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무궁화9719 2023. 12. 9. 13:42

‘서울의 봄’ 이후 5·18…“발포 명령 실질 결정권자는 전두환”

5·18진상조사위 조사 결과 요약문 발표
“최세창, 윗선과 통화 후 ‘위급하면 발포’”

기자정대하
  • 수정 2024-01-13 00:31
  • 등록 2024-01-12 15:12
영화 ‘서울의 봄’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윗선에 통화를 한 후 ‘위급상황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했다.”
 
지난 11일 광주에서 열린 ‘오월의 대화’ 시민토론회에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발표한 조사활동 요약문의 내용이다. 조사위는 1980년 5월20일 광주역 앞 첫 집단발포와 관련한 김길수 3공수여단 16대대장의 진술을 확보했다. 진술 내용은 “(1980년 5월20일) 이날 밤 실탄 배분과 발포 명령은 최 여단장(준장)이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윗선의 명령을 받아 행하였다”는 것이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1997년 12·12 및 5·18 검찰 수사에서 “(실탄 지급 명령은)대대장의 건의를 받아 제가 내린 결정이며, 위협용으로 사용을 하고 그 밖의 목적이 있을 때는 사전에 보고를 하고 사용을 하라고 했다”고 답변한 바 있다.
 
3공수여단은 1980년 5월20일 광주에 추가로 투입돼 광주역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던 부대다. 이 집단발포로 시민 5명이 숨졌다. 계엄군이 시민군들한테 군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제시한 자위권 보유를 천명(계엄사 5월21일 저녁 7시30분)하기 전이다.
 
1980년 8월6일 최규하 대통령이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는 전두환에게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자위권 보유 천명 전 발포를 명령한 ‘윗선’은 누구일까? 윤영기 보안사 본부대장은 조사위에 “전두환이 광주에 현장 출동한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직접 소통했다”고 진술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이끌던 군내 사조직 정치군인집단이다. 육사 13기인 최세창은 하나회의 핵심으로 12·12 당시직속 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김창세역의 모티브 인물이 최세창 3공수여단장으로 알려졌다.
 
최세창 3공수특전여단장의 검찰 진술. 검찰 수사 기록 갈무리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전 실탄이 배분됐다는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계엄군은 이날 아침 8시 전교사 사령관이 광주와 전남, 전북에 진도개 하나를 발동했다. 조사위는 “진도개 하나 발령은 실탄 분배(1인당 60발),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상황으로 발포와 직결됐다”고 밝혔다. 계엄군은 진도개 하나 발동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 일부 병력에 실탄이 분배됐고, 위협사격을 한 뒤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조사위는 “5월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사격 통제가 없이 30여분 동안 고의적인 발포를 한 것은 자위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조사위는 1980년 5월20·21일 발포엔 5·18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군 정식 명령 계통을 제치고 발포명령 등 작전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진술도 확보했다. 그간 전두환·이희성·주영복·황영시·정호용 등 5명은 광주항쟁 마지막 날인 5월27일 새벽 시민들을 학살한 혐의(내란목적살인죄 등)로 처벌을 받으면서 발포 명령을 포함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기간의 발포 책임자를 지목하지 못했다.
 
한겨레가 2019년 보도한 육군 제2군사령부(영호남·충청지역 관할)의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나오는 ‘전 각하’ 메모. 한겨레 자료 사진
 
이용린 당시 보안사 정보처 정보과장은 조사위에 “진압작전의 지휘는 계엄사령관, 특전사령관, 전교사사령관, 20사단장이 했다. 그러나 총체적인 책임은 전두환 사령관의 책임이다. 12·12 이후로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박경석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은 “발포명령은 문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전두환의 지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발포는 보안사 계통에서 지시가 간 것이다. 5·18의 총책임자는 만인이 아는 것처럼 전두환이다”라고 조사위에 진술했다.
 
전두환이 5·18 당시 작전에 관여·개입한 정황도 확인됐다. 조사위는 “전두환이 80년 5월24일 언론사 편집부장 간담회에서 ‘오늘도 무기반납을 저녁 6시까지 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나로서는 이틀 정도 더 기다리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무산되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점도 정황 증거로 제시했다.
 
지난 11일 오후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 주최로 광주 전일빌딩245에서 열린 5·18진상조사위 조사활동 관련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정대하 기자
 
육군 2군 사령부가 작성한 문건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의 5월21일 회의 내용에 ‘전 각하께서 초병에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이라고 기재돼 있다. ‘전 각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의미한다. 또 5월23일 회의 내용에 ‘24:00~03:00 어간 작전’에 대해 ‘각하께서 굿 아이디어’라고 기재된 사실도 확인됐다. 조사위 관계자는 “필적 조사를 통해 2군 작전 관련자의 글씨체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사위는 17개 직권조사 과제(4건 병합) 중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발포경위 및 책임소재’ 등 6건을 전원회의에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조사위는 “구체적인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를 주력으로 살폈으나 진술 조사와 기록조사를 통해서도 구체적인 특정을 할 수 있는 입증자료가 부족해 결국 ‘진상규명 불능’ 결정했다”며 “‘불능 결정’은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일 뿐 사건이 없었다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불능 처리된 과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유를 보고서에 적겠다”고 말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계엄군. 5·18기념재단 제공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5·18 희생자 ‘파묘’ 후 26기 이전…전두환 지시 정황 확인”

5·18조사위, 신군부 ‘비둘기 시행 계획’ 공개
관변단체 내세워 5·18 희생자 ‘강제 이장’
“각하 면담시 이전 검토”…전두환 지시 확인

기자정대하
  • 수정 2024-03-27 22:12
  • 등록 2024-03-27 16:49
1980년 5·18항쟁이 끝난 뒤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주검을 광주 북구 망월동 시립묘지로 옮기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시민군 서호빈(당시 20살·전남대 공과대 재학)은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항전하다 총을 맞고 숨졌다. 서호빈은 광주 망월동 5·18묘지에 묻혔다. 전남 여수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아버지는 당국의 압력에 시달렸다. “자식을 두 번 죽이는 것 같다”며 이장을 꺼렸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1984년 1월19일 아들의 묘를 여수의 한 공동묘지로 이장했다. 서호빈의 유족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 면담에서 “수사기관이 수시로 찾아왔고, 시청과 교육청을 통해 ‘이장하지 않으면 사표를 내라’고 압박했다”고 진술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압 뒤 광주 망월동 시립묘지에 묻혀있던 희생자들의 주검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도록 한 ‘최종 지시자’는 전두환으로 드러났다. 전두환 반란세력은 총칼로 권력 장악을 마무리지은 뒤 민간단체를 앞세워 5·18유족들을 회유하고 겁박해 26구의 주검을 망월동 묘지 밖으로 옮기게 했다고 5·18조사위는 결론 내렸다.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망월동 공원 묘지 이전 계획 보고서. 조사위 제공
 
27일 5·18조사위의 ‘국가권력 등에 의한 피해자 탄압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당국은 1980년 5월 광주 북구 망월동 시립공원묘지 3묘역에 안장됐던 126기의 묘지 가운데 26기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묘지 이장은 1983년 3월부터 84년 9월까지 시행됐다. 이런 사실은 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가 1983년 2월에 작성한 ‘비둘기 시행 계획’ ‘유족묘지 이전대책 보고’ 등의 문서를 5·18조사위가 입수해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조사위는 “이 문서를 보년 ‘1982. 3.5 전남 도지사 각하 면담시 공원묘지 이전 검토 지시’라는 문구가 나온다”며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전남지사 김창식을 만나 묘지 이전을 직접 지시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라고 밝혔다. 이후 전라남도는 1982년 7월30일 내무부 장관(노태우)에게, 505보안부대장은 그해 8월25일 청와대 정무2수석에게 묘지 이전 계획을 각각 보고했다. 

망월동 5·18 희생자 묘지 이전 계획은 ‘비둘기 시행 계획’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전두환 세력은 망월동 묘지가 5·18 학살을 상징하는 정치적 공간이 될 것을 우려해 강제 이전을 추진했다. 보안사령부의 전남지역 예하부대인 505보안부대는 사단법인 전남지역개발협의회(현 광주전남발전협의회)라는 관변단체를 내세워 묘지 이장을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것처럼 꾸몄다.

 
5·18항쟁 직후 광주 망월동 구묘역. 한겨레 자료 사진
 
전국의 기업 대표 등을 상대로 ‘5·18 치유’ 명목으로 기금을 모았던 전남지역개발협의회는 묘지를 이장한 5·18유족들에게 1천만원씩을 지급했다. 당시 이장됐던 주검 26기는 현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돼 있다.
 
정경자 조사위 팀장은 “공안기관이 협박과 회유를 통해 유가족들의 의사에 반해 묘지 이장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에서 심대한 인권침해 사례”라고 밝혔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계엄군 집단발포 전 시민군 무장? 광주 시민사회단체 반발

5·18조사위 보고서 논란…“일부 위원 반대, 불능 결정”

기자김용희
  • 수정 2024-03-14 19:03
  • 등록 2024-03-14 17:31
군은 전남 나주경찰서 반남지서 총기 탈취 시간을 1980년 5월21일 오후에서 오전으로 조작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광주
 
시민·사회단체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가 최근 공개한 조사보고서에 대해 5·18 진상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오월정신지키기 범시도민대책위원회(대책위)는 14일 성명을 내어 “5·18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 운동까지 벌여서 탄생한 5·18조사위가 무능력과 무기력을 넘어 5·18을 심각하게 왜곡한 조사결과 보고서를 펴냈다.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5·18조사위는 조사 과정과 내용에 대한 광주·전남공동체와의 지속적인 보고와 소통, 진실 규명을 위한 의견수렴을 거부했다”며 “그 결과가 1997년 사법적 판결을 통해 명확하게 정리된 ‘국가의 잔인한 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정의로운 저항’이라는 5·18의 역사적 의미까지 왜곡했다”고 했다.
 
대책위는 5·18조사위가 5·18 당시 광주시민의 무기고 습격 사건 보고서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전 조직적으로 준비한 사건으로 기술하며 군과 경찰의 조사 결과를 뒤집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수구·보수세력들이 지속해서 유포한 ‘폭도론’, ‘북한 개입설’ 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또 5·18 당시 군·경찰의 피해 조사보고서에는 5·18 당시 공수부대의 잔인한 학살 행위가 광주시민들의 과격 시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기술해 또 다른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이번 조사가 학살자를 희생자로 만들었고 5·18의 역사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했다고 규탄했다. 대책위는 “국민의힘은 5·18 망언을 일삼았던 도태우 변호사를 위성정당 비례대표 후보로 최종 의결했다”며 “이번 조사보고서는 향후 도 변호사 같은 사람들의 정치적 진출을 돕고 5·18 왜곡에 대한 핵심 근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16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대국민 보고회를 열고 있다. 5·18조사위 제공
 
이에 대해 5·18조사위 쪽은 이날 “전남 일원 93개 경찰관서 피습과 53개 무기고 피습 사실을 경찰·군기록, 수사기록, 대인조사 등을 통해서 무기고 피습이 21일 오후 1시30분 이후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며 “그런데 일부 위원 등이 당시 남평지서장이 1980년 당시의 진술을 번복해 ‘5월21일 오전에 카빈총 8정 등 무기가 피탈되었다’고 진술한 조사 결과를 배제하고 남평지서의 무기 피탈 시점을 오후로 특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해 전원위원회에서 합의하지 못해 ‘불능 결정’됐다”고 밝혔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5·18 희생자 첫 총상자 바꾼 조사위…발포경위 실체규명은 부실

김안부씨 사인 타박상·자상→총상 변경
방위병 3명 중 1명만 군인희생 분류 혼선

기자정대하
  • 수정 2024-03-07 08:38
  • 등록 2024-03-07 07:00
김안부의 주검이 발견된 뒤 광주서부경찰서 공의 양민의원에서 처음 작성한 검안서(맨 왼쪽)와 광주지검의 검시 보고서.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지난 1일 공개한 진상조사 보고서가 일부 희생자의 사인이 총상으로 바꿔 분류된 것과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방위병들의 사인 분류도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김안부(사망일 5월19일), 정지영(5월21일), 김경환(5월20일) 3명이 애초 타박상 또는 자상 사망자에서 총상 사망자로 재분류됐다. 조사위는 김안부가 5월19일 밤 10시께 광주공원 인근 전남양조장 공터에서 타박상을 입고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맹관총상(총알이 박힘)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런 조사위 결론은 김안부의 주검이 발견된 뒤 광주서부경찰서 공의 양민의원이 최초 작성한 검안서와 다르다. 최초 검안서에 김안부는 타박상에 의한 사망으로 나온다. 조사위는 “당시 검시에 참여한 의사와 법의학자 등이 논의한 결과 우전두부에 1×1㎝의 사입구가 존재하는 맹관총상이 인정됐다”고 밝혔다. 조사위 결론에 따라 5·18 당시 최초 총상 사망자 발생 시각은 24시간 앞당겨졌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제는 조사위에서 당시 7공수특전여단 주둔지에서 발생한 김안부 총격 사건에 대해 명확한 실체 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사위원 일부는 “최초 총상 사망자로 새롭게 밝혀진 인물(김안부)과 관련한 조사 내용도 부실했다”며 발포 명령 관련 조사의 진상규명 불능 사유로 언급했다.
 
5월21일 숨진 정지영도 광주지검의 사망자 분석 개요에는 타박사로 나오지만 이번에 총상 사망으로 재분류됐다. 정지영은 5월21일 오전 11시 도청 앞에서 경찰 헬기에 실려 화정동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고인의 친형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그해 6월2일 전투교육병과사령부 101사격장에 가매장된 주검 14구 사이에서 동생을 찾았다. 당시 동생 주검에는 귀 뒷부분을 가격당한 흔적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조사위가 이번에 사인을 재분류하면서 유족 의견을 듣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방위병 3명의 신분 분류도 제각각이다. 조사위는 보고서에서 계엄군 총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희생자 166명 가운데 당시 방위병이었던 손광식을 제외했다. 손광식은 집에서 소속기관으로 출퇴근하던 대체복무 사병이었는데, 5월22일 오후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인근에서 20사단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숨졌다. 손광식은 집으로 퇴근하다가 계엄군 총격에 사망한 만큼 처음엔 민간인 희생자로 분류됐으나 1980년 7월 군인 사망자로 정정돼 현충원에 안장됐다. 손광식이 군인 사망자로 분류되면서 애초 22명이었던 군인 피해자는 23명으로 늘었다. 문제는 5·18 당시 희생된 방위병 김형관과 김정선은 지금까지 민간인 희생자로 분류돼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조사위 쪽은 “정부의 군인 사망자 분류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5·18 사망자 검시내역 총상 사망자 분석 개요’(1989년 2월23일)엔 방위병 손광식이 민간인 희생자로 나온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같은 사망자가 두 장소에…시간 쫓겨 봉합 서두른 5·18 조사

5·18조사위, 17건 중 15건 발표

기자정대하
  • 수정 2024-03-06 08:45
  • 등록 2024-03-06 05:00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주도했던 전두환씨가 사망한 가운데 2021년 11월23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 옛 5·18묘역 박현숙씨의 비석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박현숙씨는 광주 주남마을 마이크로버스에 탔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광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지난 1일 개별 사건 진상규명 보고서를 공개했지만, 그동안 진압군 쪽과 생존자 쪽 진술이 일치하지 않았던 광주 주남마을 미니버스(마이크로버스) 총격 사건 등의 진상은 여전히 논란 상태로 남아 있다. 피해자들은 조사위가 조사 종료 시한에 쫓겨 기록과 진술에 대한 면밀한 검증 없이 서둘러 사건을 봉합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광주 송암동과 광주교도소 암매장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조사위는 지난 1일 개별 보고서 17건 가운데 13건을 공개한 뒤 4일 추가로 2건을 공개했다. 앞서 조사위는 조사 과제 17건 가운데 11건은 ‘진상규명’으로, 6건은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표 참조) 5·18 이후 학살 세력의 은폐 시도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고 하지만, 4년의 활동을 통해 조사위가 내놓은 성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23일 광주 주남마을 마이크로버스 총격 사건과 같은 기종의 차량. 조사위 제공
 
조사위는 1980년 5월23일 발생한 주남마을 마이크로버스 사건과 관련해, 당시 총격 현장에서 살아남은 양민석과 채수길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총으로 사살한 군인 1명과 동행자 1명 등의 신원을 처음 밝혀냈다. 조사위는 “마이크로버스 피격으로 양민석, 채수길, 김재형, 김정, 김현규, 손옥례, 고영자, 김남석, 김윤수, 김춘례, 박현숙, 백대환, 황호걸 등 13명이 사망했고, 홍금숙만 생존했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이 사건 발생 시각으로 진술해온 오후 2~3시를 오전 11시로 바로잡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건의 조사 결과가 그동안 나온 기록 및 생존자·목격자 진술과 달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5·11연구위원회’ 문서를 보면, 홍금숙은 “5월23일 오전 9시30분쯤 지원동을 지나 화순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산 쪽에서 위협사격이 있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문서엔 탑승자가 ‘10명 이상의 남자와 여자 1명’이라고 적혀 있고, 또 다른 기록엔 “오후 2~3시 사이였고 18명(여성 4명)이 있었다”는 진술이 담기기도 했다. 이에 대해 허연식 조사위 과장은 “군인 증언과 군 자료 등을 통해 마이크로버스엔 17명이 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주검은 13구만 발견됐다. 사망한 채수길과 양민석이 애초 버스에 탔던 17명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선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마이크로버스 총격 사건의 존재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됐다. 당시지원동에서 꽃집을 운영하던 김종화(77·한겨레 2021년 5월18일치 11면)씨는 5월23일 오전 8시30분~9시15분 마이크로버스 총격이 있었으며, 자신이 주검 10구(여성 2명)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총격 뒤 숨진 고영자(당시 26살)의 신분증을 확인해 일신방직에 고인의 죽음을 알렸다고 진술한 바 있다. 김씨가 지목했던 마이크로버스는 길에 넘어져 있었고, 홍금숙 등이 탔던 마이크로버스는 전복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마이크로버스 총격 사건은 2건 이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사위 조사 결과와 달리 고영자·김춘례 2명은 홍금숙과 같은 버스에 탄 희생자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조사위 쪽은 “총격 사건 목격자의 증언을 들었지만, 사실과 달랐다”고 밝혔다.
 
주남마을 인근 지원동 구급차(앰뷸런스) 운전자 사망 사건 조사 결과도 논란을 부른다. 조사위는 행방불명 의혹이 제기됐던 앰뷸런스 운전자가 장재철씨이며, 사망 시각도 5월23일 오후 3시라고 특정했다. 하지만 장씨는 앰뷸런스 운전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5·18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의료반 차량 운전자였던 장씨는 5월23일 지원동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했다가 밤 9시쯤 총격을 받아 사망했고 이튿날 주검이 전남도청으로 옮겨졌다.
 
1980년 5월28일 앰뷸런스 차량 안 운전자가 사망한 채 방치돼 있다는 내용의 광주 동구청 상황일지.
 
조사위 조사 결과는 광주 동구청이 작성한 상황일지와도 차이를 보인다. 일지를 보면,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마무리된 직후인 5월28일 ‘(지원동)동사무소 옆 앰브런스 차내 1명 사망자 방치’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조사위 쪽은 “5월28일 발견된 앰뷸런스의 운전자는 23일 사망한 장재철씨다”라고 했다. 하지만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장씨의 어머니를 만나 당시 정황을 들었고, 장씨는 23일 사망해 주검이 이튿날 도청으로 옮겨졌다. 28일 앰뷸런스 안에 또 다른 사망자 1명이 방치돼 있었다는 증언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원동 앞 구급차 운전자 사망 방치 사건에 대한 조사위 보고서에는 주남마을 마이크로버스 탑승 사망자인 손옥례의 이름도 등장해 혼란을 가중한다. 조사위는 “손옥례는 (다른 마이크로버스에 탄) 의료 봉사단(4명) 중 한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손옥례는 김재형, 김정, 김현규처럼 다발성 총상을 입었으며, 지원동에서 함께 옮겨져 검시된 것으로 보아 이들과 함께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었다. 하나의 보고서에 주남마을 마이크로버스와 앰뷸런스 총격 희생자들을 이중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허연식 조사위 과장은 “또 다른 미니버스 사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서 기록했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광주 남구 송암동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송암동 주민 김복동씨와 생존자 류시열(79)씨가 증언했던 송암동 분뇨통에 쌓여 있던 9구의 주검(한겨레 2019년 5월16일치 1면)에 대해서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허연식 과장은 “송암동에서 군인 간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계엄군 주검들이 분뇨통 부근에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5·18 전문가들은 “(조사위 의견은) 당시 희생자 주검이 풀로 덮여 있었다는 목격자 진술과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1980년 5월21일 광주역에서 발견된 주검 2구를 리어카(손수레)에 싣고 옛 전남도청 앞으로 이동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조사위 제공
 
조사위는 광주교도소 인근 암매장 의혹과 관련해 12명의 희생자 명단을 확인했다. 5·18 직후인 1980년 5월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 진상조사’ 발표에서 ‘교도소 사건’으로 민간인 28명이 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조사위 쪽은 “국방부가 발표했던 28명 중 (이번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6명이 실제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구인지는 밝히지 못했다”고 했다. 조사위는 항쟁 초기 손수레에 실려 있던 주검 2구의 신원도 밝히지 못했다. 당시 시민들은 5월21일 광주역에서 주검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를 따라 전남도청 쪽으로 행진했다.
 
조사위는 올해 6월 말까지 정부와 국회 등에 종합보고서를 송부할 계획이다. 문제는 보고서 내용에서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조사위 활동 시한이 지난해 말 종료돼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암매장과 연결되는 사안 등을 유족이나 목격자들의 상호 확인 절차 없이 종합보고서가 나오면 안 된다. 종합보고서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면 그동안 진상규명을 위해 시민들이 기울여온 노력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암매장 의심 행불자 73명은 어디에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기자김용희
  • 수정 2024-03-06 07:44
  • 등록 2024-03-06 05:00
2022년 3월8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이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무명열사 유해를 발굴해 유전자 검사를 위한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5·18조사위 제공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행방불명으로 신고된 이는 모두 242명이다. 이 가운데 84명은 보상심의위원회에서 5·18실종자로 인정받았다. 이어 2002년 광주시가 실시한 ‘5·18행방불명자 소재 찾기 사업’을 통해 5·18 구묘역에 묻혀 있던 무명열사묘 11기 중 6기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실종자는 모두 78명으로 공식 정리됐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조사 개시 뒤 구묘역에서 신원이 확인된 6명을 제외한 신고자 236명(인정 78명, 불인정 158명)의 행적을 추적했다. 이 가운데 55명은 5·18 당시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이 중 행불자로 인정받은 3명에 대해서는 5·18 피해보상 업무를 담당하는 광주시에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 또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신원 불상 5명의 유골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행불자 가족 유전자와 대조 분석한 결과 신동남(사망 당시 30살), 김재영(당시 17), 양창근(당시 16)으로 확인했다. 기존 양창근 묘역에는 김광복(14)이 안장된 것으로 확인했다. 이 가운데 김재영·김광복은 행불자로 인정받은 상태였고 신동남은 가족들이 행불자로 신고는 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 5·18조사위는 행방불명자는 73명, 행방불명 불인정은 105명으로 결론짓고 ‘진상규명’으로 결정했다.
 
5·18조사위는 신동남의 사례로 봤을 때 이들 178명(행불자 73명+불인정 105명)이 5·18 당시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조사위는 이들이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광주·전남 곳곳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조사위는 계엄군 장·사병 전수조사를 통해 57명으로부터 가(암)매장을 지시하거나 실행했고, 직접 목격하거나 관련 사실을 들었다는 진술과 증언을 확보했다. 이들은 제3공수여단(전남대와 광주교도소 일원), 제11공수여단(주남마을 일원), 제31사단 해남대대(해남군부대 일원), 61훈련단 11병참선 경비대대(광주변전소와 31사단 일원) 소속이었다. 이 가운데 31사단 해남대대, 영암군 학산면 공설묘지, 화순 너릿재 터널 인근, 31사단 등 5곳에서 발굴조사에 나섰으나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조사 기간에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진행되는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262구, 해남대대 9구, 영암 공설묘지 6구 등을 발굴했지만 5·18과의 연관성은 찾지 못했다.
 
민간인 주검 소각설과 해양투기설에 대해서도 조사했으나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주 승화원과 광주 일곡화장장 시체 소각설에 대해서도 확인 작업을 벌였지만, 5·18 당시 계엄군 간 오인 사격으로 숨진 31사단 병사 3명과 검시를 마친 민간인 사망자 3명을 화장한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판단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