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어난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공문서가 확인됐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이 기록한 자료인데 조선인 40여 명이 일본인에 의해 살해됐고, 당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도 근거가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정현우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일본 언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씨가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실에서 찾아낸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자료입니다. 사이타마현 서부 지역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한 육군 지방기관인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했고, 1923년 12월 15일에 상부 기관인 육군성에 제출됐습니다.
내용을 보면 당시 낮에 이동하지 못한 조선인 40여 명이 해가 저물자 '살기를 품은 군중에 의해 모조리 살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찰관들이 조선인 200여 명을 이송하던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와 함께 '조선인의 습격도, 방화도 없었다'며 당시 일본에 떠돌던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인 관련 헛소문에 빠진 사람들을 무지몽매한 무리라고 비판까지 했습니다.
일본 구마가야 사령부는 밤에 학살이 벌어진 만큼, 이송은 밤을 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밤에 조선인을 이송하면 어두운 곳에서 사람이 살해되는 참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간토대지진 직후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 정황이 담긴 공식문서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가미카와 요코 / 일본 외무상 :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나 중국인의 상황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간토 대지진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사실관계 확인조차 피하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좀처럼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100년 전 발생한 일본 간토대지진 직후 도쿄 등지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담긴 일본 정부 공문서가 확인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5일 재일동포 단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등이 설립한 재일한인역사자료관에 따르면 와타나베 노부유키(渡辺延志)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실에서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 40여 명이 일본인에 의해 살해됐다고 기록된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를 발견했다. 이 문서는 일본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 서부 지역 병무 및 재향군인 업무를 맡은 ‘구마가야(熊谷)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해 1923년 12월 육군성에 제출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간토대지진 발생 사흘 뒤인 1923년 9월 4일 경찰이 경찰서로 이송하던 조선인 200여 명 가운데 40여 명이 살해당했다. 연대구 사령부 측은 이 문서에 “200명 중 110명은 경찰 보호를 받고 호송됐지만 낮에 이동하지 못한 40여 명은 살기를 띤 군중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경찰력이 미약했고 군중심리가 발발해 순간적으로 불상사가 발생했다”고 기술했다.
사령부 측은 이 사건을 ‘선인(鮮人·조선인을 비하하는 단어) 학살’ ‘불법행위’ 등으로 표현했다. 사령부는 이어 밤에 조선인을 이송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 밤을 피해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기록했다.
와타나베 전 기자는 “일본 정부는 학살 기록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학살 참상을 목격한 당사자들이 정리한 공문서가 정부 내부에 잠들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의지로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이 없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전 관방장관은 올 8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 입장에 대해 “정부 조사로 한정한다면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수는 관련 자료마다 다르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6661명으로 집계됐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학살 문건 나올 때마다 日정부 “사실 명확히 할 기록이 없다” 입장 고수
성호철 기자입력2023. 12. 26. 03:01
일본화가가 그린 관동대지진 조선일 학살 장면.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관련 보고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존재했지만 일본 정부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기록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2009년 일본 내각부 산하 중앙방재회의가 발간한 ‘관동대지진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보고서는 ‘살상 대상은 조선인이 가장 많았으며, 조선인 희생자 수는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자의 1∼수%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당시 관동대지진 사망·실종자가 10만5000명이기 때문에 최소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살상을 인정한 것이다. 보고서 집필에 참여한 스즈키 준 도쿄대 교수는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해당 보고서는 대지진 당시 정부 발표로부터 언급할 수 있는 ‘최저한’”이라며 “보고서는 조선인 살해 사건을 ‘살상’이라고 표현했지만, 무기를 갖춘 다수가 무장하지 않은 소수를 살해했기 때문에 ‘학살’이란 표현이 타당한 사례가 많았다”고 했다.
조선총독부도 1923년 12월 작성한 ‘관동 지방 지진의 조선인 현황’이란 제목의 문서에서 대지진 당시 대규모 조선인 피해가 있었다고 명시했다. ‘살해 조선인 수(數)’라는 문서의 세부 통계 항목에는 ‘도쿄는 약 300명, 가나가와현은 약 180명, 사이타마현 166명, 지바현 89명, 군마현 약 40명, 도치기현 30명 등 총 813명’이라고 적혔다.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가나가와현의 살해 조선인 수에 대해 총독부는 ‘1명’이라고 쓰고는 ‘추가 조사 중’이라고도 적었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 공식 문서로 분류되는 ‘사이토 마코토 문서(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을 지낸 1919~1927년, 1929~1931년 기록된 공식 문서)’의 일부다.
대지진 당시 가나가와현이 내무성에 보고한 ‘재해에 따른 조선인과 중국인에 관한 범죄 및 보호 상황 기타 조사의 건’이라는 문서도 지난 9월 새롭게 공개됐다. 야스코치 아사키치 당시 가나가와현 지사는 1923년 11월 21일 50쪽 분량의 이 문서를 작성, 소노다 다다히코 당시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고했다. 대지진 직후인 1923년 9월 2~4일 사흘간 가나가와현에서만 59건의 살해 사건이 발생, 145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는 내용이다. “34살 남성인 차태숙은 9월 4일 요코하마 근처에서 자경단에게 살해됐다” 식으로 당시 살해된 조선인 14명의 실명도 이 문서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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