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베네치아 (Venezia)
2010. 3. 20.
이태리 베네치아 (Venezia)
베네치는 베네치아만(灣) 안쪽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는 수상도시로서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의 사주(砂洲)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都市共和制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十字軍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에 점령되기까지 반 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베네치아의 구시가지는 지난날의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산마르코대성당·두칼레궁전·아카데미아미술관 등은
미술·건축예술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는 로마·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이다.
인구 : 28만 명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기원전 5세기 아타라왕에게 쫓겨 바다로 달아난 베네치아 족의 후예들이 세운 왕국인데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 때, 수송과 병참을 도맡게 되며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17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 그리고 378개의 다리로 연결된 지금의 베네치아는 그 로맨틱한 아름다움에 누구나 한번쯤은 가고 싶은 곳 1순위로 꼽히는 곳이죠.
▲ 산마르코광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불리는 산마르코 광장
이태리 베네치아에 오면 산마르코 광장 관광은 필수
이곳은 베네치아의 심장부라고 불렸다
▲ 두칼레 궁전
베니치아 고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1577년 화재로 전소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거라고 하는데 지금은
건물 전체에 박물관으로 활용중이다.
▲ 산마르코광장과 대종루의 종탑
▲ 산 마르코 광장(두칼레궁전 방면) 풍경
▲ 베네치아에 입성한 대형 크루즈 선박둘
▲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
산 마르코 광장 앞에 떠있는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섬(San Giorgio Maggiore)에
같은 이름의 성당이 섬 안에 있다. 팔라디오의 설계에 의해 1610년에 완공된 이 교회의 내부에는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종탑에 올라갈 수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베네치아의 모든 섬의 전경을 다 구경할 수 있다.
▲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살루테성당. 베네치아 대운하 입구 왼쪽에 있는 8각형의 아름다운 교회. 바로크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17세기때의 건축가 롱게나의 작품이다. 이 건물의 기반을 다지는데
115만 6657개의 떡깔나무와 낙엽송이 쓰였다고 한다. 페스트 전염병을 겪고 나서 성대한 서약식이
거행되었는데, 페스트로부터 도시를 구해준 성모 마리아에게 화려한 성당 하나를 지어서
바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방대한 공사는 그래서 필요했다. 이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감사 표시이자,
1630년 이 역병으로 희생된 4만 7000명의 시민들을 추모하자는 뜻이었다.
▲ 운하입구의 리알토다리
대운하 서쪽의 한 부분을 연결하는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하얀색의 석조 다리로 원래 목조 다리였으나 석조 다리로 재건되었다.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과 설계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Antonio da Ponte와 그의 조카, Antonio Contino가 디자인하여 건축하였다.맨 밑은 아치로
되어 있어 그 밑으로 배들이 지나다니고 다리에는 두 줄의 쇼핑 아케이드와 세 줄의 보행자
통로가 있으며 아치형의 기둥들이 삼각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다.
이 다리를 유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베네치아의 최초의 석조다리라는 사실과
아치 모양의 아름다움, 다리 위에 화려하게 장식된 아케이드들 때문이라는 것. 운하에 놓여 진 수많은
다리 가운데 하나인 이 다리를 세계인이 찾는 명물로 만들어 낸 것은 작은 것 하나라도 가꾸고 보존하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감각과 상업성이 융합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 한탄의 다리
베네치아에 있는 많은 운하는 118개 섬 사이를 이어주는 수로역할을 한다.
이 섬들 사이로 중심 수로인 그란데 운하가 2개의 넓은 만곡부 주위를 흘러 도시를 통과한다.
너비 37~69m이며 평균수심이 2.7m인 그란데 운하 주위에는 많은 대저택, 교회, 해상주유소 등이 있다.
19세기까지 안토니오 다 폰테가 설계한 리알토 다리가 그란데 운하를 가르지르는 유일한 다리였지만
나중에 다리가 2개 더 건설되었다. 400여 개에 달하는 베네치아 다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감옥과 팔라초 두칼레(도제의 궁전) 사이에 짧게 서 있는
한탄의 다리'이다.
▲ 산 조르조 마조레 섬 전경
▲ 독특한 건축 양식의 등대
▲ 이태리에서 베네치아 와 베니스 는 같은 말이다. 베니스는 베네치아의 영어 이름이다.
베네치아에는 정말 곤돌라가 유명해서 지나가는 곳곳에 저렇게 곤돌라를 탈수 있는
승강장들이 따로 되어 있다. 괜히 물의도시라 불리는게 아니였다.
곤돌라의 낭만
베네치아 여행코스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 리알토 다리
access 산타루치아 역에서 1, 2, N번 수상버스 탑승, 리알토 하차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S자의 대운하에는 3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다리가 리알토 다리이다. 16세기까지 나무 다리였다가, 16세기 말공모에서 안토니오 다 폰테의 설계가 채택되어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다리로 변신하였다. 리알토 다리의 중간에서 보는 베네치아의 모습은 말 그대로 황홀지경이다. 다리에서 충분히 대운하를 감상했다면 이제 다리와 이어진 골목을 탐험할 시간! 2~3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길에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데, 특히 가판대에는 명품부터 과일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비잔틴 양식의 성당 산 마르코 대성당
access 산타루치아 또는 리알토 다리에서 1, 2, N번 수상버스 탑승,
산 마르코(S.Marco) 역 하차
time 09:45~17:00(평일), 14:00~17:00(휴일)
URL www.basilicasanmarco.it
넓게 펼쳐진 산 마르코 운하를 곁에 두고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산 마르코 대성당. 화려하고 독특한 모양의 이 건축물은 다른 도시의 성당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베네치아는 세계 각국의 문물이 모여드는 무역의 중심지라 건축물에도 이국적인 문화가 녹아들어 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유해를 가져와 그것을 안치하기 위해 이 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15세기에 완공했다. 성당 문 아치에 있는 유해를 훔치는 장면을 표현한 금빛 모자이크화와, 성당 안의 바닥과 벽면에 채워진 그리스도와 성 마르코의 생애를 그린 모자이크화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성당 입장은 무료이지만 각종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진 제단을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베네치아의 정치, 종교, 문화 중심지 산 마르코 광장
access 산타루치아 또는 리알토 다리에서 1, 2, N번 수상버스 탑승, 산 마르코(S.Marco) 역 하차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표현한 산 마르코 광장은 낮에 가면 비둘기 때문에 그 말을 실감하기 어렵지만, 늦은 저녁에 카페 주변에서 열리는 작음 음악회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표현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광장에는 오래된 카페가 많은데 그 중 카페 플로리안은 1720년에 개업한 유서 깊은 곳으로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 명사들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산 마르코 광장은 낮과 밤의 모습이 사뭇 다른데, 낮의 활기찬 모습도 좋지만, 조명이 켜진 산 마르코 광장의 야경은 놓치면 후회할 장면이다. 꼭 카페에 앉지 않는다 해도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사거나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광장을 울리는 음악과 함께 베네치아의 밤을 즐겨 봐도 좋다.
TIP. 베네치아 들여다 보기 ★아쿠아 알타(Aqua Alta) 현상 자연의 섭리이긴 하지만, 베네치아는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아쿠아 알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쿠아 알타 현상은 해수면이 높아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매년 10월부터 4월까지 간간이 베네치아가 물에 잠기게 된다. 아쿠아알타 현상이 발생하면 사이렌이 울리고, 잠긴 도로 위로 나무로 된 길이 새로 만들어진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아쿠아 알타 현상으로 건축들의 부식이 심해지는 것이다. 여행 중에 아쿠아 알타 현상을 보게 되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하자. 언제라도 물에 잠길 것 같은 베네치아의 모습이 여행자에게는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베네치아의 상징, 곤돌라 베네치아의 대표 이미지는 곤돌라이다. 곤돌리에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들으며 운하를 오가는 경험은 꼭 연인과 함께하지 않아도 충분히 낭만적이고 색다른 경험이다. 곤돌라를 탑승하는 곳은 여러 곳이지만 어디서 출발하든 상관이 없다. 보통 45분 정도에 100유로로, 6명까지 탑승할 수 있지만, 적당히 가격을 흥정해 4명 정도로 맞추어 타자. 산 마르코 광장 앞에서 시작해 좁은 운하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리알토 다리를 지나 탄식의 다리를 통과해 다시 산 마르코 광장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가장 좋다. 보통 곤돌리에들이 건물이나 장소 설명을 해 주는데,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모습을 감상하느라 잘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이탈리아식 영어라 알아듣기 어렵다. 차라리 곤돌리에에게 노래를 부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곤돌라를 탈 때는 반드시 시간을 미리 확답받고 루트도 확인하자. |
눈부신 베네치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대종탑
add. Piazza San Marco 328, 30124, Venice
access 산 마르코 성당 정문에서 광장을 바라보고 왼쪽
time 09:00~15:00(부활절~6월), 09:00~21:00(7~9월),
09:00~15:00(10월), 09:30~15:45(11월~부활절)
tel. 041-270-8311
fee 8유로
산 마르코 성당의 왼쪽에 높게 올라와 있는 종탑은 베네치아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종루의 꼭대기에 오르면 베네치아가 한눈에 보이지만, 골목길이 워낙 좁은 탓에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운하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 건너 보이는 산 조르지오 섬과 함께 탁 트인 베네치아의 풍경을 담을 수 있으니 한 바퀴를 삥 돌아 베네치아의 360° 풍경을 모두 구경하자!
감옥으로 넘어가던 탄식의 길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
add. Piazza San Marco1
access 산 마르코 성당을 등지고 왼쪽
time 08:30~18:30(11~3월 08:30~17:30)
tel. 041-271-5911
fee 14유로
베네치아를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대표 다리인 리알토 다리보다 탄식의 다리를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탄식의 다리는 두칼레 궁전에 있는 감옥 뒤에 다른 형무소가 생겨 그 둘을 연결하기 위해 17세기에 건설된 다리이다. 죄수들이 두칼레 궁전의 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이 다리를 건너가다가 아름다운 대리석 창문을 통해 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탄식을했다 해서 탄식의 다리라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너간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만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카사노바이다.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눈에 크게 띄는 곳은 아니지만, 광장 가까이에 있으므로 한 번 찾아가 보자.
베네치아 주변 섬 여행 베네치아 근처에는 짧게는 한두 시간, 취향에 따라 반나절 동안 돌아볼 수 있는 예쁜 섬들이 있다. 베네치아를 돌아보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수상 버스를 타고 소박하지만 개성 넘치는 주변 섬들을 여행해 보자. ★ 부라노 섬 (Burano) access Fondamente Nove, 무라노 섬에서 수상버스 12번 이용 색색깔의 집들로 가득한 동화 같은 이 섬은 집집마다 널린 빨래와 창가에 놓아 둔 꽃들이 관광객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이렇게 알록달록한 색으로 집을 칠하는 것은 부라노 섬의 풍습으로, 고기잡이 배들이 알록달록하게 배를 칠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밤에 집을 잘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는데, 집의 색깔은 담당 기관에서 허락해 주는 몇 가지 색 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르게 하는 예쁜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은 확실하다. 느린 걸음으로 아기자기한 동네의 골목을 산책해 보자. 부라노의 특산물은 레이스이다. 이곳에서 수작업으로 만든 레이스는 유럽 전역에 수출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규모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명성은 그대로여서 섬 곳곳에서 레이스 가게를 볼 수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레이스 중에는 중국 상품인 경우도 많으므로 잘 확인하고 구입하자. ★ 리도 섬(Lido) access 수상버스 1, 2, 6, 8, 10번 등(리도 섬 내에 수상버스 정거장이 5군데 있음) 도시 전체가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해수욕장은 찾아보기 힘든데, 리도 섬에서는 해수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걷고 보는 여행에 조금 지쳤다면 리도 섬으로 떠나 해수욕을 즐겨 보자. 부산 해수욕이나 이탈리아 해수욕이나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과하게 옷을 훌훌 벗고 다니는 유럽인들의 자유로운 모습만 봐도 아드리아 해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리도 섬에 갈 계획이 있다면 수영복 준비는 필수이다. ★ 무라노 섬(Murano) access 산타마리아 광장에서 4.1, 4.2번 이용 무라노 섬에는 유리 공예 공장이 모여 있다. 원래는 베네치아 본섬 안에 유리 공장이 있었는데, 1,000℃ 이상의 온도에서 가열해야 하는 작업 때문에 화재가 많이 일어나 유리 세공업자들을 무라노 섬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특산품인 베네치안 글라스는 투명한 색상과 기술력에서 지금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최초의 안경을 만들어 낸 곳도 바로 베네치아이다. 세공과정을 직접 구경할 수 있는 유리공장 견학을 꼭 하지 않더라도 길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리 조각품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무라노의 유리 공예품은 꽤 비싸다. 구경을 하다 보면 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지만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유리 공예품을 머나먼 한국까지 가져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시계, 액자, 그릇 등 예쁜 공예품들이 계속 유혹의 손짓을 하더라도 작은 목걸이펜던트 정도로 만족하자. 친구들 선물로 뭘살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면 무라노에서 살수 있는 예쁜 수공예 펜던트가 제격일 것이다. [출처] [이탈리아 베네치아여행] 느릿느릿 베네치아 걷기여행|작성자 인터파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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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벌디 생가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년 3월 4일 - 1741년 7월 28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이며,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Antonio Vivaldi (1678~1741) 는 바흐, 헨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로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의
대작곡가로서, 특히 바로크 협주곡 분야에서는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힌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
1678. 3. 4 베네치아~1741. 7. 28 빈.
이탈리아의 작곡가, 바이올린의 거장.
후기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가장 잘 알려진 비발디의 협주곡은 〈사계 The Four Seasons〉(작품 8, 1~4번)라는 제목이 붙은 표제적 성격의 작품이다.
초기생애
어린시절 고향인 브레시아를 떠나 베네치아로 왔던 아버지 조반 바티스타 비발디는 이발사 였는데, 뛰어난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로 연주실력이 뛰어나 산마르코 성당 관현악단의 정규단원이 되었다. 1678년 3월 4일 태어난 안토니오 비발디는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에 산파는 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즉시 세례를 받도록 했다. 비발디의 음악적 재능은 아주 어려서부터 나타났다. 그는 곧 아버지를 대신해서 교회 관현악단에 들어갔으며 베네치아 음악의 위대한 전통을 접하면서 성장했다. 비발디가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자 관습에 따라 사제를 보좌함으로써 소명을 준비했고 그동안 음악공부를 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1703년 3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일반적으로 음악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오스페달레는 주로 여자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이었다. 이 학교는 몇몇 뛰어난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을 고용하고 있는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재능있는 원생들을 훈련시켰으며 공공 기부금과 정규적인 일요 연주회의 수익금으로 운영되었는데, 비발디는 이 연주회를 위해 수백 곡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비발디가 지휘하는 오스페달레 성가대와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그의 음악은 곧 베네치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외국인 방문객들까지도 베네치아에 오면 비발디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관례로 여기게 되었다.
12개의 트리오 소나타(작품 1)와 소나타들(작품 2)은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고, 12개의 협주곡(작품 3)과 독주 바이올린(또는 2대 이상의 바이올린) 및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화성의 영감 L'estro armonico〉은 뛰어난 음악 출판업자인 에스티엔 로제에 의해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출판된 상태였다. 이 작품들에서 비발디는 볼로냐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주세페 토렐리의 정교한 기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비발디가 시도한 관현악의 리토르넬로와 독주 부분의 과감한 병치는 독주자의 기교적 과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의 협주곡 가운데 450여 곡 이상이 오늘날 잘 알려져 있거나 최소한 추적할 수 있는것들 가운데는 독주 바이올린 협주곡 220곡, 바순 협주곡 37곡, 첼로를 위한 협주곡 27곡, 2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25곡, 오보에 협주곡 11곡, 플루트 협주곡 10곡이 포함되어 있다. 3대 이상의 악기를 위한 협주곡 32곡은 앞의 범주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다.
초기 오페라
비발디는 초기에 오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듯한데 이는 당시 사제로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페라 구조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곧 그는 극장 지배인들로부터 의뢰를 받게 되었다. 1715년 요한 프리드리히 아르만트 폰 우펜바흐(뒤에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이 됨)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비발디를 일컬어 '기업가'라 했는데 이는 비발디가 오페라 흥행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몇 곡인지 이제껏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때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50곡에 달할 것으로 여겨졌었고 비록 3번째 작품에 관해서만 실제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 발견된 편지에서 비발디는 그가 작곡한 94곡의 오페라를 언급하고 있다. 이 숫자 안에는 같은 오페라를 다시 쓴 것이나 개작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며 그 가운데 13곡은 한 작품을 구성하는 일련의 기악곡들로 출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협주곡과 소나타와는 달리 비발디의 오페라는 1번도 성공적으로 재공연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비발디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성악 음악을 쓸 수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음악적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가사에 나타나는 말하는 듯한 속성을 강조하는) 과장된 레치타티보는 극적 흐름을 방해하고 있으며 진부한 대본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는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종교음악 역시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14년 이미 오스페달레의 소녀들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비발디의 오라토리오 〈모이세스 데우스 파라오니스 Moyses Deus pharaonis〉를 연주했으며 2년 후에는 그의 걸작인 〈승리한 유디타 Juditha triumphans〉를 불렀다. 비발디의 많은 종교 음악 가운데 독창과 합창 부분이 교대로 등장하는 7성부 〈성모 찬가 Magnificat〉와 11개의 개별적인 부분들로 작곡된 〈영광송 Gloria〉이 있다. 다소 느슨하고 단순한 화성 구조를 갖는 협주곡들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종교 음악은 전통적인 베네치아 다성음악의 절대적인 통제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음악).
비발디가 오스페달레에 부임한 처음 10년 동안 관리자측과 비발디의 관계는 극히 좋았는데 그것은 오스페달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데 대한 그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오페라 공연과 다른 곳에서의 지휘 등의 일로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에 대한 불평이 일기 시작했는데 사실 어떤 때는 몇 년 동안 베네치아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비발디는 오스페달레측과 그가 자리를 비울 경우 1개월에 2곡의 협주곡을 작곡해주기로 계약했지만 관리자측에서는 그가 직접 그 작품들을 지도해주기를 원했다. 결국 교회 당국은 그의 모든 활동들을 너무나 세속적인 것으로 판단해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그는 어려서부터 앓아온 심장 질환(협심증) 때문에 미사에서 강론하는 것도 중단했다. 그는 또한 만토바에 체류했을 당시의 제자 안나 지로의 불륜 관계로 비난받았다. 소프라노 가수였던 그녀는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자매가 함께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집에서 그를 간호했다. 1737년 페라라에서 오페라를 제작하고 있을 때 교황의 대사로부터 중단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문에 경제적인 손실을 입었지만 그에게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준 결정적인 일격이었고 그후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그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침체기
비발디는 이 충격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그의 음악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739년 프랑스 학자 샤를 드 브로스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비발디의 인기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에 실망한 비발디는 빈으로 갔지만 불행하게도 1729년 트리에스테에서 만났던 후원자 카를 6세는 그가 도착한 후 곧 죽었으며 오스트리아는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휩쓸렸다. 그러나 빈은 작품을 위해서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었다. 비발디는 그곳에서 죽었으며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비발디가 살아 있는 동안 출판된 작품들은 그의 명성을 온 유럽에 전파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비롯한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그의 후계자들은 또다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비발디가 죽자 곧 그의 음악적 명성은 쇠퇴했다. 19세기 중엽 새로운 바흐판을 위해 작업하던 학자들은 '비발디의 12개의 협주곡, 바흐 곡 편곡'이라고 적힌 헌사가 포함된 필사본을 찾았는데 이 발견으로 비발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그는 가장 널리 연주되는 바로크 작곡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창설된 많은 실내 관현악단들이 특히 선호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현존하거나 추적할 수 있는 850여 곡에 달하는 비발디의 작품 가운데 96곡의 협주곡과 42곡의 소나타만이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다. 출판된 작품수와 그가 작곡한 전체 작품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몇몇 작품들을 따로 소장하는 거장들의 관례를 생각한다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W. Kolender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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