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6.10.인혁당사건.4.19(민주화운동)등 등...
12·3 내란 때처럼…광주에도 ‘정의로운 항명’ 있었다
무궁화9719
2025. 5. 16. 08:54
12·3 내란 때처럼…광주에도 ‘정의로운 항명’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45주기
(상) 임무수행 소극적이었던 군경들
정대하기자
- 수정 2025-05-16 07:18
- 등록 2025-05-1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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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 다 죽이겠다. 약간의 희생자가 생기더라도 사격을 좀 해 물리치자.”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에 있었던 11공수특전여단 최아무개 소령은 군에 제출한 ‘5·18 회고’라는 글에서 당시 대대장 회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회의에서 한 장교가 사격을 제안했다. 금남로 집단발포 전 군인들과 시민들이 대치했을 때였다.


당시 62대대장 고 이제원 중령만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며 벌컥 화를 내며 지휘봉을 내동댕이쳤다. 이 모습을 지켜본 최아무개 소령은 “우린 좁은 소견에 ‘참 답답한 대대장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고 썼다. 그렇게 이 중령이 반대했지만, 조준사격 등 집단발포로 비무장 시민 41명이 총격 등으로 사망했다. 이 중령은 1995년 서울지검의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 조사에서 “광주사태의 책임은 나를 비롯해 그 당시 광주사태 진압에 참여했던 모든 군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 중령처럼 5·18 당시 전두환 반란세력에 저항하며 민간인 희생을 걱정했던 군인들의 행적이 주목받고 있다.
5·18 때 군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한 이구호(1933~1999) 장군은 시민 무력 진압에 반대한 군인이다. 그는 1980년 5월21일 오후 4시께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이 “나 참모차장인데, 폭도들을 진압하고 도청을 점령하는 데 전차를 동원해야겠다.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시오”라고 지시하자 거부했다. 그는 “만약 (전차) 동원을 요청하려면 정식 지휘계통을 통해 명령해달라”고 되받았다. 계엄부사령관인 황 차장이 “이 자식, 전차포를 쏘면서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야”라고 소리치자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당시 “광주시민이 적군이 아닌데 어떻게 시민을 향해 발포하란 말이냐”며 끝까지 잘못된 명령을 거부했다. 평소 무궁화를 좋아했던 이 교장은 군 전역 후 동생과 ‘무궁화 주유소’를 운영하다가 세상을 떴다.


김기석(1931~2010)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소장)도 신군부의 무자비한 진압에 반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김 부사령관은 “당시 광주사태에 대한 실질적 지시는 계엄사령관보다 황영시가 더 관심 있게 지휘를 했었다”며 “심지어는 ‘무장헬기·전차 뒀다 어디다 쓰느냐’는 얘기까지 했다”고 생전 증언한 바 있다. 그는 5월24일 전두환 최측근인 최예섭(1929~2019) 보안사 기획조정실장(준장)과 시민수습대책 방안을 두고 이견을 빚다가 총을 들이대며 충돌하기도 했다. 김 부사령관이 5월23일 11시40분에 적은 친필 메모엔 ‘시민을 폭도로 몰지 말고 귀가토록 조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던 안병하(1928~1988) 치안감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전두환 반란세력의 명령을 거부했던 인물이다.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하고 중령으로 전역한 뒤 총경으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한 안 치안감은 1980년 5월25일 “시민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신군부의 강제 진압 명령을 거부해 직위 해제됐고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고문 수사를 받아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88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2002년 5·18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고 2017년 11월 ‘제1호 경찰 영웅’으로 선정됐으며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
노희준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겸임교수는 지난달 30일 5·18기념재단 주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5·18 당시 계엄군은 신군부가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을 장악하고 있어 절대적인 복종이 강조되는 상황이었다”며 “하지만 2024년 계엄군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서 지휘부의 명령에 소극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광주에 대포 못 쏩니다” 군복 벗고 ‘무궁화 주유소’ 차린 장군
육군기갑학교장 이구호 준장
황영시 참모차장 “전차 동원” 지시에
“시민에게 발포하란 말이냐” 정면 거부
신군부들 승승장구하던 1981년 예편
5·18 수사 때 황 차장 만나
“지금이라도 진실대로 말하십시오”
정대하기자
- 수정 2021-05-21 10:49
- 등록 2021-05-18 19:56

“생전 ‘어떻게 국민을 향해 대포를 쏘겠느냐?’고 하셨어요.”
5·18 때 군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한 고 이구호(1933~1999) 장군의 장남 이상우(62)씨는 지난 10일 “전의 이씨 집성촌인 쌍촌동이 있는 광주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신 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출생인 그가 1979년 7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예하 육군기갑학교장(준장)으로 부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80년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던 날, 이 교장은 신군부 핵심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했다.

이 교장은 96년 1월6일 검찰에 참고인으로 나가 5·18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80년 5월21일 오후 4시께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의 전화를 받았다. 황 차장은 대뜸 ‘나 참모차장인데 폭도들을 진압하고 도청을 점령하는 데 전차를 동원해야겠다.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시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교장은 이 ‘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만약 (전차)동원을 요청하려면 정식 지휘계통을 통해 명령해달라’고 되받았다. 계엄부사령관인 황 차장은 ‘이 자식, 전차포를 쏘면서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이 교장은 화가 나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 사람의 충돌은 중앙정보부 ‘첩보’로 올라갔다.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씨는 그해 5월22일 긴급 전언통신보고문을 통해 ‘황영시 중장이 유혈사태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히 진압할 것을 지시해 왔다. (그런데) 기갑학교 교장은 광주시민이 적군이 아닌데 어떻게 시민을 향해 발포하란 말이냐고 지시를 정면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이 교장은 검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들이 법이나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때였다. 군부의 정식 지휘계통 절차를 무시하고 지시해도 제가 순응해 전차를 동원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육군기갑학교는 5·18 때 육군보병학교 및 포병학교와 함께 외곽경비를 담당했다. 전교사에선 전차 1개 중대, 탱크 10대를 35사단에 배속했다. 전교사 작전일지엔 5월27일 광주 진압작전 때 ‘전차 18대와 장갑차 5대가 기갑학교 정문을 통과했고, 통합병원 앞에 집결’했다고 돼 있다. 이상우씨는 “1개 대대(전차 32대)를 다른 사단에 배속한 뒤 외곽경비 임무만 수행했다. 아버지는 5·18 때 무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신군부 광주진압 관련자들은 승승장구했다. 국방부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참여해 전두환씨한테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정호용·황영시 등 52명이다. 이상우씨는 “그들(신군부)이 시킨 대로 탱크 몇 대라도 보냈으면, 훈장 받았겠지요?”라고 말했다. 황영시는 육군참모총장과 감사원장을 지냈지만, 이 교장은 81년 5월 군복을 벗었다. 이후 홍성직업훈련원 원장, 대전직업훈련원장 등을 잠시 맡았다가 동생과 함께 주유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상우씨는 “애국자셨다. 무궁화를 좋아하셔서 ‘무궁화 주유소’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2·12 및 5·18 수사 때 만났다. 황영시는 검찰의 대질신문 때 ‘전차 동원 지시’와 관련해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같은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든지 비망록에라도 기재해 두었다면 인정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피해 갔다.
그러다가 황영시는 옆에 앉아 있던 이 교장을 보며 “하여간 내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미안하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던 이 교장은 “지금이라도 진실을 진실대로 말씀하십시오”라고 촉구했다.
이상우씨는 지난달, 5·18 당시 시민협상대표였던 김범태씨 등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군 시절 사진들을 모두 태워버릴 정도로 가족들의 충격이 컸다. 명예회복 문제를 포기하고 살다가 5·18 때 진압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시민군이 집단발포에 맞서 무장했던 날 이 장군이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한 것에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젊은이들 죽어가는데 편히 있겠냐” 도청 사수한 63살 변호사
‘5·18 수습대책위’ 이종기씨
전차 진입 소식에 ‘죽음의 행진’ 총부리 아랑곳 않고 군과 협상
시민군 활동했던 아들 충영씨 “해방 광주, 아버지 바라던 세상”
김용희기자
- 수정 2021-05-19 02:00
- 등록 2021-05-18 19:59

“아, 우리 아버지네.”
13일 이충영(60)씨는 ‘노먼 소프 기증자료 특별전’(옛 전남도청 별관, 5월7일∼7월31일)에 걸린 한 사진을 보고 짤막하게 탄식했다.
1980년 5월27일 상무충정작전(광주진압작전)이 끝난 후 옛 전남도청에서 붙잡힌 아버지 이종기(당시 63살) 변호사가 군용버스에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민군이었던 이충영씨는 “27일 새벽 광주 계림초등학교 인근을 경비하다 군인에게 붙잡혔다. 아버지가 수습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도청에 남아계시다가 붙잡혔을지는 생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 변호사는 1973년 대통령 명예훼손과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변호사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시대를 한탄하며 유신정권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렸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이 변호사는 “명예와 지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달도 채 안 돼 12·12 쿠데타가 일어나며 이 변호사는 또다시 좌절에 빠졌다. 그러던 중 5·18민주화운동을 맞았고 그는 5월21일 도청으로 향했다.
이충영씨는 “21일 오후 군인들이 시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중학생까지 총을 들고 다니자 아버지는 ‘큰일이 생길 것 같다’고 걱정하셨다.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대항하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셨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22일 도청 부지사실에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며 임시위원장을 맡았다.

이 변호사는 ‘온건파’로 분류된 수습위원이었다. 시민이 총을 들어봤자 살인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의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기를 회수, 반납하는 조건으로 계엄군과 협상을 하자는 쪽이었다.
26일 계엄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 변호사 등 수습위원 16명은 도청부터 광주 서구 농성동 차단지점까지 3.5㎞를 걸으며 ‘죽음의 행진’을 펼쳤다. 농성동 차단지점에서는 탱크를 앞세운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과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위인백(73) 전 5·18교육관장은 “농성동에 도착하니 주변 건물 2층에서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섬뜩했다. 이 변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협상에 임했다”고 기억했다.
계엄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온건파는 26일 밤 수습위원회 회의에서 “무기를 회수해 희생을 줄이자”고 주장했다. 강경파는 “불명예스러운 항복을 할 수 없다. 도청을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라”며 반대했다. 이때 대부분의 수습위원은 도청을 떠났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이 변호사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말리는 부인에게 그는 “어찌 모르는 척할 수 있느냐.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도청에서 이 변호사와 같이 있었던 김태찬(60)씨는 “이 변호사가 ‘젊은이들이 죽어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집에서 편히 있겠냐. 자네들하고 같이 하려고 왔네’라며 도청으로 오셨다. 우리에게 총을 내려놓으라며 ‘자네들이 살아남아서 증언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셔 큰 의지가 됐다”고 말했다.
1980년 10월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형 집행면제로 풀려난 이충영씨는 집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 이 변호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5·18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충영씨는 “아버지는 온건파였지만 누구보다 항쟁이 지속되기를 바라셨던 분이다. 80년 5월 해방 광주는 어쩌면 아버지가 꿈에 그리던 세상이었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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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보안사 최예섭, 권총 뽑아 ‘공식 지휘라인’ 김기석에 달려들어”
김기석 부사령관 메모 의미
군 지휘권 이원화 방증
최예섭 등 전두환 복심 3인방이
5·18 진압 막후 컨트롤타워 구실
고 명노근 교수 목격 증언
최예섭-김기석 총 들이대며 충돌
“서울서 온 장성 한 명이 달려들자
전교사 부사령관도 권총 들이대”
‘무장헬기’까지 적시된 메모
‘폭도 시외 도주’ ‘코브라-장갑차’
24일치 메모에 또렷이 적혀
무장헬기로 시민군 공격 시사

<한겨레>가 17일 입수한 김기석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소장)의 메모는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예섭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준장)과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대령), 최경조 보안사 감찰실장 등 ‘전두환의 복심’ 3명을 이용해 5·18 상황을 통제했다는 그동안의 의혹을 방증하는 자료다. 공식 지휘계통에 없던 이들 삼인방은 별도의 ‘작전지침’을 통해 5·18 진압작전 과정에서 컨트롤타워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석 부사령관의 메모는 12·12와 5·18 검찰 수사(1995년) 때 확보된 것이다. 김 부사령관은 (자신의 계급인) 별 모양 두개가 그려진 메모지에 5·18 당시 상황을 한자를 섞어가며 기록해두었다. ‘GEN, choi(ASC)’는 5월19일 헬기를 타고 광주로 온 최예섭 보안사 기획실장으로 보인다.

보안사는 화순탄광에서 빼내 전남도청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을 제거하는 데 큰 관심을 쏟았다. 최예섭 기획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5월24일 회의의 토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수류탄을 뇌관과 분리’, ‘도청내 정황 연락’ 등이었다. 대책으론 ‘수류탄 분리작업을 위한 기술문관 진입’, ‘문관 배승일 수행’ 등의 메모가 눈에 띈다. 신군부가 광주 상황을 진압하기 위한 상무충정작전 계획을 최종 승인한 5월25일엔 ‘10:00 A학생으로부터 작업 완료’라고 적혀 있다. 5·18 이후 배승일 군 기술문관은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형석(통일과역사연구소 소장) 박사는 2017년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이란 글을 통해 “5월23일 자연스레 결성된 폭약관리반(9명)은 도청 지하실의 폭약이 폭발하면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폭약 뇌관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폭약관리반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보다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기석 부사령관의 또 다른 메모 ‘작전일지’ 5월22일치에는 ‘12시 수습위 대표자 10명 도지사 계획관 인솔 도착’이라는 대목도 있다. 이는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관계자 10명이 전교사에서 계엄군과 수차례 회의를 했다는 뜻이다. 5월24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일원으로 전교사를 찾은 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는 이때 최예섭 보안사 기획실장과 김기석 부사령관이 서로 총을 들이대며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명 교수는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 실린 구술을 통해 “어제 합의하지 못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부사령관실을 찾아갔는데 전투복 차림을 한 준장들 3, 4명이 들어왔다. 우리는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대화 도중 언성이 높아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서울서 내려온 장성 한 명이 부사령관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고 쏠 듯이 달려들었다. 부사령관도 권총을 들이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양쪽 부관들이 서로 말리자 장성은 얼굴을 붉히며 사령관실을 나갔다”고 증언했다. 그간 소장에게 총을 들이댄 서울에서 온 준장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기석 장군의 메모에 적혀 있는 ‘제너럴 최’(최예섭 기획실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보안사와 전교사 간 권총 충돌은 지휘권 이원화가 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육군본부-2군사령관-전교사-31사단-공수여단이라는 정식 지휘계통과 달리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을 통해 5·18 발포명령 등 중요한 지휘가 이뤄졌다는 그동안의 의혹과 맞물려 있다. 명 교수는 “광주 지역의 군관들은 시민 대표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되도록이면 좋은 방향으로 수습하려고 하는 반면, 서울 지역 군관들은 강경으로 밀어붙이려는 의도에서 총을 들이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고 지적했다. 당사자인 김 전 부사령관과 최 전 실장은 각각 2010년, 2019년 세상을 떴다.
무장헬기 동원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김기석 부사령관의 5월24일치 또 다른 메모도 중요하다. 이 메모엔 ‘폭도―시외로 도주 경향/ 코부라―에이피시(장갑차)/ 500엠디―차량/ 인원―병력’이라고 적혀 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시외로 도주하는 폭도들 중 장갑차를 탄 시민군은 코브라 헬기로, 차량을 탄 시민군은 500엠디로, 그냥 시민군은 병력으로 대응하라는 내용으로 보인다”고 했다. 2018년 2월,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도 당시 40여대의 헬기 중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5월21일과 27일 여러차례 사격을 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