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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은 기정사실이었던 한국전쟁 협상, 왜 2년이나 걸렸을까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무궁화9719 2025. 1. 10. 09:23

휴전은 기정사실이었던 한국전쟁 협상, 왜 2년이나 걸렸을까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2025. 1. 12. 18:57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 휴전협상①] 협상의 전쟁

본편부터 휴전협상에 관해 다섯 편의 글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써온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들은 답사여행의 기록에 역사의 지식과 정보를 교합해서 나의 소박한 생각으로 정리한 글이다. 특히 이 시점에 독자 여러분께 알릴 것은, 휴전협상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김보영의 <전쟁과 휴전>(한양대학교 출판부)에 크게 기대었다는 사실이다.
 
김보영 선생은 휴전협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고 그 이후에도 후속연구를 계속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김보영 선생은 그것들을 종합해 일반인들이 읽기 쉬운 단행본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휴전회담회의록에서 시작해 미국의 외교문서, 구소련의 각종 문서는 물론 중국의 문헌 등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물의 교양서 버전인 셈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면서 좀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면 494쪽에 이르는 김보영 선생의 두툼한 책을 찾아보라고 추천하고자 한다. 나의 글이 학술적이진 않은 터라 본문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고 내가 읽은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기자말>
 
[윤태옥(답사 여행객)]
 
  임진각 바람의 언덕.
ⓒ 윤태옥
77번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국도다. 부산에서 출발해 남해안을 훑어가다가 땅끝마을 해남에 이르고, 다시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서는 임진각에서 한국전쟁에 막힌 채 끝난다. 지도를 놓고 손가락으로 짚어서 따라가 보면 내겐 묘한 느낌이 든다. 사랑스러운 땅덩어리를 지그시 품어 가다가, 길이 멈추자 비로소 두 눈을 살포시 뜨는 느낌이다.
 
이 국도의 종착점은 1번 국도와 만난다. 교차로 부근의 임진강역에서 기차로 갈아타면 임진강철교를 건너 도라산역으로 갈 수 있다. 차로와 철도 모두 판문점으로 가는 길이다. 판문점을 방문하자면 임진각관광지에서 바람의 언덕 옆에 있는 안내소를 거쳐야 한다. 이 안내소는 통일부의 판문점견학 지원센터가 운영하는 현장사무소다.
 
지원센터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견학일정을 살펴보니 "2023년 7월 18일 미군 병사 월북 이후 판문점 견학이 잠정 중단된 상황으로, 유엔사 등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견학 재개되면 일정 공지 예정"이라고 돼 있다. 수천 년을 운위하지 않아도 그저 우리 땅일 뿐인데 외국군 병사 한 명이 일탈한 사건 때문에 유엔군사령부가 내국인들의 방문 기회를 아예 막아버렸다니. 한국전쟁이 남겨놓은 유적 정도로 생각했던 판문점이 지금도 현대사가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현장이라는 게 새삼 실감 난다.
 
'판문점'이라는 지명
 
판문점은 휴전협상 관련자들이 만든 지명이다. 1951년 10월 개성시 널문리의 개활지에 있는 초가집 세 채와 주막이 있던 주막거리를 새로운 휴전협상 장소로 정했다. 회담장 이전을 협의하면서 널문을 판문(板門)이라는 한자로 바꾸고, 주막이 있어서 점(店)을 덧붙인 것이다.
 
이곳에서 1951년 10월 25일부터 정전협정 조인 이틀 뒤인 1953년 7월 19일까지 1년 9개월 동안 길고 지루한 회담이 진행됐다. 협상이 완료되자 조인식을 위해 조인장을 세웠다. 조인장의 본체는 북한이 지었고 진입로와 전기시설 등 마무리 공사는 미군이 했다. 이때의 판문점은 내가 보았던 텔레비전 뉴스의 판문점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다. 휴전협상장이었던 판문점의 그 지점은 우리나라 인터넷 지도에서는 볼 수 없고 구글지도에서는 정전협정 조인장이라는 지명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봉주영

 

지금 TV뉴스에서 보는 판문점은 정전협정 조인장에서 서남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공동경비구역(JSA)이다. 동서 800m, 남북으로 600m인 장방형의 구역이다. 정전협정을 체결한 직후 양측이 합의한 군사분계선 위에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고 단층 건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사무실과 회의실, 경비병 막사 등을 새로 지었다. 이곳에서 포로교환이 이뤄졌다. 영화 <공동경비구역>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옆으로 늘어선 일곱 채의 단층 건물을 중간에 두고, 남쪽의 자유의 집과 북쪽의 판문각이 우뚝 서 있다. 자신이 배후라고 과시하는 듯 커다란 덩치를 내세우며 단층 건물 회담장을 압박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이 구역에 있는 건물명으로는 통일이니 자유니 평화니 하지만 나의 오감으로는 그 반대로 느껴지기만 한다. 이곳의 위치는 우리나라 인터넷 지도에서 판문점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로 3333번지 또는 진서면 선적리 359라고 나온다. 건물명으로는 평화의 집 하나만 나타난다.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된 장소는 위에 설명한 판문점의 두 구역과는 또 다르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 첫 회의부터 다음달 16일까지 한 달 남짓 협상장으로 사용한 장소는 개성시의 내봉장(來鳳莊)이란 한옥이다. 이곳은 북한 인민군이 통제하는 지역이라 미군 대표단과 취재기자들은 약 20km를 북상해야 했다. 마치 적진으로 들어가는 형세다. 미국이 장소 문제를 제기해 7월 14일 회담 지역을 중립화하기로 합의했다. 개성시의 중심점으로부터 반경 5마일 이내를 중립지대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중립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모두 15차례 발생했다. 회담 초기에 완전무장한 중국군 1개 중대가 중립지대를 통과한 사례(8.4)는 중국측이 실수라고 해명하고 김일성이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서한을 보내어 수습했다. 8월 23일에는 미공군이 회담장소를 폭격했다고 중국 측이 항의했다. 미국은 사건을 조사한 후에 중국측의 조작이라고 묵살했고 이로 인해 휴전회담이 두 달 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실제 미군기가 중립지대를 오폭하는 사건(9.10)도 발생했다. 이때는 미국 수석대표가 오폭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회담장소 이전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판문점이 새로운 장소로 선택돼 10월 25일 휴전회담 본회의가 재개됐다.
 
세 곳 모두 역사적 의의가 있는 장소이지만 두 곳은 북한 지역이라 우리에게는 아예 금족의 땅이고, 공동경비구역 역시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기 때문에 남한의 일반인들은 방문하는 게 쉽지 않다.
 
정전? 휴전?
 
  임진강 독개다리. 한국전쟁 당시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 윤태옥
이제 한국전쟁 당시로 돌아가면서 우선 용어상의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협상의 당사자를 압축해서 서술하는 경우 '미국'과 '중국측'으로 했다. 우리나라의 공간사(公刊史)와 적지 않은 논문이나 저술에서는 유엔군과 공산군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중공군이나 공산군이란 표현은 역사의 용어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이미 중국군이나 인민군 등으로 서술해 왔다.
 
중국과 북한은 공동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수석대표는 북한이 맡았고, 정전협정에는 펑더화이와 김일성이 각각 서명한 것을 감안해 중국이 아니라 중국측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실제 회담은 중국이 주도했고, 특히 전쟁의 장기화 국면에서는 북한의 요청을 묵살하다시피 했다. 소련은 세 나라 가운데 최고의 의사결정 위치에 있긴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전쟁과 협상에 직접 나서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휴전협상에서 자문역으로 규정했다.
 
유엔군이란 용어 자체는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 제1의 당사국인 남한조차 옵서버로만 참관시켰고 유엔의 참전 15개국도 배제하고 협상을 독단적으로 진행했다. 유엔-유엔군에 대응하여 중국-북한 또는 중국군과 인민군을 묶어서 칭하는 말도 적당치 않은 점도 고려해 미국으로 특정해 서술하기로 했다.
 
휴전(Armistice)과 정전(truce 또는 cease-fire)이란 말도 헛갈릴 수 있다. 정전은 군사적인 충돌을 멈춘다는 의미이고, 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중지하는 것으로, 종결의 뜻이 분명한 종전과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양측이 실제로 조인한 문서에는 휴전과 정전 두 용어가 혼재돼 있다. 우리글로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고 중국어로는 '朝鮮軍事停戰的協定(조선군사정전적협정)'이지만 영문으로 'A military armistice(휴전) in Korea'이다. 한국전쟁에 관해 요약하자면 휴전협상을 해서 정전협정까지는 체결했으나, 정치협상까지 해서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951년 6월, 한국전쟁의 전선은 개전 이전의 38선에 걸치게 됐고 어느 쪽도 단기간에 완승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일단 양측 모두 피해가 상당했다. 미군은 1951년 1월 이후 6월까지 중국군에 대한 반격은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장병 8만여 명의 인명피해를 당했다. 전사 2만1300명, 부상 5만3100명, 실종과 포로 4400명 등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인명피해가 총 14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60% 정도가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입 초기에는 영악한 매복작전으로 세계 최강 미군을 격파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진공했으나 인명피해는 막대했다. 유엔군에 비해 무기와 장비가 낙후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전쟁을 지탱해 줄 경제력도 달렸다. 중국을 침략자라고 규정한 유엔 총회가 1951년 5월 대중국 대북한 금수조치를 권고한 결의도 경제적 타격을 주고 있었다.
 
정전 논의 자체는 한국전쟁 개전 직후부터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 외교적 접촉을 시도했었다. 인도는 독자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국제사회 전반은 한국전쟁이 한반도 밖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국은 38도선 부근까지 재반격에 성공한 시점인 1951년 5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련과 중국에 한국전쟁의 정치적 해결 곧 휴전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생각이 달랐다. 미국의 속내를 확인한 소련은 중국을 내세워 휴전협상을 추진하기로 했다. 휴전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6월 3일 휴전을 공식적으로 제안한 소련 대표의 유엔 연설이었다. 미국 정부는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에게 휴전협상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양측의 실무적인 준비를 거쳐 7월 10일 휴전회담 본회의가 개성시의 그 내봉장에서 시작됐다.
 
협상계통은 미국의 경우 협상 대표단 위에는 유엔군 사령관이, 그 뒤에는 합동참모본부가 있었고, 최종 의사결정자는 미국 대통령이었다. 대표단 5인은 미군 장성 넷과 한국군 장성 한 명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한국군 장성은 협상에 나서지도 못하고 협상정보도 충분히 제공받지 못하는 옵서버였다.
 
중국측은 중국이 협상을 주도했지만 대표단에는 인민군 장성이 셋이고 중국군 장성이 둘인데, 수석대표는 인민군 총참모장 겸 부수상이었던 남일을 내세웠다. 중국은 한국전쟁은 북한이 주체이고 자신들은 지원한다는 논리를 대표단 구성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인민군의 작전지휘권을 중국군이 통합해서 행사했듯이 협상장 뒤에서 실제 협상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전방지휘부를 운용했다. 개성에 있는 전방지휘부는 협상전문가인 중국 외교부 부부장 리커눙(李克農)이 책임자였다. 협상의 최고지도부는 마오쩌둥과 김일성으로 하고 스탈린과 펑더화이는 자문역으로 했다. 마오쩌둥은 거의 실시간으로 회담장의 진행상황을 보고 받았고, 거의 매일 모스크바에 전문을 보내고 스탈린의 의견을 들었다.
 
예비회담을 거쳐 7월 10일 시작된 휴전회담은 몇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7월 26일 다섯 개의 의제에 합의했다. ① 회의 의제의 채택 ②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③ 정전 조치 및 휴전의 감독기관 등 ④ 포로 교환 ⑤ 양측에 대한 정치회담 건의 등이었다. 그 이후의 회담은 이들 의제를 순서대로 협상하는 과정이었다.
 
협상의 첫 단계로 의제를 합의하면서 가장 큰 이슈가 된 것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것과 외국군의 철수 문제였다. 미국은 38도보다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의제를 군사분계선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아울러 휴전협상은 군사적인 문제에 국한한다는 이유로 철군과 같은 정치 문제를 의제로 올리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결국 외국군 철수 문제는 구체적인 내용이 명시되지 않은 5번의 포괄적인 의제로 넘기면서 일단 쟁점을 비켜갔다.
 
젊은 장병 갈아넣게 만든 '전투계속의 원칙'
 
  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으로 왼쪽 책상에서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 박도/NARA
휴전협상 전과정에 걸쳐 큰 문제가 된 것은 전투계속의 원칙이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인 압박으로 협상을 끌고간다는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 첫 회의에서 미국 수석대표는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된다는 '전투계속의 원칙'에 미리 대못을 박았다. 중국측은 조기휴전을 원했지만 미국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런데 협상을 시작한지 한달 반만에 개성사건(8.23)이 발생하고 회담은 중단됐다. 이 기간에 전투계속의 원칙은 큰 영향을 발휘했고 이후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날까지 강력한 행동원칙으로 작동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측도 휴전협상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 군사적으로 더 심하게 충돌할 수 있다고 대비하고 있었다. 중국군과 인민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면서 유엔군의 공중폭격과 지상포격에 버틸 수 있는 갱도식 진지를 구축했다.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펑더화이는 회담과 연계하는 6차 공세를 준비했다. 중국측은 9월에서 11월까지 2개월 동안 공격하여 유엔군을 8만 명 정도 쓰러뜨리면 유엔군이 화해를 요청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북한의 청천강 이북 지역에 새로 공사를 시작한 활주로가 완공되지 않았고 소련이 공군 지원에 뚜렷한 답변이 없고 물자 수송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10월까지 연기하다가 양측이 11월 27일 군사분계선 합의문에 가조인하면서 철회됐다.
 
미국은 군사적 압박에 중국측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휴전회담 개시 사흘 만에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미 공군에게 모든 공격력을 동원해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라고 명령했다. 미 극동공군은 합동참모본부가 평양 폭격이 회담 자체가 결렬시킬 수 있어 승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7월 30일 은밀히 평양까지 폭격했다.
 
유엔군은 8월 들어 하계공세를 시작했다. 8월 18일에는 향로봉 전투를, 19일에는 피의 능선 전투를 벌였다. 8월 23일 소위 개성사건으로 휴전회담이 중단된 이후 31일에는 펀치볼 전투를, 9월 4일에는 가칠봉 전투를 시작했다. 모두 강원도 양구와 고성 지역에서의 공세였다. 10월에는 강원도 철원에서도 추계공세를 퍼부었다. 연천-철원 계곡을 장악하고 철의 삼각지를 통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3일에는 코만도 작전을, 13일에는 노매드-플라선 진격작전을 시작했다. 유엔군이 하계·추계 공세를 통해 철원 양구 고성 지역에서 전선을 밀고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전선이 지금의 군사분계선과 대략 일치한다.
 
유엔군은 항공작전을 병행했다. 8월 중순부터 해군과 해병대의 항공기까지 동원해서 북한의 철도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그동안 소련 국경과 근접하다는 이유로 제외됐던 나진도 폭격했다. 해상공격도 계속됐다. 영국군 해병대가 원산에 두 차례 상륙해 시설물을 파괴하고 흥남에도 함포사격을 가했다. 유엔군의 하계·추계 공세와 공중폭격과 해상공격은 10월 20일 그러니까 휴전협상의 회담장소를 이전하기로 합의(10.22)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휴전협상 본회담은 의제만 합의하고는 8월 23일 개성사건으로 중단됐다가 두 달 동안의 유엔군 공세가 끝난 후 10월 25일 판문점으로 옮겨서 재개했다. 협상이 시작되면서 전황이든 경제상황이든 국내 정치사정이든 한국전쟁의 휴전은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다. 문짝을 열었으니 몇 걸음만 내디디면 합의의 마당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로(門路)가 물 새는 해저터널처럼 험하고도 길었다. 회담장에서는 협상의 전쟁이, 전선에서는 전투계속의 원칙이 전쟁을 계속하게 했다. 전쟁의 종결 또는 평화협정은커녕 당장의 전투를 중지하는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아마도 세계 전쟁사에서 결렬을 선언하지 않고 끌고 간, 가장 긴 휴전협상이 아니었을까.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해 자기네 젊은 장병들을 갈아 넣었던, 그 많은 목숨을 쏟아붓고도 실제 무얼 얻었는지 알 수가 없는, 미국의 정권이 바뀌고 그 위에 소련의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겨우 정전협상까지만 체결한 게 바로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