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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by 무궁화9719 2023. 6. 28.

[단독] 흙 위로 삐져나온 사람 발.. 민간인학살 직후 사진 찾았다

심규상입력 2020. 10. 16. 09:51수정 2020. 10. 17. 08:48
 
영국 워닝턴 기자가 찍은 '골령골 죽음의 계곡', 대전 동구청 12월 전시 예정

[심규상 대전충청 기자]

 

  [발굴사진] 1950년 대전 골령골에서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한 직후 현장 모습이 담긴 사진이 확인됐다. 총을 멘 북한군 5명과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4명이 한 줄로 늘어서 시체가 묻힌 구덩이를 응시하고 있다.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발굴사진] 인근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북한군에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1950년 대전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끝난 직후 현장 모습이 담긴 사진이 추가 확인됐다.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1910~1983)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사진에는 학살 직후 유해가 드러난 모습과 함께 산세 등 당시 지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장면이 들어 있어 사건의 진상 파악과 유해 매장지 추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전 동구청 국제협력특보(아래 국제특보)인 영국인 데이빗 밀러(40)씨는 위닝턴 기자가 남긴 자료와 유품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 셰필드 대학의 자료실에서 여러 장의 골령골 현장 사진을 확인했다고 15일 <오마이뉴스>에 알려왔다. 셰필드 대학은 위닝턴 기자가 남긴 취재수첩 등 기록을 소장하고 있다.
  
앨런 위닝턴 기자는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상황과 그 영향을 보도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와 대전 산내 학살에 대한 기사를 타전했다. <데일리 워커>는 1950년 11월, 특집판으로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보도하기도 했다.
 
1950년, 군경에 의해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산내 학살이 끝난 직후 북한군과 함께 현장을 방문한 그는 같은 해 9월, <데일리 워커> 지에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제목으로 골령골 학살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묘사해 사진과 함께 타전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목구멍까지 스며들어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그 냄새를 느껴야 했다.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위닝턴 기자의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기사 중에서)

실제 기사 사진에는 살해 후 대충 묻혀 구덩이 밖으로 손과 다리가 삐져나온 시신의 모습이 실려 있다(관련 기사 : "죽음의 구덩이, 삐져나온 손·발·머리" http://bit.ly/4nW5Rt).
 
당시 소하천, 도로 모습 담겨... 유해매장 추정지 파악 도움될 듯
     
  [발굴사진] 시신을 아무렇게나 묻어 흙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보인다.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발가락 쪽으로 추정된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이날 데이빗 밀러 국제특보가 세필드 대학에 있는 위닝턴 취재자료에서 찾은 사진에는 당시 <데일리 워커> 지에 실린 동일한 장면의 사진 외에 그동안 미공개된 사진이 여러 장 확인됐다.
 
우선 골령골 골짜기 전경이 담긴 사진이 눈에 띈다. 골짜기 봉우리 모양과 산세를 보면 골령골이 틀림없다. <오마이뉴스>가 골령골 1학살지와 2학살지로 이름 붙인 곳이 대부분 화면에 들어 있다. 당시 소하천과 도로 모양도 잘 드러나 있다.
 
당시 목격자들은 2학살지의 경우 폭 2m의 구덩이의 길이가 200m에 달하는 데 길가를 따라 구덩이를 팠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로가 확장·포장 됐고 위치도 많이 변해 정확한 암매장지를 찾기 힘든 상태다. 이 사진은 유해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 사진] 골짜기 봉우리 모양과 산세를 보면 지금의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의 모습과 동일하다. <오마이뉴스>가 골령골 1학살지와 2학살지로 이름 붙인 곳이 대부분 화면에 들어 있다. 멀리 대전 보문산 자락이 보인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또 다른 사진에는 총을 멘 북한군 5명과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4명이 한 줄로 늘어서 시체가 묻힌 구덩이를 응시하고 있다. 이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곳에 시체로 보이는 밖으로 드러난 희끗희끗한 물체가 보인다.
 
다른 사진에는 아무렇게나 묻어 흙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 다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시체가 삐져나온 장면은 위닝턴 기사의 당시 보도기사에 실린 사진과 같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구덩이가 음푹 꺼져 땅이 갈라져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다.
      
미군이 현장에 버린 빈 담뱃갑과 탄피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위닝턴 기자는 당시 기사에서 "땅에 버려진 빈 담뱃갑들과 놓여 있는 수천 개의 탄약통은 모두 미제였다.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며 "이런 살인극은 미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나는 한 움큼의 M-1과 카빈 탄약통을 주웠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썼다. 이 사진은 기사에 등장한 '미군이 버린 빈 담뱃갑'으로 추정된다. '카빈 탄약통'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도 있는데 불명확하다.
 
대전산내희생자유족회 전미경 회장은 "사건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매장지를 추정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며 " 대전 동구청의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발굴사진] 희생자 유해(위 붉은 원안)로 보인다. 위닝턴 기자는 기사에서 "땅에 버려진 빈 담배 갑들과 놓여 있는 수천 개의 탄약통은 모두 미제였다.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며 "이런 살인극은 미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대전 동구청, 셰필드 대학에 직원 파견 성과
 
대전 동구청(청장 황인호)은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을 보도한 위닝턴 기자의 자료를 받기 위해 셰필드 대학 측과 자료 제공 및 상호 파트너십 구축 방안 등을 협의해 왔다. 이를 위해 데이빗 밀러 국제특보가 셰필드 대학을 방문 중이다. 데이빗 밀러 국제특보는 방문 기간 중 위닝턴이 남긴 주요 자료를 스캔해 오는 12월, 동구청 주최 관련 전시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달 22일부터 40일간의 일정으로 골령골 제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16일 현재까지 수습한 유해는 40~42구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최소 4000명, 최대 7000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1950년 7월 첫째주에 찍은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영국 <데일리 워커>의 위닝턴 기자가 찍은 위 사진과 비슷한 장소다. 앨런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이 찍고,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NARA에서 발굴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시체가 부패하면서 구덩이가 움푹 꺼져 땅이 갈라져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보좌관제공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이었던 앨런 위닝턴 기자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직후 유해가 매장된 모습을 목격하고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제목의 기사.
ⓒ 심규상
 
  1950년 9월, 영국 <데일리 워커> 지에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제목으로 실린 위닝턴 기사와 사진 . 위닝턴 기자는 기사에서 사진과 함께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 드러나 있었다"고 썼다. 대전 동구 골령골의 행정동 이름이 '낭월(Rangwul)'이다. 위닝턴 기자는 골령골 학살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묘사해 사진과 함께 타전했다.
ⓒ 심규상
 
  당시 현장에 미군이 버린 빈 담뱃갑과 탄피(붉은 색 원안)으로 보인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사건, 6·25전쟁 시기 68년 된 악몽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6. 25. 09:26

 

1950년 6월 25일 새벽, 삼팔선 전면에서 북한군이 탱크로 밀고 내려와 6·25전쟁이 발발했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무능했던 정부는 그대로 남쪽으로 밀리면서 서울 시민을 그대로 둔채 6월27일 새벽에 몰래 대전으로 피난왔다고 합니다. 대전의 옛 충남도청은 잠시 임시 정부청사가 되기도 했고, 옛 충남도지사 공관은 피난 온 이승만 대통령이 거처로 사용하며 마치 서울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라디오로 대국민 허위방송을 했던 곳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7월1일에 대전을 떠나 이리, 목포를 거쳐 해군함정으로 부산으로 들어간 것이 7월3일이었다고 하니, 대전이 임시수도였던 시간은 단 나흘이고, 정부가 아무런 일도 못하는 거의 무정부상태였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기가 막힙니다.  

 

 

검은 비를 세운 산내 골령골 1차 학살자 유해 발굴 현장 . 왼쪽으로 보이는 긴 둔덕이 유해를 발굴한 곳으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다.

 

검은 비에 새겨진 1차 집단 학살지

 

이야기는 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꺼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전쟁은 이미 68년 전, 전세계적으로 이념이 충돌하던 혼란한 시기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이념 세력을 대변하는 전쟁이 한반도 땅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직도 전쟁을 몸으로 경험한 세대가 생존해 있으니 끔찍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랜 반목을 딛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화해하고, 더 아름다운 상생을 위해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이때, 우리에게는 가슴아팠던 시절을 기억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며 풀어가야 하는 일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학살현장 사진(1999년 기밀 해제)

 

올해 70주년인 제주 4.3이 그렇고, 남한 곳곳에 자국민에게 학살당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여러 곳이 있습니다.  대전에도 그런 곳이 있는데요, 너무 끔찍해서 한동안 차마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쉬쉬했던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입니다.

 

산내 골령골 1, 2, 3차 학살 현장

 

사회주의 세력이 소련을 등에 업고 무력으로 남침하자 대전형무소에서는 재소자 1400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4㎞ 떨어진 산에 매장했다고 하는데요. 직접 산내 낭월동으로 끌고가 현장에서 처형했다고도 합니다. 

 

그 중에는 좌익 인사 등 국내 정치범도 있지만 제주 4.3으로 끌려온 제주도민들도 있었고,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한 일반 재소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인 보도연맹원 같은 예비 검속자도 '예방 학살'에서 학살당했습니다. 

 

7월1일에 해산 명령에 따라 형무관들이 피난을 갔다는 증언으로 보아, 1차 학살은 보도연맹원을 위주로 6월28일부터 시작해 30일까지 학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대전광역시/자료 출처-대전광역시 인권센터 기사

 

7월 초, 2차 학살에는 정치범, 제주 4.3 관련자, 여순사건 등과 관련해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를 끌고가 학살했는데요. 미군이 운전하는 미군트럭에 재소자들을 싣고 갔고, 미군의 감시 하에 미군이 학살 장면을 촬영해 본국으로 보고했다고 합니다. 

 

영국 '데일리 워커'의 기자 앨런 위닝턴이 쓴 팜플렛 형태의 작은 책, [나는 진실을 보았다]에서 '랑월 데쓰 밸리'라고 기록했다.

 

곧 이어 7월 6일부터 3차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얼마나 지옥같은 상황이었을지 그 끔찍함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당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소식을 들은 피카소가 1951년에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림을 그렸을까요.

 

한국에서의 학살(1951)-피카소 (출처-대전광역시 인권센터 기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1차에 1400명, 2차에 1800명, 3차에 1700명 등 모두 49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는데, 당시 미군 보고서에는 7월 첫주 3일동안 1800명을 처형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국인 기자의 기사나 여러 연구 자료에 의하면 최대 7000명의 민간인이 전쟁 시기에 희생된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런 학살은 반대로 북한이 점령하면서 우익 세력에도 똑같이 가해졌고, 북한이 북쪽으로 후퇴한 후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힘없는 민간인이 다시 국가 권력에 의해 부역자란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사진 출처-임재근/자료 출처-출처-대전광역시 인권센터 기사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젠 진실을 담담하게 직면하며 서로 화해와 위로를 해야하는 시점입니다. 

 

끔찍했던 역사라 다시 생각하기 싫다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상처가 깊고 크고 아립니다. 진실을 알고 화해하고 진심으로 위로하는 과정을 거쳐야 깊었던 상처에 새 살이 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산내 골령골 1차 학살 현장은 2007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을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고, 광범위하게 산에 파묻힌 2차, 3차 희생자 수천 구 유해의 위치를 찾는 것도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임재근/자료 출처-출처-대전광역시 인권센터 기사

 

꾸준히 진실을 알고자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산내 골령골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는데 올해 벌써 19차라고 합니다.

올해도 학살이 시작된 6월27일 오전에 산내 골령골 추모공원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낸다고 하니, 과거를 기억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려는 시민들이 많이 참여해 희생자를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6월25일 당일 저녁에는 대전광역시 인권센터에서 마련한 특강이 있습니다.

 

"대전 전쟁, 인권의 상흔에서 통일의 길을 묻다"

 

'이게 생시냐~!'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격스러웠던 1차 남북정상회담과 깜짝 방문한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 분위기가 열리는 때에 통일에 대한 강연이라고 합니다. 많이 참가해 통일을 생각하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1950.06.28~1951)

  골령골 자료 / 국가에 의한 죽음   

2017. 7. 1. 14:58

○주소: 대전 동구 낭월동 13-1 일대

<내용>

● 산내 골령골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 1차 학살은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에 걸쳐 1,400명이 처형되었다. 2차 학살은 7월 3일부터 5일 사이에 1,800명이 처형되었고, 3차 학살은 7월 6일부터 17일 사이에 1,700~3,700명 정도가 처형되었다.

●  당시 희생자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유해발굴 결과 34구의 유해가 발견되었고, 2015년 민간차원의 유해발굴에서는 18구의 유해가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아직도 미발굴지는 경작활동과 자연재해로 인해 훼손당하고 있고, 유가족들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어 유해발굴과 진실규명이 시급하다.

 



















 

세상에서가장긴무덤대전산내골령골#1



















 















 [출처]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1950.06.28~1951)|작성자 통일임박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학살'과 맥아더의 '묵인'

입력 2008. 7. 7. 08:57수정 2008. 7. 7. 11:03
 

[워싱턴=CBS 박종률 특파원]

대전 산내동의 골령골.

한국 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대전 형무소 수감자들을 포함해 최대 7천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된 곳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처럼 한국 전쟁 당시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이 자행된 대전과 수원, 인천, 대구, 부산등 전국 150여 군데에 대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대전 산내학살사건 희생자 위령제'는 지난 2000년부터 시작돼 올해로 9번째를 맞고 있다.

 

◈ 한국 군경에 의해 최소 10만 여명 총살

 

AP통신은 '산내동의 골령골'은 한국 전쟁 당시 '테러의 여름'(summer of terror)속 '킬링필드'(killing field) 였다고 소개했다. AP통신은 이와 관련해 6일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과 경찰이 좌익인사와 동조자들을 집단으로 처형했으며, 미국 맥아더 사령부는 사실상 이를 묵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한국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처형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뤄져 최소 10만여명이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총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미 육군 1급 비밀보고서와 국립문서보관소 자료등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의 지휘권한을 가진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도 이같은 집단처형 사실을 보고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1950년 8월 일본 도쿄에 머물던 맥아더 장군은 대구 부근에서 처형된 200~300명의 민간인 가운데 여성과 12세 소녀가 포함됐다는 보고를 받고 한국 군경의 '잔인함'(extreme cruelty)을 언급했다고 AP통신은 소개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존 무초(John J. Muccio)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관련 사실을 전했을 뿐 집단처형을 중단시켰다는 기록은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AP통신은 덧붙였다. 무초 대사는 이후 한국 정부에 잔인한 민간인 학살을 중지하고 법에 따른 집행을 요구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이와 관련해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됐던 국무부 관리 세발드(W.J. Sebald)는 그 해 12월 19일자 전문에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 내부의 문제'(South Korean internal matter)로 보고 있으며, 때문에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had refrained from taking any action)고 기술했다.

 

◈ 미군 집단학살 목격·감독·사진촬영…CIA, 미군 입회감독사실 보고 제외

 

한국 군경의 집단학살은 1950년 6월 29일 남쪽으로 퇴각하던 한국군과 미군 고문관들이 '북한군이 서울 시내 교도소 수감자들을 모두 풀어주고 점령군으로 징발한다'는 보고를 접하면서 시작됐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Rollins S. Emmerich-1986년 사망)는 부산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3,500명을 처형하려던 한국군 김 모 대령을 제지했지만 결국 김 모 대령은 북한군이 부산 외곽까지 접근하는 위급한 상황이 오기전에 이들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미 공군 정보장교였던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1981년 사망)도 그 해 7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1,800명이 집단처형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당시 영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도 그 해 7월 1일부터 사흘동안 대전지역에서도 집단처형이 이뤄졌으며 지프에 탄 미군 장교들이 '살육을 감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중앙정보국(CIA)과 미군 첩보대는 당시 관련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집단처형 현장에 미군이 입회하거나 감독했다는 사실은 제외했으며 처형사진은 한 달이 지나 펜타곤에 보내졌다고 덧붙였다.

 

AP는 이후 패럴 장군(Gen. Francis W. Farrell)이 미군의 집단학살 참여여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실제 조사가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 美 방조…영국군에 의해 제동, 한국정부 집단처형지 언론 저지

 

이처럼 집단처형을 묵인 방조하는 미국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그 해 가을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영국군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영국군 장교들이 1950년 12월 미군 점령하에 있던 북한 지역에서 총살 직전의 민간인 21명의 목숨을 구했으며, 더 이상의 대량학살을 막기 위해 서울 외곽의 이른바 '처형의 언덕'(Execution Hill)을 장악했다.

 

영국의 계속된 항의에 딘 러스크(Dean Rusk) 미 국무부 차관보는 '미군 사령관들은 그같은 잔혹행위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AP는 전했다.

 

AP는 이제 반세기가 지나 한국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역사에 감춰졌던 '테러의 여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사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미국의 모순된 행동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병준 이대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군경들은 집단처형을 중단하지 않았고, 미군들은 당시 범죄현장에 입회해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도 '민간인 집단처형은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대 가을까지 이어졌으며, 대략 150군데 집단 매장지에 희생자는 최소 1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AP통신은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집단처형지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금지했다면서 한국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의 지시에 따라 집단처형이 이뤄졌을 개연성이 높지만 관련 증거자료는 없다고 소개했다.

 

◈ "모든 책임은 한국에" vs "미국은 은폐" 책임여부 팽팽

 

한편 민간인 집단처형에 대한 미국의 책임여부를 놓고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한 상태다. 당시 대전에 주둔했던 미군 자문관 프랭크 윈슬로(Frank Winslow.81)는 AP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칠면조 사격'(Turkey Shoot)으로 불렸던 처형장에 미군이 참여하긴 했지만 '한국인은 주권국이며, 모든 책임은 한국에 있다'(The Koreans were sovereign. There was never any question that the Koreans were in charge)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은 아무 행동(제재 조치)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전 학살극을 은폐했다'(the U.S. not only did nothing, but covered up the Daejeon massacres)고 반박했다.

 

안병욱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관련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미국 정부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일 것을 권고할 계획'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nowher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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