “불구가 됐다는 가해자는 신체 1등급으로 군대도 가고, 결혼해 자녀도 낳았다”며 “나의 행동은 성폭행을 피하기 위한 정당방위였고, 가해자는 중상해를 입은 게 아니었으니 재심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여성들의 따스한 연대와는 무관하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살아나 최씨를 괴롭힌다. 최근엔 복지관에서 만난 한자 선생님의 이름이 가해자와 같아서 너무 놀랐다. 분한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이따금 숨쉬기가 어렵다.
어떤 날은 가슴에 불이 올라 얼음을 집어삼킨다. 최씨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집 근처 산에 올라 가슴을 치며 분을 토해낸다. “소리를 지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까, 그냥 가서 가슴을 친다. 건강히 살아 있어야 계속 싸울 수 있지 않겠나.”
최씨는 2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한 활동가한테서 그림책을 선물 받은 게 계기다. 꽃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얼마 전엔 부산의 한 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최씨가 색연필로 그린 꽃 그림이 전시되기도 했다.
빨간색 꽃을 가장 좋아하지만, 색연필 길이는 잎을 칠하는 초록색 계열이 가장 짧다. 초록색 잎들이 노란색으로 바뀌기 전, 최씨는 대법원으로부터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국가가 내 인생을 180도로 바꿔놨다. 제발 바로잡아 달라.”
다음은 최말자씨가 대법원에 제출한 탄원서 전문
대한민국의 검사는 헌법을 토대로 남여의 평등과 인간 존엄을 근본으로 삼아 죄를 구별하고 그에 대한 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사건에서 검사는 엄연한 성폭력 피해자를 과인(과잉) 저항이라고 오히려 가해자를(로) 만들어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2021년 부산지방법원은 “본 사건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어쩔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실로 부끄러운 변명으로 재심청구에 대한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재판이 시대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내 사건과 같은 재판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법의 체제를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1964년 사건 당시 아버지는 농사만 지을 줄 아는 무지한 농부였고, 저는 18살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이었습니다.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었고 검사의 일방적인 폭언,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에서는 수사를 통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혔고 무죄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그러나 검사들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빼고 성폭력 피해 사실이 빠진 나의 사건은 고의로 멀쩡한 남자의 혀를 자른 중상해죄를 씌워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시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미성년의 18세 성폭력 피해 소녀는 6개월 12일 동안 감옥에 보내졌고,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습니다.
판결을 받고 석방 당시의 심정은 땅바닥에 주저않아 대성통곡을 해야 했지만 어두운 밤, 구속 당시 입었던 옷을 입고 들판과 산길을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제 삶을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꽃도 피워보지 못한 그 소녀의 삶은 평생을 살면서 억울했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고, 항소 역시 기각되어 할 말을 잊고(잃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대법원 역시 3년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답변을 주지 않아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시 시대 상황에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부끄러운 변명이 아니라 억울한 판결로 한 사람의 인생이
뒤집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정의로운 판단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재판부의 명예를 회복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여성의전화,
그리고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 덕분이기도 합니다.
너무 긴 시간에 몸이 지치다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이런 일이 또 되풀이 될 것이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사건의 재심을 다시 열어 명백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다시 정의하고 정당방위를 인정하여 구시대적인
법 기준을 바꿔야만 여성 성폭력 피해자들의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며 더 이상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국가는 나의 인권에 대한 책임을 보상해야 합니다.
부산/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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