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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6.10.인혁당사건.4.19(민주화운동)등 등...

'최악의 간첩 조작 사건' 2024년에 소환된 이유

by 무궁화9719 2024. 8. 26.

30분 간격으로 스러진 여덟 민주·통일 열사들 [.txt]

반세기 전 인혁당 사형수들 삶 다룬 약전
박정희 정권 속죄양으로 본보기 처형
영남 중심 혁신계 인사들 동향도 생생

  • 수정 2025-04-11 10:21
  • 등록 2025-04-11 05:00
1975년 4월9일 오전, 체포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면회를 기대하며 서대문구치소를 찾았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그날 새벽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하고 있다. 4·9평화통일재단 제공
 
1975년 4월9일 오전 4시55분 서대문구치소 사형장에서 사형수 서도원의 형이 집행되었다. 5시30분에는 김용원이, 6시5분에는 이수병이, 6시35분에는 우홍선이, 7시5분에는 송상진이, 7시35분에는 여정남이, 8시5분에는 하재완이, 끝으로 8시30분에는 도예종이 그 뒤를 이었다. 이른바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이 여덟 사람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것은 바로 전날인 4월8일 오전 10시. 그로부터 채 만 하루가 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사형 집행이었다.
 
2007년 재심에서 여덟명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된 뒤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국가배상금 중 일부를 출연해 ‘4·9통일평화재단’을 만들었다. ‘다시, 봄은 왔으나’는 이 재단의 이창훈 사료 실장이 여덟 사형수의 삶과 죽음을 약전 형식으로 쓴 책이다. ‘이수병 평전’이 따로 나와 있고, 김원일의 ‘푸른 혼’과 권여선의 ‘토우의 집’처럼 사건을 직·간접으로 다룬 소설들도 있지만, 여덟 사람의 족적을 한데 모아 갈무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다시, 봄은 왔으나 l 이창훈 지음, 삼인, 2만5000원
 
1923년생 서도원을 필두로 1944년생 여정남까지 이들의 향년은 길어야 52년, 짧게는 31년에 지나지 않았다. 미혼인 여정남을 제하고는 평균 서너명씩 자녀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이들이 조작된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목숨을 앗긴 것이다. 이들이 박정희의 철권통치와 장기 집권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황과 근거 자료는 차고 넘친다. 무엇보다 인혁당 자체가 실체가 없는 조직이었다.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중정·지금의 국가정보원) 부장은 인혁당이 북한 노동당의 지령으로 결성되어 국가 사변을 꾀했다고 거창하게 발표했지만, 담당 부장검사와 검사들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불거진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정권의 필요에 따른 조작이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는 1972년에 세번째 계엄령을 발동한 채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이듬해 8월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켜 장기 집권을 꾀했지만, 함석헌·장준하·백기완 등이 결성한(1973년 12월24일)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의 서명운동에 이어 1974년 4월 초에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거센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등 궁지에 몰리자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필요했다. 사건 수사 초기 ‘민청학련 주역인 서울대생 이철·유인태가 경북대생 여정남을 지도하는 것으로 조서를 작성하라’는 압력을 가했던 중정은 “선배를 어떻게 조종하느냐”는 당사자들의 항의에 ‘이철·유인태 등이 여정남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바꾸어 조서를 다시 작성하도록 했다.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던 중 의문사한 김형욱 역시 이 사건을 두고 “이들을 속죄양으로 본보기 삼아 처형함으로써 국민들이 더 이상 반항을 못 하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인혁당 사형수 여덟명은 모두 대구와 부산 등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혁신계 통일 운동가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대구의 진보적 분위기는 이 사건 무렵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대구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의 지지율이 72.26%로 이승만을 세배 가까이 앞섰다는 데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경남 의령 출신인 이수병은 고교 시절부터 뜻 맞는 친구들과 사회과학 공부 모임 ‘암장’을 결성해 활동했으며, 5·16 군사반란 이후 체포되어 7년간 복역하고 나와 암장 시절 친구들을 다시 규합해 민주화 및 통일 운동에 나섰다가 이 사건으로 다시 붙들려 가게 되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은 1975년 4월8일 오전 10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다음날 새벽에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4·9평화통일재단 제공
 
‘다시, 봄은 왔으나’에는 주인공 여덟 사람과 함께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다채롭다. 1974년 구치소에서 김지하와 마주쳐 혹독한 고문 조작 실태를 폭로한 하재완이 중학 시절 전두환의 절친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재판장으로서 사형 판결을 확정한 대법원장 민복기가 그 부친 민병석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거나,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한 당시 국방부 장관 서종철이 육군 대장 시절 전두환과 노태우를 부관으로 두고 경상도 출신 장교 모임인 ‘하나회’를 지원한 배후였다는 사실, 1961년 이수병에게 15년형을 선고한 혁명재판소의 동석 심판관이 당시 20대 젊은 판사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라는 사실 등이 눈길을 끈다. 이들 말고도 이종률 부산대 교수, ‘민족일보’ 기자 이재문,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경근, 김금수 전 한겨레 논설위원, 박석무 전 의원 등 혁신계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모색과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박정희 사법살인 반세기 “반국가세력 누명 다신 없길 바랐지만…”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 50년
사형 당한 우홍선의 아내 강순희씨

고경태기자
  • 수정 2025-04-09 07:15
  • 등록 2025-04-09 05:00
2일 오후에 만난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사건’ 희생자 고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92)씨가 인터뷰에 앞서 노래를 불렀다. “당신과 나 사이에 박정희만 없었다면 쓰라린 사별만은 없었을 것을….” 애달픈 가사였으나, 절망을 이겨내는 흥겨움이 느껴졌다. 고경태 기자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서도원·도예종·송상진·우홍선·하재완·김용원·이수병·여정남 등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지, 9일로 꼭 50년이 된다. 중앙정보부는 ‘반국가적 불순세력’을 언급하며 1974년 4월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실체 없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연루된 25명 중 8명에 대해선 1975년 4월8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고 다음날 새벽 곧바로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불린다.
 
이들의 50주기를 맞아 유족 증언과 추모행사를 통해 2025년 현재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되짚었다. 희생자 우홍선의 아내 강순희(92)씨를 만난 지난 4일엔 ‘종북 반국가세력’ 척결을 명분 삼아 12·3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이 선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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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사이에 박정희만 없었다면/ 쓰라린 사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저문 거리에서 떠나가는 당신을/ 가슴 아프게 통곡하며 보내 드리지 않았으리/ 산새들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그는 노래해도 되느냐고 묻더니 곡조를 뽑았다. 가수 남진이 1960년대에 부른 ‘가슴 아프게’의 가사를 바꾼 것이다. 사람 만날 일이 있으면 이 노래부터 부른다고 했다. ‘당신과 나 사이’를 가로막은 건 ‘저 바다’(원가사)가 아닌 ‘박정희’. 행복하게 살던 가족을 풍비박산 낸 이름이다. 구성진 노래에 절망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이 묻어났다.
 
노래 속 ‘당신’은 50년 전 4월9일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편 우홍선(1930년생, 다른 이름 우동읍)이다. 그날 새벽 4시55분, 1923년생으로 나이가 가장 많았던 서도원이 맨 처음 형장으로 향했다. 우홍선은 아침 6시35분 네번째로 형장에 들어갔다. 전날인 8일 오전 10시 대법원에서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이 확정된 지 24시간도 채 흐르지 않은 때였다. 국제 법학계는 이날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한다. 우홍선의 아내 강순희씨를 4일 오후 경기도 과천 집에서 만났다. 보행기를 잡지 않으면 걷기 어렵고, 녹내장으로 실명 직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지만 밝은 얼굴로 취재진을 맞았다.
 
1975년 4월8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대법원 판결 직후 법정의 모습. 당시 대법원이 8명의 사형을 확정하자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오른쪽 안경쓴 이)씨가 오열하고 있다. 맨 왼쪽 남자 오른편 안경 쓴 여성은 이수병의 부인 이정숙씨다. 4·9통일평화재단 제공
 
강씨가 5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우리 변호사가 박정희랑 대구사범학교 동창이었어. 어떻게든 사형만 면하게 해달라 부탁하러 간다고 했는데, 가기도 전에 아침에 죽였다는 말을 전해 들은 거야. (당시 18살이었던) 큰딸이 (서울구치소에 가서) 아버지 시체를 운구해왔어. 까무러쳐 정신없이 울었지.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바짝 드는 거야. 그다음부터 안 울었어. 남편을 파주공원묘지에 묻었는데, 아들 하나, 딸 셋 숫자대로 나무를 네 그루 심었지.” 그나마 강씨는 남편의 주검을 인수해 장례라도 치렀다. 사형 집행 다음날 주검을 인수해 미사를 드리려 서울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1928년생)의 유족들은 크레인을 동원한 경찰에 영구차를 탈취당했다. 경찰은 영구차를 고양 벽제 화장터로 끌어 가 주검을 강제로 화장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삶의 전부입니다.” 우홍순이 구속돼 있던 1975년 2월8일 강순희씨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으로 백지광고를 내던 동아일보 광고란에 편지를 냈다. 4·9통일평화재단 제공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은 친위쿠데타로 영구 집권을 꿈꾼 박정희 유신 체제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이다. 1974년 4월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박정희는 특별담화문에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해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조종한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박정희 놈이 운동권 때려잡으려고 몇 사람 골라잡아 죽인 거야.” 강씨가 말했다. “(인민혁명당 사건) 1차 때 지식인 때려잡고, 2차 때는 학생운동 때려잡으려고 재주 있고 착실하게 살던 사람을 끄집어내서 학생들을 조종했다고 하면서 죽인 거지.”
 
우홍선은 고급 도장을 제작하는 한국골든스탬프사의 상무이사로 일하던 1974년 5월2일 회사에서 직원들과 회의하던 도중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사형당한 8명 중엔 여정남이 4월17일 처음 끌려갔고, 우홍선이 마지막이었다. 울산 울주에서 태어난 우홍선은 한국전쟁기에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해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한 장교 출신이다. 이후 보통 직장인으로 살았다. 그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직접 경험하며 전쟁 없는 통일조국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을 뿐이다.
 
 
1969년 우홍선·강순희 부부가 1남3녀의 자녀들과 결혼 13주년 기념으로 찍은 가족사진. 4·9통일평화재단 제공
 
우홍선은 1958년 현실정치와 남북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통일청년회를 만들었고 4·19 이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의 중앙위원장을 맡았다. 그 탓에 1964년 원륭건설(현 우남건설) 총무부장으로 일하다가 ‘북괴 지령을 받는 인혁당을 만들어 변란을 꾀했다’(1차 인혁당 사건)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9개월여 투옥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애초 인혁당은 창당된 사실이 없다. 물론 재건 시도도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인혁당과 인혁당 재건위를 ‘창조’한 힘은 고문이었다. 우홍선은 구속 4일 만인 1974년 5월6일 서울구치소에서 ‘와허증’ 처방전을 받았다. ‘하지를 쓸 수 없어 감방 안에서 누워 있어도 좋다’는 의사의 허가증이 극심한 고문을 증명한다. 중앙정보부의 고문 조작, 당시 법원의 엉터리 판결이 재심을 통해 바로잡힌 건 사형 집행 32년 만인 2007년이었다.
 
강씨를 만난 4일 오전, 헌법재판소는 전원일치로 대통령 윤석열 파면을 선고하고 있었다. 강씨는 “젊은 분들이 정의로운 결정을 내줘 감사하다”고 헌법재판관들을 연신 칭찬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잇는 ‘살인마당’ 당수”라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기에 민간인을 재판 없이 학살했고, 박정희에 이어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광주에서 시민들을 죽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도 그 뒤로 줄을 섰다는 의미였다.
 
강씨는 인터뷰를 하다 말고 또 노래를 불렀다. 이번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손을 흔들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해 “산 자여 따르라”까지 남김없이 불렀다. 사랑하는 임, 우홍선이 떠난 지 정확히 반세기. “지금도 남편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한 번 생각하면 잠을 못 잔다”는 강순희씨가 노래를 멎고 말했다. “다시는 50년 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매일 기도할 뿐이야.”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취재 도움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 50년…무죄는 밝혔지만 명예회복은 아직

9일 추모제 등 50주기 추모행사
‘빚고문’ 시달려온 피해자도

고경태기자
  • 수정 2025-04-09 07:13
  • 등록 2025-04-09 05:00
“인혁당 재건위 사건” 8인의 사형수 4·9통일열사 50주기 사진 전시회 개막식이 7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테이프켓 행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희생자 이수병의 부인 이정숙씨.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자 사법살인이었음은 수차례 진실규명과 법원 재심으로 확인됐다. 다만 그로부터 얻어야 할 사회적 교훈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피해자들과 전문가들 목소리다. 사건 50주기를 맞아 열리는 다양한 추모 행사가 울림을 지니는 이유다.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 고문에 의한 조작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2007년 1월 사형 확정을 받은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며 국가배상도 이뤄졌다. 이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 등이 국가배상금 중 일부를 출연해 2008년 4·9통일평화재단(이사장 문정현)을 만들었다.
 
4·9통일평화재단은 50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행사를 연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1960∼70년대 남북통일 구상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 이어 사형수 8명의 생애를 담은 책 ‘다시, 봄은 왔으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국회 의원회관에선 사형수 8명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가 9일까지 이어진다. 사형 집행 날인 9일 오후 4시 ‘4·9 통일열사 50주기 추모제’가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추모제에는 문정현 4·9통일평화재단 이사장의 인사말, 정태춘 가수와 평화의 나무 합창단의 추모공연,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의 추모사, 유가족 인사 등이 이어진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8인의 사형수 4·9통일열사 50주기 사진 전시회 개막식이 7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다시 봄은 왔으나’를 쓴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은 “국가폭력에 의해 여덟 분이 희생된 지 반세기가 지났으나, 법원의 무죄 판결만 있었을 뿐 완전한 명예회복은 멀었다”고 했다. 실제 사형집행당한 8명이 아닌 징역형을 산 나머지 피해자 17명과 관련해선 최근까지도 ‘빚고문’ 논란이 벌어졌다. 무기징역, 징역 20년 등을 받은 이들에 대해 2008년 형사 재심 무죄 판결이 난 데 이어 2009년에는 민사 손해배상 선고도 이뤄졌지만, 2011년 대법원은 원심을 깨고 배상금액을 대폭 감액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피해자와 유족 등 77명에게 1심 판결 뒤 가집행해 전달한 배상 금액을 도로 내놓으라는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2020년 10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채무를 면제하는 채권법 수정안은 폐기됐다. 이후 피해자와 국가 사이 또다시 소송이 벌어졌고, 정부가 법원의 화해 권고조치에 따라 원금을 뺀 이자반환요구를 철회한 것이 2022년 6월에 이르러서였다. 다만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반성 없이는 언제든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같은 참담한 국가 폭력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창훈 사료실장은 “민주유공자법 제정 등으로 이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12·3 내란사태와 같은 반역사적 행위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3년 11월에 터져 나온 경북대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에 고무된 재야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12월부터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연일 지지 성명이 이어졌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15년간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긴급조치 1호’를 발포했다.

 


1974년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는 유신에 반대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체포, 구속할 수 있으며, 이를 위반하면 민간인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내용으로 가히 계엄령과 다름없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에 반대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체포, 구속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었다. 긴급조치 2호는, 1호를 어겼을 경우 민간인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엄 선포와 다를 게 없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종교계와 문인, 지식인 등 재야인사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양성우 시인의 시처럼 온 나라가 ‘겨울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여정남과 학생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북대와 서울대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대학에서는 3월 개학과 동시에 벌일 투쟁을 차질 없이 준비해 나갔다. 경북대가 3월 21일에 먼저 투쟁의 봉화를 올리고, 4월 3일에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오래전부터 학생운동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국적 규모의 연대 투쟁이 벌어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경북대에서는 시위가 예정된 3월 21일 아침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약속한 대로 4월 3일에는 서울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선언문이 발표됐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날 밤 10시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민청학련을,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한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했다. 대학생들의 선언문 끝에 나온 명칭만 가지고 몇 시간 만에 민청학련을 체제 전복을 노리는 공산주의 혁명단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국은 단숨에 얼어붙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꺾였고, 곳곳에서 연행자들이 속출했다. 거리에는 여정남의 수배 전단이 붙었다. 결국 여정남은 4월 16일에 검거됐다. 여정남을 체포한 중앙정보부는 곧바로 혁신계 인사들의 검거에 나섰다.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이수병 등 혁신계 인사들이 서울과 대구에서 대거 연행됐다.

 


1974년 4월 3일 터진 민청학련 사건에서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고, 여정남을 통해 전국 대학의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해 공산혁명을 획책했다고 발표했지만, 고문으로 받아낸 조서 외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 명백한 조작사건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제시한 조직체계도에는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연계한 인물로 여정남이 한가운데 나와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4월 25일에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했다. 신직수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의 수사를 진두지휘한 자였다. 5월 27일에는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추가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1964년의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여정남을 서울로 보내 전국 대학의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혹독한 고문으로 받아낸 조서 외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명칭은 중앙정보부에서 갖다 붙인 것이다. 조직이라면 있어야 할 강령도 규약도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실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1964년에도 만들어지지 않은 조직이니 ‘재건’할 것도 없었다. 명백한 조작 사건이었다. 영구집권에 가장 큰 걸림돌인 서울과 대구의 혁신계와 학생운동을 동시에 뿌리 뽑기 위해 무리해서 지하당 사건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여정남을 혁신계와 학생운동을 연결하는 고리로 내세웠다.

물론 이들은 4.19와 같은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장차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 포악무도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투쟁한 것이 무슨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이분들이 몇 년 전에 ‘경락연구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적이 있었어. 나도 이재문 동지를 통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지. 이재문 동지도 초창기에는 이 모임에 참여했다고 했어.”

경락연구회는 새로운 운동의 지도부가 결성되기 전까지 지역별로 핵심 활동가를 연계하는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또 당국의 탄압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비공개로 모임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처음 ‘경락연구회’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 나는 우리 몸의 ‘경락’을 떠올렸다. 경락은 인체의 기와 혈이 흐르는 통로를 말한다. 해부학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체의 구석구석까지 다 연결돼 있다. 탄압이 일상화된 조건에서 변혁운동의 조직도 이런 형태가 아닐까. 독재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중들 속에 구석구석 연결돼 움직이는 조직. 나도 학생운동을 할 때, 경락 같은 조직을 꿈꾼 적이 있었다. 있어도 없고,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는 그런 조직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여정남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또 한편으로 신변을 어찌할지 고민이 됐다. 공안당국이 여정남과 아버지의 관계를 파악했다면 아버지도 수사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교에 출장계를 내고, 며칠 대구를 떠나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지금 도망친다면 ‘나도 관계있소’라고 인정하는 꼴이 됐어. 일단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보자, 이렇게 마음먹었지.”

잡혀가도 할 수 없다고 마음을 정리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학습 노트를 여정남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학습 노트가 발각됐다면, 그래서 누가 만든 거냐고 캐묻는다면, 과연 혹독한 고문 앞에 버틸 수 있을까…….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남이는 나와 관계된 부분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어. 나를 잘 알고 있던 서도원 선생도, 도예종 선생도 마찬가지였지.”

덕분에 아버지는 위기 상황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살 떨리고 숨 막히던 이때를 기억하며 어머니도 “정남이가 아버지를 지켜준 셈”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박정희에 의해 '살해' 당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열사. 이들은 4.19직후부터 대구와 서울을 중심으로 남쪽의 변혁운동을 이끌었고, 박정희 독재 타도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해왔다. 그 때문에 결국 박정희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런데 이재문 선생은 달랐다. 1차 인혁당 관련자이자 대구 혁신계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이재문 선생은 즉각 지명수배가 떨어졌다. 인혁당으로 구속된 사람들과 오래도록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기에 잡히면 마찬가지의 혐의를 받을 게 뻔했다. 이재문 선생은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피해 완전히 지하로 숨어들었다.

충격적인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비상군법재판에서 인혁당 관련자와 민청학련 핵심들에게 마구잡이로 사형, 무기를 선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겁주기로 여겼다. 설마 싶었다. 아무리 잔혹한 박정희라지만, 아무려면 했다.

 


1975년 4월 9일, 그 전날의 대법원 판결이 있고 18시간 만에 박정희는 인혁당 관계자들을 사형시켰다. 아침에 서울구치소로 가족 면회를 왔다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고 있는 유족들. [사진 제공 – 안영민]


하지만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불과 하루도 안 돼, 4월 9일 새벽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이수병, 그리고 여정남……. 모두 여덟 분이 희생당했다. 전날의 대법원 판결로 실망했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구치소를 찾은 가족들은 새벽에 형이 집행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은 통곡하며 울부짖다 결국 혼절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쫓아와 항의하던 종교인들도 모두 경찰에게 끌려 나갔다.

여덟 분의 사형집행 명령서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검찰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판결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모든 게 짜인 각본대로 흘러갔다. 애초부터 박정희는 이들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래서 자신한테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본보기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믿을 수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참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변혁운동의 길에서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동지들이었다. 폭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견결히 지조를 지키며 싸워온 귀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박정희에 대한 분노의 피눈물이었다.


인혁당 여덟 분의 사형수 이야기를 담은 만화 『그해 봄』 표지. [사진 제공 – 안영민]

나도 그 눈물의 절절함을 실감한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던 2019년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챙겨드리려고 아침 일찍 아버지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기척을 듣고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왠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를 보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조용히 손짓해 나를 불렀다.

“영민아, 지금 옆방에 정남이가 와 있다.”

“네? 누구라고요?”

“여정남. 근데 지금 정남이를 잡으려고 밖에 경찰이 깔려 있다. 정남이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정남이를 꼭 지켜야 해.”

아버지는 거의 울상이었다. 나는 상황을 눈치챘다. 일단 아버지부터 안심시켰다.

“아버지, 제가 여정남 선배를 잘 피신시키도록 할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방에 들어가 계세요.”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제 안심하세요. 여정남 선배는 무사히 잘 피했습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정남이가 무사하다니 이제 안심이다.”

아버지는 밤새 그렇게 보낸 듯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 자야겠다며 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기억이 사라져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여정남은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런 여정남이 박정희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할 때 한 번씩 여정남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정남이하고 마지막에 그렇게 언성을 높이고 헤어진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왜 정남이를 좀 더 따뜻한 말로 대하지 못했을까. 이제까지 살면서 그만한 열정을 지닌 운동가를 본 적이 없었어. 그런 친구를 선배들이 지켜내지 못하고 너무 일찍 떠나보냈어.”

어머니도 생전에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그날을 잊을 수 없어. 침통한 얼굴로 귀가한 너희 아버지는 식사도 거르고 밤새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지. 그렇게 소리를 내며 우는 것도 처음 봤어. 차마 방문을 열지 못하고 나도 밖에서 같이 울었지.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는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런 청년을 박정희는 어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잔인한 4월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대구 수성못 근처에 있던 여정남의 본가를 조심스레 찾아갔다. 당시 파동에 있던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정남의 부친인 여이섭 선생이 주지로 있는 통인사란 사찰이었다. 여정남은 대처승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부친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당시만 해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물 외에는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참혹한 시절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인혁당 고문하고 조작한 자들도 '친일파'였다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다큐제작기②
해방 뒤 일제 밀정들이 경찰·CIC에 들어가
친일 독재자 박정희가 '용공'으로 조작한 것
사형선고 내린 대법원장도 일제 판사 출신
그 친일파가 윤석열 정부에서 또 요직 꿰차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사형 당한 서대문형무소박물관 현재 모습. 네번째달 제공
 

"해방 딱 되고 나니까 일제강점기 때 왜놈 경찰에서 고춧가루 물 먹여, 비행기 태워, 경찰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경찰로 다 넘어갔습니다. 일정 때 밀정 하던 사람들 그대로 CIC(미군24군단 소속 첩보부대)니 특무대니 다 들어갔고.

 

이렇게 해서 이 사람들이 해놓은 짓이 완전히 민족 간의 불신 이걸 조장시켜 놓고 일제 때 하던 그 습성 그대로 유지시키고, 지금 우리 처지도 그 당시에 비해서 하나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갈 길을 찾을 것 같으면 어딘가에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예요."

 

1988년 5월 21일 고 임종국 선생의 마지막 강연 중 일부다. 임 선생은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이후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로 인정받으며 친일 잔재 청산에 일생을 바쳤다. 민족문제연구소도, 2009년 전 국민적 성원 속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모두 그의 유지를 받들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임종국 선생의 일성을 길어 올리는 일은 무척이나 시의적절해 보인다. 무려 36년이 흐른 현재, 이종찬 광복회장이 "대통령실 안에 밀정이 있다"고 개탄하는 역사의 퇴행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저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친일인명사전> 속 4776명의 친일파들 이름 사이에 박정희 이름 석 자가 자리하고 있다. 1939년 일본 군관학교에 지원하며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란 내용의 혈서를 쓴 박정희를 두고 친일파라 정의하기를 꺼리는 자들이야말로 임종국 선생이 가리켰던 "일제 때 하던 그 습성 그대로 유지시키"는 '밀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친일파 박정희가 18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빼앗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 중 1975년 4월 9일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8인의 희생자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서대문형무소를 찾으면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을 정도다.

 

광복절을 맞아 되돌아보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가 인혁당 사건에도 고스란히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희생자들과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았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고 김용원 선생 생전 가족 사진. 4.9통일평화재단 제공
 

미래를 꿈꾸고 조국 통일을 염원했던, 가장 보통의 존재들

 

목욕탕을 경영하고 있는 자

학교도서보급소를 경영하고 있는 자

반공법 위반으로 피검된 후 무직으로 전전하던 자

삼화건설 전무이사를 거쳐 회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른 자

삼락일어연구소 강사로 입직하여 현재에 이른 자

경기여고 교사로 취직하여 현재에 이른 자

양봉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

극동건설회사 외공부장으로 종사하고 있는 자

광신상업고등학교 윤리교사로 현재에 이른 자

브록크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

노동 및 행상에 종사하고 있는 자

승리 라사점을 경영하고 있는 자

대구고려학원 강사로 현재에 이른 자

대산 목재사를 경영하고 있는 자

 

국가에 의해 인혁당 사건 때 기소된 분들의 당시 직업이다. 결국 희생자들과 피해자들 모두 어떤 면에서 보통의 존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조작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지만 어쩌면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가장 보통의 존재들일 수 있었다.

 

제주4.3으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국가폭력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사 희생자들과 피해자들도 따지고 보면 보통의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다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의 공통점은 나라 걱정이 많았고, 민중들의 편에 서려고 했으며, 굳이 앞장 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마다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고.

 

한마디로 조작, '용공 조작'이었다. 실체가 없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의 경력과 활동 이력을 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과거 이력을 바탕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저 독재 치하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었고 향후 정당 활동으로 그 목소리를 널리 퍼지게 만들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대부분은 4·19 당시 혁신계 운동을 했고, 19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1967년 재야 대통령 단일후보 운동, 19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운동, 1971년 김대중 지지 운동 및 공정선거감시운동, 유신 이후 유신반대운동 등에 몸담았다. 시종일관 조국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또 이들 중 일부는 과거 조봉암의 진보당의 평화통일 운동을 지지했고, 일부는 김구를 지지했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간첩 사건 같지만 실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인혁당이란 조직 자체가 완성된 정당이 아니었다. 애초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2차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로 윤보선 등 유력 정치인들을 지목하려 했으나 여론의 반발이 두려워 계획을 바꿨다. 훗날 재심에서도 밝혀졌듯이, 권력자의 독재 권력 유지와 이에 동조하며 그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자들이 조작한 사건의 희생자일 따름이었다.

 

만주군관학교 당시 박정희(왼쪽),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쓴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혈서(1939년 만주신문)
 

독재자, 그리고 친일파와 공범자들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

 

1974년 4월 3일 저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 담화 중 일부다. 이때가 바로 인혁당(재건위)이 독재자의 입을 통해 최초로 언급된 시점이었다. 이후 그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시민들의 열망을 꺾는 정권 유지 수단으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활용되는 순간이었다.

 

복기하자면, 독재자의 딸, 박근혜 또한 나쁜 역사를 반복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는 기무사의 조언대로 눈물을 흘리며 희생자를 호명했다. 이후 해경 해체를 주장했다. 훗날 기무사 문건을 따르면, 세월호 집회 참여자를 종북으로 간주했다. 문건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대통령이 된 딸이 과거 독재자 아버지가 썼던 반공 프레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세월호의 7시간은, 세월호 참사는 탄핵을 맞는 결정적 계기였고,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오래오래 자극했다. 딸이 이어받은 독재자 박정희의 프레임은 이랬다. 인혁당 희생자들의 죄목을 보자.

 

가.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나. 국가보안법위반 다. 내란음모위반 라. 반공법위반

 

공안 검사가 기소하고 독재 치하의 사법부와 대법원이 판결한 희생자들의 죄목이다. 어떻게든 '반공'이란 죄목 아래 당시 학생조직이던 민청학련과의 연결 고리를 조작해 내려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피고는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하게 되자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하에 국가 변란과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반국가 단체의 구성을 모의하고 북괴방송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유혈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자는 논의를 함으로써 반국가 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실상 희생자들은 후배격인 민청학련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밀접하게 관계돼 있지 않았다. 판결문의 또 다른 내용을 보면,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보통의 존재들이 무시무시한 간첩의 수괴들처럼 보일 지경이다.  

 

"'유인태가 검거되었으므로 이철도 곧 검거될는지 모르니 신변을 조심하라, 검거되더라도 배후선을 절대 폭로하지 아니하여 희생자를 적게 하여야 한다'고 지시함으로써 민청학련의 구성원과 회합하여 전국에 분산된 혁신자파 세력을 재규합하여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이 통일적인 조직으로 만든 다음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여야 된다는 지령을 받고 동 지령을 수행하겠다는 결의하에 '정부를 공산폭력혁명으로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투쟁하자'는 등의 교양을 받고, 이에 감화되어 출옥 후 서울 시내 각 모 서점을 순방하면서 일어판 식민주의와 공산주의 서적을 구입 탐독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념을 공고히 하는 일방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지도요원으로서…"

 

친일파 독재자가 민주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법살인을 저지른 최악의 국가폭력. 인혁당 사건을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따져 보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 터다. '인혁당 생존자' 박중기 선생이 "역사를 모르면 인혁당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친일파들"이었다고 강조 또 강조하는 것은.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구속시킨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부는 도예종·박현채(앞줄 맨 오른쪽과 둘째), 박중기(뒷줄 왼쪽 둘째) 등 12명에게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했다. 정부기록사진집
 

친일파에 의해 처단 당한 8인의 인혁당 피해자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하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의 과거 친일 이력이나 한일협정과 같은 한일 굴욕 외교들을 떠올리면 이러한 박중기 선생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지, 왜 그가 친일 잔재 청산을 그토록 부르짖는지 숙연해질 따름이다.

어디 독재자 박정희뿐일까. 사형선고 당사자인 민복기 대법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이자 박정희 정부의 주요 인사였던 민복기의 부친은 조선 귀족 자작이자 경술국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이다.

 

인민혁명당 사건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판결한 민복기 본인도 일제강점기 판사 출신으로서 제5·6대 대법원장을 역임하고 전관 변호사로 활동했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친일파의 손에 처단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혁당 사건 50주기를 한 해 앞둔 2024년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이는 역사 왜곡을 넘어선 뉴라이트 및 극우 친일파 인사들의 정부 요직 등용과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예고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 임종국 선생이, 8인의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이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며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다큐영화 제작비 마련을 위한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으며,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됩니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구속자 석방 거리 행진을 방해하는 경찰에 항의하는 장면
ⓒ 4.9통일평화재단 관련사진보기

"(박정희 정권 당시 재판부가) 인혁당 주모자들에게 사형선고 내렸잖아요. 바로 그 다음 날 처형을 시켜버렸고. 그러면서 아주 큰 사건이 됐어요. 억울하게 죽은 거지. 왜냐면 사형선고를 내려도 그 다음 날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게 아니거든요. 사형 집행은 상당히 좀 지나서 한다고. 근데 박정희가 빨리 좀 죽여버리라 하니까 (선고) 다음 날 사형을 시켜버렸지. 그러다 이제 최근에 와서 다시 명예회복이 됐지만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었지."

최근 다큐멘터리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촬영 차 만난 정치학자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현 정부와 관련해서는 "사실 윤석열이 지금 북진 통일론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며 "기회만 있으면 북한에 한 번 쳐들어가고 싶은 사람 같다. 자신이 있다는 투다"라고 부연했다.

원로 정치학자가 윤석열 정부의 친일 반북 기조에 대해 일침을 놓은 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그렇게 북한 김일성 정권과 체제 경쟁 중이었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조작한 대표적인 간첩 사건이었다. 유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던 사건이었던 셈이다. 최근 그 인혁당 사건이 원로 정치인인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입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이종찬 광복회장님이 말씀한 대로, 저는 대통령실에 밀정이 있거나 제가 얘기한 대로 이완용이 있어서 제2의 한일 합방을 획책하고 있다(중략). 이것은 제2의 인혁당 사건을 획책하고 있지 않는가. 또 북풍, 또 빨갱이를 빙자해서 다 잡아들이려고 하는 기도가 아닌가.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가면 안 됩니다."

박지원 의원이 인혁당 사건 길어 올린 이유

21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한 박 의원의 주장이다. 박 의원은 역사 왜곡을 넘어 친일 행보를 보이고 있는 현 정권이 결국 '북풍' 공작이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조작 사건을 통해 친일 행보를 공고히 할 것이란 예상을 내놓은 것이다. 이를 위해 예로 든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인 인혁당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 가운데, 제79주년 광복절을 전후해 보수주의자인 이종찬 광복회장마저 '대통령실 내에 연탄가스처럼 밀정들이 퍼져 있다'며 강력한 우려를 내놨다.

야권을 중심으로 현 정권이 '탄핵 이후'를 대비해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만한 정부 조직을 죄다 학연 및 지연으로 맺어진 충성 그룹으로 채워나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돈다. 이러한 현 정권의 행보가 반세기 전 박정희 독재정권을, 계엄령 선포 정국을 연상시킨다는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닌 셈이다.

수사기관과 사법부까지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일으킨 대형 간첩 조작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이었다. 현 정권은 수사기관에 이어 군까지 장악한 채 역사 왜곡과 친일을 앞세우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19일 윤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상황을 가정해 실시하는 한미 합동 '을지 자유의 방패' 훈련 첫날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강도 높은 발언을 내놨다.

최근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역사 왜곡에 이은 친일과 반북이야말로 박정희 정권과 현 정권이 앞세운 정권 유지의 공통분모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박 의원이 윤석열 정권의 인사를 두고 인혁당 사건의 기억을 길어 올린 이유일 것이다.

그 인혁당 사건의 참혹성을 이해하고 현재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이 앞세웠던 고문과 조작의 기술들이다. 인혁당 사건 조작을 위해 박정희 정권은 친일 경찰들이 자행했던 고문 기술들을 그대로 가져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고 이틀째 사형 집행이란 전무후무한 사법살인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문과 은폐, 공포의 기억

  다큐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촬영 중인 박중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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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기 선생의 청력 기능 손상은 심각한 정도다. 한 쪽 청력은 완전히 상실됐고, 보청기를 쓰더라도 평상시 대화 또한 입 모양을 읽거나 필담을 해야 할 수준이다. 1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당한 고문은 이렇게 상상조차 힘든 기억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박중기 선생은 도리어 "그때는 다 그랬다"는 듯 담담히 회고한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동료들이 당한 피해를 더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인혁당 백서>에 기록된 박 선생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고문 실상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피의자였던 박중기는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를 심하게 당해서 3, 4회 실신하였으며, 강무갑은 심하게 구타를 당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고막이 터졌다. 박중기의 경우 바닥에 몸을 눕히고 양팔과 양다리를 묶이거나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물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수사관들이 시멘트를 발라놓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그 안에 박중기의 얼굴을 집어넣거나 온몸을 담가 놓은 다음에, 발가락에 코일을 감은 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문 사실은 당시 한국인권옹호협의회장 박한상 변호사가 서울교도소에서 재소자 조사를 통하여 밝혀냈으며, 당시에 이 내용이 신문 지상에 보도되어서 논란이 되었다. 또한 도예종·우동읍(우홍선) 등 혁신계 인물들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1964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 당시 민청학련 관련 피의자였던 시인 김지하가 폭로한 실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김지하는 서울구치소에서 하재완으로부터 "인혁당 사건은 고문을 통해서 조작되었다. 나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탈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폭로했다. 훗날 출소한 김지하는 이러한 사실을 신문에 연재했고, 단 3회 연재 후에 반공법 위반으로 재수감되기도 했다. 김지하의 '고문의 기억'은 이랬다.
'하재완은 중정에서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고 서울구치소 교도관에게 이야기했고, 탈장이 되어서 아랫배가 불룩하였으며 잘 걷지 못한다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하재완의 몸에는 구타로 인한 멍 자국이 있었다. 또한 우홍선은 서울 구치소에서 대낮에도 구치소 당국의 허락을 받고 사방 안에서 누워 있었고 우홍선·하재완은 조사를 받고 새벽에 사방으로 복귀할 때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업혀 왔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 전병용은 이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구타로 인한 피멍 자국이 있었고 대화를 하면서도 온몸의 고통을 못 견디어 사방 철문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는 것을 목격했다(...).

하재완은 창자가 고환으로 빠져나오는 탈홍(직장탈출증),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탈장으로 인해 한 손으로 항문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집어넣으면서 재판을 받았다. 또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폐농양증이 걸려서 기침을 할 때 피가 흘러 나왔다.'

독재정권의 극악한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고문 은폐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경찰은 사형 집행 다음 날인 4월 10일 송상진과 여정남의 시신을 홍제동 벽제화장터에서 가족들이 동의 없이 직접 화장했다. 유가족들은 경찰이 시체에 남아 있던 고문 흔적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패륜적인 무리수를 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당시 김진생(송상진의 부인)씨는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서 벽제 화장터에서 바로 화장을 시켜서 시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다른 유족이 남편의 관을 열어 보았는데,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배수자(서도원의 부인)씨는 "원래 함세웅 신부가 있는 응암동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남편의 관을 실은 차가 창녕까지 갔다"고, 이정숙(이수병의 부인)씨는 "천주교 사제단 함세웅 신부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살펴보니 손톱, 발톱, 발뒤꿈치와 등에서 시커멓게 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문 흔적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이들 사형수 부인들 중 다수는 참고인 자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고문 대신 갖가지 가혹행위를 당한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저항의 몸부림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가 고문을 당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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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만한 아무런 자료를 찾아볼 수 없고, 또한 일건 기록을 정사하여 보니 피고인들 및 참고인들은 원심법정에서 검찰관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각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조서 및 자필진술서 그리고 참고인들에 대한 진술조서 등의 성립의 진정을 인정하였으므로 동 조서 등은 모두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이에 대하여 동의여부는 불필요하므로 논지 이유 없으며 적법한 증거조사를 하였음이 명백하므로 논지는 모두 이유 없다.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한 단체라 아니할 수 없으므로 피고인들이 결성한 유형적 결합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라고 판시한 원심판결은 정당하고 따라서 논지는 이유 없다.'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들의 항소에 대한 사법부의 입장)

이들이라고해서 눈앞에 닥친 서슬 퍼런 국가폭력 앞에 무기력하게만 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 항소이유서를 제출하고 개개인의 법적 권리를 통해 독재정권의 무도함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항소의 요지로, 첫째 피고인들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일도 없으며 기타 공소사실들은 전부 허위사실이므로 원심판결은 각 사실을 오인하였고, 둘째, 검찰관 및 사법경찰관 작성의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및 자술서 등은 강요에 의하여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므로 이를 증거로 한 원심 판결은 채증 법칙에 위배하였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2000년 이후 진행된 1, 2차 재심 모두 무죄 판결이 나왔으니, 문자 그대로 정당한 주장이라 할 수 있었다.


  2차 인혁당 사건 재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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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입니다."

사형이 언도됐던 당시 여정남 선생이 법정에서 미소와 함께 남겼다는 마지막 증언 중 일부다. 이들은 고문으로 인해 육체가 고통받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을지언정 여정남 선생처럼 당당함은 잃지 않았다. 이들의 상고이유서와 항고 이유서에 그러한 당당함이 잘 드러난다.

"상기 진술서는 수사관의 공포와 억압으로서 지시에 따라 읽어주는 그대로 받아쓰기를 시켜 서명하게 하였습니다." (송상진의 항소이유서 중)

"시종일관 고문 공갈 협박으로 강제 조작 허위 진술된 제반 기록에 의한 엉터리 공소 사실과 위법재판 절차를 그대로 인정 항소기각 결정을 내린 비상고등군법회의에의 2심 재판 역시 1심 재판과 마찬가지로 전면 무효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정남의 상고이유서 중)

"5월 27일 검찰관이 1차로 공소를 제기해놓고 5월 29일부터 6월 8일까지 연일 혹독한 고문과 협박 등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사전에 작성된 공소사실 32항과 똑같은 복사된 각본대로, 취조관이 읽고 피고인은 그대로 받아쓰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자필 진술서에 기재된 32항과 똑같은 내용의 조서에 의하여 중앙정보부 간부실에서 6월 9일 작성된 것이 마지만 검찰관 신문조서다. 나는 4월 28일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었으며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 취조를 받았다." (하정완의 상고이유서 중)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문과 일주일에 걸치는 주야 연속 심문 등 위협과 회유를 겸한 정신적 위축, 그리고 동시에 동일 장소에서 행해진 경찰 수사와 검찰 취조가 도저히 자유롭게 진술할 수 없었습니다." (이수병의 항소이유서)

이미 사법살인이 자행되기 전, 희생자들의 법적 주장 속에 공안기관과 수사기관이 고문·조작하고 사법부가 용인한 역대 최악 조작 간첩 사건의 진실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검찰 독재정권이란 표현이 심상찮게 등장하는 요즈음 인혁당 사건이야말로 반면교사 삼아야 할 반북 간첩 조작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으며,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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