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v.daum.net/v/20230905212504740?f=o
박정희조차 시도하지 못한 방식, 윤석열 정부 선 넘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입력 2023. 9. 4. 15:57
[김종성의 히,스토리] 검사 출신 국가보훈부 장관이 촉발한 매우 희한한 공안정국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1964년 초반부터 격렬했다. 5·16 쿠데타 2년 반 뒤인 1963년 12월 17일에 외형상 민간정부로 출범한 박 정권이 1964년 1월부터 한일협정 타결을 서두른 결과다. 이 때문에 3월 24일에는 약 8만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 현장에 뛰어나왔다(3·24 시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국민들도 굴욕적인 한일관계를 반대했다.
이순신 동상 제막식 1주일 뒤인 1968년 5월 4일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지고, 다시 1주일 뒤인 5월 11일에는 반일 승려인 사명대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뒤이어 이이·원효·김유신·을지문덕 동상이 세워지고, 1970년 10월 12일에는 3·1운동 영웅인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건립됐다. 그런 다음, 신사임당·정몽주·정약용·이황·강감찬·김대건 동상에 이어 윤봉길 동상이 세워졌다.
[김종성 기자]
▲ 지난 8월 30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숱한 공안정국이 있었지만, 이런 공안정국은 이색적이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대상으로, 그것도 항일 독립전쟁의 명장을 상대로 '빨갱이 아니었나?', '소련까지는 왜 갔나?'라고 문초하고 있다.
독립전쟁이 중국과 러시아를 무대로 전개된 기본 상식을 외면한 채, 공산국가 땅에는 왜 간 것이냐고 캐묻고 있다. 실제 인물이 아닌 흉상을 앞에 놓고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는 매우 희한한 공안정국이다.
지난 7월 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가짜 독립유공자를 가려내기 위한 전수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발언했다. 8월 14일에는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서 홍범도뿐 아니라 여운형에게도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홍범도·정율성뿐 아니라 더욱 많은 독립투사들을 상대로 이색적인 공안정국이 전개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국가정보원이나 경찰·검찰이 아닌 국가보훈부가 주도하는 공안정국은 일찍이 없었다. 박민식 장관이 검사 출신이기는 하지만 공적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보훈부 직원들을 데리고 죄과를 찾아내는 강력한 공안정국을 이끌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외부 조력자들이 간여하지 않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이 희한한 사례에 속한다는 점은 유사한 상황에 처했던 박정희 정권과의 비교로도 알 수 있다. 박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통칭 한일협정)을 강행한 1965년 전후에도 한미일 군사동맹의 성사 가능성이 낙관적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강행으로 국민적 저항을 초래한 상태에서 미·일의 요구에 따라 군사동맹까지 추진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박 정권이 국민적 저항을 무력화시키고자 고안해 낸 아이디어는 윤석열 정권의 방식과 확연히 달랐다.
윤 정권은 무장 항일투사나 좌파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떨어트리는 방식으로 대일 굴욕외교를 정당화하고 한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홍범도 흉상에 대한 도발이 시작됐다.
박 정권은 정반대 접근법을 선택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박 정권은 독립운동가 동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요란스럽게 세우는 방법을 채택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이 세운 반일 투사들의 석고상
▲ 1968년 4월 27일 <매일경제> 기사 '충무공 동상 제막'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1964년 초반부터 격렬했다. 5·16 쿠데타 2년 반 뒤인 1963년 12월 17일에 외형상 민간정부로 출범한 박 정권이 1964년 1월부터 한일협정 타결을 서두른 결과다. 이 때문에 3월 24일에는 약 8만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 현장에 뛰어나왔다(3·24 시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국민들도 굴욕적인 한일관계를 반대했다.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져 6월 3일에는 박정희 하야 구호까지 등장했다. 이날 박정희는 서울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발포했다(6·3운동, 6·3사태). 3·24 시위 이후로 상황이 더 격화됐기에 6월 3일에 그런 조치가 나왔던 것이다.
그처럼 반일 기운이 고조될 때인 그해 5월 17일, 서울 시내에서 진기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친일 프레임에 갇힌 박 정권이 반일 투사들의 석고상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해 5월 18일 자 <동아일보> 사설은 "5월 17일, 남대문서 중앙청에 이르는 중간 녹지대에 애국선열 서른일곱 분의 입상(立像)과 좌상(坐像)의 제막식이 있었다"라며 "이조시대의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그리고 근세의 안중근 의사, 손병희 선생 및 김구 선생 등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애국선열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들이 서울 남대문에서 경복궁 입구까지 세워졌다. 이순신·안중근·손병희·김구 외에도 최무선·권율·사명당·최익현·민영환·전봉준·손병희·이준·안창호·윤봉길·이강년·허위·김좌진·이상재의 석고상도 건립됐다. 석고상 37개 중 18개가 반일 코드와 맞닿았던 것이다.
친일 프레임에 갇힌 박 정권이 반일 영웅들의 석고상을 서울 한복판에 세웠다. 국민들의 반일 열기를 달래고 역이용해 정국 안정과 국민통합을 도모하려는 의중, 자신들이 절대로 친일파가 아님을 보여주려는 의중 등을 읽을 수 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강행 뒤에는 동상 건립을 본격화했다.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 광복절에 동상 조각을 추진할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명단을 공개한 박 정권은 1968년부터 동상을 하나씩 선보였다.
제1탄은 이순신 동상이었다. 1968년 4월 27일 자 <매일경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이 착공 7개월 만인 27일 상오 10시 세종로 네거리 녹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김종필 당의장, 3부 요인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다.
박 정권이 이순신 동상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위 기사의 이어지는 대목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이날 제막된 충무공 동상은 애국선열조상건립회(총재 김종필)와 서울신문사 주관으로 박 대통령 헌금으로 건립된 20여 M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동상이다"라는 문장은 박정희가 자금을 제공했고 김종필이 실무를 주관했으며 이 동상이 국내 최대 규모였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
▲ 1968년 4월 27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
ⓒ 정부기록사진집 |
이순신 동상 제막식 1주일 뒤인 1968년 5월 4일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지고, 다시 1주일 뒤인 5월 11일에는 반일 승려인 사명대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뒤이어 이이·원효·김유신·을지문덕 동상이 세워지고, 1970년 10월 12일에는 3·1운동 영웅인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건립됐다. 그런 다음, 신사임당·정몽주·정약용·이황·강감찬·김대건 동상에 이어 윤봉길 동상이 세워졌다.
1964년 석고상 건립 때는 37명 중 18명(48%)이 반일 코드와 연관돼 있었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세운 동상들의 경우에는 15명 중 4명(27%, 이순신·사명대사·유관순·윤봉길)이 반일 코드와 관련됐다. 한일협정 반대 열기가 매우 뜨거웠을 때와 그것이 잠잠하기 시작했을 때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 이벤트의 목적이 국민들의 반일 열기를 달래는 데 있었음이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박 정권이 석고상과 동상을 건립한 표면적 목적은 애국심 고양이었다. 석고상 건립 의도와 관련해 1964년 4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선정한 37인은 을지문덕·왕건·이율곡·이순신·김정희·안창호 등 조국을 지켰거나 빛낸 이들"이라고 전했다. 나라를 지켰거나 빛낸 인물들을 선정해달라고 박 정권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요청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일협정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에 박 정권이 반일 인물들의 석고상이나 동상을 세운 것은 이들이 한국 민중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박 정권은 이들의 이미지를 이용해 친일 프레임을 털어버리고 정권 안정을 기하고자 했다. 이런 의도를 '애국심 고양'이라는 표면적 명분 속에 감췄다고 볼 수 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강행으로 국민들과 정면 충돌했지만, 국민들 마음속의 항일·반일 정서까지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역이용해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다.
윤 정권은 강제징용 제3자 변제나 한일 군사협력 강행으로 국민들과 충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민들 마음속의 역사의식까지 지우려 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그러한 새로운 시도를 위해, 저세상의 독립유공자들을 도로 불러와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따지고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국정원이 아닌 보훈부의 주도하에, 흉상을 모셔 놓고 그런 문초를 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운 이 장면은 윤석열 정권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보다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임시정부 이후 1번이 홍범도"…백선엽은 빠진 전쟁기념관 대형연표
[초인의 지정석]①
[편집자주]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초인은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민족의 구원자로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 등 역사의 질곡 속에서 조명 받았던 민족의 구원자는 누구였는지, 역사적 평가에서 이들의 위치가 영구불변할 것인지 논란을 분석하고 시사점을 찾는다.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사업회가 운영하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대형 연표에는 홍범도 장군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첫번째로 등장한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세워진 이 대형 연표에는 임정 이후 광복까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1920년)를 필두로 '한중 연합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쌍성보 전투, 자유시 참변, 대일 선전포고 등 사건이 9개 열거된 반면 6·25전쟁(1950년)과 정전협정 조인(1953년)은 각각 단 한 칸씩만 배정받고 마무리된다.
최근 국가보훈부가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한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은 대형 연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전쟁기념관은 대형 연표에 독립군 전투 등 독립활동 관련 기록이 9칸에 달하는 반면 6·25전쟁은 1칸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의 질의에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 전시된 전쟁역사실 전시내용 중심으로 대형 연표를 구성하다보니 시설 내 별도 전시관들이 있는 6·25전쟁보다는 독립군 관련 내용이 더 많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호국의 전당'으로 불리는 전쟁기념관의 대형 연표가 홍범도 장군을 '임정 이후 1번'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육군사관학교가 교정에 설치했던 홍범도 장군 흉상을 그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근거로 교정 외부에 이전하는 상황과 맞물려 묘한 위화감을 낳는다.
(칠곡=뉴스1) 공정식 기자 = 6·25전쟁 정전 70주년과 백선엽 장군 3주기를 맞아 5일 오후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고(故) 백선엽 장군(1920~2020) 동상 제막식을 통해 공개된 백선엽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높이 4.2m, 너비 1.56m 크기의 백 장군 동상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360도 회전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2023.7.5/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근 국가보훈부가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한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은 대형 연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전쟁기념관은 대형 연표에 독립군 전투 등 독립활동 관련 기록이 9칸에 달하는 반면 6·25전쟁은 1칸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의 질의에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 전시된 전쟁역사실 전시내용 중심으로 대형 연표를 구성하다보니 시설 내 별도 전시관들이 있는 6·25전쟁보다는 독립군 관련 내용이 더 많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호국의 전당'으로 불리는 전쟁기념관의 대형 연표가 홍범도 장군을 '임정 이후 1번'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육군사관학교가 교정에 설치했던 홍범도 장군 흉상을 그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근거로 교정 외부에 이전하는 상황과 맞물려 묘한 위화감을 낳는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독립유공자 이육사 시인이 애타게 찾은 진정한 '초인'은 누구일까. 이승만과 백선엽, 홍범도와 김원봉 등이 민족의 영웅인지 아닌지를 둘러싼 좌우 진영 간 '역사 전쟁'이 또 다시 불붙었다.
일례로 지난달 31일 찾은 전쟁기념관에서 한 시민은 홍범도 관련 전시물을 보며 "그때는 레닌 시대가 아니었느냐"라고 했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과 접점을 맺기 시작한 시기는 6·25전쟁 이후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1920년대 극동에서 일본과 맞섰던 시기의 소련이라는 시각에서 홍범도 장군을 두둔한 것이다.
반면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문재인 정권이 5년 동안 국군의 뿌리를 붉게 물들게 하기 위해 어떤 반국가적 행위를 했는지 살펴보겠다"며 문재인 정부의 홍범도 조명이 사실상 '국군 정체성 파괴'라는 입장을 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세는 문재인 정부 시절 좌익 계열 민족주의 운동가 김원봉을 재조명한 데 대한 반작용 성격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핵 고도화,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 등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지형이 불안정해짐에 따라'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을 필요성이 정부 차원에서 높아졌다는 주장도 나온다. 반중 정서가 강한 대만 민중진보당 집권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3연임, 중국의 대외 팽창 의지에 대한 서방의 경계 등 대외 정세가 한국 사회의 이념 논쟁과도 맞물린다는 논리다.
국가보훈부가 일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에서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한 것도 안보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백 장군은 한미동맹의 발전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수층이 조명해 왔다. 육사는 박근혜 정부 때 백 장군의 어록을 모티브로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웹툰을 온라인에 공개했다가 문재인 정부 때 비공개로 전환한 데 이어 최근 다시 공개로 방침을 바꿨다. 백선엽 장군은 6·25 당시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격멸한 중대 전과를 올린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아왔다. 일제의 간도특설대 복무 관련 논란이 있지만, '무결점·무오류의 영웅'을 찾긴 어렵다는 점에서 그런 이유로 백선엽 장군을 평가절하할 순 없다는 게 보수 진영의 주장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신냉전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버전의 이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단순하게 영웅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하는 측면은 아니라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영웅인지 아닌지 여부는 지금의 상황에 의해서도 재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의 대상 중에는 광주시가 기념 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인물인 정율성처럼 호국·보훈의 관점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도 있다. 정율성은 중국을 위해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고 북한 공산당을 위해 조선 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보훈은 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지만 특정인물에 대한 우상화 또는 비판 등 이념적 투쟁보다는 '보훈 민생' 해결을 위한 제도 보완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례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이름 없는 소년병에 대한 국가 유공자 인정은 아직 국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정치권에서는 독립 운동가 후손단체인 광복회 가입 대상을 직계비속으로 확대하는 법안도 나온 상태다. 광복 이후 세월이 지나며 애국지사의 직계존속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신냉전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버전의 이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단순하게 영웅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하는 측면은 아니라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영웅인지 아닌지 여부는 지금의 상황에 의해서도 재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의 대상 중에는 광주시가 기념 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인물인 정율성처럼 호국·보훈의 관점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도 있다. 정율성은 중국을 위해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고 북한 공산당을 위해 조선 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보훈은 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지만 특정인물에 대한 우상화 또는 비판 등 이념적 투쟁보다는 '보훈 민생' 해결을 위한 제도 보완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례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이름 없는 소년병에 대한 국가 유공자 인정은 아직 국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정치권에서는 독립 운동가 후손단체인 광복회 가입 대상을 직계비속으로 확대하는 법안도 나온 상태다. 광복 이후 세월이 지나며 애국지사의 직계존속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훈 기자 (lhshy@mt.co.kr)김지영 기자 (kjyou@mt.co.kr)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2023년 6월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 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훈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문구 게재 경위 등을 검토한 결과,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안장자격이 된 공적과 관계 없는 문구를 기재하는 것은 국립묘지 설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이 내용을 삭제키로 결정하고 24일부터 시행했다고 밝혔다. ‘장성급 장교’로서 국립묘지법에 따라 적법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백 장군에게 친일을 기재한 것이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사람을 안장하고, 그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며 선양하는 것’이란 국립묘지법상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보훈부의 설명이다.
보훈부는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은 사이버 참배 서비스 등을 제공하여 안장자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오히려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다른 안장자에 대해서는 범죄경력 등 안장자격과 관계없는 다른 정보는 기재하지 않으면서 특정인에 대한 특정 사실만 선별하여 기재하도록 한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백선엽 장군을 욕보이고 명예를 깎아내리려 했다는 강한 의심과 함께 안장자 간 균형성도 간과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보훈부는 또 “유족의 명예훼손 등 여지가 있음에도 관련 유족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고, 면밀한 법적 검토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 역시 확보되지 못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결정을 유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법적 검토 결과 문구 게재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여 해당 내용을 삭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24일 이전까지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비고에 ‘무공훈장(태극) 수여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란 문구(왼쪽 붉은 테두리 )가 적혀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24일부터 이 기록을 삭제했다.(오른쪽)
이와 관련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객관적 자료는 없다”며 “백선엽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할 당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 것인데, 위원회의 결정이 곧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백선엽 장군은 최대 국난이었던 6‧25전쟁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은 최고 영웅으로, 친일파 프레임으로 백 장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사 명예졸업장 반납 또 반납…독립영웅 후손들 “수치다” (0) | 2023.09.06 |
---|---|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0) | 2023.09.06 |
일부 前해군총장 홍범도함 함명변경 반대…"배는 부모같은 존재" (0) | 2023.09.06 |
‘호국’ 한다며 ‘독립·민주’ 걷어차기…그러면 나라 지켜지나 (0) | 2023.09.01 |
현대사 일지 1 - 해방직전 및 미군정(해방 직전~1948년 정부수립 이전) (0) | 2023.08.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