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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형제복지원 사건 35년 만에 첫 국가 진실규명…"중대 인권침해"

by 무궁화9719 2022. 8. 24.

11살에 끌려가 ‘6년의 감금’…형제복지원은 내 삶을 파괴했다

등록 :2022-08-24 18:59수정 :2022-08-24 20:59

장예지 기자 사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여성 2명 인터뷰
하루 17시간 노동…기합·구타 시달려
정신병동 끌려가 약물 투여도
진실화해위 “여성 남성보다 4배 많이 정신요양원 수용”
퇴소 뒤 35년 지났지만 트라우마 아직도

23일 경상남도의 한 지역에서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임명숙(52)씨.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전두환이 죽고 이순자가 과거에 대한 사과를 했잖아요. 하지만 제삼자가 하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가 달고 있는 ‘형제복지원’이라는 꼬리표는 없어지지 않잖아요.”
 
1981년 엄마 품이 그리운 11살 나이에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 6년을 갇혀 지낸 임명숙(52)씨는 끔찍했던 기억을 보이지 않는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가며 살아왔다. “괜히 해코지를 당할까 봐 진실 규명을 신청하기가 꺼려졌어요. 하지만 이제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가족에게도 작년에 처음으로 이 일을 알렸어요.” 임씨에겐 자신을 가뒀던 형제복지원과 방관했던 국가에 대한 불신이 깊게 남아 있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10년 넘게 인권침해 실상을 알리며 진실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임씨처럼 여성 피해생존자들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박경보 형제복지원 피해자협의회 자문위원장은 “여성 피해자들의 경우 가족에게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일을 털어놓지 못해 진실 규명 신청을 꺼리기도 한다. 당시 안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 등으로 말을 꺼내길 더 힘들어했다. 오랜 설득 끝에 이번에 진실화해위에 접수한 피해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2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진실 규명을 앞두고 <한겨레>는 22~23일 충남과 경남에서 여성 피해생존자 두명을 만났다. 이들은 형제복지원에서의 비참한 생활과 그 뒤 순탄치 않았던 삶에 대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딸의 어머니가 된 임씨는 “정신병동(형제복지원 내 정신요양원)에 갔던 일과 단체기합, 이 두 가지는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문을 뗐다.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공장에서 일했다. ‘소대’라고 불리는 생활관에는 여자 소대장이 있었지만, 단체기합을 받을 땐 남성 중대장에게도 구타를 당했다. 임씨는 “어떤 날은 코를 심하게 맞아 피가 주룩주룩 쏟아져 나왔는데, 약도 제대로 못 바르고 참아야 했다”고 했다. 13살이 된 임씨는 조금이라도 쉬고 싶어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의무실이 아닌 정신병동으로 끌려갔다. “꾀병을 부렸더니 선생님이 저희를 막 때린 뒤 정신병동으로 데려갔는데, 영양제라면서 약을 주더라고요. 그 약만 먹으면 잠이 쏟아졌어요. 그렇게 4일 내내 약을 먹었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 뒤로는 거기에 또 갈까 봐 무서워서 아파도 말을 못 하고 일했어요.” 1987년 임씨는 퇴소했지만, 오랜 노동과 단체기합으로 마디마디 뒤틀려 있는 손가락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날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수용자 가운데 부적응자나 반항자에게 임의적으로 정신과 약물을 투여하고, 정신요양원을 소위 ‘근신 소대’로 활용한 정황도 드러났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이 1년간 342명이 매일 2번 복용할 수 있는 정신과 약물 클로르프로마진(조현병 환자의 증세 완화제) 25만정을 구입한 내역을 확인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4배 이상 높은 비율로 정신요양원에 수용됐고 조현병 사망 비율도 남성에 비해 높았다”고 밝혔다.
 
1980년 11살에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ㄱ씨는 14살이 되던 해 박인근 형제복지원장 사택에서 박씨 인척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는 동갑인 박씨의 딸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ㄱ씨는 “나는 왜 학교에 보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ㄱ씨는 1987년 10대에 형제복지원을 퇴소했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거기서 나와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나이가 어리지만 술집은 무조건 써주잖아요. 배운 것도 없고. 술집에 있다 보면 결국 빚을 지게 되고, 그러면 도망가지도 못하고 (가라는) 다른 술집을 가고. 난 영화가 뭔지, 맛있는 게 뭔지도 모르고 빚 갚으려고 30대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그런 데를 안 갔을 텐데… 갈 데가 없는 거예요.” ㄱ씨는 몇 분을 소리 내 울었다. 그는 부산 만월동 술집 거리에서 형제복지원에서 본 언니를 마주쳤지만 서로 모른 척한 기억도 있다고 했다.
 
형제복지원에 갇혔던 시간은 좀처럼 아물지 않는 흉터로 두 여성에게 남아 있다. 임씨는 지금까지도 수면 장애로 매일 밤잠을 설친다. “복지원에 있을 때 불침번을 섰어요. 그럼 쪽잠을 자요. 푹 자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도 잠만 자면 내가 깨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잠들기가 어려워요.
 
”ㄱ씨는 술집을 전전하며 술과 담배에 의존했고, 때론 자해를 했다. “화가 많이 날 땐 조절을 하기 어려워요. 어린 시절을 (형제복지원에서) 군대처럼, 똑바로 안 하면 혼나고 기합받는 생활을 해서 그런지…”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형제복지원 첫 진상규명, 전두환 강제수용 지시까지 확인

  • 기자명 장슬기 기자 
  •  입력 2022.08.24 17:39
  •  수정 2022.08.24 17:43

진실화해위, 조사 1년3개월만 1차 발표…강제수용․강제노역 등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규명 
사망자 기존 552명 알려져, 657명으로 추가 확인…피해자 191명 입증, 나머지 신청인 추가 조사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판단했다. 피해자들이 그동안 주장해 온 내용을 국가기구가 공식 확인한 35년 만의 진상규명이다. 특히 당시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 전두환씨의 구체적인 지시와 여러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강제수용 등 인권침해를 확인하면서 일개 사회복지법인의 일탈로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24일 진실화해위는 1981년 당시 대통령 전씨의 지시로 만든 ‘구걸행위자보호대책’(국무총리 행정조정실) 등을 통해 최고 책임자의 지시 내용을 공개했다. 1981년 4월9일 보안사령부는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실태’라는 보고를 올렸고 다음날 전씨는 “서울시 등 전국 대도시에 신체장애자를 비롯한 걸인들의 구걸행위가 늘어나고 있음을 지적, 구걸행위자를 일제단속하고 아울러 보호대책을 수립, 보고토록 국무총리에게 지시”하라고 했다. 

 

▲ 1984년 5월11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씨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 사진=형제복지원 운영 화보집

 

전씨가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에게 훈장을 주는 사진 공개로 박 원장이 국가에 비호를 받는다는 정황은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강제수용을 시작으로 수많은 인권침해에 대통령의 책임 소재를 구체화한 것이다. 1981년 10월6일 전씨는 국무총리에게 관련 보고를 받은 이후 88올림픽 개최 이전 서울 거리에 걸인이 없도록 할 것, 걸인 중 정상적 사람이 40% 되는데 대공적 용의점 있는지 검토할 것, 수용된 걸인은 지방장관 책임하 농촌 일손돕기 등 농민 지원 등을 지시했다. 최종 확정한 ‘구걸행위자보호대책’은 전국 수용시설 확충과 시설 민간위탁화, 단속체계 정비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관련기사 :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전두환 사과도 없이 가버렸다”]

강제수용, 전두환 지시 있었나

정부가 피해자의 진정과 소송을 묵살한 사실도 확인했다. 1982년 8월 강아무개씨는 자신의 형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수사해달라며 정부 기관과 경찰에 진정서를 냈다. 박인근 원장은 강씨를 무고죄로 고소했고 1982년 10월15일 강씨가 구속기소됐다. 

 

강씨 진술에 따르면 박 원장은 형사들을 다그치면서 다혈질적인 모습을 보였고 박 원장이 경찰 비호를 받는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 강씨의 가족들이 박 원장에게 잘못했다는 내용의 글을 작성했고 같은해 10월28일 사과문이 한국일보에 실렸다. 같은해 12월 부산지법은 강씨에게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 한국일보 1982년 10월 28일자. 피해자인 강아무개씨 가족이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에게 작성한 사과문

 

또 다른 사례에선 1987년 2월 형제복지원 퇴소 아동의 아버지가 관계자 처벌을 요청하며 부산지검 울산지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는데 부산시 공무원들이 고소취하를 종용했고, 이 과정에서 안기부와 방첩대까지 동원된 정황이 드러났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서 강제수용 사실을 알고도 묵인․정당화한 사실, 보안사령부에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간첩 용의자를 감시하기 위해 요원을 침투시키면서 이곳의 인권침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는 내용 등도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 해당 기관들은 책임있는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의 지시와 함께 여러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형제복지원 강제수용과 각종 인권침해에 대해 일부 공무원들이 문제라는 인식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는데 영향을 주지 못했다. 

 

▲ 24일 기자회견에서 형제복지원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 사진=MBC 갈무리

 

부산시 형제복지원 관리감독 업무(보사국 사회과 복지계장) 공무원은 1986년 자신의 석사학위논문에서 내무부 훈령 410호에 대해 “국민 자유권 행사를 제약하는 것으로 이를 장관 훈령으로 함은 법치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고 형제복지원에서 직업훈련을 한다고 하지만 자격증을 갖춘 종사원이 없으며 경비절감과 인력활용을 위해 군대조직처럼 운영하고 있다며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1987년 문제가 된 내무부가 내무부 훈령 410호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경찰업무지침에 따라 ‘기동적 단속’ ‘야간 미행 단속’ 등 부랑인 단속업무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비행성예측법 실시’라는 자료를 보면 경찰이 자의적으로 비행성을 판단해 복지시설인계까지 결정할 수 있도록 한 사실도 드러났다. 공권력이 임의로 국민의 신체 자유를 제한한 행위다. 

 

당시 단속 경찰 증언을 종합하면 경찰 자의적 판단으로 부랑인을 선정하고 강제수용했다. 경범죄 위반자를 경범죄처벌법에 따른 구류나 과료 처분하지 않고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한 사례, 고아라는 이유로 소년범을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한 사례 등도 확인됐다. 경찰뿐 아니라 부산시 등에서 부실한 조사 이후 형제복지원으로 강제수용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모델의 전국화

형제복지원은 1960년 부산 감만동에서 형제육아원으로 개소해 1962년 용당동으로 확장 이전, 1975년 주례동으로 다시 확장이전했다. 1982년 증축공사 등 운영기간 내내 모든 건물 공사를 수용인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켰다. 형제복지원 측은 당국에서 보조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국비․시비를 지원받고 산림청에서 헐값에 부지를 불하받았다. 

 

1981년 10월 총리 행정조정실 주도 ‘구걸행위자 보호대책’을 보면 전국 부랑인시설을 확충하기로 하고 12월 추진상황을 점검하면서 재원 문제가 불거지자 ‘형제복지원 모델(강제노역)’을 따라 건축 비용을 절감하도록 지시했다. 

 

형제복지원 측은 자체 월간지 ‘새마음’ 등을 통해 수용인들에게 적금을 지급했다고 주장하지만 진실화해위 확인 결과 수용인들에게 적금을 온전히 지급하지 않았다. 1987년 수사 당시 검찰이 압수한 물건 중 ‘기증금 세입결의서’ 등을 보면 수용인들이 도망가거나 사망할 경우 또는 박 원장 명령에 불복할 경우 즉시 기증처리 해 소유권이 형제복지원으로 넘어간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다수 기록을 조작․오기재한 가운데 호적에 문제가 생긴 경우도 있었다. 설아무개씨의 경우 5~6세경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됐는데 입소 당시 신상기록카드에 생년월일 등을 잘못 기재했고 이후 다른 시설로 전원됐다. 잘못된 신상정보로 설씨에 대해 가족이 없는 호적을 창설했고 가족들은 군대 갈 나이까지 설씨가 돌아오지 않아 사망신고를 했다. 이번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설씨는 친동생과 극적으로 만났고 현재 호적상 친동생보다 나이가 어리게 기재된 사실을 확인해 회복절차를 진행 중이다. 

정신요양원은 징벌? ‘화학적 구속’ 정황까지

형제복지원 내 정신요양원 수용인 다수가 의료적 진단이 아닌 징벌 조치의 일환으로 이뤄진 사실도 드러났다. 피해자들 증언뿐 아니라 신상기록카드에서도 ‘정신질환자로 사료된다’는 비의료인의 판단 이후 정신요양원으로 갔기 때문이다. 보건사회부 지침을 보면 ‘사회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자’에 대한 수용이 ‘중증 정신질환자’ 등 보다 우선순위에 있었다. 

 

▲ 형제복지원 내 정신요양원 약물 관련 자료. 사진=진실화해위

 

이렇게 정신요양원에 입소한 이들에게 부적절하게 약물을 투여한 정황도 나타났다. 수용인 다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CPZ(클로르포로마진) 등 정신과 약을 강제로 먹여서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부산시 해명 자료를 보면 정신요양원 내에서 구입한 클로르포로마진은 1년간 수용자 전원이 매일 투여할 양이었다. 그 외에도 형제복지원에선 각종 마약류에 해당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을 구매했다. 

 

이번 조사로 1975~1988년 형제복지원 사망자는 기존에 알려진 552명보다 105명 많은 65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면서 수용자 응급 후송 중 사망 사례나 사망진단서 조작 사례가 있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결과를 근거로 국가가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피해 회복과 트라우마 치유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국가가 각종 시설 수용․운영 과정에서 피수용자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시행하고 사회복지공무원과 시설운영자 등에 대한 인권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사과 주체인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처인지 특정하지 않았지만 이번 조사에서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시내용과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훈령의 문제점, 여러 국가기관의 조직적 행위가 드러났기에 향후 발표에서 대통령과 행안부 등의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권고안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진실화해위는 국회에 강제실종 피해를 막기 위해 지난 6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유엔 강제실종방지협약’을 조속히 비준 동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부산시에는 피해자 조사와 지원업무 당당 조직이 업무를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적합한 예산․규정․조직을 정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35년의 단식, 삭발, 눈물…‘형제복지원’ 진실을 찾다 [만리재 사진첩]

등록 :2022-08-24 15:40수정 :2022-08-24 16:34

신소영 기자

진실화해위, ‘형제복지원’ 국가폭력·인권침해 결론
1987년 진상조사 첫발 뗀 뒤 35년 만에 피해인정
생존자들, 국가 상대 지난한 투쟁 발자국 재조명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소속 박순이 피해자(왼쪽)가 24일 중구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서 정근식 위원장의 발표를 들으며 눈물흘리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정근식)가 24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 폭력에 따른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냈다. 이로써 피해자들은 1987년 진상조사단의 첫 조사 뒤 35년 만에 국가 기관으로부터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이날 진실화해위는 1차 진실규명 결정을 발표해 전체 형제복지원 진실규명 신청자 544명 중 작년 2월까지 접수된 191명을 대상으로 피해자로 인정하며, 국가에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 회복 및 트라우마 치유 지원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왼쪽)이 24일 서울 중구 위원회 사무실에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 위원회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정근식 위원장(앞줄 왼쪽)이 한종선 피해생존자모임 대표(오른쪽)와 포옹하며 격려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자모임 대표는 “이번 진실규명으로 피해당사자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고 국가는 이 책임에 대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국민에게 약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이 오기까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싸워온 피해자들의 걸음 걸음을 사진으로 모아본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맨앞)가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해 정근식 위원장(맨왼쪽)의 발표를 들은 뒤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피해 생존자 연생모씨가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서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신소영 기자
 
부산 형제복지원의 생존자 한종선씨는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책 <살아남은 아이>를 썼다. 2013년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한씨 옆으로 경북 구미에 살던 그가 국회 앞에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들었던 손팻말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가 국회 앞에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들었던 손팻말. 한겨레 자료사진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2015년 4월 28일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들이 국회 앞에서 삭발 기자회견을 열고 “19대 국회는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조속히 제정하라”고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예술인 문화행동 회원들이 2018년 9월 3일 오전 국회 앞 담장에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마음을 담아 만든 조각보를 설치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이 2018년 12월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 교육실에서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고개 숙여 사과하며 악수를 청하고 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0~80년대 도시 ‘정화’를 이유로 불법적인 내무부 훈령에 따라 사람들을 강제수용하고, 구타와 감금, 학대, 성폭행, 강제 노역, 살인까지 저지른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이다. 피해 생존자들이 복지원에 끌려가 겪은 일과 이 때문에 망가진 삶을 증언하는 동안, 문 총장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가 2019년 11월28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지붕 위에서 지지 방문을 한 이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최씨는 군사정부 시절에 일어난 수많은 국가폭력에 대한 진실을 밝혀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 통과를 요구하며 당시 23일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기력이 떨어진 최씨의 추락을 우려해, 이날 119구조대원이 채워준 안전띠가 그의 허리에 둘러져 있다. 당시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공방으로 민생법안 처리가 멈춰선 ‘20대 국회’ 코앞에서 최씨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대표(오른쪽)와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가 2020년 5월7일 오후 여야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을 20대 국회 임기 안에 처리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기뻐하고 있다. 지난 5일부터 과거사법 개정안의 조속 처리를 요구하며 국회 의원회관 현관 지붕에서 단식농성을 해온 최승우씨는 이날 농성을 풀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7살, 냉동차에 실려 도착한 지옥…“머리 박혀 다리 이층침대까지”

등록 :2022-08-24 14:23수정 :2022-08-24 20:13

류석우 기자

[한겨레21]
35년 걸린 형제복지원 ‘피해자’ 인정
진실화해위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사망자 105명 추가 확인 등 진실규명 결정

2019년 1월2일 인천 자택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이혜율씨가 입소 당시 신상기록카드를 들어 보였다. 김진수 기자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2022년 8월24일 국가 기관으로부터 피해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1987년 신민당이 진상조사단을 꾸려 처음으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지 35년 만입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8월24일 “형제복지원 사건은 불특정 민간인을 부랑인이라 낙인찍고 강제수용한,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며 피해자 191명에 대해 1차 진실규명을 결정했습니다. “국가가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도 권고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강제노역과 폭행, 성폭력 등이 발생하는 동안 국가는 관리 감독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운영기간 중 숨진 수용자도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105명이 많은 657명으로 추가 확인됐습니다.
 
<한겨레21>은 2019년 표지이야기를 통해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예율씨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씨는 7살 때 엄마를 찾으러 나섰다가 경찰에 이끌려 형제복지원에 들어갔습니다. 3년 전 인터뷰 당시에 그는 “바라는 건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피해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4년6개월 동안 형제복지원에서 번호로 불린 이씨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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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0… 저는 번호로 불렸어요

대규모 인권유린 사건인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가 2020년 5월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10m 높이 캐노피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제 이름은 이혜율, 1976년 4월18일생입니다. 어릴 때 꿈이 가수였어요. 할머니 댁에 살았는데 서울 신길동 골목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희나리>를 잘 불렀어요. 이상하게 그 노래가 좋았어요.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는데 남동생하고 저를 예쁘게 입히고 싶어 하셨어요. ‘부르뎅’ 같은 아동복에 챙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어머니는 제가 5살 때 아버지랑 헤어지고 대전에 살았어요.

매타작이에요. 주먹, 몽둥이 막 날아와요.

1983년 10월, 제가 7살, 남동생이 5살 때, 남동생 손을 잡고 둘이 기차를 탔어요. 아버지가 준 용돈 600원이 있었어요. 대전 엄마한테 가려고 했어요. 같이 살던 삼촌과 할머니가 무서웠거든요.기차 안에서 잠이 들었어요.
 
깨보니 부산이에요. 애 둘이 있으니까 파출소로 데려가더라고요. 밤 10시쯤이었어요. 경찰한테 할머니 집주소, 전화번호를 줬어요. 거기 나무의자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또 잠이 들었어요.
 
깨우기에 나가보니 냉동차가 서 있어요. 문이 열렸는데 안이 깜깜하더라고요. 몇 사람이 타고 있었어요. 집에 데려다주나보다 하고 얌전히 있었죠. 우리가 타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한 고등학생을 훅 낚아채 태우더라고요. 그 오빠는 학생복 같은 걸 입고 있었어요. 동생이 무서워서 울었어요.
 
밤 11시쯤, 어마어마한 큰 철문 앞에 섰어요. 철문을 몇 개 더 따고 들어가더니 저희 등을 툭 치며 “들어가 자” 그러더라고요. “왜 여기 데려왔냐”니까 그냥 “잔말 말고 들어가” 그래요. 처음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시간이 지나니 쭉 늘어선 이층침대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날 밤 동생을 껴안고 한 침대에서 잤어요.
 
8310…. 저는 번호로 불렸어요.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어요. 둘쨋날, ‘형제복지원’이라 쓰인 파란 트레이닝복과 검정 고무신을 받았어요. 양말은 없어요. 다들 동상을 달고 살았어요. 동생 머리는 박박 깎고 저는 단발로 잘랐어요. 긴 머리를 자를 때 서러웠어요. “집에 보내달라”고 할 때마다 그냥 때려요. 저는 눈치가 빨랐어요. “언젠가 아버지가 찾아오겠지” 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안 찾아오니 원망이 커졌어요.
 
저는 여자아동소대 23소대로, 남동생은 24소대에 배치됐어요. 기합은 틈만 나면 받았어요. 남자 여자 안 따지고 기본적인 건 다 해요. 기본이 뭐냐고요? 날마다 매타작이에요. 주먹, 몽둥이 막 날아와요. 조장, 중대장, 소대장이 몽둥이를 항상 들고 다녀요. 기분 나쁘면 풀릴 때까지 때려요. 가만히 있어도, 울어도 맞아요.
 
‘원산폭격’(뒷짐 진 채 허리를 굽혀 머리를 땅에 박는 행위)은 기본이에요.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머리 박고 다리를 이층침대까지 올리는 거죠. 피가 쏠려서 나중엔 마비될 거 같아요. 23소대가 제일 높은 지대에 있어 웬만한 건 다 보였어요.
 
죽는 사람 많이 봤어요. 이불로 둘둘 말아 대여섯 명이 몽둥이로 계속 때려요. 발로 툭툭 차서 “얘 죽었구나” 하고 어디론가 가져가요.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건 공포, 공포, 공포였어요. 아무리 맞아도 맞는 거엔 무감각해질 수가 없어요. 언제나 아파요. 어떻게든 안 맞는 게 최우선이었어요. 동생은 별명이 ‘꼴통’이었는데 저보다 더 많이 맞았어요. 볼 때마다 울어 퉁퉁 부은 눈이 새파랬어요.
 
일렬로 서면 번호를 불러요. 시선 각도도 정해졌죠. 눈만 돌아가도 맞아요. 옷을 갤 땐 각이 딱 서야 해요. 그다음엔 기도하고 구보해요. 복지원 안 교회에서 예배를 봐요. 그 안에서도 몽둥이를 들고 다녀요. 밥은 꽁보리밥, 저는 지금도 보리밥은 안 먹어요. 국민교육헌장,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워야 해요. 못 외우면, 또 맞죠.

교과서는 있는데 공책은 없는 학교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합창단에 뽑혔거든요. 흰색 세일러복을 줬어요. 제 보물1호였어요. 외국인이나 높은 사람들이 방문하면 노래를 불렀어요.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계금분교도 다녔어요. 학교가 23소대보다 작았으니 애들을 학교에 다 보내진 않은 거죠.
 
선생님도 형제학원 사람들이었어요. 그 안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잡혀 들어와 있었으니까요. 교과서는 있는데 공책은 없었어요. 뭘 배운 거 같지는 않고요. 파란 트레이닝복이 해지면 그 고무줄로 놀았어요. 쥐, 지네가 장난감이었죠. 이를 많이 잡았던 기억이 나요. 저는 후원자가 많았어요. 어떻게 아냐면, 좀 덜 맞았어요. 그래서 부러워하는 아이들이 있었죠.
 
초코파이도 기억나요. 제 생일에 그 귀한 걸, 제가 잡혀온 날 횡단보도에서 낚인 그 오빠랑 친구 삼총사가 줬어요. 어떻게 구했냐니까 방법이 있다고 그 자리에서 빨리 먹으라고 해요. 삼총사는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자개공장에서 일했는데 제가 그중 한 명을 좋아했어요.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이 생기고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그중 두 오빠는 자살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은, 절대 못 잊어요. 제가 8살 때 어느 날, 저는 영국, 남동생은 프랑스로 입양 가게 됐다는 거예요. 입양 부모 만나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가는 거예요. 합창단 선생님한테 매달렸어요. 동생하고 떨어질 바엔 차라리 죽여달라고. 제가 한번 울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거든요. 합창단 선생님이 천사 같은 분이었어요. 그분이 손을 써줬어요. 고마워서 더 열심히 노래했어요.
 
완전히 갇혀 있었어요. 형제복지원에 잡혀오고 4년6개월 동안 외부로 딱 한 번 나갈 수 있었어요. 열병에 걸려 죽을 뻔했거든요. 병원에 한 번 다녀온 게 다예요. 저를 시작으로 23소대에 열병이 돌아 한 명이 죽었어요. 저 때문인 거 같아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애들이 어떻게 탈출할 엄두를 내겠어요. 한 번, 탈출 시도를 본 적이 있어요. 담에 밧줄을 걸고 올라가려다 다 미끄러져 내려왔어요. 고무신이니까. 다행히 걸리진 않았죠. 경비 할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외출했는데 제가 집 주소랑 약도를 그린 쪽지를 썼어요. 한번 가봐달라고. 그런데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어요.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진 어느 날, 건물 앞에 봉고차들이 쫙 섰어요. 대충대충 짐만 싸라고 해요. 호명해서 타면 출발하고 또 출발하고. 저랑 동생은 부산 남포동 남광아동복지원으로 갔어요. 중3 때까지 거기 있었어요. 일반 학교에 다니는 건 좋았는데 친구가 없었어요.
 
학교에 고아 몇 명이 있는데 밥이며 반찬이며 만날 똑같으니 애들이 알고 말을 안 걸어요. 초등학교 짝꿍이 절 정말 싫어했어요. 걔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요. 동생은 계속 도망갔어요. 저랑 선생님이랑 만날 잡으러 다녔죠. 그때는 왜 자꾸만 도망가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형제복지원 안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수용자들을 동원해 주례동 국유림에 형제복지원 시설을 짓고 있는 공사 현장 모습. 출처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원장은 당연히 사형당한 줄 알았거든요

남광아동복지원에서도 부모님 이름을 말했는데 찾아주지는 않았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절 돌봐줬던 그 천사 오빠가 우리 집을 찾아주겠다고 온 적 있어요. 그 오빠가 서울로 데려갔는데 너무 많이 바뀌어서 길을 찾을 수 없었어요. 오빠가 또 오겠다고 하고선 연락이 끊겼어요. 아직도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나올 때마다 그 오빠 아는지 물어요. 꼭 찾고 싶어요.
 
중학교 3학년 올라간 직후 어느 월요일, 학교 갔다 왔더니 층계 제일 꼭대기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있어요. “너 나 모르겠냐?” 그래요. 모르겠다고 하고 인사만 했어요. 알고 보니 삼촌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가 있어요. 그 얼굴은 절대로 못 잊죠. 동생도 아빠는 기억했어요. 보자마자 대성통곡했어요. 왜 이제야 데리러왔느냐고.
 
집에 돌아와보니, 풍비박산이 나 있어요. 예전엔 꽤 잘살았는데 정말 가난해진 거예요. 게다가 아빠가 엄했어요. 이럴 거면 왜 우릴 데려왔느냐고 원망도 했어요. 동생은 계속 가출했고요. ‘7살 때 내가 동생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얘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마음이 아팠어요.
 
8년 동안 아빠가 우릴 찾아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해요. 신문광고도 했대요. 형제복지원에도 두 번 왔는데 그런 사람 없다고 하는데다 형제복지원 기록에도 제 주민번호가 다르게 적혀 있었어요. 우리 찾는다고 일도 다 작파하고 친구들한테 돈 빌리고, 차까지 다 팔았대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가 울었어요. 처음 봤어요. 아빠가 우는 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랑 식당 갔다 텔레비전에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이 나오는 걸 봤어요. 말소리는 안 들렸는데 소름이 확 끼치면서 무서운 거예요. 당연히 사형당한 줄 알았거든요.
 
졸업하고 집 나와 친구랑 같이 살았어요. 형제복지원은 그냥 잊으려 했어요. 사느라 바빴으니까요. 아빠랑 새어머니가 일 나가면 몇 달 안 들어오기도 해서 제가 중3 때부터 음식을 만들었어요. 꽤 요리를 잘해요. 식당, 록카페 주방에서 일하다 포장마차, 피시(PC)방도 했어요.
 
친구 많고 사교적이었는데도 형제복지원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거짓말쟁이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부랑자 딱지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창피할 게 없어요. 부모도 있는데 납치당한 거잖아요. 그 생각이 들면서 형제복지원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리고 싶어 시나리오를 써보려 했어요. 잊으려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8년 전부터 불면증이 갑자기 생기더니 우울증이 됐어요. 제 행동 하나하나에 형제복지원이 배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전깃불, 바로바로 끄거든요. 스위치를 내리다 생각해요. ‘아, 이것도 형제복지원이구나.’ 거기선 그렇게 안 하면 맞았으니까요. 기억이 확 몰려와요. 제가 형제복지원 나오고 한동안 슈퍼도 혼자 못 갔어요. 무서워서요. 자살 기도도 몇 차례 했어요. 사는 데 미련이 없더라고요.

전깃불 끄다가도 복지원 생각나

제가 바라는 건 진상 규명, 명예회복, 피해배상이에요.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고 국가가 사죄해야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건물이 완공된 다음에 잡혀 들어갔는데 그전에 갇혔던 사람들은 그 건물을 맨손으로 지어야 했대요. 또 형제복지원 말고도 이런 일을 당한 사람이 많았어요. 이런 일이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꼭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지난해 12월27일엔 종일 기분이 너무 처져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분노는 혼자 삭이는 편이거든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또 무산됐다고 하더라고요. 마음 같아선 국회로 쳐들어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어요. 법안만 통과돼도 마음이 좀 가뿐해질 것 같아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형제복지원 사망자 105명 추가…조현병 약 25만정 구입도

등록 :2022-08-24 10:00 수정 :2022-08-24 18:27

장예지 기자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1차 진실규명
35년 만에 국가로부터 피해자 인정
사망자 105명 추가 확인…657명으로
“반항하면 약물 과다 투약해 통제한 듯”
당시 전두환은 박인근 원장 두둔하며
“부랑인 수용 문제, 시설운영자 문제 아냐”

경찰 단속에 걸려 형제복지원으로 끌려온 아이들 모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제공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국가 기관으로부터 ‘피해자’로 공식 인정됐다. 1986년 형제복지원에 대한 검찰 수사를 시작으로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1987년 진상조사단을 꾸려 처음으로 조사를 한 뒤 35년 만이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고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을 견뎌야 했던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경제적 문제에 대한 보상도 이뤄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24일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정근식)는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191명에 대한 1차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5월 조사개시를 결정한 뒤 1년 3개월간 자료 및 진술 조사 등을 진행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회복과 트라우마 치유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가가 의무 안 해…보안사 요원 위장침투도”

이날 진실화해위는 피해자 191명에 대한 1차 진실규명을 결정하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를 “사회통제적 부랑인 정책 및 사회복지 및 치안관계 법령,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산시 부랑인 일시보호 위탁계약 등을 근거로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부랑인으로 칭한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해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사망, 실종 등 중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의 책임’임을 분명히 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운영과정에서 수용인은 감금상태에서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에 이르는 등 인간 존엄성을 침해받았으며 국가는 형제복지원에 대한 관리 감독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진정을 국가가 묵살했고, 그 사실을 인지해도 조처하지 않았으며 1987년 이 사건을 축소·왜곡해 실체적 사실관계에 따른 합당한 법적 처단이 이뤄지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1986년 5월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간첩용의자(납귀어부)에 대한 근원 발굴 보고’ 일부. 보안사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부산지역 부랑자 3000여 명을 강제 격리 수용하고 있는 시설로서 불순분자에 의한 조직적 집단행동 유발시 위해성이 높은 집단”으로 판단하면서도 “교도소보다 더 강한 규율과 통제로 재소자 대부분이 동소에서 탈출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진실화해위 제공
 
정부와 군이 형제복지원을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정황도 이번 조사를 통해 처음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문건을 확보해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납북귀환어부 김아무개(29)씨를 감시하기 위해 보안사 요원을 위장 침투시키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보안사는 이 수사공작을 ‘갈채공작’으로 명명하고 승인했다”며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으로부터 서약서를 받고 지속적으로 관리체계를 구축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자를 ‘신원특이자’로 구분해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하고 감시한 정황이 드러나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의 문건도 발견됐다.
 
2018년 9월3일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예술인 행동’ 집회가 열렸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대규모 인권유린 사건인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가 2020년 5월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10m 높이 캐노피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사망자 105명 추가 확인…일부는 암매장”

새롭게 드러난 피해사실과 인권침해도 있다. 기존에 알려진 사망자 수는 552명이었는데 진실화해위가 처음으로 확보한 사망자 통계와 명단 등을 종합한 결과 사망자 수는 657명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수용자 중 응급 후송 중 사망 등 의문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진단서도 조작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전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에게 정신과 약물을 과다 투약해 의학적으로 통제하고, 높은 사망률 문제도 드러났다. 1986년 형제복지원 회계에서 지출된 ‘정신환자시약비’는 1267만원으로, 일반환자시약비(1015만원)보다 많았고, 1년간 342명이 매일 2번 복용할 수 있는 정신과 약물 클로르프로마진(조현병 환자의 증세 완화제) 25만정을 구입한 내역도 발견됐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이 수용자 중 부적응자나 반항자에게 임의로 약물을 투여해 정신요양원을 ‘근신소대’처럼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의 사망자 수도 1986년 한 해에만 135명으로, 당시 일반국민 사망률(0.318%)보다 13.5배 높았다. 
 
박인근은 형제복지원이 최고의 부랑인 수용 시설임을 보여주기 위해 회고록에 원생들과 각종 시설 사진을 실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 제공

“정부는 피해자·유족에 피해 회복 방안 마련해야”

1987년 2월16일 작성된 ‘1987년 보건사회부 업무보고’ 중 대통령 지시사항.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는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뒤 한 달이 지나 처음 입장을 내 “부랑인수용보호 문제는 시설운영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며 책임자 처벌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진실화해위 제공
 
8월 현재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진실규명을 신청한 이들의 수는 544명으로, 진실화해위는 오는 12월까지 계속해서 접수를 받은 뒤 신청 순서대로 추가 조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형제복지원 사건 35년 만에 첫 국가 진실규명…"중대 인권침해"

송고시간2022-08-24 10:00 

 

김치연 기자기자 페이지

2기 진실화해위, 사망자 105명 추가 확인…국가 사과·피해회복 조치 권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 결정발표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왼쪽)이 24일 중구 위원회 사무실에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8.24 hama@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치연 기자 =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내렸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35년 만에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국가 폭력에 따른 인권침해 사건'으로 인정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24일 오전 위원회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진실규명 결정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 사건은 경찰 등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이들의 허가와 지원, 묵인하에 부랑인으로 지목한 불특정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단속해 형제복지원에 장기간 자의적으로 구금한 상태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 실종 등 총체적인 인권침해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위원회는 ▲ 부랑인 단속 규정의 위헌·위법성 ▲ 형제복지원 수용과정의 위법성 및 운영과정의 심각한 인권침해 ▲ 정부의 형제복지원 사건 인지 및 조직적 축소·은폐 시도 등을 밝혀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진실화해위 조사 1년…조속한 진상규명을"

(서울=연합뉴스) 조다운 기자 = 군사정권 시절 부랑자 수용을 명목으로 감금·강제노역 등을 당했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청와대 앞에서 잇따라 집회와 기자회견을 열고 조속한 진상규명과 실질적인 피해자 배상을 거듭 촉구했다. 사진은 이날 청와대를 찾아 요청서를 전달하는 이동진 피해자협의회 회장(오른쪽). 2022.3.4 allluck@yna.co.kr

단속·수용·운영 모두 인권침해…사망자 105명 추가 확인

조사 결과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랑인 단속부터 수용, 시설 운영 등 전반적인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60년 7월 20일 형제육아원 설립부터 1992년 8월 20일 정신요양원이 폐쇄되기까지 경찰 등 공권력이 부랑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민간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하고, 강제노역과 폭행, 가혹행위, 사망, 실종 등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벌어진 사건이다.

 

형제복지원 입소자는 부산시와 부랑인 수용 보호 위탁계약을 체결한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만8천여 명이었고, 특히 1984년에는 한 해에만 입소자가 4천355명에 달했다.

 

마구잡이식 부랑인 단속과 형제복지원 수용의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법률유보·명확성·과잉금지·적법절차·영장주의 원칙 등을 모두 위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훈령은 부랑인 단속반이 부랑인으로 지목된 사람을 어떤 형사절차도 밟지 않고 수용시설에 보내 강제수용할 수 있도록 한다.

 

진실화해위는 최초로 사망자 통계와 명단 등 14건을 검토한 결과 1975∼1988년 형제복지원 사망자가 기존에 알려진 552명보다 105명이 더 많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위원회는 수용자 응급 후송 중 사망 사례나 사망진단서가 조작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20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소속 피해자 국가 상대 80억원 청구 손해배상 소송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1.5.20 yatoya@yna.co.kr

 

◇ 국가 묵인·외면 속 은폐된 진실

당시 국가가 형제복지원의 실상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외면한 정황도 드러났다.

 

1986년 보안사령부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간첩 용의자를 감시하기 위해 보안사 요원을 수용자로 위장 침투시켜 복지원 실상을 파악했다.

 

보안사령부는 이때 "교도소보다 더 강한 규율과 통제로 재소자 대부분이 탈출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곳"이라고 형제복지원을 평가하면서도 어떤 조처도 하지 않았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지고 검찰 수사가 시작된 후에도 보건사회부는 부랑인 강제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부산시와 경찰, 안기부 등 부산 지역 모든 기관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했다"며 "특히 부산시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진정과 소송을 회유하고 원장과 측근들이 다시 형제복지원 법인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했다.

 

형제복지원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이 24일 중구 위원회 사무실에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8.24 hama@yna.co.kr

 

◇ 국가 공식 사과·피해회복 실질 조치 권고

위원회는 이런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가가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회복 및 트라우마 치유 지원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또 국가가 각종 시설의 수용 및 운영 과정에서 피수용자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 국회는 유엔 강제 실종 방지협약을 조속히 비준 동의하라고 했다.

 

특히 부산시에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조사 및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를 위해 예산·규정·조직을 정비하라고 권고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은 "오랜 시간 기다려온 형제복지원 사건의 인권침해 진실이 드러난 것은 피해자와 유가족, 사회단체 등이 기울인 노력의 결과"라며 "2기 진실화해위 출범의 계기가 된 이번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진실규명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2020년 12월 10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1호 사건으로 접수한 뒤 지난해 5월 조사를 개시했다. 이번 진실규명은 전체 신청자 544명 중 작년 2월까지 접수된 191명을 대상으로 나온 것이다.

chi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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