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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3 진실·화해 기록한 3만303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될까

by 무궁화9719 2023. 4. 20.

4·3 진실·화해 기록한 3만303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될까

등록 2023-04-03 10:00수정 2023-04-03 10:38

제주도·4·3평화재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5·18 민주화운동 등재 계기로 2017년부터 본격 추진
“국가폭력과 그 이후의 과거사 해결 방법 선도적 사례”

제주4·3평화재단이 2021년 상반기 ‘기록이 된 흔적’이라는 주제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사전 준비로 연 ‘기록이 된 흔적’ 전시회에 공개한 4·3위원회의 ‘4·3희생자 심의·결정 요청서’. 허호준 기자
 
역사는 기록이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 50여년에 걸친 침묵과 탄압의 시대에도 4·3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기록과 기억의 힘이었다.
 
기록은 역사의 진실로 안내하는 길잡이였다. 4·3 이후 명예회복 운동의 여정을 밝히는 기록은 진실규명과 화해운동의 과정을 보여준다. 제주 사회의 4·3에 대한 접근은 두개의 축으로 이뤄지고 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이 한 축이고, 화해와 상생을 위한 노력이 다른 한 축이다. 4·3은 사건 이후 탄압과 금기의 시대가 있었고, 6월 항쟁 이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 4·3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 평화공원 및 평화재단 조성, 유족회와 경우회의 화해 선언, 보상금 지급 등 점진적 해결의 과정을 거쳐왔다.
 
2021년 제주4·3평화재단이 마련한 전시회에서 선보인, 1만4000여명에 이르는 4·3 희생자 심의·결정 요청서. 허호준 기자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도가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은 이런 4·3 해결 과정이 담긴 기록물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두 기관이 등재를 추진하는 4·3 기록물은 제주4·3특별법이 ‘4·3의 정의’에서 규정한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의 사건 기록물과, 그 이후 전개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문서·사진·영상·유물 등 두 종류로 나뉜다. 사건 당시 기록물은 세계적 냉전이 지역의 비극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사건 이후의 기록물은 4·3 당시의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의 공식 조사와 사과, 이를 끌어낸 시민사회운동, 유족들의 자발적인 화해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 기관은 2011년 5월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4·3 기록물의 등재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들 기관은 2017년께부터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4·3 기록물 수집을 위한 국외 조사와 4·3 기록물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학술행사, 민간 기록물 수집 캠페인, 4만9600여건에 이르는 문서와 신문기사, 사진 등 4·3 기록물의 체계적인 정리 작업, 주요 기록물 전시회 등도 그 일환이었다.
 
제주4·3평화재단이 2021년 상반기 연 4·3 기록물 전시회. 허호준 기자
 
앞서 제주도는 지난 2월2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각계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출범식을 여는 등 의욕적 행보를 밟아가고 있다. 2월27일에는 문화재청에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신청서를 냈다. 등재 대상은 4·3 당시 생산된 정부·국회 및 군경 기록, 재판 판결문, 미군정 및 미 대사관 보고서, 제주도의회의 피해조사 기록, 정부의 희생자 심의·결정 요청서, 각종 증언, 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의 화해 선언 등 화해·상생의 기록 등 모두 3만303점에 이른다.
 
도는 등재 신청서에서 “4·3 기록물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실질적 피해 회복의 과정을 망라한 과거사 해결의 선도 모델이자 가해자와 피해자 간 화해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총체적 기록물”이라며 “세계적으로 분쟁을 겪은 여러 사회에 갈등 해결과 화해의 해법을 제시한다”고 밝혔다. 고희범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도 “4·3 기록물은 냉전의 보편사와 분단의 특수사가 담긴 시대의 기록이자, 제주도민들의 자발적인 화해·상생 노력이 국가폭력의 상처 극복과 갈등 해결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총체적 기록물”이라고 말했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4·3을 세계가 인정하는 과거사 해결의 모범사례, 어떤 비극도 평화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세계사적 상징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지난 2월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4·3 유족과 각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4·3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제주도 제공
 
4·3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어떤 절차 밟나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은 까다롭다. 우선 우리나라 문화재청의 심사에서 통과돼야 한다. 국가마다 2건 이내로만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재 결정은 격년으로 홀수 해에 이뤄진다.
 
제주도는 제주4·3평화재단과 함께 등재 필요성이 제기된 지 10여년 만에 준비를 끝내고 지난 2월27일 문화재청에 등재 신청서를 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희망하는 기관·단체는 여럿이다. 녹록지 않은 예선을 거쳐야 한다.
 
산림녹화 기록물(산림청), 태안 기름유출 피해 극복 기록물(충남), 유생 1만명의 상소문인 만인소(경북 안동시), 3·1운동 기록물(3·1운동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 등이 등재를 추진하고 있어 예선 문턱을 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청은 심사를 거쳐 이달 안에 2건의 후보 기록물을 선정해 내년 3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유네스코는 기록물이 정확한 자료임을 보여주는 ‘진정성’과 기록물의 ‘완전성’,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중요성’과 ‘독창성’ 또는 ‘희귀성’, 기록물의 보존 상태 등을 등재 기준으로 삼아 심사한다.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발표는 2025년 하반기에 예정됐다.
 
제주4·3 희생자 1만4660명 가운데 생존 희생자는 116명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도는 희생자들이 한명이라도 더 생존해 있을 때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제주도청 누리집의 ‘4·3 종합정보시스템’을 통해 세계기록유산 등재 온라인 응원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김창범 제주4·3유족회장은 “75년이 지난 지금 다시 4·3 흔들기가 지속돼 유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다시는 이 땅에 반목과 갈등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화해와 상생의 역사로 세계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4·3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4·3 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올리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4·3의 의미와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라며 “4·3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기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수형인 명부·형무소 편지·희생자 결정서…기록물에 담긴 ‘제주 4·3’

등록 2023-04-03 10:00수정 2023-04-03 10:35

제주4·3 시기 통학증명서와 석방증.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지난 2021년 제주4·3평화기념관 2층 전시실 중앙에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4·3 희생자로 결정한 1만4천여명의 ‘제주4·3사건 희생자 및 유족 심의·결정 요청서’가 전시됐다. 제주4·3특별법 제정 이후 당시까지 결정한 희생자 1만4532명의 심의·결정 요청서가 45개 ‘기록의 탑’으로 쌓인 것이다. 여기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결정된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과 사건의 개요 등이 담겼다. 심의·결정 요청서는 전시실의 중앙홀을 가득 메웠다. 희생자 및 유족 신고서는 희생자 1인의 희생 경위를 담은 개별 기록이자 사건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총체적인 기록이다. 이 기록만으로도 4·3의 규모와 비극성을 알 수 있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대표적인 ‘4·3 기록물’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본다.

■ 석방증·통행증

4·3 시기 당국은 각종 증명서를 발급했다. 이 증명서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쪽지였다. ‘선량한 백성’이라는 의미가 담긴 ‘양민증’이 없으면 폭도가 됐고,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학생은 학교가 발행하는 ‘통학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8년 4월 발급한 이 증명서에는 성명과 나이, 학년과 반, 주소와 함께 통학 구간까지 적혀 있었다. 이 증명서를 기증한 부원휴(93)씨는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데 검문이 심해 통학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통학 증명서와 학생증을 제시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명서는 ‘석방 증명서’다. 이 증명서에는 ‘서명인은 미국인과 조선인 합동 취조를 1948년 6월23일 종료 석방함’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는 6·23 재선거가 무기 연기된 뒤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미군이 함께 심문을 진행한 것은 당시가 미군정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1948년 11월17일자 계엄령 문건. 제주4·3평화재단 제공

■ 계엄령 문서

1948월 11월17일 이승만 정부가 대통령령 제31호로 공포한 ‘제주도지구 계엄 선포에 관한 건’이란 문서에는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지경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언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 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 계엄령을 계기로 제주도는 ‘통곡과 죽음의 섬’이 됐다. 이해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제주도 중산간 마을들은 초토화됐고, 수많은 도민이 학살되고 국가폭력에 노출됐다. 미군 정보보고서(1949년 4월1일자)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엄령은 계엄법 이전에 공포돼 ‘불법성’ 논란이 일었고, 법원은 최근 수년 동안 진행된 4·3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재판을 통해 계엄령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4·3 시기인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군사재판 ‘수형인 명부’ 제주4·3평화재단 제공

■ 수형인 명부

1999년 9월 당시 추미애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4·3 당시 2530명의 직업, 이름, 본적, 항변, 판정, 판결, 언도 형량, 언도 일자 등이 적힌 ‘수형인 명부’를 발굴하면서 알려졌다. 4·3 시기 ‘불법’ 군사재판은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체포되거나 당국의 귀순 권고로 귀순한 이들은 제주주정공장 등에 수용돼 고문과 취조를 받고 수십명씩 한꺼번에 재판정에 나가 ‘재판 아닌 재판’을 받고 육지 형무소로 이송됐다. 형무소로 이송된 이들은 자신의 형량과 죄명도 몰랐다. 당시 군사재판은 판결문과 조서 등 재판의 기본적인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고, 2017년 이후 지금까지 4·3 재심 재판을 통해 당시 희생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4·3 희생자는 모두 1200여명에 이른다.
 
제주4·3 시기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

“형님과 늙으신 어머님, 처자식의 소식을 듣고 싶사오니 속히 답장하여 주십시오. 할 말은 태산같이 있어도 그만 그칩니다.” 1949년 2월11일 제주읍 삼도리 출신 문숙현은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 중인 대구형무소에서 어머니한테 이런 엽서를 보냈다. ‘할 말은 태산 같았지만’ 다 하지 못했다. 문숙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학살됐다. 군사재판을 받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이들 가운데는 제주도의 가족들에게 몇 차례의 엽서를 보내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직후 대부분 행방불명됐다. 엽서는 형무소 검열인과 ‘군 검열’도 확인된다. 엽서 내용은 주로 집안 어른들이나 식구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내용이 많다. 자식의 혼사, 부모의 건강 걱정, 딸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보고 싶다는 내용도 있다. 어떤 이들은 소나 말을 잘 관리해달라고 했고, 조밭 파종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절절한 내용이 담긴 엽서를 통해 군법회의 수형인들의 형무소 이동 경로도 파악된다.
19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평화재단 제공

■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국회는 한국전쟁 당시 무고한 양민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4·3 당시 제주도경찰국장을 지낸 최천 단장을 포함한 3명의 조사단이 제주도에 체류한 시간은 6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의 진실규명 요구는 뜨거워 <제주신보>가 이들의 방문을 앞두고 단기간 접수한 결과 1800여명의 희생자가 신고 접수됐다. 조사 당시 4·3이 끝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는 인적 사항은 물론 학살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있으며, 일부는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다.

■ 제주도의회 4·3피해조사 보고서

제주도의회는 1993년 3월 4·3특별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4·3 피해자를 접수하고, 증언과 피해 지역 등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3차례에 걸쳐 <제주도의회 피해조사서>를 수정·보완해 발간했다. 최종적으로 1999년 12월31일자로 피해 접수 상황을 정리한 결과 피해자 수는 모두 1만4841명이고, 이 가운데 피해신고서를 받은 인원은 1만2243명, 미신고자는 2598명으로 집계됐다. 제주도의회의 피해신고서는 피해자의 이름과 가족관계, 피해 상황 등을 적도록 했다. 이 신고서는 제주4·3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청원 당시 주요 문서로 제출됐다.
 
2003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주민들이 세운 영모원. 제주4·3평화재단 제공

■ 화해·상생의 상징

영모원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주민들이 2003년 3월 세운 위령비이다. 항일운동가와 4·3 희생자, 군·경 희생자 신위를 한곳에 모셔 추모하는 곳이다. 이 영모원은 주민들 스스로 토론하고 준비해 세웠다. 4·3 시기 군·경 희생자와 일반 희생자를 한곳에 모아 넋을 기렸다. 추모 화해와 상생의 표본으로 평가된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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