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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학생과 싸울 수 없다” 전경의 고백…‘열린 군대’의 씨앗이 되다

by 무궁화9719 2024. 4. 27.

“학생과 싸울 수 없다” 전경의 고백…‘열린 군대’의 씨앗이 되다

[한겨레S] 커버스토리
열린군대시민연대 10주년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전경 폭력에 숨져
‘양심선언’ 박석진, 13년 뒤 그날 ‘열군’ 출범

“채 상병 사망·수사 외압, 군대문화 병폐가 원인”
2012년 대선 개입이 단체 창립 계기
“중립성 무너진 군, 감시할 필요 절감”

기자조일준
  • 수정 2024-04-27 09:35
  • 등록 2024-04-27 07:00
2024 세계 군축행동의 날인 지난 22일 오전 박석진 열린군대시민연대 상임활동가(뒷줄 오른쪽 둘째) 등 28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평화를 염원하는 손팻말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0년 활동의 전체 맥락을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해야죠.”
“스토리텔링을 잘 짜는 게 중요해요.”
“어떻게 일러스트를 할지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그래픽이 너무 많으면 어수선해 보이진 않을까요?”
“많이 넣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리스트를 보고 검토하죠.”
 
지난 15일 저녁,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작은 건물 3층. 열린군대시민연대(이하 열군) 사무국에서 운영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4월26일 저녁에 열릴 열군 10주년 후원의 밤 ‘꿈꿔온 10년, 열어갈 10년’(행사명)을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과 자료집부터, 초청장 발송, 행사장 세팅과 진행, 축하공연, 음식 준비까지 챙길 게 한둘이 아니었다. 운영위원 8명 중 열군 창립자인 박석진(55) 상임활동가를 뺀 7명은 20~30대 남녀 청년들이다. 열군의 정책과 활동은 운영위가 결정하고, 일상적인 실무는 박석진과 신재욱, 두 명의 상임활동가가 도맡다시피 한다. 열군은 “군사문화의 수직적 계급 구조와 무조건 상명하복 문화의 폐단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만큼 단체 운영도 수평적 구조를 추구”(박석진)한다. 그는 관공서 업무 등 행정적 필요에 따른 ‘서류상 대표’일 뿐이다.

군사독재 정권 끝났지만…

열군이 2024년 4월26일로 창립 10돌을 맞았다. 한국 사회에서 몇 안 되는 군사 문제 전문 시민단체 중 하나다. 박 활동가는 “한국 사회에서 군대와 안보 문제는 성역화한 측면이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과 분단은 북한을 항상 위협적 존재로 규정했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적대감과 힘에 의한 안보 논리가 많은 국민에게 내재화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열린군대시민연대의 박석진(오른쪽 맨 뒤)·신재욱(왼쪽 맨 앞) 상근활동가를 포함한 운영위원들이 지난 15일 서울 성북구 사무실에서 회의 중 창립 10주년을 뜻하는 열 손가락을 펴보이고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그가 열군을 창립한 직접적 계기는 2012년 대선 때 국군 사이버사령부가 댓글 부대를 운영하면서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사건이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였던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사실은 군사 정권과 싸운 거잖아요.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고 개정 헌법에 ‘군의 정치적 중립성’(5조 2항)을 명시했는데, 그것이 무너지고 있었어요. 시민사회가 군대를 감시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뜻이 맞는 분들이 함께했죠.” 그는 “감시와 비판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시민의 힘으로, 한국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수호하는 진정한 ‘국민의 군대’가 되도록 노력한다”고 열군의 목표와 활동을 소개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196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을 물리친 뒤에도 뿌리 깊은 군사 문화의 잔재와 권위주의 그림자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해 여름 호우 실종 민간인들의 수색 작업에 투입됐다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숨진 해병대 채 상병의 사망 사건을 두고 권력의 최고위층이 보여주는 무책임과 수사 외압 의혹은 최근의 일례일 뿐이다. 박 상임활동가는 해병대 채 상병 사망과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윤석열 정부의 불통과 권위주의적 속성, 군 지휘관의 입신양명 욕구, 그리고 지휘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기 힘든 군대 문화의 병폐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열린군대시민연대의 로고. 시민사회(civilian)가 군대를 감시하는 눈을 형상화했다.
 
“윤석열 정부의 문제 중 하나는 굉장히 이데올로기적인 정권의 색채가 짙다는 겁니다. 그런 정권은 북한뿐 아니라 야당이나 시민사회와도 대립하는 속성이 강해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수사자료 회수 관여 의혹, 윤 대통령이 범죄 피의자인 그를 호주 대사로 보내버린 것도 그래요. 국민이 이 사건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는데, 수사를 받는 핵심 피의자를 딴 데로 보내버리면 문제가 없어지고 논란이 잦아들 거라고 판단한 거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식으로 꼼수를 써서 문제가 풀릴 만큼 낮은 수준이 아닌데 정치권력의 속성이 그런 짓을 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또 “군이 상명하복의 조직이라지만 정당한 명령이냐 아니냐가 복종 의무의 기준이 돼야 한다”며 “군인복무기본법(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에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하고 양심선언자나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호의 실효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법·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20명 미만 후원자, 지금은 440여명

열군은 이제 10살이 됐지만, 박 활동가가 군대 감시 시민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91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1990년 10월 노태우 정부가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겨냥한 ‘신(新)공안정국’으로 치달았다. 그에 맞선 시민사회의 저항도 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1년 4월26일, 명지대 1학년 강경대군이 전투경찰(전경)의 무차별 폭력으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박석진은 대학 1학년 재학 중 휴학하고 군에 입대했다가 전경으로 차출돼, 서울의 여러 대학과 거리에서 시위 진압의 최전선에 서야 했다. (▶관련기사=강경대 죽음 뒤 “진정한 분노의 대상 알아야 한다” )
 
자괴감이 컸던 박석진 일경은 강경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며칠간 깊은 고민에 빠졌다. 5월4일, 그는 연세대 학생회관에 있던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를 찾아가 양심선언을 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지만 실정법으로는 ‘탈영 군인’이었다. 2년여 수배 생활 끝에 양심선언 동료 군경들과 청와대로 행진 중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한 뒤에는 잔여기간 복무까지 마쳐야 했다.
 
1991년 5월18일, 전경으로 복무중 양심선언을 하고 수배 중이던 박석진(당시 24살) 일경이 민주화 시위 중 전경의 폭력에 숨진 명지대 재학생의 장례식 당일 노제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박석진 제공
 
그 뒤 박석진은 군대 문화를 바꾸는 시민운동에 힘을 쏟겠다고 결심했다. “힘들고 지칠 때면 경대를 많이 찾아갔어요, 광주 망월동에. 가서 술 한잔 따르고 저도 한잔 먹고. 경대 옆에서 밤을 새운 적도 몇번 있어요. 저는 ‘강경대 열사’라는 호칭보다 경대라고 부르는 게 편해요. 그를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저 혼자 친해진 거예요.”
 
열군이 출범한 2014년 4월26일은 13년 전 대학생 강경대가 스러진 바로 그 날짜였다. 창립총회 발기인들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군의 정치적 중립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과 시대착오적 통제에 반대하며, (…) 군사주권의 회복, 평화와 복지를 위한 군축을 위해 시민사회와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열군의 지난 10년은 그런 다짐과 선언을 실천해온 시간이었다. 시작은 열악했다. 그해 12월, 열군의 첫 총회 참석자는 20명이 채 되지 않았고, 한 해 후원금 총액은 180만원에도 못 미쳤다. “상근 활동가가 저 혼자였는데, 당연히 활동비 같은 것은 없었고, 격일로 밤샘 세차 일을 하거나 새벽에 어린이집 식자재 배달 등 일을 병행하며 활동을 이어갔죠.”
 
10년이 지난 지금 정기후원회원은 440여명으로 늘었다. 부정기적인 시민 후원금과 아름다운재단 등 민간단체의 프로젝트 지원금도 소중하게 쓰인다. 그래도 회원 수는 활동의 중요성에 비춰 턱없이 적고 살림살이는 늘 빠듯하다. 박 활동가는 “시민단체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부 지원금은 전혀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신재욱 상임활동가는 지난 2월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군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체화 과정 연구; 1987~1993 군인·전경 양심선언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열군은 시민들의 신청을 받으면 열리는 상설 강좌 3개를 비롯해 다양한 기획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안의 군사주의, 마치 공기처럼 스며 있는’은 우리 사회가 오랜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학교와 직장, 미디어 등에서 남성성, 수직적 인간관계 등 군사 문화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고 참가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나눈다.
 
지난 7일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이 열린군대시민연대의 상설 프로그램 ‘전쟁기념관 다시보기’에 참여하고 있다. 열린군대시민연대 누리집 갈무리
 
2016년부터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주목해 “노골적인 적대와 힘에 의한 안보의 논리가 촘촘하게 구성된 전시물”(박석진)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전쟁기념관 다시 보기’도 정례화했다. 지난 7일에는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이 참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활동가로 일하는 허진선(30)씨가 열군 운영위원이 된 것도 2018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뒤였다. “제가 민변의 미군문제연구위원회 간사여서 군사·안보·평화 이슈와 관련된 토론회나 행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 처음 전쟁기념관에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국가가 규정하는 적절한 안보관이라고 할까, 국민은 그 틀 안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선전)처럼 느껴지는 내용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거예요. 우리 안의 군사주의가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평소엔 느끼기 어렵다는 생각에 열군의 연속강좌를 들었어요.”
 
허락되지 않은 기억 온라인 전시관’은 앞서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은 2020년 열군이 기획과 운영을 주관하고 41개 시민단체가 공동주최한 사진전 ‘허락되지 않은 기억 RESTRICTED’을 일회성 전시에 그치지 않고 온라인 플랫폼으로 구현한 것이다. 전시 명칭이 ‘허락되지 않은 기억’인 것은 ‘허락된 기억’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국가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통제하고 독점해왔다는 뜻이다. 사진전은 피난, 폭격, 파괴, 학살 등 국가가 ‘공식 기록물’ 기억에서 배제했던 주제들을 다뤘다. 전시물 대다수는 미군 사진부대가 찍은 선전용 사진인데, 목적에 위배되는 일부 사진들에는 ‘RESTRICTED’(접근 제한, 대외비)라는 도장이 찍혔다가 세월이 흘러 비밀이 해제되면서 그 문구를 삭제한다는 뜻의 중간줄이 그어졌다. 열군은 기억의 위계를 뒤집어 ‘금지를 금지한다’는 뜻으로 재해석했다.
 
열린군대시민연대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펴낸 간행물과 자료집의 일부. 조일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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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관점에서 보는 국방 정책 

열군은 상설강좌 말고도 군 수뇌부와 정치권력의 최상부에서 결정되는 국방·안보 정책의 문제점을 짚기 위해 매년 하반기 ‘시민의 눈으로 군대를 보다’라는 제목의 연속 기획강좌를 열고 있다. 지난 1월에는 국방부가 2년마다 발표하는 국방백서의 최신판을 꼼꼼히 분석한 ‘2022 국방백서, 시민의 관점에서 다시보기―해설 및 분석’을 발간했다. 한국에서 시민단체가 국방백서를 분석한 보고서를 펴낸 것은 열군이 처음이다. 열군은 내년 초에 나올 ‘2024 국방백서’를 시민사회의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하고 ‘시민에 의한 국방정책 제안’을 정부에 전달한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열군은 또 2020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전쟁 70년 기간을 맞아 한국전쟁의 상흔이 담긴 공간을 누구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한국전쟁 다크 투어 가이드북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를 발간(2021년)하고, 이듬해부터는 이 책을 활용한 역사기행을 매년 진행하고 있다. 열군은 가이드북에 실린 장소들의 해설 영상을 담은 큐알(QR) 코드 모음집을 부록으로 함께 내고, 단체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접속 링크들을 올려놨다.
 
열린군대시민연대가 창립 10주년을 맞은 4월26일 서울 대학로 한예극장에서 연 후원의 밤 행사에서 제주 강정마을 평화합창단이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열린군대시민연대가 창립 10주년을 맞은 4월26일 서울 대학로 한예극장에서 연 후원의 밤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열군은 향후 10년의 비전으로 ‘역사에 열린, 시민에 열린, 평화에 열린 군대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선언했다. 이런 지향은 올해 2월부터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김선우씨가 성공회대 재학 중이던 2015년 리포트 과제로 ‘시민단체 활동 참관 및 컨설팅 보고서’를 쓰면서 ‘열린 군대’의 미래지향적 의미를 설정하면 좋겠다고 한 제안이 밑거름됐다. 이후 열군 운영위원회에서 수차례 워크숍을 통해 구체적 내용을 가다듬고 올해 초 정기총회에서 채택됐다.
 
‘열린군대’의 새 비전은 이렇다. ‘역사에 열린’은 학살과 독재로 얼룩졌던 한국군의 과거를 성찰하며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 ‘시민에 열린’은 안보·국방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시민의 관점과 감시를 수용하는 것, ‘평화에 열린’은 적대에 기반한 군사적 수단이 아니라 대화·협력·군축 등 비군사적 수단을 수용하며 국가안보를 구실로 주민 생존권을 위협하지 않는 것. ‘꿈꿔온 10년, 열어갈 10년’을 맞은 열군이 ‘역사와 시민과 평화에 열린 군대’라는 목표를 향해 다시 운동화 끈을 조이고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대학생이 죽고, 전경은 일기를 썼다 “진정한 분노의 대상 알아야”

[한겨레S] 커버스토리
1991년 봄, 박석진 일경의 일기

“예전 내 동지들에게 최루탄을…
왜 우리가 적이 돼 싸워야 하나
폭력보다 강했던 시위대 비폭력”
마지막 일기 4일 뒤 양심선언

기자조일준
  • 수정 2024-04-27 09:33
  • 등록 2024-04-27 07:00
1993년 5월25일, 박석진(당시 24살, 사진 가운데) 일경 등 군·경 양심선언과 관련해 수배된 8명이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수배 해제를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이던 중 농성장으로 찾아온 가족들과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해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1991년 봄이었다.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주역들이 포진한 노태우 정권은 임기 4년차인 1991년 들어 대학가와 노동계의 민주주의 요구를 거칠게 탄압하며 신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의 삶의 향방도 이때 결정됐다. 박씨는 당시 대학을 휴학하고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 소속 전투경찰로 병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4월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의 무차별 폭력으로 목숨을 잃자, 박 일경(당시 계급)은 양심선언을 하고 국방부 소속 ‘군인’이 아닌 내무부 소속 ‘전경’으로서의 군 복무를 거부했다. 그 뒤로도 한달 새 11명의 젊음이 분신과 폭력진압으로 스러져갔다. 박석진 활동가는 당시의 괴로운 심경과 결단의 과정을 담은 일기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그의 일기는 내밀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공적 기록의 의미가 있어,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괄호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자가 붙인 설명이다. (▶관련 기사= 여전히 깊은 군사문화·권위주의…“부당한 명령 거부할 권리 있어야”)
 
1991년 1월18일(금)
오후에 두 시간 정도 진압 훈련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다릴 때의 긴장감보다 부딪힐 때의 혹독함이 나았다. (…) 많은 사고가 나를 혼란시키고 있어서 정확히 정리 내지 정돈할 순 없지만 (…) 다음번 휴가 때 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생각을 했다. 정말 건강하고 편한 모습으로.
 
1월23일(수)
맞교대로 미 대사관 경비를 섰다. (…) 저녁에 회식이 있었다. 요즘엔 회식 때마다 과음하기로 했다. (…) ○○○ 일경과 얘기를 좀 했는데 쪽팔렸다. 모방과 답습의 내 지식이, 아는 체하려는 내 꼴이. 철학 대사전을 사야겠다.
 
2월7일(목)
거의 살인적인 근무가 떨어졌다. 어제 심야 방찰사오(‘방범 근무’의 군대식 음어)에다가 미 공병단 근무까지, 그곳도 맞교대로. 새벽 2:30에 나가서 5:00까지 또 근무를 섰다.
 
2월22일(금)
치안본부 진압 검열이 있었다. 요 며칠 새 세번째 검열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진압복에 훈련을 했다. (…) 너무너무 추워서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3월2일(토)
파고다(공원, 서울 종로2가)에서 민중당의 수서 지구(택지를 특혜 분양한 권력형 비리) 규탄 대회가 있었다. (…) 피곤함 때문인지 별 감정 없이 서 있다 돌아왔다. 이어지는 독산동 방범 근무. 피로는 우리를 여러모로 모지게(성격이나 태도를 거칠게) 하고 있다.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가 1991년 4월 서울경찰청 기동대 소속 전경으로 시위 진압에 동원되던 시절에 쓴 일기장 겉표지. 박석진 제공
 
3월11일(월)
08:00시부터 종로에서 가투 대비가 있다고 해서 파고다에 갔다.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는가 싶었는데, 10시경에 사해(집회가 해산)되어서 장막(소속 기동대)으로 하나열(복귀 집합)했다. 특수진압술 시범 대비 훈련 때문이었다.
 
3월14일(목)
틈만 나면 자야겠다는 일념으로 불타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정오경에 상황이 있었다. 한진해운 노조의 집회였다. 무더기 연계(체포 연행)가 있었다.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고, 아직은 남아 있는 감정이(…) 단결투쟁가, 동지가, 노동가를 들으면서 되살아나는 용트림을 느꼈다.
 
3월27일(수)
시드니 셸던의 ‘내일이 오면’을 다 읽었다. 외박 나가면 (서점의) 외국서적센터에 가서 영문판 소설을 샀으면 싶다. ‘White Badge’(안정효 작가의 장편소설 ‘하얀 전쟁’의 영문판)도 함께.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스쳤다.
 
4월3일(수)
동국대 상황 대비. 꽤 힘든 하루였다. 오래간만에 상황다운 상황을 맞은 것 같다. 많은 FB(화염병)와 돌을 맞았다. (전경의) 돌격이 많아서 위기도 많았고. 물론 동국대학생들에게. 나는 또 한번 동료(전경)들과의 이질감.
 
4월10일(수)
연세대에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사수대 발대식이 있었다. 작년 건국대에서처럼 우리 소대가 또 기습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과 같은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나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당위성과 정당성이 똑같이 고개를 들었고(…) 정말 지루한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가 1991년 4월 서울경찰청 기동대 소속 전경으로 시위 진압에 동원되던 시절에 쓴 일기. 박석진 제공
 
4월16일(화)
오늘 난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무수한 돌과 화염병과 그들의 욕설을 받아냈던가? (…) 예전의 내 동지에게 돌을 던지고 방패로 찍고 깨스(최루탄)를 퍼부어대는 이들은 또한 어떻게 내 동료인가? 왜 우리가, 우리 젊은이들이 싸워야 하는가? 얼마 전까지 같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같이 아파했던 이들이 어떻게 완전히 적이 되었는가? 누가 이런 대본을 썼는가? ―경희대 학내 진입 상황에서―
 
4월19일(금)
차라리 그것은 시위 진압이라기보다 ‘쥐새끼 소탕 작전’에 가까웠다. 우린 보이는 대로 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방패로 찍어서 개 끌듯이 끌고 다녔다. 폭력이라는 마약에 취해버린 그들은 미친 광기를 내보이며 온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이미 힘의 우위를 느낀 그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건 이미 악마적 유희였으며, 어디에서도 인간은 볼 수 없었다. (…) 아침 동이 트는 이 순간에도 우린 죽어가고 있다. 아니면 이미 죽어버린 삶을 살고 있거나.
 
(그로부터 일주일 뒤, 기어이 사건이 터졌다. 명지대 재학생 강경대씨가 전투경찰의 무차별 폭력 진압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강경대 사망 사건은, 앞으로 닥쳐올 참혹한 시대적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 학생 박승희의 분신을 시작으로, 5월까지 한 달 동안에만 11명의 젊은이가 강경대 타살에 항의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자신을 불살라 스러졌거나 폭력적인 시위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관련기사= 강경대에서 김귀정까지…기억해야 할 이름들)
 
4월26일(금)
또 하나의 젊음이 꺼져 갔다.(명지대 강경대 사망) 채 시작되지도 못한 젊음이 이 시대에 의해 꺾여갔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쇠파이프를 휘둘러 죽인 전경을 욕하고 벌하면 되는가? 아니면 극렬 시위를 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해야 옳은가? 누가, 무엇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었는가? 전경의 분노 대상은 온전히 학생이고, 학생의 분노 대상은 온전히 전경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부정한 시대에 정의를 수호하는 젊은이여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분노의 대상을 알아야 한다.
 
1991년 4월 27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강경대 학우 살인 규탄 대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선 학생들이 경찰의 물대포 세례를 맞으며 “살인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4월27일(토)
명지대에 갔다가 연세대로 향했다. 온 신촌 바닥을 메우고도 남을 개스탄이 쏟아졌고, 소대 전방에서 water cannon(물대포)의 물이 퍼부어졌다. 그에 맞서는 그들(시위대)의 비폭력은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방독면 속에 숨어서 나는 계속 달려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제 결정할 때가 아닌가? (…) 지난 10개월 동안 난 버텨왔다. 이 조직에 맞는 인간이 되려고도 했었고, 그저 냉소적이 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았다. (…) 결심만 선다면, 결심만 선다면…, 난 뛸 것이다.
 
4월29일(월)
광화문 네거리. 시야가 제한된 방독면 속에서 난 앞사람의 워커(군화)만 보고 달렸다. 호흡 곤란으로 미칠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난 떠밀렸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파탄을 일으키며 난 이미 내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터지는 사과탄과 SY-44탄에 학생들의 비폭(력 저항)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애국 전경 동참하라”는 그들의 외침도 아련히 멀어져 갔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gas(최루탄 연기) 속에서 나는 지옥을 연상했다. (…) 부정의한 시대는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미쳐가고 있었다. 왜 이리도 우리는 이렇게 황폐한 세상을 만들어버렸는가? (…) 달리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 함께 외치고 싶다. 함께 호소하고 싶다.
 
4월30일(화)
이제 실천할 때이다. 모든 관념적 사고는 끝났다. 이제 행동만이 남았다. 더 이상 내 인생을 빼앗길 수 없다. 뛰리라. 마침내 난 외치리라.
 
박석진 일경의 1991년 봄 일기는 4월30일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흘 뒤인 5월4일, 박 일경은 전경복 차림으로 부대를 등지고 연세대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양심선언의 일부 대목은 이렇다.
 
“얼마 전까지 같이 진압복을 입고 방독면을 쓰고 고생했던 전경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학생들이 우리의 적일까요? 정말 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과 돌 때문에 우리가 다치고 고생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가 돌과 화염병을 막아야 합니까? 우린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왔습니다. 더 이상 국민과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싸울 수 없습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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