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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통일부, 7.4남북공동성명 협의과정 회담문서 공개

by 무궁화9719 2023. 7. 11.

통일부, 7.4남북공동성명 협의과정 회담문서 공개

[남북회담문서 ①] 분단 후 첫 판문점 당국간 비밀접촉('71.11~'72.6)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입력 2023.07.07 14:38
  •  수정 2023.07.07 14:55
1972년 5월 3일 김일성 수상(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접견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1971년 11월 20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부당국간 첫 비밀접촉이 진행됐다. 

 

훗날 7.4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지게 된 이 비밀접촉은 전날 열린 남북적십자 제9차 예비회담의 한적 대표단의 일원인 정홍진이 북적 대표중 한 사람인 김덕현을 회의장에서 따로 만나 적십자 예비회담과는 별도로 실무자간 비밀접촉을 제의한 데 따른 것이다.

 

이렇게 남북 정부당국간 첫 비밀접촉은 1971년 11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남측 정홍진과 북측 김덕현이 단독으로 만나 시작됐다. 

 

서로 만날 일이 있을때는 같은 기간 열리던 적십자회담에서 '메모로 연락하는 것이 좋겠다'는 신호를 서로 주고받는 대목이 이채롭다.

 

뒤에 서로 확인하고 공개된 일이지만, 남측 한적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이라던 정홍진은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 본 소속과 직책이었고 북측 김덕현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책임지도원이라는 신분을 위장한 채 처음 대면했다.

 

1971년 11월 20일부터 1972년 7월 1일까지 24차례의 비밀 접촉이 있었다. 남북적십자회담과 별도로 진행된 비밀 실무접촉은 11차례(~'72.3.22). 그 이후 남북 실무담당자인 정홍진('72.3.28~31 평양방문)과 김덕현(4.19~21 서울방문)이 각 한 차례 상호 방문하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선로동당 조직부장의 남북 교환방문에 대한 사전 작업을 마쳤다. 

 

이후락(5.2~5)과 박성철(5.29~6.1)은 각각 한차례씩 비밀리에 평양과 서울을 방문해 고위급 회담을 한 뒤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박성철의 서울방문과 회담이 진행된 1972년 6월 1일까지 양측 실무자와 고위급 상호방문이 이어지고 이후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앞두고 남북의 물밑접촉은 계속됐다.

 

남북대화사료집 제7권 [사진제공-통일부]
 

통일부는 7.4남북공동성명 협의과정 등이 담긴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 제7권과 8권, 총 1,678쪽을 6일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는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비밀접촉('71.11~'72.6) △7.4남북공동성명 발표('72.7)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3차례, '72.10~11) △남북조절위원회 회의(3차례, '72.11~'73.6)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10차례, '73.12~'75.3) 관련 진행과정과 회의록 등이다.

 

이 가운데 280쪽은 비공개 처리되어 있어 공개비율은 약 86%이다. 공공기관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비공개 대상정보) 규정에 따라 회담 전략대책과 회담 실무자 인적사항 등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남북회담 문서공개심의회 심의를 통해 비공개 결정되었다고 통일부는 설명했다.

 

이후락-김일성, 박성철-박정희 면담 기록 등 비공개 자료는 이날 발표 후 3년이 지나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재검토하여 공개 여부를 다시 결정하게 된다. 

 

공개된 남북회담문서 원문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내 '남북회담문서 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고 공개 목록과 공개방법, 열람절차는 남북회담본부 누리집(https://dialogue.unikore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일부는 이에 앞서 지난해 두차례에 걸쳐 남북회담사료집 제2~6권 4,680쪽을 공개한 바 있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당국이 한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낸 1972년 이후락-김영주, 박성철-이후락 회담 경과는 다음과 같다.

 

1972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과 박성철 제2부수상 일행의 접견 모습 [사진촐처-남북대화사료집]
 

이후락 중정부장은1972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 수상(당시)과 두 차례, 김영주 당조직부장과 두 차례 회담을 진행했다.

 

북측도 그해 5월 29일부터 3박4일간 박성철 제2부수상(당시)이 수행원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한 차례 예방하고 이후락 부장과 두 차례 회담을 했다.

 

이때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나온 의제를 실무접촉을 통해 수정을 거듭한 뒤 1972년 6월 30일과 7월 1일 접촉에서 남북공동성명 서명 문건 교환절차를 거쳐 7월 4일 오전 10시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하게 됐다.

 

이후 세 차례의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를 개최해 △남북조절위 구성 및 운영 합의서 서명 교환△대남 대북 방송 중지 △군사분계선상에서의 확성기에 의한 대남대북방송 중지 △상호 전단살포 중지 등에 합의하고 그해 11월 11일 0시를 기해 발효시켰다.
 
남북조절위 3차 공동위원장 회의('72.11.30, 서울)가 끝난 당일과 이튿날 바로 시작한 조절위 제1차 본 회의부터 3차 본회의('73,.6.12~13)까지 양측은 서로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회의를 종료했다.

 

남측은 제도와 이념의 차이로 인한 마찰 및 저항 요인이 적은 비정치 분야를 시작으로 상호 이해와 신뢰 증진을 바탕으로 정치 군사 분야로 옮겨갈 것을 제의했으나, 북측은 공동성명이 나온 이상 서로 신임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선 군사대표자 회담을 열어 남북의 군사대치 해소방안를 합의하고 조절위 내에 정치·군사·경제·문화·외교 등 5개 분과위원회를 동시 일괄 발족시키자고 제의했다.

 

북측은 또 남북조절위와 별도로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1973년 8월 28일 북측은 평양방송을 통해 김영주 부주석(당시)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 △남북공동성명 원칙 존중 △'2개조선' 노선 취소 △통일인사에 대한 탄압 중지 △체포, 투옥된 애국자 석방 등 4개항의 개선없는 대화는 무의미하다며 대화중단을 선언했다.

 

남측은 남북조절위 실무운영기구인 간사단 접촉을 통해 조절위 운영재개를 제의해 1973년 12월 5일부터 1975년 3월 14일까지 10차례 조절위 부위원장 회의를 판문점 자유의집과 판문각을 오가며 번갈아 개최했으나 이견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부위원장회의에서 남측은 조절위 개편과 정상화를 촉구했으나 북측은 간사단 접촉에서 남측의 6.23선언 취소와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부위원장회의에서는 조절위와 병행하여 남북 정당 사회단체 및 각계 인민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구성해 통일관련 일체의 문제를 여기서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등 팽팽이 맞섰다.

 

결국 7.4남북공동성명으로 시작된 남북조절위원회는 3차례 공동위원장회의, 3차례 본회의, 3차례 간사회의, 10차례 부위원장회의, 그리고 3차례의 변측대좌를 끝으로 완전 중단되게 됐다. 북측은 1975년 5월 30일 예정된 11차 부위원장 회의의 무기연기를 서울에 통보했고, 이때 직통전화도 완전 중단됐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7.4남북공동성명 발표 . 1972. 7.4.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1972..3.28 정홍진 남측 실무대표가 김영주 당 조직부장 면담. [사진-남북대화사료집]
 

냉전 완화 '데탕트' 분위기에서 무르익은 남북대화 의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 세계는 냉전 질서의 완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데탕트'의 시대를 구가했다.

 

미국은 소련 견제와 베트남 전쟁 종결을 위해 중국과 관계개선을 원했고 중국도 국경 무력충돌까지 발생한 소련을 견제하고 대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필요했다.

 

1969년 11월부터 미국과 중국은 비밀접촉을 시작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 대표팀이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고 그해 7월 백악관 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으며,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방문해 최초로 미중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국내에도 데탕트를 갈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김대중은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미·소·일·중 4개국 보장론', '향토예비군 완전 폐지' 등을 제시하고 3월 '통일정책 수립을 위한 범국민적 기구 수립, 긴장완화와 남북교류, 통일외교 강화' 드을 골자로 하는 통일정책 관련 선거공약을 발표했다.

 

4월 12일 허담 북한 외무상은 최고인민회의 보고에서 '미군 철수,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예속적 조약 폐기 등 8개항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했으며, 8월 12일과 14일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회담 제의와 수락이 이루어져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당국회담이 진행되기에 이른다.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평화적 국토통일을 강조하고 이듬해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평화통일 대화조건'을 제시했으며, 김일성 수상은 '평화적·자주적 통일의 장애는 미국'(日 아사이신문 기자회견 '71.9.15), '남북 제정당간 쌍무적·다무적 협상 제의'(日 요미우리신문 인터뷰, '72.1.10), '남북 국회의원 자유왕래'(美 뉴욕타임즈 인터뷰, '72.5.26)를 주장하는 등 통일문제에 대한 정치적 타결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가장 높은데서 신임하는 사람들이 비밀접촉 가지면 어떻겠나?"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총재의 남북간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제의에 따라 1971년 9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개최된 예비회담은 회담 벽두부터 북측이 정치적 문제를 들고 나옴으로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은 난항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북대화사료집 7권' 제 1절 실무자 접촉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적  회담운영부장으로 비밀 실무접촉을 진행한 남측 대표정용원 [사진출처-남북회담사료집]
 

1971년 11월 20일 오전 10시 5분부터 12시 20분까지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1차 비밀접촉에서 양측은 전날 있었던 적십자회담에서 쟁점이 된 '가족범위'에 대해 몇마다 나누다 바로 국제정세 문제로 주제를 옮겨간다.

 

북측 김덕현이 "정선생은 국제문제전문가로 알고 있는데..."라고 운을 떼자 정홍원은 "닉슨의 중공방문이 언제될 것인가를 점쳐보는 정도지요"라고 대꾸한다.

 

대만문제를 꺼내든 '중공'과 '미국', '소련' 모두 마찬가지라며 주제를 옮기더니 '강대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소국을 희생시킨다'며 양측은 금세 동의한다.

 

김덕현이 "그런데 요즘 세계를 협상의 시대라고 하든가요"라고 하자 "하기야 주먹으로 하려는 것 보다 말로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이어 김덕현은 "서울 남대문에 자주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는데요"라며, "우리도 자주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위에서 신임하는 사람, 말하자면 가장 높은데서 신임하는 사람들이 비밀접촉을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적십자회담은 회담대로 진행하고 별도로 말씀이야"라고 본론을 제기했다.  

 

정홍진은 "그러한 사람간의 비밀접촉은 연구해 볼만한 일입니다"라며 동의를 표하고는 "우리 둘이니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겠는데, 간첩을 보낸다거나 KAL기의 납북, 수많은 어부의 납북 등 이러한 성격의 상황을 개선해 나간다면 그러한 상황변화 자체가 그러한 접촉의 기반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슬쩍 비틀지만 김덕현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려면 나도 할말이 많지만..., 신임하는 사람간의 접촉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이라며 '고위급 정치회담'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정선생과 만날 날이 있으면 (남북적십자)회담시 '메모'로 연락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제의하고 정홍진은 "그렇게 합시다"라고 동의한다.

 

2차 비밀접촉('71.12.10)에서 정홍진이 '어떤 급의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묻자 "노동당과 민주공화당의 당고위급으로 하면 좋겠다"고, 장소에 대한 의향을 묻는 질문에는 "국내든 제3국이든 어디든지 좋다. 외국이 또 미국이 모르게 우리 민족끼리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다"고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정홍진이 "정치회담을 검토하려면 좀 더 귀측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인데...., 예컨대 오늘날의 남북대결 상황을 어떤 형태로 변화시켜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든지, 말하자면 어떤 상황으로 변화케 하려는 의도인지, 이런 것을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없겠나"라고 묻자 김덕현은 "그러한 문제는 내 개인의견으로 말할 수는 없고 돌아가 윗사람에게 물어, 다음 만날때 답해 주겠다"라고 대답했다.

 

정홍진이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키신저의 두 차례 방중과 닉슨의 내년(1972년) 방중을 거론하며 미중 수교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구체적 상황변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북측 의도를 거듭 확인하려 들지만 김덕현은 "만나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면 해결못할 것이 무엇이겠나"라고 언급을 삼가했다. 

 

중앙정부보 협의조정국장 정홍진과 조선로동당 책임지도원 김덕현

 

북측 비밀실무접촉 대표 김덕현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3차 비밀접촉('71.12.17)에서 김덕현은 '자유왕래' 등 적십자회담의 쟁점사안을 해결하려는 정홍진에게 "서로 신분부터 정확히 밝히고 이야기하도록 하자"고 하면서 "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담당 책임지도원이다. 당신 이야기를 책임있게 고위층에 전달할 수 있고 또 책임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신분을 밝힌다.

 

이에 정홍진은 "나의 현직은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이고 전직은 대통령 직속기관의 국장"이라고 답한다. 김덕현이 "CIA를 말하는 것인가"고 되묻자 정홍진은 "그렇다. 당신 이야기를 책임있게 보고할 수 있고 책임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응대한다.

 

이 자리에서 김은 수첩을 꺼내들어 "우리(북)을 끌고 비상사태 선언을 내었는데 우리를 위협하자는 것인지, 다른데 목적이 있는 것인지. 비상사태 선언과 평화통일 구상은 양립될 수 없지 않나"라며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국가비상사태에 대해 따져 물었다.

 

정홍진은 "당신이 한 이야기는 나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못된다"며, "비상사태선언은 당신들을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고 당신들의 남침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대통령의 8.15선언을 깊이 음미하라. 북이 도발을 그만 둔다면 UN에 있어서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고 응수한다.

 

본격적인 정치회담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장면이다.

 

2차 비밀접촉 나흘전 박 대통령은 중국의 유엔가입을 비롯한 국제정세 변화와 그 틈을 탄 북한의 남침위협 등을 이유로 국가안보를 최우선시하고 사회불안을 용납치 않겠다는 등 6개항의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1972년 1월 29일 4차 비밀접촉으로 넘어갔고 북측은 상호 신분에 대한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며 '고위층 신임장' 문제를 다시 꺼내들었다.

 

정홍진이 "서로의 직위를 확인하는 물적증거(문서)가 필요없다는 나의 의견을 명백히 밝혀둔다"며 북측 태도를 분명히 밝히라고 하자 김은 "물적증거가 없으면 중요한 이야기는 할 것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5차 비밀접촉('72.3.7)에서 양측은 상호 신임장을 교환, 확인한 뒤 서로 돌려주었다.

 

남측은 이때 향후 상호 대화를 전달하고 회답을 들려줄 책임자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측 김영주 당조직부장을 확정하자는 제안과 함께 당 조직부장을 수신인으로 하는 중앙정보부장의 신임장을 휴대한 1명과 수행원 1명이 비밀리에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고 북측에서 중앙정보부장 귀하로 된 김영주의 신임장을 가진 사람의 방남도 받아들이겠다는 제의를 한다.

 

이때 김영주 명의의 신변보장 각서를 요구하면서 방북시 전달받아 귀환할 때 각서는 돌려주겠으며, 북측의 방남시에도 동일한 절차를 밟겠다고 한다.

 

방북과 방남의 목적은 특정하지 말고 의사소통과 상호 생각을 교환하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히 정치적 문제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덕현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니 정확히 위에 전달하여 다음 면담시 확답하겠다"며 다음 접촉을 3월 10일 판문점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그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축배라도 나누자며 인삼주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고 대화록은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6차 비밀접촉('72.3.6)에서 김덕현은 앞선 남측 제의를 모두 환영한다며 동의를 표시하고, 방북 대표의 명단과 일시, 북측 각서는 언제 받겠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물어왔다. 김영주 당조직부장에게 보고한 뒤 받은 대답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 

 

접촉은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을 벗어나 건너편 북측 지역인 판문각에서 이뤄졌다. 이때부터는 판문각과 남측 '자유의집'을 번갈아 가며 접촉장소로 이용했다.

 

판문점 남측 지역 '자유의집'에서 진행된 7차 비밀접촉('72.3.14)에서 남측은 중앙정보부장 신임장 휴대자는 장기영(전 부총리, 당시 한국일보사장), 수행원은 OOO(한국일보 주일특파원)이라 통보하고, 그들의 방북절차와 경로 등을 세세히 합의했다.

 

장기영의 체류일정은 북측에 일임하겠지만 체류기간은 10일 이내가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수시로 김덕현과 정홍진이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자고 했다.

 

장기영의 방북은 특정한 목적을 갖는 것은 아니며 전달할 서한도 없다고 하면서, 단지 상호 대화를 교류하고 의사소통을 하자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는 이후 장기영의 방북이 철회되고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을 정홍진-김덕현 선에서 계속 진행하기로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김덕현은 이에 대한 회답을 3월 16일 10시 판문점에서 만나 전하겠다고 하면서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이 판문점에 와서 직접 영접하겠다고 말했다.

 

또 4월 25일 이전이라도 초청할 수 있다며, 방문 시기를 당겨달라는 의사를 밝혔으나 정홍진은 북측이 김일성 주석의 회갑인 4.15 행사로 분주할 것이고 장기영 사장의 건강때문에 날씨가 따뜻한 4월 하순이 좋겠다며 여러 사정을 고려해 이후락 부장이 결정한 사안이니만큼 방문일자는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장홍진과 김덕현은 이날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구체적인 이야기는 본인들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지만 종국적인 남북한문제는 이후락과 김영주가 직접 만나 협의하는 고위급회담을 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데 전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또 자신들도 상호 허가를 바탕으로 자유로이 오가면서 일이 잘되도록 협의를 잘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분단이후 첫 남북고위급회담 합의..이후락 중정부장-김영주 당 조직부장 

 

8차 비밀접촉('72.3.16)은 판문점 판문각에서 이뤄졌다. 북측은 장기영 대표와 정태연(鄭泰演) 수행원을 남측이 희망하는 경로와 방법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신임장의 직명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서로 '부장선생'으로 하자는 정도의 조정안만 전달했다.

 

김영주는 "적십자회담을 촉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상봉(김덕현-정홍진)이 보다 더 중요하다"며 "제일 좋기는 의사소통을 먼저하고 나라의 평화통일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남북적십자회담과 고위급 회담 병행 추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남측이 제의한 4월 25일 방북도 좋지만 김일성 수상(당시)의 회갑(4.15)은 소박하게 쇨 것이며 별도 행사도 없으니 4월 1일부터 11일 사이에 와야 김영주 부장도 만나고 다른 간부들도 만날 수 있다고 하면서 방북 일정을 조정해달라는 요청도 했다.

 

7차 비밀접촉에서 나왔던 이후락-김영주 회담에 대해서는 "만약 이후락 부장선생이 박대통령의 신임이 가장 두텁다면 그와 만날 용의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문제를 직통으로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환영 입장을 밝혔다. 

 

장소 문제와 관련해 김영주는 "국내에도 복잡하지 않는 적당한 장소가 얼마든지 있는데 무엇때문에 제3국에 가서 만나겠느냐"며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에 대한 비밀유지의 어려움을 이유로 제3국을 주장한 장홍진은 "두 사람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진전되면 장소문제야 상호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김덕현·정홍진의 상호 방북도 이날 구체적으로 거론되어 사실상 고위급 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 체계로 자리매김되어 갔다.

 

김일성-이후락, 박정희-북측 고위급 면담 언질

 

9차 비밀접촉('72.3.17)에서 남측은 다시 이후락-김영주 회담 주선을 위한 정홍진과 김덕현의 상호방문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이날 접촉에서 이후락 부장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방법은 결국 김영주 선생과 이후락 부장이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김영주와의 직접 회담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3자를 개입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현재 진행중에 있는 김영주 선생의 신임자 김덕현 선생과 나의 신임자 정홍진 동지가 상호 방문함으로써 그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또 촉진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뜻에서 장기영씨를 보내겠다는 먼저번 제의를 철회하고 앞에 말씀드린 김덕현 선생과 정홍진 동지들의 상호 신임에 의한 방문을 새로이 제안코저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김덕현은 전적으로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일단 제기된 문제이니 장기영의 방문도 고려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에 대해 정홍진은 장기영의 방문은 특정 목적없이 의사소통을 위해 제기된 것이니 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한 실질적 방도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흘 후 열린 10차 비밀접촉('72.3.20)에서 북측은, 남측이 수정 제의한 '장기영 초청 철회', '현재 접촉중인 두 대표 상호방문으로 대체'에 다른 의견이 없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영주는 "나와 이후락 부장선생이 서로 직접 만나는 것을 원칙적으로 합의한 조건에서 연락대표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중간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다"며, "지금은 최고위급의 의사를 대변하여 국가대사를 논의할 수 있고 격폐된 감정을 툭 털어놓고 풀 수 있는 고위급 대표들이 직접 만날 때라고 믿는다"는 의사를 남측에 전달했다.

 

장기영의 방북이 취소되고 그동안 비밀 실무접촉을 해 온 정홍진과 김덕현이 남북고위급 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김영주는 "이후락 부장선생이 오신다면 우리는 물론 거대한 민족적 위업을 수행하는데 상응하게 부장선생을 귀빈으로 맞이할 것이며 신변안전과 모든 편의를 전적으로 보장할 것"이라며 "최고위급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언질도 했다.

 

김일성 수상이 이후락 부장을 직접 면담하겠다는 것도 이때 처음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김영주는 만약 이후락이 북을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제3국에서 만날 수도 있고, 혹시 자리를 뜨기 어렵다면 최고위급이 신임하고 그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다른 고위급 대표를 보내도 환영할 것이라며, 회담 성사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열린 11차 비밀접촉('72.3.22)에서 양측은 정홍진의 평양방문일정은 3월 28일, 체류기간은 3일 전후로 정하고 28일 오전 11시 판문점에서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북측은 이후락-김영주의 고위급회담은 제3국보다 '국내'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운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를 토의할 것인만큼 최고위급을 만남으로서만 모든 문제가 성과적으로 풀릴 수 있을 것"이며, "국내에서 해야 하루 빨리 열릴 수 있고 또 비밀을 보장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회담조건도 좋게 해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소는 평양이나 원산을, 방북 경로는 판문점 경유, 제3국 경유, 바다를 거쳐 들어가는 경로가 언급되었다.

 

남측은 김덕현을 서울로 초청했고 일정은 정홍진의 방북시 별도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정홍진은 김덕현에게 서울 방문시 이후락과의 면담에 대해 언질을 주고는 "내가 평양에 갈 때는 김영주 조직부장의 여러가지 솔직한 의견과 남북문제의 평화적 해결방법에 관한 의견을 여러가지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72년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이루어진 정홍진의 평양방문부터 7.4남북공동성명 발표까지 '남북회담문서 ②' 기사 계속됩니다. 

지난 1972년 12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북측 김영주 공동위원장을 대리하여 회담에 참가한 북측 박성철 제2부수상의 예방을 받고 있다. 3차례의 공동위원장 회의를 거쳐 남북조절위원회 제1차 본회담을 개최했다. 각각 3회의 본회담 및 간사회의, 10회의 부위원장회의가 진행돼 간사회의 구성, 공동사무국 설치, 조절위원회 운영세칙 등을 논의했으나 1975년 5월 29일 북측은 남측의 외세의존, 전쟁정책, 반공·멸공정책 등을 이유로 회의 참가를 거부해 무산되고 말았다. (사진=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디지털사진전)
출처 : 뉴스프리존(http://www.newsfreezone.co.kr)

박정희, 정상회담 압박하는 北밀사에 "여건 조성 시기에"

하채림입력 2023. 7. 9. 05:01

北, 이후락 평양 방문 이어 박성철 서울 방문 때도 '先정상회담' 주장
강인덕 前장관 "朴대통령, 냉면 먹고 올 수 있지만 의미없다며 거부"

박정희 전 대통령 예방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 (서울=연합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5월 31일 청와대에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 일행을 접견하고 있다. 2023.7.6 [통일부 제공. 재발행 및 재판매 금지]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극비로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도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박 대통령 여건 조성이 먼저라며 거부한 것으로 남북회담 사료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성철 부수상 면담의 내용이 사료를 통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통일부가 지난 6일 공개한 '남북회담 사료집'에 따르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에서 북측 공동위원장 박성철 제2부수상을 만나 "김일성 수상께서, 박 대통령이나 제가 평화적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만날 용의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이러한 문제는 분명히 박성철 부수상께서 박 대통령을 만나셨을 때 박 대통령께서도 같은 뜻의 말씀을 하신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며 "박 대통령께서는 다만 여건 조성 시기가 언제 오느냐, 이러한 여건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이냐고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박 부수상이 "김일성 동지께서는 몸소 이 부장선생을 접견하시는 자리에서 귀측이 민족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사상과 정견의 차이를 초월하여 박 대통령이나 이 부장선생과 합작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는 것을 뚜렷이 밝히셨다"며 정상회담을 거듭 제의한 데 대한 이 부장의 답변이었다.
 
북한은 공동위원장회의에 앞서 1972년 5월 초 이후락 부장의 극비 평양방문 때에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총비동지(김일성)와 박 대통령 간에 정치협상을 열어야 한다'며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이 부장은 당시에도 "처음부터 김 수상과 박대통령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며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공동위원장회의에서 이후락·박성철이 주고받은 대화는 북한이 이후락·김영주 회담뿐만 아니라 이후락·김일성 면담과 이어 박정희·박성철 면담에서 정상회담을 끈질기게 압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일성이 이후락과 면담에서 1·21 사태에 관해 사과성 해명을 하고 6·25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내용은 여러 경로로 알려져 있었지만 정상회담 제의를 했다는 것은 남북회담 사료집 공개를 통해 남북 고위급 인사의 발언으로 처음 확인됐다.
 
특히 그간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박정희·박성철 면담(1972년 5월 31일)에서도 북한이 정상회담을 집요하게 요구한 사실도 이후락 부장의 언급에서 확인된 것이다.

 

1972년 5월 극비 평양 방문서 김일성(오른쪽)과 악수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당시 중정 제9국장(북한국장)으로서 이후락 부장을 보좌하며 남북 접촉 실무 전반을 이끈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91)은 박정희 대통령의 정상회담 거부 언급 전후 맥락을 자세히 묘사했다.
 
강 전 장관은 지난 7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박 대통령을 예방한 박성철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서 '노동당의 기본원칙입니다'라면서 읽어 내려갔는데, 통일문제는 김일성 수령이 추진하고 나섰으니 박 대통령께서 좋다고만 하시면 저절로 해결이 된다면서 정상회담부터 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강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지금 당장이라도 오늘 업무 후 평양까지 가서 아이들하고 같이 냉면 한 그릇 먹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인데 왜 내가 가고 오고 못 하겠느냐,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지 않으냐며 분명하게 반대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시험 칠 때 쉬운 문제부터 풀지 않느냐, 그러니 쉬운 문제부터 풀자고 하시면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먼저 해결하자고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김일성과 정치회담을 해서는 달라질 것이 없다며 명확하게 거부했다는 것이 강 전 장관의 전언이다.
 
7·4 남북공동성명 당시 중정 제9국장(북한국장)이었던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2023.4.18 tree@yna.co.kr
 
강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이 박성철과 면담한 후 우리(중정)한테 한 지시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듯이 하라'는 것이었다"며 "실은 박 대통령은 남북 당국 접촉 초기부터 정치회담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 해야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1972년 5월 극비리에 진행된 이후락·김일성 면담과 박정희·박성철 면담은 그 해 7월 통일 3원칙을 정립한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각각 박성철과 이후락을 면담한 남북회담 사료는 이번에 공개되지 않았으며 3년 후 다시 공개 심사 대상이 된다.
 
9일 통일부에 따르면 이후락 부장은 김일성과 세 차례 면담하고 한 차례 오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성철과 한 차례 면담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들 면담은 간접적이긴 해도 정상 간 대화라고 볼 수 있어 이번 남북회담 사료 공개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tr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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