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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명 모였어도 깨끗-질서정연... 한국 민주주의의 힘

무궁화9719 2024. 12. 16. 05:48

새로운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0대 20대 청년들이 탄핵 집회에 나온 까닭?
‘질서 있는 퇴진’은 없다
'혼돈과 역설’의 생명사상으로 본 비상계엄 그 이후
문명전환의 마중물, K-정치를 기대한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로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대표

 

드디어 차원변화의 때가 왔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 여의도, 형형색색의 LED 응원봉들과 함께 새로운 주체성의 출현이 목격된다. 새로운 질서의 형성이 관찰된다. 그리고 생명사상을 공부하는 나는 거기서 ‘신생(新生)’의 기운과 ‘혼돈적 질서’의 문법을 읽는다.

 

10대 20대 청년들이 탄핵 집회에 나온 까닭은?

 

그날의 밤과 새벽 나는 만에 하나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마음을 졸이며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총칼의 계엄이 유혈사태를 부르고 유혈사태가 총칼의 계엄을 합리화하는 1980년 광주의 끔찍한 경험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20대의 딸이 친구와 함께 여의도에 나갔다고 한다. 지금까지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간혹 정치 현실에 대해 언급한 적은 있었지만, 시위 현장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무엇이 그녀를 집회 현장으로 이끌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그저 짐작을 할 뿐이다. ‘총구 앞에 선 생명’의 본능적인 공포감. 나의 감각이다. 서울 한복판에 총을 든 계엄군이라니.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의사당의 창문을 깨고 진입을 하다니. 아마도 나의 딸과 또래의 청년들은 원룸의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총을 든 계엄군’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청년들을 여의도 탄핵 시위현장으로 이끌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것은 계엄군의 총부리가 정치의 최종심급인 ‘생명’의 안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지금껏 여당이든 야당이든 굳이 정치의 층위에 접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정치는 늘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나’의 삶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역시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12월 3일 ‘비상계엄’의 총부리는 원초적 생명력의 분출을 격발했다.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4.12.10. 연합뉴스
 

한 언론사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탄핵 시위에 참석한 청년들은 “비상계엄 선포가 개개인의 일상을 흔들었기 때문”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이 점이 중요하다. 계엄군의 총이 “개개인의 일상을 흔들었다는 것.”(세계일보, 2024-12-07)

 

‘12.3 비상계엄’ 사태 이틀 후 지방대학의 시간강사인 나는 [사회학의 초대] 수업을 위해 학교에 갔다. 그날의 강의 주제는 ’또 다른 삶과 세계를 꿈꾸는 사회학‘이었다. 한 학생이 자신의 사회적 꿈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억압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혼자 은둔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그리고, 이제 생명은 권력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된다. 이번 목표는 대통령 윤석열과 그의 정치적 동무들이다. 자신의 일상적 삶에 은둔하던 이들이 ’생명 층위‘에서 ’사회정치적 층위‘로 올라온다. 질 들뢰즈가 미셸 푸코에 관해 쓴 책 『푸코』에서 읽은 경구가 다시 생각난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생명은 피의 학살을 예감하며 공포로 몸서리친다. 그러나, ’공포‘는 거꾸로 ‘저항’의 동력이기도 하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청년들을 현장에 이끌어낸 것은 원초적 생명감각이다. 정동적(情動的) 신체의 감응이다. 저항의 일차적인 목표는 생명의 보존이다. 그러나, ‘감응하는 신체’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하늘·땅·사람(天地人) 세 기틀이 위태로운 ‘위기(危機)의 생명’은 하늘·땅·사람 세 기틀이 재배치되는 ‘기회(機會)의 생명’으로 차원변화 한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 친위 쿠데타를 저지한 선진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청년 레지스탕스들은 이제 ‘공포/저항’의 레지스탕스에서 ‘신명/저항’의 레지스탕스로 도약한다. ‘비장한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흥겨운 레지스탕스’가 된다. 생명사상에서 신명은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생명력의 원천이며,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그리고, ‘흥(興)’은 신명의 활동 형식이다. 비장한 가운데서도 해학이 있고, 깊은 슬픔 속에서도 환희의 마음이 있다. 우리의 몸에는 최소한 40억 년 ‘생/사’의 이중성과 진화의 복잡성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겨운 레지스탕스’도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는 하늘이 도운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내공 덕분이다. 깊이 감사할 일이다.

 

‘신명나는 레지스탕스’는 LED 응원봉과 K-팝과 함께 정치사회적 차원변화를 추동한다. 응원봉만이 아니다. 재미와 의미를 교합한 말놀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세계를 창발한다.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나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이라는 가상의 단체 이름이나, ‘제발 그냥 누워 있게 해줘라. 우리가 집에서 나와서 일어나야겠냐’ 등의 문구가 그것이다(경향신문, 2024.12.07.).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말놀이는 경남 창원의 대학생들이 만든 ’윤퇴사동‘이란 말이다. 풀어 말하면, ’윤석렬 퇴진하면 사라질 동아리‘라고 한다(경남도민일보, 2024.11.13.). 여기서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사라질‘이라는 표현이었다. 나에게 그것은 구조화되지 않은 ’비-정형‘의 운동형식이다. 생겨나면 다시 사라져야 하고, 사라져야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생명세계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및 구속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관련 손팻말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2024.12.8. 연합뉴스
 

​​​​​​​‘질서 있는 퇴진’은 없다

 

사회적 질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야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그런 맥락에서 ‘질서 있는 퇴진’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퇴진은 공백을 남기고, 공백은 ‘미-결정의 지대’로서 새로운 질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과 당 대표 한동훈의 ‘질서 있는 퇴진’은 두말할 것 없이 정치적 수사법일 뿐이다. 그것도 정치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매우 허술한.

 

대통령의 하야를 통한 퇴진이든, 탄핵에 의한 대통령 직무정지든 혼돈은 필연적이다. 혼란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헌법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는 탄핵‘이야말로 가장 ’질서 있는 퇴진’일 것이다. 퇴진은 기존 질서의 축이 무너지는 것이고, 때문에 반드시 기존 체제의 해체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혼돈과 정면으로 마주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정치판의 해체와 재배치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불연속적인 도약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념정치와 패권정치로는 기후파국의 현실과 AI로 상징되는 포스트휴먼의 현실에 대응할 수 없다. 개헌을 통해 ’87년 체제‘의 종식과 제7공화국의 성립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권교체‘나 ’정치개혁‘으로는 불충분하다. ’정치전환‘과 ’정치개벽‘이 요구된다.

 

나에게 생명은 ‘혼돈’이다. ‘혼돈의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질서에는 두 차원이 있다. ‘질서의 질서’와 ‘혼돈의 질서’가 그것이다. ‘질서의 질서’가 체계 유지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혼돈의 질서’는 새로운 질서 생성의 잠재성에 방점을 찍는다. ‘혼돈의 질서’는 불편하다. 그러나, 결코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는 요동과 혼돈을 피할 수 없다.

 

혼돈은 ‘변이’를 생산한다. 우리는 여의도 탄핵 집회 현장에서 수많은 정치적 변이들을 목격한다. 앞서 시위현장을 살펴보았지만, 결정적인 변이는 ‘LED 응원봉’이다. 촛불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촛불 역시 영원할 수 없다. 촛불도, 촛불문화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촛불의 시대’에서 ‘응원봉의 시대’로의 대전환을 관찰한다.(그러나 촛불 또한 오롯이 어느 한 켠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서 가장 재미난 변이로 관찰된 것은 ‘라면을 먹는 계엄군들’이었다(노컷뉴스, 2024.12.09). ‘질서의 질서’ 속 군인들이라면 항상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작전 중 편의점 라면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면을 먹는 신체와 의식은 계엄군의 질서를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균열시킨다. 수동적이지만, 확실한 ‘항명’이다. 기존 군대질서의 변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변이는 ‘비질서’와 혼돈을 널리 널리 전염시킨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열망한다. 그러나 혼돈 없이 새로운 질서를 기대할 수 없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대로 질서는 항상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이다.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

 

복잡계이론의 경구가 절묘하다. “혼돈의 가장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며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 윤석열과 그의 정치적 동무들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대혼돈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리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경험한다. 응원봉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시위 문화, 새로운 정치적 인물들, 새로운 언어와 문법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돈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계를 예측할 수 없다. 단순히 한국정치의 미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삶도 세계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 자신의 감각과 세계관, 그리고 정치체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또 새롭게 생성될지 예단할 수 없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이념정치의 한 축이 붕괴하고 있고, ‘87년 체제’ 역시 동시에, 이미 무너지고 있다. ‘이념의 시대’를 넘어서 ‘의미의 시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미의 시대’가 이미 여기 와 있다. 아마도 조만간 '영성의 시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신체적 세대체험의 변동이다. 지난 30년간 시위 현장의 중심이었던 386은 이제 686이 되었고, 항상 주변에 머물렀던 그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중심, 다중심적 중심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연합’도 아니고, ‘메타(meta)’도 아니다. 연합의 발상은 ‘전지적 작가시점’ 즉 하늘에서 전체를 내려보는 자의 관점을 전제한다. 노동자-농민의 동맹도 보수-진보의 연합정치도 마찬가지다. 형형색색 응원봉 세대는 ‘부분들의 연결’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본 ‘은둔할 권리’도 그렇고, ‘윤퇴사동’도 그렇다.(‘부분들의 연결’의 이면에는 전체주의의 함정이 있다. AI 전체주의, 디지털 전체주의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뒤에서 이야기할 디지털 응원봉도 마찬가지다.)

 

다시 묻는다. 새로운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물론 나의 대답은 한마디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이다. 그리고 풀어 말하면 이렇다. 첫째 숨겨진 생명력의 힘, 둘째 혼돈을 대면하기, 셋째 ‘변이’ 되기를 통한 또 다른 세계의 격발.

 

문명전환의 마중물, K-정치를 기대한다

 

한국은 오랫동안 세계의 변방이었고, 혼돈의 가장자리였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주변이 아니다. 물론 중심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은 ’주변적 중심‘이다. 혹은 ’중심적 주변‘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사이에 끼어 있다. 하지만, 한류를 통해 만만치 않은 새로운 문명사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류 덕분에 ’한국의 시위‘는 한국의 시위만이 아니다. ’한국의 정치‘가 한국의 정치만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정치는 전세계의 K-팝 팬들의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LED 응원봉과 함께.

 

K-팝 공연장의 응원봉은 디지털 시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라이터 불과 촛불의 아날로그 색과 빛을 대체한다. 응원봉에는 블루투스가 있어 공연장 안에서 수천 수만 응원봉들 전체의 색깔을 조율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빛과 색인 이상 디지털 응원봉 역시 항상 아날로그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LED 응원봉은 LED가 그렇듯이 ’아날로그-디지털‘이며, ’에코-디지털‘이다.

 

미국의 정치는 불온하고, 유럽과 일본의 정치는 무기력하다.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정답이 아니다(하나의 답일 수는 있다). 사회주의권은 오래전에 붕괴했고, 정치분석가들은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혹, 한국으로부터 새로운 정치가 태동할 가능성은 없을까?

 

우리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이미 적지 않은 여야의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부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의 실패를 목격했다. 그러나, ‘진보정권’의 성공과 진화를 자신있게 말할 수도 없다.

 

많은 이들이 기대하듯이 10대 20대 청년세대들의 집회 참석 자체가 차원변화의 징후이다. 응원봉 세대는 야당으로의 정권교체에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전세계의 K-팝 네트워크, 한류 네트워크와 연결된 지구적 감각의 신인류들이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매우 ’한국적‘이면서도, 매우 ’탈-한국적‘이다. 새로운 정치의 주체성도, 문명전환의 주체성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대통령 윤석열을 퇴진시키고, 그의 정치적 블럭을 해체해야 한다. 그러나, LED 응원봉의 열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문득 저항의 목표가 민주당을 향할 수도 있다.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발해야 한다. 새로운 감각과 진동과 음색을 지닌, 새로운 정치적 인물이 절실하다. 당겨진 정치 일정은 특별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트럼프의 재선은 '소련 붕괴' 이래 최대의 역사적 격변”이라고 하지 않던가?.

 

2024년 12월, 대한민국 정치의 대격변기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인류사적 대전환기, 문명사적 대전환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에 응답하는 담대한 정치기획과 정치적 변이의 생산, 나아가 정치체계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오늘이다. 또 하나의 한류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K-정치가 그것이다. ’기후격변 시대의 지정학‘과 ’AI시대의 새로운 인간학‘에 유의해야 한다. 디지털 응원봉 세대와 함께 문명전환의 대서사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회의사당역 주변에서 열린 집회가 끝난 뒤 쓰레기를 모아 정리하는 시민들 ⓒ 임병도관련사진보기

"당연한 거 아니에요?"

14일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가 끝난 뒤 쓰레기를 줍는 시민이 기자에게 한 말입니다. 평범한 시민이라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는 오히려 쓰레기를 줍는 이유를 묻는 기자가 더 이상한 듯 쳐다봤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 시민들이 몰려 있어 가보니 집회에서 나온 전단이나 비닐, 음료수 빈 병 등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모아 놓은 전단 더미를 함께 나르는 시민도 있었고, 귀가하면서 쓰레기를 주우며 가는 시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사용했던 전단이나 쓰레기를 가방에 넣고 가거나 쓰레기를 담은 봉투를 손에 들고 가는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 국회의사당 주변 도로 ⓒ 임병도관련사진보기

집회가 끝난 뒤 국회의사당 주변 도로입니다. 종이 조각 등이 몇 개 도로에 남아 있지만, 마치 새벽에 환경미화원이 청소한 것과 비슷했습니다.

시민들이 모이고 난 뒤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고 돌아가는 일은 이미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 때도 있었습니다. 이후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 때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모였지만 거리가 너무 깨끗해서 외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2024년 12월 14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최 측 추산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지만, 집회가 열렸던 도로는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보였습니다.

집에 가는 길도 질서 있게... 안전사고 없었던 지하철

집회가 끝난 뒤 국회의사당역을 이용하려는 시민들이 안전요원의 통제에 따라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 임병도관련사진보기

집회가 끝나고 귀가하는 시민들의 질서 의식도 돋보였습니다. 이날 국회의사당역은 집회가 끝난 뒤 지하철을 이용하려는 시민들이 많았는데, 안전요원의 통제에 따라 지하철역 입구부터 질서 있게 내려갔습니다.

안전요원들은 한꺼번에 시민들이 몰리자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중간중간 시민들을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개찰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승강장으로 가는 좁은 계단에 시민들이 몰리지 않도록 개찰구 진입을 통제했는데, 시민들은 안전요원의 지시에 따라 차분하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지하철 열차 안에는 손에 윤석열 퇴진 피켓을 들고 있는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평상시 출퇴근길이면 짜증이 날 정도로 복잡했지만,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시민도 있었습니다. 기자가 내릴 역이 가까워오자 "내리세요?"라고 물은 한 시민은 "뒤쪽에 내릴 분 있답니다. 내렸다가 탑시다"라며 기자의 하차를 도왔습니다.

평소보다 시간은 걸렸지만, 여의도 집회에 올 때보다 더 편안한 귀갓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긴다 했지"... "영훈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 촛불 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 모습 ⓒ 임병도관련사진보기

집회에선 시민들이 만들어 온 손 피켓 문구도 눈에 띄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한 시민이 들고 있는 태블릿에는 "우리가 이긴다 했지?"라는 문구가 나왔습니다.

지난 7일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 불참으로 탄핵소추안이 불성립됐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회를 이어 나간 시민들의 끈질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자, 권력자는 결코 시민을 이길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옆에는 "영훈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게"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피켓을 든 시민도 있었습니다. 자녀의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도 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을 위해 추운 날씨에 거리로 나왔고, 이번 윤석열 탄핵 집회도 그랬을 겁니다.

12월 14일 저녁 7시 24분, 윤석열 대통령은 직무정지됐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남아 있고, 윤 대통령이 파면되면 누군가가 대통령이 될 겁니다. 그 누구라도 언제나 시민이 이긴다는 이날의 교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추운 겨울날 더는 거리로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