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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4.19혁명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4.19혁명

by 무궁화9719 2022. 9. 14.

4.19혁명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4.19혁명

4.3. 6.25. 일제.조선(이승만)

2016. 4. 19.

▲ 4.19 최초 발포 현장, 인권 표지석 설치 4.19혁명 당시 경찰이 시민을 향해 첫 실탄을 발포한 현장에 인권현장 바닥 동판이 설치됐다. 서울시는 4.19 혁명 58주년에 맞춰 16일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분수대광장 바닥에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동판 설치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부터 근현대 흐름 속에서 자행되었던 인권 탄압과 이에 맞서 저항했던 인권 수호의 생생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곳에 황동으로 만든 바닥 동판을 설치해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인권 현장 표석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4.19혁명 (1960년에 있었던 4.19 혁명입니다)

youtu.be/bTgwQsB9_cw

 

솔아 솔아 푸르른솔아...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들어도 강물저어 가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최루탄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최초의 민주 혁명 도화선이 되다

등록 :2018-04-11 11:12수정 :2018-04-11 11:53

[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58년 전인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서 눈에 최루탄 박힌 김주열 열사 주검 떠올라

     
<부산일보> 1960년 4월 12일 치(왼쪽), 김주열(당시 16살, 마산상고 수험생)군이 실종 27일만인 1960년 4월 11일 마산시 중앙동 대한통운 옆 미창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를 때의 장면. (당시 언론사들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은 원본 사진을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삼·일오 사건 실종 학생 김주열 군은 참살 당하였다
-잔인 극악하게 학살 11일 11시 중앙부두 앞바다서 발견
 

오늘로부터 58년 전인 1960년 4월 11일 경상남도 마산시(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이 발견됐다. 김 군은 오른쪽 눈부터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힌 채 주검으로 떠올랐다. 실종된 지 한 달여 만에 발견된 탓에 시신의 부패 또한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김주열 군은 마산에서 시작된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경찰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 군의 주검을 바다에 버렸다. 김주열 군의 주검은 이승만의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로 인해 ‘좌익 폭도’로 내몰린 시민들의 분노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득표율 115%…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 

 

<동아일보> 1960년 3월 17일 치.
 

당시 이승만 정권은 12년 동안 지속된 장기집권 체제의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꾸몄다. 선거는 ‘투표함 바꿔치기’, ‘5인 1조 투표’ 등 갖가지 불법적인 수법들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이 속한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부통령인 자유당 이기붕의 득표율이 115%가 나오자 적당히 낮춰 발표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외신들은 한국의 부정 선거에 대해 ‘독재국가 징조’, ‘조작된 선거 승리’, ‘정치적 자유, 놀랄 만큼 후퇴’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냈고, 이승만의 재선에 대해 “썩은 승리”라고 평가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1960년 3월15일 선거 당일부터 전국적으로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1960년 3·15 의거 직후 부산 <문화방송>(MBC) 전응덕 보도과장이 김주열군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전북 남원 출신이었던 김주열 군은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1960년 3월 14일 마산으로 들어갔다. 김주열 군은 3월 15일 마산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 군의 어머니인 권찬주 씨는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마산 시내 곳곳을 수소문했다. 아울러 방송과 신문 등 가리지 않고 아들의 실종을 알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마산 시민들에게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돼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김주열 미스터리’가 뇌리에 박히다시피 했다.

 

그러는 사이 이승만은 부정 선거로 인한 시민들의 규탄 시위를 오히려 폭동으로 몰아갔다. 명분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파 후손들이 자주 애용하는 ‘좌파 폭도’론이었다. 무력진압에 나선 이승만 정권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마산사건 대책위는 반공청년단과 정치 깡패들에게 카빈총 30정이 지급됐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거리에서 즉사하는 시민들이 발생하는 등 유혈사태의 충격이 심각해지자 규탄 시위는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주검

 

<동아일보> 1960년 4월 14일 치.
 

김주열 군이 실종된 지 한 달여가 지난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무렵, 한 낚시꾼에 의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 한 구가 마산 앞바다에서 인양됐다. ‘그 주검은 바로 김주열’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마산 시민들에게 퍼져나갔다. 당시 <부산일보>는 처참한 김주열 군의 주검 사진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또 모든 언론사에 이 사진을 제공했다. 김 군의 처참한 모습에 전 국민이 분노했다.

 

 

김 군의 주검이 떠오른 4월 11일, 잠시 주춤했던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다시 타올랐다.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마산 제2차 봉기를 시작으로 4월 19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주한 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를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약 1000명의 청소년들이 모여 서울로 이송하기 위해 김 군의 시신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시가지를 행진하여 지역 경찰서로 이동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군중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시위 분위기를 전했다. 아울러 “군중들은 ‘이기붕에게 죽음을’과 ‘이승만 정권과 함께 물러나라’고 소리쳤다”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경찰이 200-500발의 총을 쏘아 군중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적어 이승만 정권의 무력진압이 총기를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일어났음을 문서로 증언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13일 치.
 

한편, 김주열 군의 주검은 병원에 안치된 채 수습되지 못하고 있었다. 검찰은 김 군의 얼굴에 박힌 최루탄이 포탄인지 불발탄인지 몰라 폭발 우려로 부검을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군의 어머니는 “주검을 인수할 수 없다”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사람이 처리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군의 부검은 주검이 발견된 지 사흘 만인 4월 15일에 이뤄졌다. 부검에 참여한 의사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김 군 얼굴에 박힌 최루탄이 발사에 의해 박힌 것인지, 또는 사람 손에 의해 박은 것인지 아는 바 없다”고 말해 갖가지 의문점을 남기기도 했다.

 

<마산일보> 4월 20일 치.
 

김 군의 부검 결과 발표로 인해 민심이 더욱 요동쳤다. 18일에는 김주열 군의 주검을 유기했다는 마산경찰서 경비 주임 박종표의 자백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중년 여성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까지 확대됐다.

 

군중들이 외치는 “이승만 정부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두고 이승만은 ‘불온 구호’라며 검찰과 경찰에 각각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면서 경찰에서 수사하는 목적이 구호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며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만들어 시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갔다.

 

피의 화요일이 된 4월 19일

 

김 군의 주검이 발견된 지 일주일이 지난 4월 18일, 시위의 물결은 서울까지 올라온다. 고려대학교 전교생이 시위에 나서며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대학생들의 참여도 이끌어낸다.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4월 19일 정점을 치닫게 된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 치.
 

이승만은 장갑차를 동원해 군중에 무차별 일제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사망했으며, 총상자 또한 수백 명에 달했다. 4월 19일 하루 서울에서만 104명이 사망했다. 부산에서도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 부상 70명이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 군도 포함됐다. 전 군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당황한 이승만은 19일 당일 오후 3시께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달리 중립을 지켰다.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킨 것이다. 당시 서울지역에 출동한 계엄군인 15사단은 각급 부대에 긴급 지시사항을 내렸다.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

 

이승만의 등 떠밀린 하야, 번복, 하야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 할 일이다 .”  

 

-1960년 4월 20일 이승만 대국민 담화 -

 

<한겨레> 자료 사진.
 

전국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의 뜻이 없었다. 오히려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민들을 비난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면서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엄군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 국무부 장관은 주미 한국 대사에게 항의 각서를 보낸다. 계속해서 한국 내 상황을 보고받았던 미국은 앞서 1,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에서 그친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 국무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기자회견 이튿날인 4월 21일 국무 위원은 일괄 사표를 낸다. 부통령이었던 이기붕 또한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4.19 당시 지프를 타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소식을 전하는 청년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더 이상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건 당시 김정렬 국방부장관이었다. 김 장관은 4월 26일 오전 이승만에게 하야할 것을 권유했다. 국무위원과 비서관들도 하야를 재촉했다. 당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이승만에게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라는 뜻이었다. 이승만은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1960년 4월 27일 치 1면. 대통령기록관 제공.

 

하지만 이승만은 이튿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갑자기 사임을 거부했다. “내가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한 국무위원이 ‘사임해야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직언한 끝에 이승만의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됐다. 이로써 부정선거의 주인공이었던 이승만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도주한다. 3·15 부정 선거는 한국 헌정사 이래 국회 의결을 통해 정식으로 무효 처리된 유일한 선거로 남았고, 4·19 혁명은 독재에 항거한 국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린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전북 남원군 금지면 묘소(왼쪽). 김주열 열사가 세상을 뜬 지 50년 만에 경남 마산시 서성동 3·15 의거기념탑 앞에서 그의 넋을 기리는 범국민장의 노제가 열리고 있다. 이날 범국민장은 1960년 4월 11일 김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던 마산 중앙부두와 당시 시위 현장 일원에서 발인과 시신 운구 연출, 초혼제와 노제 등으로 진행됐다. <한겨레> 자료 사진.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는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에 안장됐다. 아울러 서울 4·19 민주묘지와 마산 3·15 민주묘지에 각각 가묘가 조성돼 그를 기리고 있다. 김 열사는 주검으로 떠오른 지 35년 만인 1995년 4월 11일, 모교인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50년 만인 2011년 4월 11일, 정부 지원 없이 후원금과 성금만으로 치러졌다. 

 

참고 문헌

미국외교기밀문서 (FRUS) 1958-1960. Volume XVIII. Japan; Korea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의 세부사항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보고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의 시신 > 박태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경신문 > 1960년 3월 16일 자 , <워싱턴 포스트 > 1960년 3월 17일 자

<마산일보 > 1960년 4월 12일 자 , 4월 20일 자

<한겨레 > 2000년 4월 5일 자 , 역사문제연구소 이신철 칼럼

<한겨레 > 2014년 1월 13일 자 , ‘길을 찾아서 이룰태림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4.19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8일 고대생들의 시위에 뒤이어 4월 19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전국 각지의 거리를 메웠다. 자유당의 친위대나 다름없었던 경찰은

이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시위대는 곳곳의 자유당사와 경찰서를 불태웠고 이 날

하루동안 111명의 시민들과 5명의 경찰관이 사망,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정부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 4월 26일까지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이 날 오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서 자유당 독재정권은 12년만에 막을 내렸다.

 

 

 

질주하는 시위 학생들

 

 

 

 

 

 

 

 

 

 

계엄군 출동

 

 

 

 

 

 

김주열 열사는

당시 17세로, 마산상고 1학년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가 자행된 3월 15일 밤 마산시청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경찰은 그 처참한 모습을 숨기려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유기했는데,

근 한 달만인 4월 11일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하여 마침내 2차 시위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가두시위로 확산됐고,

이는 마침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의는 승리하리라

 

 

 

 

 

 

 

19일 경무대 앞에서 일제 사격을 받고 뒤로 몰리는 데모대, 이때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4월19일 경무대로부터 중앙청 쪽으로 데모대를 압박하여 나오는 경찰사격대,

이날 결찰의 발포로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천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

희생자들은 대학생 22명, 고등학생 36 명 노동자61명 중학생. 국민학생19명

무직 33명 화이트칼라 19명 이었습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의 경찰의 발포등으로 당일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룬 기사.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대는, 시위대 중 3월 18일  실종되었다가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에 의해 마산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자살하였다.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준 혁명이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4월 인민봉기, 4·19 인민봉기, 4.19 반미 반파쇼 항쟁, 남조선인민봉기

라고 부른다.

 

배경

부정선거의 원인이 된 이기붕

1960년 1월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도중 신병 末期라는 판정을 받게되어 하와이 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결국 선거 한달전인 2월 25일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 소식을 듣는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고 대구 도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원인

1960년 3월 17일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3·15 마산시위)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 홍진기로 교체·임명하는 등 정국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8일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

 

경과

3·15 마산시위

1960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3.15 마산시위를 다룬 기사.

27일 동안 행방불명이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3·15 마산시위(이후 3.15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3.15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모진 평가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인 293명의 동의서명을 받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촉구 결의안'이 지난해(2009년) 12월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는데도 국가보훈처가 '국가기념일' 제정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부정적 입장을 밝혀온 국가보훈처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에 최종 동의를 하면서 행정안전부 2010년 2월 23일부터 2010년 3월 2일까지 입법예고했으며,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를 계기로 마산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생 데모에 호응,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를 행진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고려대학교 유진오(兪鎭午) 총장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귀교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에서 대한반공청년단의 소속에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증언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

(사망 21명, 부상 172명). 과잉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4월 19일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 와중에 곳곳에서 경찰의 사격발포가 자행돼 수십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 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로 기세충천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현 대통령 경호실장급)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여 막았으나, 곡사포는 곧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한편, 시내의 시위대는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한편,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부대로 피신하였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시위를 강경진압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했다.

 

이승만의 사퇴

이에 장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설득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고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방송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선언을 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 단기 4293년 4월 26일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가는 이승만 박사.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 출범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연설발표 당일 오후 4시에 이승만은 경무대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이 그보다 하루 먼저 사퇴하였으므로 궐위중인 부통령과 총리를 대신해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이기붕 일가 변사

4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자 처벌을 약속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기붕 처벌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기붕의 처벌을 거부했다.

 

4월 27일 경무대 비서관 박찬일이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의 집을 방문했다.[12] 박찬일 이기붕의 딱한 처지를 말하며 망명의 길을 열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12] 그는 이기붕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허정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박 비서관에게 확실한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만송을 해외로 내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12]'는 것이다.

 

그는 '만송이 부패와 부정에 대한 책임을 면할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국가에서처럼 실권(失權) = 곧 죽음이라는 사태가 벌[12]어진다면 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사태가 가라앉아 만송에 대한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 때까지만 그를 해외로 안전하게 피신시킬 생각이었다.[13]

 

한편,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14]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

1960년 4월, 부통령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는 당시 현직 대통령 이승만의 유고 시 대통령직 계승서열 1위권자였다.

 

장면 부통령 대국민 담화문

1. 본인은 오늘로서 부통령직을 사퇴한다.

3·15 부정선거로 인하여 3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 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게 됨을 볼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 것이다. 동시에 본인의 사퇴로서 권력을 갈취하여 압제와 폭정을 계속하는 이승만정부에게 경종을 울리고, 나아가 자유·민주의 정신을 이 땅에 소생시켜,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 본인이 국민 여러분의 지지로서 부통령에 당선된 이래, 헌법이 본인에게 부여한 직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를 수행할 기관들은 이승만 정부의 고의적인 방해로 인하여 그 구성조차 보지 못하였으며, 그 외에도 독재화하여 가는 정치, 파탄되어 가는 국민경제, 혼란 일로의 사회상고립되어 가는 외교 등을 시정하기 위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행정부에 대한 충고를 하였고, 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함도 수차이었으나, 그때마다 거부당하였으며, 부득이 서면으로 한 본인의 진언도 아무런 반향을 보지 못하였다.

금년의 선거를 앞두고 이박사의 4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유당과 정부는 재작년 12월에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야당 의원을 폭력으로 축출· 감금한 후,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법을 개악했으며, 언론 기관과 야당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평화적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불법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등으로 부정선거의 복선을 갖추었고, 헌법정신에 배치되는 3월 조기선거, 유령유권자의 조작, 입후보 등록의 폭력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부정 무더기표 투입, 3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에 대한 각종 방해, 부정개표 등으로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97퍼센트 내외의 여당득표를 조작 발표함에 이르러서는 정권욕의 불법수단이 극한에 달하여 민주선거제도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3. 이러한 부정, 살인선거 등에 대하여 국민의 분함은 가슴에 사무쳤고, 진리와 정의에 민감한 청소년 학도들의 시위운동은 전국 각지를 휩쓸게 되었다. 집권자의 사병화한 경찰은 평화적 시위 학도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그도 부족하여 학살한 보복살상과 고문을 무수히 감행하여 국민을 경악케 하였고, 또다시 총탄을 퍼붓는 등 무단정책을 사용한 나머지, 드디어 법적 요건에 어긋나는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는 수치스런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 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 본인은 비록 부통령의 직을 떠난다 할지라도 민주투쟁 전열에서 국민들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을 맹세한다.

5. 본인은 비록 부통령의 직을 떠난다 할지라도 민주투쟁 전열에서 국민들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을 맹세한다. 이번의 전국 학도 총궐기 운동은 우리 역사상 새로운 시기를 획하는 것으로서, 3·1 독립운동에 비견할 만한 금자탑이며, 이제부터 민족정기와 자유정신은 온갖 압제력을 물리치고, 광명의 천지를 개척하여 조국의 민주건설과 반공통일을 완수하게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끝으로 민주 수호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민족의 꽃'들에 대하여 그 명복을 빌며, 명예의 부상자 여러분의 쾌유를 소원한다.

 

– 단기 4293년 4월 23일대한민국 부통령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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