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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증원 2천명, ‘과학’ 문제가 아니라 ‘합의’ 문제다

무궁화9719 2024. 5. 21. 07:12

의대증원 2천명, ‘과학’ 문제가 아니라 ‘합의’ 문제다

한겨레2024. 5. 20. 09:35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86)
의료윤리, 아직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한 이름

의정갈등은 여러 관점과 견해, 고려 사항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문제여야지, 어느 한쪽이 힘으로 밀어붙여서 관철할 문제여선 안 된다. 픽사베이
 
“한국의 의대 입학 정원 증원을 둘러싼 갈등은 의료계, 법체계, 정부 정책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매우 다면적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언론 보도는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의대생과 전문가들의 반응과 이러한 정책이 직면한 광범위한 법적 문제에 크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고위급 정부 및 사법 기관의 참여는 이 논쟁의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강조합니다. 이 보도는 의료 정책과 전문 교육의 복잡성뿐만 아니라 이러한 중추적인 결정의 광범위한 사회적 함의를 반영합니다. 매체가 이들 핵심어를 통해 엮어낸 이야기는 당면한 전문가적 관심사와 장기적인 국가 보건 정책 목표 사이의 긴장을 포착하여 지속적인 투쟁과 논쟁의 시나리오를 묘사합니다.”
 

위 기술문은 5월15일부터 17일 오전까지 ‘의대증원’ 관련 기사를 수집하여, 기사 본문 핵심어를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에 현재 상황을 표현할 것을 요청한 결과문이다. 며칠, 아니 지난 석 달의 혼란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라고, 역시 인공지능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긴 하다. 그런데 혹시 윗글에서 이상한 점은 없는가.
 
마지막 부분을 나는 주목한다. 인공지능이 이상한 글을 썼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의 역설적인 상황을 잘 드러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당면한 전문가적 관심사와 장기적인 국가 보건 정책 목표 사이의 긴장”으로 인한 “지속적인 투쟁과 논쟁의 시나리오”라는 이 묘사는, 의사의 전문가적 견해와 국가 보건 정책 목표가 충돌하며 그것이 투쟁과 논쟁을 빚어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보건의료 전문가의 견해와 국가의 보건 시책이 가리키는 방향은 일치해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이때 한쪽이 다른 견해나 주장을 펼치면, 그것은 당사자의 이해를 반영한 주장일 뿐, 전문가나 정부가 견지할 만한 입장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갈등은 이권을 반영한 ‘밥그릇 싸움’일 뿐이다.
 
정치나 경제에서 소위 ‘이해 충돌’ 사안, 이권 때문에 원래 해야 했을 일 대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현실이기에 ‘밥그릇 싸움’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건의료 전문가의 견해와 국가의 보건 정책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수차례 경험했던 일이 아닌가.
 
그것은 의료가 수학이 아닌,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 의학과 사회의, 과학과 인간의 충돌로 인한 결과다. 다른 한편으론 여러 당사자가 연관된 보건의료의 문제에서 각자의 가치와 신념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일이다.
 
이런 충돌을 조율하기 위해 현대 사회는 윤리라는 방식을 도입했고, 그때 출현한 것이 ‘의료윤리’라고 하는 신생 분야였다. 예컨대 존엄사·안락사 갈등이, 임신중절 논쟁이 그러했듯이. 이들 논쟁은 의학과 사회, 과학과 인간의 견해차가 어디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였다.
 
설명을 위해 이들 사례를 검토하겠지만, 그 전에 먼저 결론을 내고 출발하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의료의 문제에서 윤리를 따져본 적이 거의 없는 셈이다.

존엄사 논쟁 

죽음에 관한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망은 태고의 것이지만, 이것이 ‘존엄사 논쟁’으로 굳어진 것은 우리에게 죽음의 순간을 연장할 수 있는 의과학의 방법이 생긴 다음이다. 신경학적 쇼크 상황에서 신체 상태 안정, 인공호흡기의 발명, 급식관의 설치 방법 확립 등은 이전 당연히 끝났어야 했던 생을 잠시라도 붙잡아 놓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붙잡기만 할 뿐, 다시 돌려놓을 수는 없는 경우들이 종종 벌어졌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서 갈등이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의학이란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특정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학적 선택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환자를 그냥 놓아두는 일은 없다. 의료인이라면 손상된 신체 앞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자연스러운 동기를 갖기 마련이다. 소위 연명의료의 상황, 죽을 사람을 일단 붙잡아 놓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때에, 의료적 해답은 그래도 연명의료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료의 본령이므로.
 
하지만 환자 본인이나 가족이 그렇게라도 생명을 유지하길 원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누군가는 그렇게 ‘유지만’ 되는 삶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에, 누군가는 그런 삶의 억지스러운 유지가 너무 고통스럽기에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존엄사 요청, 최소한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명의료는 이제 멈춰달라는 요구는 여기에서 나온다.
 
사회는 또 관점이 다르다. 의학적 상황을 빼고 본다면, 생명 유지 노력을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고 이는 넓게 보았을 때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명의료 중단이나 존엄사를 허용하는 일은 자살 방조와 같이 취급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회적으로 자살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선택은 오히려 자살이 법적으로 허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지는 않을까.
 
의료윤리학의 역사적 사건들을 꼽은 흐름도. 현대 의학의 발전은 보건의료의 여러 상황과 결정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스캔들 앞에서 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의료윤리학이 시작되었다.

의료윤리의 해법

이런 충돌하는 주장 중에 답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의학, 환자, 사회의 관점은 각자가 입각하고 있는 논리, 가치, 신념 등으로 인해 다를 수밖에 없다. 존엄사 문제를 놓고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해답을 특정 관점, 이를테면 과학이나 법학이나 사회학이 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한쪽에서 답이 나오려면, 어느 한 학문만이 옳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학문이나 이론만이 옳을 수 없다. 특정 학문은 현실의 한 단면을 뜯어내어 자신의 이론 틀로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답’은 여러 학문이 살핀 내용을 모은 그 어딘가에 있겠지만, 우리의 인식적 한계로 인해 그 답에 가닿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고 힘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도입된 것이 ‘의료윤리’였다. 의료윤리는 여러 학문과 견해들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렇기에 여러 관점과 가치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몇가지 원칙으로 설정하고 그곳으로부터 답을 도출하는 방식을 취했다.
 
예컨대 의료윤리는 환자 자율성이라고 하는 원칙이 모든 당사자가 합의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의학도, 환자도, 사회도 환자가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합의하리라고 본 것이다. 이런 합의점을 찾은 다음에, 의료윤리는 다시 사례에 접근하여 해결책을 논의한다.
 
이를테면 연명의료 결정의 문제에서 환자 자율성의 원칙은 의료인으로 하여금 말기 환자에게 연명의료 중단의 의사를 묻는 절차를 도출한다. 환자는 상황을 분명히 인지할 것, 외압 없이 자유로이 결정을 내릴 것, 가능하면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의향을 밝혀놓을 것을 요구받으며, 따라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작성이 추천된다. 사회는 이런 절차를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하여 현실성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보편 윤리학과 의료윤리학은 꽤나 다른 학문이다. 철학-윤리학이 추상적인 층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답을 찾는 것(따라서 철학적 탐구가 그 핵심 방법론이 된다)과 달리, 의료윤리학은 갈등 상황에서 합의 가능한 구역들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의 여러 보건의료 관련 논의들은, 그리고 현재의 의정갈등은 의료윤리를 살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도, 의사 쪽도 마찬가지다. 의료윤리를 한다고 말하는 나는 늘 벽에 부딪힌다. 아무도 소환하지 않았는데 허공에서 떠드는 셈이니. 아, 소환은 한다. 자신들이 윤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믿으니까. 

지금이라도 의료윤리를 

일전에 정부가 의료윤리 운운하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다. 위의 이유 때문이다. 의료윤리는 정부나 사회의 견해를 관철하는 논리도, 의사의 말이 옳다고 확증하는 작업도 아니다. 벌어진 보건의료의 문제에서 각자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관점에 차이가 없으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슬프지만, 나는 지난 석 달간 어디에서도 이런 노력을 찾아보지 못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사 쪽은 의사 쪽대로 자신의 관점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기만 했을 뿐, 어느 쪽도 상대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더구나 환자 쪽은 이런 장에서 완전히 논외가 되어 의견 개진이나 논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왔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변화될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의대증원이나 정책적인 방향을 놓고 전문가적 견해와 보건 시책에 차이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서로가 전제하는 의료적 상황, 심지어 문제 인식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답을 내놓을 수 있나. ‘2천명’의 과학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으며, 앞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니 그것은 과학이 결정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향후 의사 부족 또는 과잉을 추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추산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 그것은 여러 관점과 견해, 고려 사항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문제여야지, 어느 한쪽이 힘으로 밀어붙여서 관철할 문제여선 안 된다.
 
따라서 장외에 있는 의료윤리학자로서 나는 외친다. 우리, 이제라도 윤리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는 없나. 언제까지 힘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놓아둘 것인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미래 의사수요' 연구한 서울의대 교수 "의·정, 문제의식은 같아"

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2024. 5. 14. 19:09

14일 홍윤철 서울의대 교수 발제…"2천이란 특정수치 제시, 과학적이지 않아"
"정부, 4대과제 중 의사증원 가장 강조…의료계와 우선순위 재조정 합의해야"

14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행정대학원 한국정책지식센터에서 '의사 정원 어떻게 해야 하나?'란 주제로 열린 정책 & 지식 포럼에서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여부를 확정할 법원 결정이 목전에 다가온 가운데 정부가 '증원 근거'로 내세운 연구보고서 저자가 "2천 명이라는 특정한 숫자를 (정원 증원규모로) 제시한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법정까지 가서 반목 중인 정부와 의료계의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며, 필수의료 인프라 문제 등을 풀기 위한 정책 추진순서에 양측이 합의해야 한다는 해석도 내놨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홍윤철 교수는 14일 서울대 행정대학원 한국정책지식센터가 '의사 정원, 어떻게 해야 하나?'를 주제로 개최한 포럼에서 발제자로 나서 이같이 밝혔다. 홍 교수는 보건복지부가 '의대 2천 명 증원'의 근거자료로 내세운 3가지 보고서 중 하나인 '의사인력 적정성 연구'(2020)의 저자다.
 
정부는 현재 의대증원 효력 집행정지 관련 항고심을 심리 중인 서울고등법원의 석명 요청에 홍 교수의 보고서를 포함한 50여 가지 자료를 지난 10일 답변서로 제출했다.
 
홍 교수는 '2035년이면 의사 1만 명이 부족하다'는 추계를 토대로 의대 정원을 연 2천 명 늘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정부의 입장을 두고 "과학적이지 않다"며 "추계는 과학적이어야 하는데, 어떤 한 포인트를 찍어서 하는 추계는 그 자체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앞서 홍 교수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2천 증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 왔다.
 
그러면서 "정부의 의사 수 추계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면 그걸 고려해서 미래 의사 수를 추계해야 한다"며 "법원이 과학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홍 교수는 또 "우리나라의 절대적인 의사 수가 (정부가 비교 지표로 거론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적은 것은 맞지만, 국민 의료 이용량은 OECD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수준"이라며 국내 의료 상황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어 "의료서비스 제공량이 많은데 어떻게 제공자(의사)가 적다고 할 수 있겠나.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 의료의 진실을 알 수 없다"며 "우리나라 의료 서비스는 매우 독특하게 행위별 수가제에 기반해 의사가 의료행위를 많이 해야 수입이 늘어나는 문제가 있다"고 분석했다.
 
행위별 수가제는 그간 업무부담에 비해 보상은 현저히 낮은 필수의료과(科)의 인력 유출을 야기하는 고질적 문제로 꼽혀 왔다. 진찰이나 검사, 처치 등 개별 행위마다 의료서비스 가격을 매겨 대가를 지불하다 보니, 의학적 판단에 근거하지 않은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부풀린다는 지적이 많았다.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 발제 자료 중 발췌. 서울대 행정대학원 한국정책지식센터 제공
 
홍 교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의료행위의 절대 횟수보다는 환자의 치료 결과가 관련보상 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위가 아닌 성과, 결과 등 가치 기반으로 지불체계가 바뀌어야 한다"며, 가령 이같은 경우 1차 의료기관과 종합병원, 대학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이 환자 치료를 위해 팀워크를 얼마나 잘 발휘했느냐 등이 보상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정부도 고난도·고위험 의료행위 등에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는 대안적 지불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홍 교수는 이를 두고 "정부와 의료계의 문제의식이 같은데 싸우는 이유는 정책 우선순위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중요시하는) 순서가 다를 뿐 내용은 사실상 같아 '왜 이리 치열하게 싸워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의료개혁 4대 과제 중 정부가 '의료인력 확충'(의대 증원)을 가장 강조하면서, 정책패키지의 다른 과제들은 상대적으로 밀려나고 의·정 갈등도 더 크게 불거졌다는 문제의식이다.
 
홍 교수는 "정부가 4대 개혁과제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4가지를 다 할 수 있는 방안을 가져왔어야 했다"며 "정부는 의료계와 정책 추진 우선순위 재조정에 합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즉, 큰 틀에서 양측이 의료개혁 방안을 먼저 합의한 뒤, 이를 바탕으로 의사 증원도 재논의하자는 제언이다. 

홍윤철 교수 발표자료 중 발췌. 서울대 행정대학원 한국정책지식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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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 leunj@cbs.co.kr 

"사법부 간 의대증원, 정부 갈등관리·정책입안 역량 부족 방증"

권지현2024. 5. 15. 08:28

'절차적 정당성' 두고 이견…"협의 부족" vs "여러 정권서 공론화"
"의사집단, 능동적으로 사회의제·대안 제시할 역량 길러야"

'의대 증원 반대' 항의 팻말 지나는 이주호 부총리 (전주=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전공의들이 3주 넘게 진료실에 복귀하지 않은 13일, 전북대학교를 방문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의대 증원에 반발해 팻말을 든 의대 교수들 앞을 지나고 있다. 2024.3.13 warm@yna.co.kr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의과대학 증원을 놓고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정부가 증원 과정에서 갈등을 관리하며 정책을 입안하는 역량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천명'이라는 증원 숫자의 적정 여부를 떠나 과정이 적정했는지를 따져볼 때 정부가 의사를 포함한 이해당사자의 이견을 조율해 정책적 합의까지 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의대 증원이 정치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풀리지 못하고 사법부 판결을 바라보게 된 것 또한 증원 과정에서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정부뿐 아니라 의료계와 의사 단체 역시 대내외적 정책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상호 설득·협의와 학습 빠져…정부 동원 방식 대신 거버넌스 패러다임"
 
15일 학계 등에 따르면 정부·시장·시민사회 간의 협력을 중심으로 보건복지서비스 생산에 대해 연구하는 강창현 단국대학교 공공정책학과 교수는 "이번 의대 증원 과정에는 진정한 상호 설득·협의 과정이 빠졌다고 본다"며 "과거와 달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던지고 추진하는 '동원 모형'은 현시점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거버넌스 패러다임' 개념을 설명했다. 의사결정 체제에서의 거버넌스란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문제 해결에 협력하는 의사 결정 구조다. 다수의 정책학자는 21세기의 국정 패러다임이 정부 주도의 하향식에서 민간이 참여하는 네트워크인 거버넌스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정책 수용 집단 또는 대상으로 분류됐던 민간 부문의 역량이 과거와 달리 굉장히 높아져서 정부가 '이렇게 하자'고 하는 방식으로는 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운 환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의대 증원은 국민이 지지하는 정책이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뤄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수단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정부가 소홀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의 경우 공공의료 체계인 국민보건서비스(NHS)를 개혁할 때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공청회를 개최한다는 점을 예로 들며 "정부가 보건의료 정책의 상위 로드맵, 소위 '마스터플랜'이라는 것을 정하고 공론화를 거쳤어야 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 방송 지나치는 의료인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9일 오전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인이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이 생중계되고 있는 텔레비전을 지나치고 있다. 2024.5.9 ksm7976@yna.co.kr
 
"자유방임 의료정책, 거버넌스 작동 못시켜…제도 속으로 의사 끌어들여야"
 
보건정치학을 연구하는 정웅기 미국 존스홉킨스대 박사는 근본적으로 "한국의 보건의료 정책은 '자유방임적'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보건의료 거버넌스를 작동시킬 역량이 없고, 공급자(의사)를 통제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고 봤다.
 
한국의 보건의료 서비스는 개원의와 재벌 병원 등 민간이 주도해 왔고, 저수가-저급여-저보험료 체계가 확립되며 의사들은 비급여 진료를 통해 이윤을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간섭하느냐'는 의사들 말이, 실은 문제의 핵심을 짚은 것"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정 박사는 "의사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한 정부와 관계를 형성할 유인이 없다"라며 의료 관련 정책에 대한 의사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이들이 이해관계를 표출할 제도적 장을 열어주는 동시에 책임성을 부과하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 박사는 그러기 위해서는 수십년간 쌓여온 의사들의 '정부불신' 타파가 우선이라고 했다.
 
그는 불신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의 내실화를 들며 "(환자 등)각계의 의견을 대변하는 전문성 있는 민간 연구자들로 '작업반'을 만들고, 이들이 숙의하고 연구한 결과물에 대해 각 집단 대표가 토론을 통해 결정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비어있는 대한의사협회장 자리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024년 제1차 보건 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참석하지 않은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의 자리가 비어있다. 2024.2.6 jjaeck9@yna.co.kr
 
"정부, 여러 정권 걸쳐 증원 공론화해…절차적 정당성 충분히 확보"
 
반면, 의대 증원은 오래된 논쟁거리인데다 긴 시간 동안 정부가 이미 충분히 공론화했다는 시간도 있다.
 
정형선 연세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사태만 놓고 보면 의대 증원 추진 과정이 거칠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대 정권은 여러 번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증원을 추진해 왔고 그때마다 의사들을 포함한 이해관계자들과 공청회 등을 통해 논의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단체는 역대 정권이 추진한 각각 다른 규모의 의대 증원을 똑같은 근거로 똑같이 반대했다"라고 지적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한 직역, 한 조직의 의견을 이렇게까지 들어 주는 경우가 있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사를 충분히 겪은 정부가 최종적으로 증원 규모를 결정할 때 이해당사자인 의사단체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정 교수도 정부가 보건의료 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역량이나 의사들과 협상할 힘을 잃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는 그 원인으로 '밀실 합의를 통한 의사 수 감원 정책'을 지목했다.
 
특히 의약분업 사태 당시 의사 수를 줄여 의료계를 '달래는' 것처럼 밀실 합의로 이뤄지며 의사들의 희소가치와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고, 정부가 의사들의 주장을 제어할 수단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러한 관점에서 더 이상 의대 증원을 미룰 수가 없다고 강조하며 "협상장에 나서는 의사단체 대표들도 '내부 표심을 얻기 위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해 회원들을 위한 선택을 받아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모두 지쳐가는 순간'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14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내원객들이 담요를 덮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4.5.14 ksm7976@yna.co.kr
 
사법판결에 명운 걸린 의대 증원…"의·정, 정책으로 푸는 게 바람직"
 
전문가들은 정부와 의료계의 이러한 정책·갈등관리 역량 부족으로 의대 증원이 결국 법원 판결을 바라보게 된 데 안타까움을 표했다.
 
강창현 교수는 보정심 등 정부가 의대 증원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만든 협의체를 "절차상 요건을 갖추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고 보고 "정부가 지금이라도 목표치를 조정해 시간을 두고 정책 협의를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강 교수는 "정책은 직관적으로 결정되기도 하며, 과학적 근거가 있든 없든 법원이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할 일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정웅기 박사는 정부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 관련 논란을 두고 "과정에서의 정당성은 적극적인 소통·이해당사자와의 협의·투명성 등으로 구성되는데 보정심이나 의정협의체는 그 요건들을 충족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그렇지만 의사 집단의 정책역량 또한 부족했다"라고 평가했다.
 
정형선 교수는 "최근 의사들이 증원 관련된 사안을 다 사법부로 가져가고 있는데, 정부의 정책적 결정 하나하나를 사법부에서 판단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정책이 제대로 되려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정부는 의대 정원을 규제하고 관련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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