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고문하고 조작한 자들도 '친일파'였다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다큐제작기②
해방 뒤 일제 밀정들이 경찰·CIC에 들어가
친일 독재자 박정희가 '용공'으로 조작한 것
사형선고 내린 대법원장도 일제 판사 출신
그 친일파가 윤석열 정부에서 또 요직 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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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딱 되고 나니까 일제강점기 때 왜놈 경찰에서 고춧가루 물 먹여, 비행기 태워, 경찰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경찰로 다 넘어갔습니다. 일정 때 밀정 하던 사람들 그대로 CIC(미군24군단 소속 첩보부대)니 특무대니 다 들어갔고.
이렇게 해서 이 사람들이 해놓은 짓이 완전히 민족 간의 불신 이걸 조장시켜 놓고 일제 때 하던 그 습성 그대로 유지시키고, 지금 우리 처지도 그 당시에 비해서 하나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갈 길을 찾을 것 같으면 어딘가에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예요."
1988년 5월 21일 고 임종국 선생의 마지막 강연 중 일부다. 임 선생은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이후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로 인정받으며 친일 잔재 청산에 일생을 바쳤다. 민족문제연구소도, 2009년 전 국민적 성원 속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모두 그의 유지를 받들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임종국 선생의 일성을 길어 올리는 일은 무척이나 시의적절해 보인다. 무려 36년이 흐른 현재, 이종찬 광복회장이 "대통령실 안에 밀정이 있다"고 개탄하는 역사의 퇴행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저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친일인명사전> 속 4776명의 친일파들 이름 사이에 박정희 이름 석 자가 자리하고 있다. 1939년 일본 군관학교에 지원하며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란 내용의 혈서를 쓴 박정희를 두고 친일파라 정의하기를 꺼리는 자들이야말로 임종국 선생이 가리켰던 "일제 때 하던 그 습성 그대로 유지시키"는 '밀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친일파 박정희가 18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빼앗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 중 1975년 4월 9일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8인의 희생자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서대문형무소를 찾으면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을 정도다.
광복절을 맞아 되돌아보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가 인혁당 사건에도 고스란히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희생자들과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았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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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꿈꾸고 조국 통일을 염원했던, 가장 보통의 존재들
목욕탕을 경영하고 있는 자
학교도서보급소를 경영하고 있는 자
반공법 위반으로 피검된 후 무직으로 전전하던 자
삼화건설 전무이사를 거쳐 회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른 자
삼락일어연구소 강사로 입직하여 현재에 이른 자
경기여고 교사로 취직하여 현재에 이른 자
양봉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
극동건설회사 외공부장으로 종사하고 있는 자
광신상업고등학교 윤리교사로 현재에 이른 자
브록크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
노동 및 행상에 종사하고 있는 자
승리 라사점을 경영하고 있는 자
대구고려학원 강사로 현재에 이른 자
대산 목재사를 경영하고 있는 자
국가에 의해 인혁당 사건 때 기소된 분들의 당시 직업이다. 결국 희생자들과 피해자들 모두 어떤 면에서 보통의 존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조작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지만 어쩌면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가장 보통의 존재들일 수 있었다.
제주4.3으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국가폭력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사 희생자들과 피해자들도 따지고 보면 보통의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다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의 공통점은 나라 걱정이 많았고, 민중들의 편에 서려고 했으며, 굳이 앞장 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마다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고.
한마디로 조작, '용공 조작'이었다. 실체가 없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의 경력과 활동 이력을 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과거 이력을 바탕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저 독재 치하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었고 향후 정당 활동으로 그 목소리를 널리 퍼지게 만들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대부분은 4·19 당시 혁신계 운동을 했고, 19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1967년 재야 대통령 단일후보 운동, 19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운동, 1971년 김대중 지지 운동 및 공정선거감시운동, 유신 이후 유신반대운동 등에 몸담았다. 시종일관 조국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또 이들 중 일부는 과거 조봉암의 진보당의 평화통일 운동을 지지했고, 일부는 김구를 지지했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간첩 사건 같지만 실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인혁당이란 조직 자체가 완성된 정당이 아니었다. 애초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2차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로 윤보선 등 유력 정치인들을 지목하려 했으나 여론의 반발이 두려워 계획을 바꿨다. 훗날 재심에서도 밝혀졌듯이, 권력자의 독재 권력 유지와 이에 동조하며 그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자들이 조작한 사건의 희생자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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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그리고 친일파와 공범자들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
1974년 4월 3일 저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 담화 중 일부다. 이때가 바로 인혁당(재건위)이 독재자의 입을 통해 최초로 언급된 시점이었다. 이후 그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시민들의 열망을 꺾는 정권 유지 수단으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활용되는 순간이었다.
복기하자면, 독재자의 딸, 박근혜 또한 나쁜 역사를 반복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는 기무사의 조언대로 눈물을 흘리며 희생자를 호명했다. 이후 해경 해체를 주장했다. 훗날 기무사 문건을 따르면, 세월호 집회 참여자를 종북으로 간주했다. 문건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대통령이 된 딸이 과거 독재자 아버지가 썼던 반공 프레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세월호의 7시간은, 세월호 참사는 탄핵을 맞는 결정적 계기였고,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오래오래 자극했다. 딸이 이어받은 독재자 박정희의 프레임은 이랬다. 인혁당 희생자들의 죄목을 보자.
가.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나. 국가보안법위반 다. 내란음모위반 라. 반공법위반
공안 검사가 기소하고 독재 치하의 사법부와 대법원이 판결한 희생자들의 죄목이다. 어떻게든 '반공'이란 죄목 아래 당시 학생조직이던 민청학련과의 연결 고리를 조작해 내려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피고는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하게 되자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하에 국가 변란과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반국가 단체의 구성을 모의하고 북괴방송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유혈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자는 논의를 함으로써 반국가 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실상 희생자들은 후배격인 민청학련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밀접하게 관계돼 있지 않았다. 판결문의 또 다른 내용을 보면,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보통의 존재들이 무시무시한 간첩의 수괴들처럼 보일 지경이다.
"'유인태가 검거되었으므로 이철도 곧 검거될는지 모르니 신변을 조심하라, 검거되더라도 배후선을 절대 폭로하지 아니하여 희생자를 적게 하여야 한다'고 지시함으로써 민청학련의 구성원과 회합하여 전국에 분산된 혁신자파 세력을 재규합하여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이 통일적인 조직으로 만든 다음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여야 된다는 지령을 받고 동 지령을 수행하겠다는 결의하에 '정부를 공산폭력혁명으로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투쟁하자'는 등의 교양을 받고, 이에 감화되어 출옥 후 서울 시내 각 모 서점을 순방하면서 일어판 식민주의와 공산주의 서적을 구입 탐독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념을 공고히 하는 일방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지도요원으로서…"
친일파 독재자가 민주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법살인을 저지른 최악의 국가폭력. 인혁당 사건을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따져 보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 터다. '인혁당 생존자' 박중기 선생이 "역사를 모르면 인혁당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친일파들"이었다고 강조 또 강조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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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에 의해 처단 당한 8인의 인혁당 피해자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하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의 과거 친일 이력이나 한일협정과 같은 한일 굴욕 외교들을 떠올리면 이러한 박중기 선생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지, 왜 그가 친일 잔재 청산을 그토록 부르짖는지 숙연해질 따름이다.
어디 독재자 박정희뿐일까. 사형선고 당사자인 민복기 대법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이자 박정희 정부의 주요 인사였던 민복기의 부친은 조선 귀족 자작이자 경술국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이다.
인민혁명당 사건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판결한 민복기 본인도 일제강점기 판사 출신으로서 제5·6대 대법원장을 역임하고 전관 변호사로 활동했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친일파의 손에 처단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혁당 사건 50주기를 한 해 앞둔 2024년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이는 역사 왜곡을 넘어선 뉴라이트 및 극우 친일파 인사들의 정부 요직 등용과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예고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 임종국 선생이, 8인의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이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며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다큐영화 제작비 마련을 위한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으며,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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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구속자 석방 거리 행진을 방해하는 경찰에 항의하는 장면 | |
ⓒ 4.9통일평화재단 | 관련사진보기 |
"(박정희 정권 당시 재판부가) 인혁당 주모자들에게 사형선고 내렸잖아요. 바로 그 다음 날 처형을 시켜버렸고. 그러면서 아주 큰 사건이 됐어요. 억울하게 죽은 거지. 왜냐면 사형선고를 내려도 그 다음 날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게 아니거든요. 사형 집행은 상당히 좀 지나서 한다고. 근데 박정희가 빨리 좀 죽여버리라 하니까 (선고) 다음 날 사형을 시켜버렸지. 그러다 이제 최근에 와서 다시 명예회복이 됐지만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었지."
최근 다큐멘터리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촬영 차 만난 정치학자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현 정부와 관련해서는 "사실 윤석열이 지금 북진 통일론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며 "기회만 있으면 북한에 한 번 쳐들어가고 싶은 사람 같다. 자신이 있다는 투다"라고 부연했다.
원로 정치학자가 윤석열 정부의 친일 반북 기조에 대해 일침을 놓은 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그렇게 북한 김일성 정권과 체제 경쟁 중이었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조작한 대표적인 간첩 사건이었다. 유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던 사건이었던 셈이다. 최근 그 인혁당 사건이 원로 정치인인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입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이종찬 광복회장님이 말씀한 대로, 저는 대통령실에 밀정이 있거나 제가 얘기한 대로 이완용이 있어서 제2의 한일 합방을 획책하고 있다(중략). 이것은 제2의 인혁당 사건을 획책하고 있지 않는가. 또 북풍, 또 빨갱이를 빙자해서 다 잡아들이려고 하는 기도가 아닌가.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가면 안 됩니다."
박지원 의원이 인혁당 사건 길어 올린 이유
21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한 박 의원의 주장이다. 박 의원은 역사 왜곡을 넘어 친일 행보를 보이고 있는 현 정권이 결국 '북풍' 공작이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조작 사건을 통해 친일 행보를 공고히 할 것이란 예상을 내놓은 것이다. 이를 위해 예로 든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인 인혁당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 가운데, 제79주년 광복절을 전후해 보수주의자인 이종찬 광복회장마저 '대통령실 내에 연탄가스처럼 밀정들이 퍼져 있다'며 강력한 우려를 내놨다.
야권을 중심으로 현 정권이 '탄핵 이후'를 대비해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만한 정부 조직을 죄다 학연 및 지연으로 맺어진 충성 그룹으로 채워나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돈다. 이러한 현 정권의 행보가 반세기 전 박정희 독재정권을, 계엄령 선포 정국을 연상시킨다는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닌 셈이다.
수사기관과 사법부까지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일으킨 대형 간첩 조작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이었다. 현 정권은 수사기관에 이어 군까지 장악한 채 역사 왜곡과 친일을 앞세우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19일 윤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상황을 가정해 실시하는 한미 합동 '을지 자유의 방패' 훈련 첫날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강도 높은 발언을 내놨다.
최근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역사 왜곡에 이은 친일과 반북이야말로 박정희 정권과 현 정권이 앞세운 정권 유지의 공통분모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박 의원이 윤석열 정권의 인사를 두고 인혁당 사건의 기억을 길어 올린 이유일 것이다.
그 인혁당 사건의 참혹성을 이해하고 현재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이 앞세웠던 고문과 조작의 기술들이다. 인혁당 사건 조작을 위해 박정희 정권은 친일 경찰들이 자행했던 고문 기술들을 그대로 가져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고 이틀째 사형 집행이란 전무후무한 사법살인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문과 은폐, 공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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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촬영 중인 박중기 선생. | |
ⓒ 네번째달 | 관련사진보기 |
박중기 선생의 청력 기능 손상은 심각한 정도다. 한 쪽 청력은 완전히 상실됐고, 보청기를 쓰더라도 평상시 대화 또한 입 모양을 읽거나 필담을 해야 할 수준이다. 1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당한 고문은 이렇게 상상조차 힘든 기억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박중기 선생은 도리어 "그때는 다 그랬다"는 듯 담담히 회고한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동료들이 당한 피해를 더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인혁당 백서>에 기록된 박 선생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고문 실상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피의자였던 박중기는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를 심하게 당해서 3, 4회 실신하였으며, 강무갑은 심하게 구타를 당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고막이 터졌다. 박중기의 경우 바닥에 몸을 눕히고 양팔과 양다리를 묶이거나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물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수사관들이 시멘트를 발라놓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그 안에 박중기의 얼굴을 집어넣거나 온몸을 담가 놓은 다음에, 발가락에 코일을 감은 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문 사실은 당시 한국인권옹호협의회장 박한상 변호사가 서울교도소에서 재소자 조사를 통하여 밝혀냈으며, 당시에 이 내용이 신문 지상에 보도되어서 논란이 되었다. 또한 도예종·우동읍(우홍선) 등 혁신계 인물들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1964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 당시 민청학련 관련 피의자였던 시인 김지하가 폭로한 실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김지하는 서울구치소에서 하재완으로부터 "인혁당 사건은 고문을 통해서 조작되었다. 나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탈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폭로했다. 훗날 출소한 김지하는 이러한 사실을 신문에 연재했고, 단 3회 연재 후에 반공법 위반으로 재수감되기도 했다. 김지하의 '고문의 기억'은 이랬다.
'하재완은 중정에서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고 서울구치소 교도관에게 이야기했고, 탈장이 되어서 아랫배가 불룩하였으며 잘 걷지 못한다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하재완의 몸에는 구타로 인한 멍 자국이 있었다. 또한 우홍선은 서울 구치소에서 대낮에도 구치소 당국의 허락을 받고 사방 안에서 누워 있었고 우홍선·하재완은 조사를 받고 새벽에 사방으로 복귀할 때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업혀 왔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 전병용은 이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구타로 인한 피멍 자국이 있었고 대화를 하면서도 온몸의 고통을 못 견디어 사방 철문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는 것을 목격했다(...).
하재완은 창자가 고환으로 빠져나오는 탈홍(직장탈출증),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탈장으로 인해 한 손으로 항문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집어넣으면서 재판을 받았다. 또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폐농양증이 걸려서 기침을 할 때 피가 흘러 나왔다.'
독재정권의 극악한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고문 은폐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경찰은 사형 집행 다음 날인 4월 10일 송상진과 여정남의 시신을 홍제동 벽제화장터에서 가족들이 동의 없이 직접 화장했다. 유가족들은 경찰이 시체에 남아 있던 고문 흔적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패륜적인 무리수를 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당시 김진생(송상진의 부인)씨는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서 벽제 화장터에서 바로 화장을 시켜서 시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다른 유족이 남편의 관을 열어 보았는데,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배수자(서도원의 부인)씨는 "원래 함세웅 신부가 있는 응암동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남편의 관을 실은 차가 창녕까지 갔다"고, 이정숙(이수병의 부인)씨는 "천주교 사제단 함세웅 신부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살펴보니 손톱, 발톱, 발뒤꿈치와 등에서 시커멓게 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문 흔적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이들 사형수 부인들 중 다수는 참고인 자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고문 대신 갖가지 가혹행위를 당한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저항의 몸부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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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가 고문을 당한 흔적. | |
ⓒ 4.9통일평화재단 | 관련사진보기 |
'의심할 만한 아무런 자료를 찾아볼 수 없고, 또한 일건 기록을 정사하여 보니 피고인들 및 참고인들은 원심법정에서 검찰관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각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조서 및 자필진술서 그리고 참고인들에 대한 진술조서 등의 성립의 진정을 인정하였으므로 동 조서 등은 모두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이에 대하여 동의여부는 불필요하므로 논지 이유 없으며 적법한 증거조사를 하였음이 명백하므로 논지는 모두 이유 없다.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한 단체라 아니할 수 없으므로 피고인들이 결성한 유형적 결합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라고 판시한 원심판결은 정당하고 따라서 논지는 이유 없다.'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들의 항소에 대한 사법부의 입장)
이들이라고해서 눈앞에 닥친 서슬 퍼런 국가폭력 앞에 무기력하게만 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 항소이유서를 제출하고 개개인의 법적 권리를 통해 독재정권의 무도함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항소의 요지로, 첫째 피고인들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일도 없으며 기타 공소사실들은 전부 허위사실이므로 원심판결은 각 사실을 오인하였고, 둘째, 검찰관 및 사법경찰관 작성의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및 자술서 등은 강요에 의하여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므로 이를 증거로 한 원심 판결은 채증 법칙에 위배하였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2000년 이후 진행된 1, 2차 재심 모두 무죄 판결이 나왔으니, 문자 그대로 정당한 주장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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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인혁당 사건 재판 사진. | |
ⓒ 4.9통일평화재단 | 관련사진보기 |
사형이 언도됐던 당시 여정남 선생이 법정에서 미소와 함께 남겼다는 마지막 증언 중 일부다. 이들은 고문으로 인해 육체가 고통받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을지언정 여정남 선생처럼 당당함은 잃지 않았다. 이들의 상고이유서와 항고 이유서에 그러한 당당함이 잘 드러난다.
"상기 진술서는 수사관의 공포와 억압으로서 지시에 따라 읽어주는 그대로 받아쓰기를 시켜 서명하게 하였습니다." (송상진의 항소이유서 중)
"시종일관 고문 공갈 협박으로 강제 조작 허위 진술된 제반 기록에 의한 엉터리 공소 사실과 위법재판 절차를 그대로 인정 항소기각 결정을 내린 비상고등군법회의에의 2심 재판 역시 1심 재판과 마찬가지로 전면 무효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정남의 상고이유서 중)
"5월 27일 검찰관이 1차로 공소를 제기해놓고 5월 29일부터 6월 8일까지 연일 혹독한 고문과 협박 등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사전에 작성된 공소사실 32항과 똑같은 복사된 각본대로, 취조관이 읽고 피고인은 그대로 받아쓰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자필 진술서에 기재된 32항과 똑같은 내용의 조서에 의하여 중앙정보부 간부실에서 6월 9일 작성된 것이 마지만 검찰관 신문조서다. 나는 4월 28일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었으며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 취조를 받았다." (하정완의 상고이유서 중)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문과 일주일에 걸치는 주야 연속 심문 등 위협과 회유를 겸한 정신적 위축, 그리고 동시에 동일 장소에서 행해진 경찰 수사와 검찰 취조가 도저히 자유롭게 진술할 수 없었습니다." (이수병의 항소이유서)
이미 사법살인이 자행되기 전, 희생자들의 법적 주장 속에 공안기관과 수사기관이 고문·조작하고 사법부가 용인한 역대 최악 조작 간첩 사건의 진실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검찰 독재정권이란 표현이 심상찮게 등장하는 요즈음 인혁당 사건이야말로 반면교사 삼아야 할 반북 간첩 조작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으며,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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