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첫 옥살이 때 수인번호 264, 그리고 다른 뜻 [역사 속 오늘]
등록 :2023-01-03 11:18수정 :2023-01-05 20:45
강민진 기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조선일보>에 첫 시 ‘말’ 발표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이육사 본인 사진(왼쪽)과 이육사의 또 다른 필명인 ‘이활(李活)’로 쓴 서명.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첫 시 ‘말’은 필명 ‘이활(李活)’로 실렸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1927년 첫 옥살이(23살), 그리고 수감번호 ‘264’
1927년은 이육사가 첫 옥살이를 하며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해입니다. 당시 23살의 이육사는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뒤 독립활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0월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장진홍 의거’로 세상에 알려진 사건입니다. 당시 독립운동가 장진홍은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소포를 배달해 폭파를 시도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범행의 단서를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독립활동을 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꾸며 냈습니다. 이육사도 그의 형(이원기), 동생(이원일, 이원조) 등과 함께 공범으로 엮여 1년7개월 동안 무고하게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첫 시. 그의 또 다른 필명인 ‘이활(李活)’로 실렸다. <조선일보> 1930년 1월3일 치.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대구폭탄사건(장진홍 의거) 예심결정서. 이원록(이육사의 본명)을 비롯해 이원기(이육사의 형), 이원유(이육사의 동생) 등의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기소를 면한다 내용이 담겼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23일치.
한편 이때의 수감번호인 ‘264’는 시인 이육사의 필명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이육사’는 한자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담았는데 戮(죽일 육) 史(역사 사)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며 일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의미로 썼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체포를 염려한 집안 어른의 권유로 뜻을 순화한 陸(육지 육) 史(역사 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또 이후에는 肉(고기 육) 瀉(설사 사) 즉,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한자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대는 뜻을 담기도 했습니다.
1930년 첫 시 <말> 발표(26살)
흣터러진 갈기후즈군한 눈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채찍에 지친 말이여 !
수굿한 목통축 처진 꼬리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햇치려는 말새해에 소리칠 흰 말이여!
-‘말’ 이활(李活)-
꾸준히 저항시를 썼던 이육사는 순국하는 그 날까지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바로 1930년 1월3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시 ‘말’입니다. 내용을 보면, 1연에서 ‘힘겹고 고달픔에 지친 말’이 2연에서는 ‘도약을 준비하는 늠름한 말’로 표현돼 현실 극복과 함께 미래지향적인 의지와 신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당시 억압당한 우리 민족의 내적 자아와 자유를 향한 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문인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입니다. 첫 시 ‘말’ 이후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시 ‘광야’, ‘청포도’, ‘절정’ 등을 포함해 총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육사는 또 일제가 한글 사용을 규제하자 이에 저항해 한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는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의 물결에 휩쓸려갈 때도 강건히 지켜낸 민족의 양심이자 조국 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습니다.
이육사의 친필을 확인할 수 있는 미발표 유고시 ‘바다의 마음’(왼쪽)과 ‘편복’ 원고. 이 ‘편복’은 일경에 압수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되찾은 것이다. ‘편복’은 ‘박쥐’를 일컫는 한자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1934년 6월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된 이육사의 신원카드(왼쪽)와 신원카드 사진. 이육사문학관 제공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40살)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연합뉴스
(왼쪽 사진) 한복을 입은 이육사(오른쪽) 시인의 사진. 함께 찍은 사람은 동생 이원일과 친구 조규인이다. (오른쪽 사진) 이육사의 형제들. (원창, 원일, 원조(왼쪽부터). 이육사문학관 제공
(중략)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현실 극복의 의지와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이상을 실현해줄 구원자(또는 미래 역사의 주인공인 후손)로 해석됩니다. 화자가 그토록 기다린 ‘초인’은 어쩌면 평생을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이육사 자신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문헌
김용균,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여름언덕, 2022, P.186-187, 191
<조선일보> 1929년 12월23일 치, 1930년 1월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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