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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영웅 안중근 누가죄인인가

by 무궁화9719 2023. 1. 9.

안중근 의사 사형 직전까지 붙든 ‘가족 사진첩’ 고국 왔다

등록 :2022-03-22 17:55수정 :2022-03-23 02:34

노형석 기자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와 두 아들 분도, 준생의 빛바랜 사진이 붙어 있는 사진첩. 표지를 비단으로 싼 이 사진첩은 안 의사가 옥중에서 숱하게 꺼내 보며 애장했던 유품으로 전해진다. 지난 2020년 한 일본인 소장가가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사진첩을 기증한 사실이 22일 공개됐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구한말 대한제국 국권을 빼앗은 침략 원흉인 일본 초대총리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1879~1910). 그가 사형 직전까지 옥중에서 꺼내 봤던 젊은 부인과 앳된 두 아들의 빛바랜 사진이 마침내 고국에 돌아왔다.

 

삼성그룹 산하 삼성문화재단은 안중근 순국 112주기(26일)를 앞두고 22일 보도자료를 내어 최근 안중근 의사 숭모회로부터 보존처리를 위해 인계받은 안 의사의 가족 사진첩과 친필 붓글씨 2점의 실물 사진을 공개했다.
 
재단 쪽은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 세 유품의 수복과 보존을 위한 작업 공정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사진첩과 친필 글씨 작품을 포함한 안 의사 유품 48점이 2020년 1월 일본 소장자의 결단으로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기증된 사실도 처음 언론에 알렸다.
 
공개한 유품들 가운데는 가족사진첩이 우선 주목된다. 지난 2009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열렸던 안 의사 친필유묵전 때 일본 야요이박물관 소장품으로 처음 세상에 소개됐던 유품이다. 비단으로 싸인 사진첩 안에 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와 어린 아들 분도, 준생이 찍힌 빛바랜 사진이 붙어 있는데, 첩의 모서리가 크게 닳은 모습이 눈에 띈다.
 
재단 쪽이 낸 설명 자료를 보면, 이 사진은 의거 직후 일본 경찰이 촬영한 것으로 파악된다. 안 의사는 거사를 결행하기 전에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동지 정대호에게 부탁했다. 당시 평안남도 진남포에 살던 부인 김아려는 연락을 받고 두 아들 분도, 준생과 함께 하얼빈으로 갔으나 의거 다음 날 도착해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시 한복 차림으로 하얼빈 시내를 배회한 부인 김아려와 아이들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일본 경찰이 현지 총영사관으로 연행해 조사하면서 가족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첩을 만든 이는 안 의사가 갇혔던 뤼순 감옥의 관리로 추정된다. 사형 판결을 받은 안 의사를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가족사진을 구해 붙인 비단 사진첩을 만들어 건넸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서리의 닳은 흔적은 안 의사가 수없이 꺼내 봤을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재단 쪽 관계자는 “사진첩은 안 의사의 재판 당시 통역을 맡은 소노키 스에요시란 인물이 안 의사로부터 직접 받거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 소노키의 딸이 일본 소장가에게 기증했다가 최근 고국에 돌아오게 됐다”고 전했다.
 
함께 보존처리 될 붓글씨 작품 2점은 사형 집행 직전인 1910년 3월께 쓴 것으로 추정된다.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란 뜻의 ‘천당지복영원지락’(天堂之福永遠之樂)이란 천주교 신앙 관련 글귀가 쓰인 작품은 사진첩과 함께 2020년 일본인 소장자가 기증했다. 최초 소장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높은 뜻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뜻의 <논어> 문구 ‘지사인인살신성인’(志士仁人殺身成仁)이 쓰인 또 다른 글씨 작품은 1910년 공판 과정을 취재한 도요신문 통신원 고마쓰 모토고에게 준 것이다. 고마쓰가 1921년 일본으로 가져갔고, 후손이 2016년 11월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안중근 의사의 친필 글씨 작품. 왼쪽 작품은 ‘천당지복영원지락’, 오른쪽 작품은 ‘지사인인살신성인’이란 글귀가 각각 쓰였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사진첩은 현재 연결 부분이 끊어졌고 모서리 부분이 많이 해진 상태다. 손상 부분을 수리해 최대한 원래 모습으로 복원할 방침이라고 한다. 두 글씨 작품들은 종이와 족자를 꾸미는 장황천을 천연 소재로 바꾸고 수년간 숙성시킨 풀로 다시 배접하기로 했다. 재단 쪽은 “예산과 인력이 달려 보존처리 하지 못하는 독립운동 유산들을 찾아 지원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영웅 안중근 누가죄인인가 뮤지컬영화

 

영웅홈페이지

 

먼저 뮤지컬로 유명해진 영웅은 안중근의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뮤지컬 영웅은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이 동지들과 함께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으로 조국의 독립을

결의하고 조선 침략위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살인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되는 이야기입이다.

누가죄인인가 누가영웅인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중국 뤼순 형무소에서 모습과 사형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보실수 있기에

많은 관심이 가는 영화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영웅 안중근 의사의 뜨거웠던 마지막 1년을 그린 ‘영웅’이

연말 극장가에 N차 관람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웅’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다.

 

‘영웅’이 연말 극장가에 N차 관람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CGV 에그지수 93%, 롯데시네마 9.4점, 메가박스 9점까지 영화를 본 실관람객들의 높은 평점과 더불어 쏟아지는 관객들의 생생한 추천 리뷰들은 N차 관람 열기에 힘을 싣고 있다.

귓가에 맴도는 넘버로 관객들에게 진한 여운을 전하는 ‘영웅’은 흡인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선사하는 윤제균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오리지널 캐스트인 정성화를 비롯한 김고은, 나문희, 조재윤, 배정남, 이현우, 박진주까지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눈부신 시너지로 재관람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객들은 “3번째 보는데도 눈물 흘리며 본 최고의 영화”, “이건 무조건 한 번 더 관람하세요”, “이런 영화를 혼자 볼 수 없어서 가족들과 함께 N차 관람 중”, “모두가 혼신을 다해 만든 게 느껴지는 작품, 열 번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 관람했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작품” 등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N차 관람 열풍을 이끌고 있다.

이처럼 폭발적인 N차 관람 리뷰와 함께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며 올겨울 극장가를 이끌고 있는 ‘영웅’은 식지 않는 열기 속 흥행 돌풍을 이어갈 것이다.

오리지널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한 작품인, 영화 ‘영웅’은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김나영 MK스포츠 기자]

 

 
사진=CJ ENM

빼앗긴 나라를 위해 싸운 그들이 죄인인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안중근은 살인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조선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지키려고 싸운 독립군 중 누가 죄인인가?
 
35년이 흐른 1945년 8월 15일, 독립을 맞이했지만, 안중근의 유해는 찾을 길 없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위대한 영웅의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도 못지키고 있을뿐이다.
유해를 찾지 못하게 처리해버린 일본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아닌가..

포스터에 써진 문장이 힘있게 다가온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대한제국 독립군 대장이다."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이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여운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으며, FN M1900으로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였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다.  
 

시신 못 찾은 안중근, 그래서 소녀상 건립이 중요하다

기억과 기록을 위한 노력이 함께한다면... 김훈 소설 <하얼빈>을 읽고

23.01.07 11:51l최종 업데이트 23.01.07 11:51l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

안중근의 유언이 퍼지며 한인 사회는 흥분했고 일본은 긴장했다.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토)를 죽인 뜻이 명확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태도가 주는 파장을 일본은 심각하게 걱정했고 결국 시신마저 유족에게 내주지 않았다. 그는 감옥 구내 묘지 어딘가에 묻혔으나 2023년이 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고 말한 우덕순의 말과 안중근이 이토를 쏜 이유는 다르지만 같았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라는 세 단어는 다른 많은 말들을 흔들어 깨워서 시대의 악과 맞서는 힘의 대열을 이루었'고, 남루한 단어들이 갖는 연대는 거창한 구호가 없이도 우덕순과 안중근을 눈빛으로 하나 되게 만들었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안중근은 이토를 쏜 이유를 법정에서 진술한다. 정치성이 드러나는 그의 말은 일본이 만들고자 하는 명분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일본은 그의 논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재판 과정에 공을 들였지만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빠르게 정리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또한 안중근의 죽음 이후까지 치밀하게 통제한다. 1910년 국권을 침탈한 일본의 교활한 태도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일본의 교활한 태도는 현재도 진행 중

며칠 전 아침방송에서 평화의 소녀상 관련 이야기가 나왔다. 2022년 11월 25일, 아르헨티나 한인회와 아르헨티나의 5월 할머니회(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희생당한 이들의 유가족들)의 주도로 기억의 박물관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는 소식이었다(2022년 12월 23일, 뉴스공장).

방송에서는 무산된 이유를 일본 대사가 '평화의 소녀상 설치가 일본에 대한 모독, 공격이'라고 하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정적인 것은 기시다 총리가 G20에서 소녀상 건립이 양국 간의 갈등이 될 것이며 만약에 세우면 IMF에 투표권을 행사해서 투자 철회 등의 협박이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기억의 박물관은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을 해 놓은 상태인데, 유네스코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덧붙였다. 

현재 일본의 극우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 자체를 부정하거나 지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접한 우리나라만이 일본의 강제 징용이나 성노예 문제의 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해 당사자인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그 문제에 대해 더는 일본에게 사과도, 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어려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은 흔들림 없이 정책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는 반면, 우리의 대응 방식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고 요동친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깊이 느끼게 한 것 같다. 안중근의 깊은 눈, 서늘한 심장, 냉철한 분노가 지금 이 시대에 더 반갑고 감사했다.

 
  하얼빈, 김훈(지은이)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하얼빈>은 무거운 주제와 역사적인 인물의 개인적 투쟁의 역사가 민족사에 끼친 엄청난 사건을 얘기하면서도 글이 튕겨 나오지 않고 쉽게 읽혔다. 책을 읽으며, 역사는 사람과 기억과 기록의 만남이며, 서로 잘 어우러질 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또한 역사의 증거이며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을 독약을 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부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일파가 흔들리는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

비록 친일 관료들을 앞세워 도장 하나로 빼앗긴 나라였지만, 민초들의 분노,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을 일본은 더욱 두려워했으며, 그러한 저항 운동의 명맥이 이어져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작가의 말처럼 안중근의 생애는 짧고 강렬하다. 영웅임이 틀림없지만 영웅의 모습을 거두고 나면 뜨겁고 혼란스러웠을 청춘이, 아까운 한 사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는 그 인물의 짧은 시간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렇게 해서 '짐승을 쏘기에 아까운' 그의 솜씨로 적의 심장을 관통하고 흔드는 것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전달한다. 

안중근의 여행은 계속 진행 중

일찌감치 민중들에게 그의 행동은 국가를 위한 영웅적 의거이며 독립 투쟁이었으나 종교적인 판단은 달랐다. 재판 당시에 안중근에게 내려졌던 그릇된 종교적 판단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당 방위'로,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했다고 김수환 추기경은 바로잡는다. 짧은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던 안중근의 깊은 신심을 생각한다면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합니다.'(1993.8.21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 중 김수환 추기경 강론, 후기 중)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편이다. 핍박 받고, 정치 경제적 이익 때문에 불의에 눈 감는 정부 대신, 억압당한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록된 역사는 핍박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덕순과 안중근의 행위가 그러했고 이름 없이 희생한 많은 독립지사들의 행동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상 건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의 한국 인민을 죽이고' 능욕한 그들의 범법은 잊히지 말아야 한다. 소녀상 하나가 가지는 기억의 힘, 비석에 새겨진 작은 기록의 힘을 아직은 가늠할 수 없지만,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막으려 하는 일본 정부의 끈질긴 훼방과 그들의 두려움을 생각한다면, 소녀상 건립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으며 청년 안중근의 결단만큼이나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여행은 존재를 위한 여행이었으며 거사를 위한 여행이었고 죽음을 향한 여행이었다. 어떤 여행이었건 그의 여행은 실패도 끝도 아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알리기 위한 우리의 노력, 현재 해외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평화비는 9개국에 35개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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