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걸린 한반도 평화…위태로운 '위협의 균형'
김정은 "힘의 균형 파괴되면, 핵무기 포함 무력사용"
국방종합대 연설…윤 대통령 '국군의 날' 기념사 비난
남북 지도자 '만약'에 기대 경쟁적으로 '공멸'을 예언
유엔 사무총장이 말조심 당부한 까닭은? "대화하라"
"지난 10월 4일 유엔사무총장 대변인은 우리에게 '수사의 수위를 낮추길 바란다'는 요청을 해왔다. 이같은 요청이 서울에도 전달됐는지 불분명하나 (…) 나는 분명히 일관하게 군사력 사용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천명할 때마다 '만약'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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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내뱉는 순간 허공에서 사라지기도 하지만, 자칫 큰 싸움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저잣거리의 흔한 싸움과 마찬가지로 말과 말이 부딪히면서 긴장이 높아지면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이란 전쟁의 와중에서 유엔의 존재는 갈수록 추레해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서 건설적 역할을 한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나마 '말의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엉뚱하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7일 김정은국방종합대학 개교 60주년 기념연설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김 위원장은 '유엔의 당부'를 들머리로 군사력 사용에 관한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적들이 우리 국가를 반대하는 무력 사용을 기도한다면 공화국 무력은 모든 공격력을 주저없이 사용할 것이며, 여기에는 핵무기 사용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전 시기에 우리가 그 무슨 남녘해방이라는 소리도 많이 했고, 무력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두 국가를 선언한)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다"라면서 "솔직히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의식하는 것조차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 서고 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유엔 누리집에 따르면 지난 4일 한반도 관련 일정은 없었다. 어떤 계제에서 북한에 '말조심'을 요청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이러한 당부를 한 건 처음이 아니다. "(북한의) 고립이 아닌, 외교로 한반도에서의 '부정적 궤적'을 뒤집어야 한다"는 게 구테흐스 총장의 지론. 작년 4월 13일 북한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관련국 장관급 회의에서 북한과 한미동맹이 무한 대치하는 상황을 개탄하며 한 말이다. 구테흐스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거론하면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하고, 대화 재개를 촉구했다.
더불어 "적대적 레토릭(수사)을 줄인다면 정치적 긴장을 낮추고 외교적 접근을 탐사할 공간을 만들어낼 것"이라며 말조심을 당부했다. 북한이 화성-12형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2022년 2월 1일 안보리 긴급회의에서도 대변인을 통해 강조한 말이다. 안보리 제재 결의를 위반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면서 지속가능한 평화의 방안으로 대화와 외교를 역설했다. 북한과 한미동맹이 정확히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메시지를 되풀이 내놓고 있다.
김 위원장은 북한 국방과학과 방위산업의 미래 일꾼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힘의 균형'을 강조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며, 한미동맹이 '핵동맹'이라는 사실도 인정했다. "조선반도에서 전략적 힘의 균형의 파괴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라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밝힌 '군사력의 압도적 대응'을 거론했다. "현명한 정치가라면 국가와 인민의 안전을 놓고 무모한 객기를 부릴 것이 아니라 핵국가와 대결과 대립보다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상황관리 쪽으로 더 힘을 넣고 고민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요약하면, '만약'을 전제로 핵무기를 포함한 공격 의지를 강조하는 한편 상황관리의 중요성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물잔에 비유하면 위협의 절반을 채우고, 절반을 남겨 놓은 셈. 윤 대통령 역시 '만약'을 전제로 물잔의 절반을 채운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 사용을 기도한다면 우리 군과 한미동맹의 결연하고 압도적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면서 "그날이 바로 북한 정권의 종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이 물잔의 중간선을 지키면서 '위협의 균형'을 이룬다면 적어도 물이 흘러넘치는 파탄은 없을 것임을 윤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역설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구테흐스가 강조한 말조심 당부 역시 같은 맥락에서 대화와 외교를 역설한 것이다. 남북 지도자와 유엔 수장이 한줄기 입장이라면 한반도 안보 전망이 긍정적일까?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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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관한 한 북은 늘 앞서 나간다. 김 위원장은 미국을 '반공과 전쟁에 명줄을 걸고 있는 침략의 원흉'으로, 대한민국을 '그 사환군(꾼)'으로 지칭했다. "더러운 명줄이 끊기는 시간을 감득할수록 더더욱 발광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며 마지막 힘이 깡그리 소모될 때까지 전쟁에로 줄달음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거론한 '정권 종말의 날'에 대해 "천박하고 상스러운 망발"이라면서 "상전의 '힘'에 대한 '맹신'에 완전히 깊숙이 빠져 있다"고 비꼬았다. 윤 대통령에 대해 "좀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사기가 쉽다"라는 등 상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수사가 상궤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상대를 자극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흡수통일을 암시하는 '자유의 북진'이나 '힘에 의한 평화' 등 남측이 내놓은 말 역시 북한을 자극했을 터. 윤 대통령은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가 '변곡점'에 처했다"는 말이 종종 나오지만, 한반도는 그리 한가하지 않다. 점은 선이 됐고, 선은 면이 됐으며, 면이 불온한 전략공간이 된 지 오래다. 남북은 전쟁준비, 전쟁연습, 무력시위에 각각 열을 올리면서 갈수록 말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표현 수준이 어떠하든 서로에 대한 위협의 끝은 남과 북의 공멸이다. 자기 핵이든, 남의 핵이든 모두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으로 쌓는 성에는 철근도, 콘크리트도 없다.
북한은 7일 개막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1차 회의에서 헌법에 '영토조항'을 신설하고, 남북이 '교전 중인 두 국가'임을 명시하겠다고 예고했다.
아군 포성 울리면 대피소 가야 하는 '눈물의 연평도'
[연평도 르포] 북한 석도와 불과 3㎞, 남북 대치 현장
예고된 포사격에도 온몸 울리는 K9 자주포의 "굉음"
훈련의 정상화? '주민 안전'을 담보로 벌이는 무리수
두 차례 연평해전, 정전 후 첫 포격전의 상흔 곳곳에
가래칠기 해변, 조기 역사관, 충민사 등 볼거리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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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쾅."
지난 5일 오후 2시쯤 연평도를 쩌렁쩌렁 울린 K9 자주포의 포성이다. 전날 포사격 훈련을 예고하는 휴대전화 공지가 있었지만, 불의의 굉음은 방문객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총성이 귀청을 울린다면 포성은 온몸을 울렸다. 거의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주민과 방문객은 물론, 섬 안의 모든 생명체가 울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여러 문이 특정 과녁을 타격하는 '동시표적사격(TOT)'은 동시에 또는 몇 초 간격으로 포성을 잇달아 토해냈다. 3개 포대 18 문의 K9 자주포는 한 발당 400만 원에 달한다는 포탄을 얼추 100발가량 뿜어댔다. 섬 내 8곳의 대피소가 개방돼 있었다.
"9.5(목) 14시경 백령 및 연평도 지역에서 우리 군이 해상사격 예정입니다. 주민 및 방문객들은 야외활동을 자제 바라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권고합니다." (15일 11시 7분, 옹진군) 전날 포사격을 예고하며 "안전에 유의하라"고 사전 안내했고, 포사격 뒤에는 "15시 10분 해상사격이 종료됐다"고 알렸다.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 정지에 따른 훈련의 정상화니, 올해 해상 완충구역에 첫 포사격을 한 건 북한이라느니, 멀리 떨어진 용산 국방부의 탁상 위에서나 주고받을 말이다. 북방한계선(NLL)을 이고 사는 연평도 주민에게는 결코 할 말이 아니다. 그 이유를 밝히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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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포사격은 올들어 세 번째. 지난 1월 5일 오전 북한이 연평도 맞은편 등산곶과 백령도 맞은편 장산곶 인근 해상 완충구역에 200여 발의 해상 포사격을 했고, 같은 날 오후 우리 군은 400여 발의 대응 사격을 했다. 국방부는 군복차림의 장관이 합참 전투통제실을 찾아 훈련 상황을 점검하는 사진을 내보냈다. 어쨌든 포문을 먼저 연 건 북측이었다. '선제 포격'의 주체가 바뀐 것은 지난 6월 26일이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 소속 해병부대가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해상 사격훈련을 했다. K9 자주포와 다연장로켓 천무, 스파이크 미사일 등 290여 발을 공해상의 가상 표적에 쏘았다. 2017년 8월 이후 첫 정례 훈련이었다.
그런데 남이건, 북이건 포문을 열면 연평도 주민은 가까운 대피소를 찾아야 할까? 아니다. 상식이 무너진 건 지난 1월 5일이었다. 남북이 해상포격을 주고받은 그날 상황을 돌아보자. 북한군이 해상 포사격을 한 것은 이날 오전 9시쯤부터 11시쯤까지다. 그런데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과 백령면 사무소가 주민대피령을 발동한 건 낮 12시 13분쯤이었다. 왜 북한군의 포사격 시간에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국방부 당국자의 답에 '불온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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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국자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북한이 해안포를 쐈기 때문에 주민을 대피시킨 게 아니라, 연평도 포격 때처럼 우리 군의 해안포 사격을 빌미로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할 수 있어서 대피령을 내린 것"이라고 답했다. 주민대피령을 내린 직접적 이유로 북측의 포사격이 아니라, 우리 측의 포사격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5일 백령면과 연평면 주민에게 발송된 '대피 권고' 메시지도 같은 맥락이다. 국방부 당국자가 확인하고, 현장에서 거듭 확인한바 연평도 주둔 해병의 포사격은 주민 안전을 담보로 한다. '국민의 안전'은 윤석열 정부가 습관처럼 되풀이해 온 말이다.
그런데 국민의 안전은 금액으로 얼마나 될까? 국방장관 신원식에 따르면 달랑 '1원'이다. 남북 9.19 군사합의를 일방적으로 일부 효력 정지한 뒤 작년 11월 23일, 국회 국방위에서 버젓이 한 말이다. "(일부 효력 정지의) 이익이 1조 원이면, 손해는 1원"이라고 했다. 2018년 이후 남북 간 서해 충돌을 막아 온 군사합의를 폐기한 결과 연평도 주민이 겪어야 하는 불안과 불편,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부수적 피해'도 1원에 포함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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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말이 현란한 이다. 당시엔 대통령의 결정을 무작정 엄호하려다가 둘러댄 요설 정도로 들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새삼 궁금해졌다. 이득과 손해를 보는 주체가 국민이라면 99원의 이득을 위해 1원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심코 내뱉은 말로 국민 안전의 값을 매겼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국민의 군대'에서 밥을 벌던 군인 출신 안보 관료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다. 연평도는 여느 최전선이 아니다.
주민과 군인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북측 석도(3㎞)와 갈도(4.5㎞), 장재도(7㎞)가 지척이다. 1차 연평해전(1999)과 2차 연평해전(2002)은 그나마 바다에서 벌어진 군과 군의 충돌이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던 북측 개머리해안이 12㎞, 무도 방사포 기지가 11㎞ 거리다.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된 까닭이다. 이후 K9 포대를 1개(5문)에서 3개(18문)로 늘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중과부적이다. 위력이 떨어질지언정 북측 해안포가 10배 이상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시 북측이 포격을 멈추지 않으면, 선박을 댈 수 없는 곳이다. "1원"을 운운한 예비역 장성의 뇌리에 최전방 주민은 단연코 없었다. 14년 전 포격의 흔적은 섬 곳곳에 내재화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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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도 화근은 우리 군의 K9 포사격이었다. 북측이 이날 오전 전통문을 통해 우리 군의 호국훈련을 거칠게 항의했지만 묵살했다. 군 지휘부는 북측의 이상 동향을 보고받고도 무시했다. 북측 미그-23기 5대가 정찰비행을 한 뒤 포격이 시작된 것은 오후 2시 34분. 북측은 세 차례에 걸쳐 1시간 동안 포격을 퍼부었다. 민간인 지역 7곳도 비켜 가지 못했다. 해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 전파된 건물이 49채, 부분 파손된 건물이 400채였다. 전체 건물 800채의 절반이 피해를 본 것.
섬 곳곳이 불길에 휩싸였지만, 소방차는 1대뿐이었다. 다음날 인천에서 급파된 화물선이 소방차를 실어 와 진화할 수 있었다. 다행히 부두시설이 파괴되지 않은 덕분이다. 정부 지원으로 새집과 새 건물이 늘어났다. 학교 건물은 연평 초중고등학교 1곳. 건물 안 초등학교 지하에는 도서관과 놀이 시설을 갖춘 100평의 '희망대피소'가 생겼다. 시내 1호 대피소에는 간이 진료소도 갖췄다. 그러나 연평도가 고향인 해설사는 "주민들은 굉음만 울려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라고 전한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훈련을 한다"는 말이 적어도 이곳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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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는 교육하고, 평화는 전망한다. 관광의 주제이기도 하다. 175번지의 피폭 가옥 3채를 보존하고, 바로 옆에 안보교육장을 세웠다. 해주만을 바라보는 평화전망대에는 17세기 시작한 조기잡이 전성시대부터 섬의 역사를 담았다. 1969년 처음 점등한 연평도 등대는 남북관계와 운명을 함께했다. 조기 파시가 열릴 정도로 은성했던 바다를 한동안 비췄지만, 어업한계선이 덕적도로 내려가면서 쓸모가 없어지자 1974년 소등했다. 2019년 재점등했지만, 등대 구실은 못 한다. 어선을 띄울 수 없는 밤바다에 등대 불빛은 장식품일 뿐. 불빛은 남쪽만 비추도록 인위적으로 조정했다.
평화와 안보를 걷어내도 볼거리는 많았다. 연평도(延坪島)는 평평하게 이어진 섬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분단 이전에는 황해도 해주군에 속했다. 평화공원 옆 나즈막한 봉우리 정상에는 이 층 누각의 조기 역사관이 새 단장 중이었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가래칠기 해변은 절경이었다. 병자호란 어간에 조기잡이 어살법을 처음 알려준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민사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소연평도의 얼굴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섯 가지 표정을 짓는다. 풍요와 전쟁, 분단과 최일선, 평화로운 일상 속 상흔, 지난한 역사의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연평의 얼굴'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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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격으로 새해 연 남북…'9.19 없는 서해'의 미래인가
육군, 이례적 새해 첫날 사격 이어 5일 남북 서해 포격
연평도·백령도 주민대피령…양구선 놀란 주민들 항의
해동기 포사격 본격화되면, 다시 '격랑'에 휩싸일 서해
'안전장치' 풀고 애먼 장병들에게 외치게 한 "즉, 강, 끝"
새해 첫 아침 밥상이 중요하듯, 군사분계선 부근의 분위기도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한해살이의 앞날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할지언정 정초엔 불온함을 멀리하는 게 한반도 거주민의 오랜 풍습이다. 그런 점에서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남과 북이 '말의 전쟁'에 이어 내보인 '결기'는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남북의 새해 첫 '상차림'을 면밀하게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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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200발, 남 400발
남북이 포사격으로 새해를 열었다. 합동참모본부는 5일 "북한군이 오늘 09시쯤부터 11시쯤까지 백령도 북방 장산곶 일대와 연평도 북방 등산곶 일대에서 200여 발의 사격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다행히 우리 군과 국민의 피해는 없었다. 탄착점이 북방한계선(NLL) 북쪽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목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경고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군도 이날 오후 3시쯤부터 K9 자주포 등의 해안포를 대응 발사했다. 역시 경고 성격이었다. 다만 '비례 대응'의 범주를 넘었다. 북측이 발사한 포탄의 두 배가량인 400여 발을 발사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당국자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우리도 6년 만에 처음으로 해상완충해역에 포사격을 했다"면서 이같이 전했다. '해상완충구역'은 이제 의미가 없는 말이다.
남북은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1조 2항)에 따라 서해 남측 덕적도~북측 초도까지의 해역에서 포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을 중지키로 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22~23일 남측의 비행금지구역 일방 효력 정지에 이은 북측의 합의 전면 파기로 무용지물이 됐다. 6년 만에 달라진 건 남북 군 당국이 해상완충구역에 갈마들며 포사격을 한 데 그치지 않았다. 백령도, 연평도 주민들까지 14년 전의 악몽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사무소와 백령면사무소는 낮 12시 13분쯤 안내방송을 통해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가까운 대피소로 피했다가 오후 3시 46분쯤 대피령이 해제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3시간 30분 동안 연평도 주민 2100명 중 495명이 대피소 8곳에 분산됐고, 백령도 주민 4800여 명 중 269명과 대청도 주민 36명이 대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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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20%만 대피
북한이 포사격한 해역은 연평도, 백령도로부터 수십㎞ 떨어진 곳인데 주민들이 왜 대피해야 했을까. 또 왜 전체의 20%도 안 되는 주민만 대피시켰을까. 국방부 당국자는 "북한이 해안포를 쐈기 때문에 주민을 대피시킨 게 아니라, 연평도 포격 때처럼 우리 군의 해안포 사격을 빌미로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할 수 있어서 대피령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 군이 백령도와 연평도 북측 수역으로 해안포 사격을 했다는 건 남측의 완전한 억지 주장이며, 대피와 대응 사격 놀음을 벌인 것 역시 상투적인 수법"이라는 북측 인민군 총참모부의 보도도 틀렸다. 그야말로 상투적인 대남 선전전일 뿐이다.
우리 정부와 보수언론은 9.19 합의 일부 효력 정지를 두고 분계선 인근 상공에서의 대북 정찰을 재개하게 됐다며 '안보의 정상화'라고 평가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5일 서해에서 벌어진 일은 남북 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그 탓에 주민이 불안에 떨어야 하는 긴장이 '일상화' 된 첫 신호이기 때문이다. 악몽의 재연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이를 내다보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규명해야 한다. '9.19 합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대통령과, 일부 효력 정지가 "1조 원의 이익이 있다면, 그로 인한 손실은 1원"이라고 호들갑 떠들었던 신원식 국방장관에 책임의 일단이 있다는 말이다. 국민이 안보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보장하는 안전장치는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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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일부 효력정지가 초래한 '긴장의 일상화'
기실 새해 아침 첫날 포문을 연 건 남측이었다. 1일 우리 육군은 새해를 실사격 훈련으로 시작했다. 제3 포병사단 예하 백골 포병사단은 강원도 철원 문혜리 포격사격장에서 K9, K55A1 자주포 18문을 동원해 150발을 쐈다. 강원 양구에서는 1월 1일 사격에 급급했던지, 사전 홍보조차 하지 않은 탓에 새해 첫날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강원도민일보는 양구군 동면 팔랑 1리 포 사격장에서 느닷없이 실시된 박격포 사격 훈련 탓에 놀란 주민들이 해당 부대로 몰려가 항의했다고 2일 전했다.
한 군사전문가는 <민들레>에 "육군의 혹한기 훈련은 매년 하지만 장병들이 하루 쉬는 1월 1일부터 사격을 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정치적 메시지가 담겼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리 군은 1일부터 연일 주둔지와 작전지역 안에서 자주포와 전차, 공군 항공, 화포, 차량 등을 동원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에 따르면 해군은 3일 동·서·남해의 1·2·3함대 해역에서 올해 첫 해상기동훈련과 함포 사격훈련을 동시에 전개했다. 구축함을 비롯해 함정 13척과 항공기 3대가 참가했다.
북한의 해안포 사격 훈련은 9.19 합의 이전만 해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그때마다 우리 군도 대응 사격을 해왔다. 그 끝에 발생한 유혈 충돌이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이었다. 그러나 국방부 당국자의 설명과 달리 우리 군은 북한군의 포사격과 우리의 대응 사격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공개하지 않았다. 주민을 대피시키지 않은 건 물론이다. 5일처럼 남북의 포사격이 있을 때마다 주민대피령을 내린다면, 서해 5도 어민들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조업을 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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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되는 해동기 이후 '격랑'
이제 해동기가 되면 남북의 해안포 사격으로 서해가 다시 시끄럽게 됐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22년 3월 북한의 서해 창린도 해역 해안포 발사를 두고 "9.19 합의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국방부는 당시 해상완충구역 북방이었기에 합의 위반이 아니라고 밝혔다. 진정한 국방은 통수권자 이하 군 수뇌부가 밤잠을 설치며 대비할지언정 국민은 편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완성된다. 시도 때도 없이 국민을 불안케 하는 국방은 하류 중의 하류다. 다가오는 4월 총선과 무관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해는 9.19 합의 파기 뒤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 곳이다. 제1연평해전(1999), 제2연평해전(2002), 천안함 침몰(2010)에 이어 연평도 포격이 발생했다. 이날 남북의 해안포 사격과 주민대피령 발동은 '9.19 없는 서해'의 앞날을 보여준다. 군사적 충돌의 안전장치를 먼저 해체해 놓고 애먼 일선 장병들에게 "즉, 강, 끝(즉시 강력하게 끝까지 응징)" 구호를 외치게 하는 것은 국민 우롱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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