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1운동 103주년, 미일이 야합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되새길 때

무궁화9719 2022. 9. 17. 23:55

3.1운동 103주년, 미일이 야합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되새길 때

  • 기자명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  입력 2022.03.01 17:19
  •  수정 2022.03.02 13:26

[기고] 미국, 3.1운동 철저히 외면 일제 편들고 종전이후 친일 청산 저지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비밀리에 도쿄에 만나 만든 것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각각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밀약이 맺어진 수개월 후인 1905년 8월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에 이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의 묵인 아래에 조선반도 식민침략을 본격화했다.

 

▲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일제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특히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경제적 폭압을 일삼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후 레닌이 발표한 '민족 자결 원칙', 만주 지린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 독립 선언서(무오독립 선언)에 이어 1919년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인 3·1 만세 운동 또는 3·1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 국무성은 3·1 운동이 발생하자 그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서울주재 미 영사에게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할 것과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나무위키

 

약 3개월가량 전국적으로 발생한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이가 이 과정에서 순국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운 강경탄압정책에서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꿔, 조선어로 된 일간신문 발생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 윌슨 등 미국 정부 종전까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청산 지속적으로 외면

 

미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측면도 있었지만 이를 주장한 윌슨 대통령은 당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포함한 서구 열강 등의 세계 지배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이 전승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윌슨은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아예 삭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국내에서는 그 속셈을 모르고 큰 기대를 했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 객관적인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

 

3·1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면서 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 정부는 1920년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표한 적이 없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조선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7 February 1942, FRUS, 1942, I, General,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859-60;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1 May 1942, Ibid., 873-75.>.

 

그러다가 미국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 조선을 적절한 조치를 통해 독립하도록 할 것을 선언했고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이에 동의했다<FRU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448-49>. 당시 열강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들이 조선에 대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에 합의했을 뿐 구체적인 독립 추진 계획 등은 전혀 협의하지 않았다. 이들 연합국 지도자들은 서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이익을 나눠 갖기를 희망하면서 서로 견제하는 태도만을 취했다.

 

일본이 미국의 핵 공격을 받고 항복했는데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의 하나로 분류해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보면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사실의 연장선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 아래와 같이 기록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다. 그 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조선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총독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Treaty of Annexation". USC-UCLA Joint East Asian Studies Cente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February 2007. Retrieved 19 February 2007>.

 

미국은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체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일제 미청산, 미 정부의 동북아 정책 강행 결과

 

미국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을 접수해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미국의 이런 조치는 미국 정부가 2차 대전이후 동북아에서 일본을 소련세력을 견제할 교두보로 삼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취한 일본인의 환심을 사려는 점령정책과 거의 동일했다.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해석한 결과였는데 이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비롯된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 이승만 전 대통령.

 

1948년 이승만 정권 등장까지 지속된 미군정의 이런 조치는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국내에서는 일제 미청산의 이유를 이승만과 친일파에 주목해 제시할 뿐 미국 정부가 맥아더 사령관을 시켜 실시한 동북아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거의 언급치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은 일제가 항복한 이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을 슈퍼 갑으로 공인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1953년 이후 남한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 수준이 되면서 미 군정기에 발생한 제주 4.3,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민간인 학살, 광주항쟁 등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나 언론이 이에 대해 침묵하는 관행이  3·1 운동 103주년을 맞아 여전한 것은 서글프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씨줄날줄] 가쓰라·태프트 밀약/문소영 논설위원

입력 :2021-11-14 19:58ㅣ 수정 : 2021-11-15 01:35 

 

 
초대 필리핀 총독을 지낸 윌리엄 태프트 미국 전쟁부 장관은 1905년 7월 말 일본과 필리핀 등의 순방에 나섰다. 일본은 1904년 발발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종전을 앞두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예상과 달리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미국과 영국 등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태프트 장관은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를 대동했다. 나중에 앨리스만 서울을 방문했을 때 고종은 미국 대통령인 양 극진히 환대했지만, 외교적 성과는 없었다.

미국은 세계 4위 전력의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킨 일본이 자신의 식민지인 필리핀 군도에 대해 관심을 가질까 우려했고, 영국은 1902년에 맺은 제1차 영일동맹을 갱신해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제1차 영일동맹은 양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영국은 중국에 대한 이해를,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를 서로 용인했다.

태프트 장관은 그해 7월 27일 도쿄에서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를 예방한 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하는 내용의 의견을 나눴다. 며칠 뒤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태프트와 가쓰라 대화를 확인했다’는 답을 받아 8월 7일 가쓰라 총리에게 전달됐다. ‘가쓰라ㆍ태프트 밀약’의 전말이다.
 
이 밀약은 1924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닛이 이 메모를 발견,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미일의 외교적 흥정’이라고 했다. 1950년대 말부터 두 국가의 공식적인 협약이나 협정이 아닌 만큼 국제법상의 구속력이 없다면서 각서, 기록, 합의된 비망록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문제는 이 ‘밀약’으로 일본은 국제적으로 조선 지배를 인정받았다고 판단하고, 그해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해 식민지 지배의 포석을 깔았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의 밀사’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고 애쓰던 이승만은 가쓰라ㆍ태프트 밀약이 폭로되자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겼다고 판단했고, 이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의심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1954년 7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했지만, 공동성명을 내지 않았다. 그 이유에 밀약도 영향을 미쳤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방한한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지난 12일 만나 “미국이 승인해 일본이 한국을 합병했다”고 말했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누구는 100년 전 일이라도 해야 할 말이 아니냐고 하고, 누구는 외교적 관점에서 부적절했다고 한다.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인식을 챙겨야 할 때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정의길 칼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욕먹는 이유

등록 :2021-11-15 16:41수정 :2021-11-16 02:04

정의길 기자

 
국익을 숭고한 가치로만 포장할 경우, 분쟁의 위험성이 커지고 타협 불가능으로 치달아 재앙이 된다. 16일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첫 화상 회담에서 대만 문제 등을 놓고 서로에게 금지선은 무엇인지라도 확인한다면 큰 수확이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접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의길ㅣ선임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방한한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만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에 일조했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일부 평자들은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우리가 무능하고 현실을 몰랐기 때문인데, 미국 책임으로 돌렸다고 이 후보를 비판한다. 원론적으로 당연한 얘기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조폭에게 두들겨 맞았는데 힘이 약한 당사자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한국에서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조약이라고 역사 교육에서 가르쳐 왔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웠다.
 
1905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전쟁부 장관과 가쓰라 다오 일본 총리의 ‘밀약’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미국이 용인했다기보다는, 필리핀이 미국의 영향권임을 일본이 확인한 데 방점을 둬야 한다. 당시는 러-일 전쟁의 승패가 이미 결정돼, 한반도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간 게 객관적 현실이었다. 미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필리핀까지 영향권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은 것이 이 밀약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양국 고위 인사의 비공식 양해 사항일 뿐이다.
 
한반도 식민 지배의 책임을 일본 외에서 굳이 찾는다면 당시 패권국가였던 영국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던 영국은 극동에서 군사력 전개가 힘에 부치자 ‘영예로운 고립’ 외교정책까지 포기하며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러-일 전쟁에서 영국은 일본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하는 배후였다. 조선이 1910년에 뒤늦게 신흥국 일본에 의해 식민화된 것도 영국과 관련이 있다. 당시 영국은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권에 있다고 봤고, 조선의 시장 가치를 높이 보지 않았다. 현상 유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봤는데,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이 활발해지자 일본을 가지고 봉쇄한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규정하는 주요 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 중요시하고 미국에 책임을 묻는 것은 미국에 대한 우리의 기대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모호한 미국의 외교정책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 열강의 전통적인 ‘세력 균형 현실주의’를 폄하해 왔다. 자신들의 아메리카 대륙 지배를 ‘문명화를 위한 예정된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대외정책에서도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반대하고, 자유·인권·독립의 이상주의 노선을 천명했다. 본토에 많은 자원과 팽창하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유럽 열강의 나눠먹기를 견제하는 문호개방정책이나, 1차 세계대전 뒤 민족자결주의 등이 대표적인 이상주의 외교 노선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이 패권국가로 등극하고, 이를 위협하는 소련 등이 등장했다.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주의 노선은 국가 간 힘의 우위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고 국익 우선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와 갈등을 보였다. 문제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착종이다. 자신의 국익을 숭고한 가치로만 포장할 경우 분쟁의 위험성이 커지고 타협 불가능으로 치달아 재앙이 된다. 베트남전, 이라크전쟁, 아프간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최근 미-중 대결 역시 그런 양상이다. 강대국 사이의 대결은 불가피하다는 공격적 현실주의 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최근 <포린 어페어스>에 ‘불가피한 경쟁’이라는 기고에서 과거 미국 행정부들이 관여 정책으로 중국의 부상을 허용해 놓고는 여전히 추상적인 가치를 명분으로 중국을 봉쇄하려 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상대방의 금지선을 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서로가 이해하는 것이 전쟁 가능성을 줄일 것”이라며 대외정책에서 위선을 벗어던지라고 주장했다.
 
싱크탱크 ‘뉴 아메리카’의 대표 앤마리 슬로터도 <뉴욕 타임스> 기고 ‘바이든 독트린에 대해 솔직해질 시간’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현실주의자, 자유주의 국제주의자, 인권운동가 등 모두의 기호를 만족시키려다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제 미국의 대외정책은 20세기의 ‘국가 중심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환경과 불평등 등 ‘사람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진화해야 한다며, 이를 바탕으로 한 미-중 간의 협력을 촉구했다.
 
미어샤이머는 현실주의에 바탕한 대결을, 슬로터는 이상주의에 바탕한 협력을 촉구한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솔직하게 설정하고 이상주의적 가치로 포장해 호도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점은 있다. 16일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화상으로나마 처음으로 회담을 한다. 대만 문제 등에서 서로에게 금지선은 무엇인지라도 확인한다면 큰 수확이겠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Katsura–Taft agreement , <일> 桂・タフト協定
 

요약 1905년 6월 러일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태프트는 일본에서 가쓰라와 회담하여,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교환조건으로 승인하였다. 협약 내용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 비밀협정은 20세기 초 미국의 동아시아대륙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은 같은 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 9월에 포츠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국제적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늑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이 협정의 내용은 1924년까지 양국이 극비에 붙였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George Grantham Bain/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1905년 6월 러일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태프트는 필리핀 방문 전에 일본에 들러 가쓰라와 회담하여, 미국의 대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조건으로 승인하였다.

 

협약 내용은 첫째,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대하여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으며, 둘째, 극동의 평화유지는 일본·미국·영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 동시에 유일한 수단이며, 셋째,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밀협정은 20세기초 미국의 동아시아대륙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으로,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 간에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에 앞서 이미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밝히고 있었다. 즉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있게 통치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피력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 비밀협정에 의해서 미국의 한국문제 개입의 가능성을 배제시킨 일본은 같은 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 9월에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국제적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이 협정의 내용은 1924년까지 양국이 극비에 붙였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쓰라 다로

ⓒ Shika ryouse shomei/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