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9719 2023. 12. 2. 10:56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사건 

아던트뉴스
 2023.11.02 11:20:56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9시간의 일촉즉발을 그린 영화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계기인 12.12 군사 반란은 노태우,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이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 반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군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김성수 감독은 12.12 군사 반란 이야기를 모티브로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서울의 봄을 영화로 만들게 된 이유는 실제로 자신이 그날 밤 직접 들었던 총성을 꼽았다. 김성수 감독은 "그때 당시 한남동에 살았다. 육군참모총장 공관 건너편에 살던 친구네 집 옥상에서 들었던 총성이 영화를 만들게 된 출발점이다. 열아홉 살이던 그때 나는 20분간 간헐적인 총성을 들으면서 공포에 떨었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또한 서울의 봄에는 이름만 들어도 신뢰가 가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배우 황정민은 강렬한 존재감과 연기력으로 신군부 핵심 인물 전두광을 연기한다. 전두광은 권력 찬탈을 위해 군내에 사조직을 동원해서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황정민은 "출연을 결심한 이후 그 누구도 엄두 못 낼 만큼 제대로 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다"며 영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전두광에 대립하는 정우성은 군인 이태신을 맡았다. 그는 "배우로서 지닌 역량을 이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쏟아부었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로 완성하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오픈 더 도어'는 10월 25일 개봉해 상영 중이며 '소년들'은 11월 1일, '서울의 봄'은 11월 22일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1979년 12월 12일, 서울을 패닉에 빠뜨린 반란의 전말!

https://youtu.be/b1giBYJXiJs

권남영입력 2023. 12. 7. 11:30수정 2023. 12. 7. 13:16

 

1995년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MBC 유튜브 영상 캡처© Copyright@국민일보
 
12·12 군사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500만명을 넘기며 흥행 중인 가운데 극에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생애가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배우 정우성이 극중 연기한 이태신 역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육성이 공개돼 뭇사람들의 울분을 일으켰다.
 
장 전 사령관이 1995년 출연한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 방송 영상을 MBC가 6일 유튜브에 공개했다. 영상은 크게 주목받으며 단 하루 만에 170만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당시 방송에서 장 전 사령관은 “우리 국민들이 12·12와 같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쿠데타의 진상을 알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이태신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광(황정민) 보안사령관에게 끝까지 대항하는 것처럼 실제로 장 전 사령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일으킨 군사 반란을 막기 위해 최후까지 분투했다. 그러나 반란이 끝내 성공하면서 장 전 사령관은 신군부에 체포돼 육군 소장에서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극 중 인물인 이태신(정우성).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Copyright@국민일보
 
장 전 사령관은 “12·12는 반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총책임자였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주도한 반란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됐다. 나는 물론이고 계엄사령관이나 국방장관, 대통령께서도 감쪽같이 몰랐다”며 “내가 그날 연희동 저녁 식사에 유인돼 도착했던 시간이 오후 6시반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95% 이상 반란 성공이 보장된 상태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실제로 내가 (당시 상부에) 요구했던 병력이 한 사람이라도 동원됐나. 그 사람들이 전부 (쿠데타) 판을 다졌다”면서 “사령부에 들어가 보니 반란 진압 주력 부대인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세 단장들이 전부 경복궁 30경비단 반란에 가담하고 있더라. 그 사람들은 10·26 직후부터 한 달이 넘도록 충분한 반란 준비를 한 것이었다”고 돌이켰다.
 
1995년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MBC 유튜브 영상 캡처© Copyright@국민일보
 
장 전 사령관은 원망스러운 게 있다면 자신이 가장 원망스럽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하도 못나서 나의 소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요청했을 때 즉각 승인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짚었다.
 
장 전 사령관은 “(요청한 병력이 동원됐다면) 경복궁에 있던 반란군 4개 여단 정도야 일격에 끝장내버릴 수 있었다”면서 “감히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불경인 줄 알면서 말씀드리자면 국가의 궁극적인 반란 진압 책임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이 내란과 반란으로부터 국가의 헌정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장관 보고가 없었더라도 즉각 진압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12·12 이후 장 전 사령관 개인의 비극도 시작됐다. 장 전 사령관 체포 소식에 분개한 부친이 곡기를 끊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서울대생이던 아들은 같은 해 실종됐다가 낙동강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이 2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 간다’며 나가선 한 달 동안 소식이 없더니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발견 장소인 낙동강변 야산에 가보니 (아들 시신이) 완전히 얼어 거적때기로 덮여 있었다”며 “그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일그러진 아들 얼굴을 아내에게 보일 수 없어 제가 입김으로 녹이고 혀로 씻어냈다. 그때 눈알에서 사탕만 한 얼음덩어리가 나왔는데, 이놈이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고 가는 눈물인가 생각했다. 오늘날까지 제 가슴에 수만 개의 못이 돼 있다”고 토로했다.
 
1995년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배경화면에는 전두환 연설 장면. MBC 유튜브 영상 캡처© Copyright@국민일보
 
장 전 사령관의 아내는 생전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이 어쩌면 이렇게 비참하게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국가에 잘못을 저질렀거나 도적질을 했거나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잖느냐”며 “(한번은 남편에게) 농담으로 ‘당신은 왜 그쪽에서 회유할 때 넘어가지 않았느냐. 그쪽에 가 있었으면 득세하고 호의호식하며 가족이 잘지내지 않았겠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장 전 사령관은 “나중에 내가 그 사람들(신군부)을 반란죄로 고발했더니 (되레)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7번의 고소를 받았다. 그중에는 내가 그들에게 욕을 했다고 하극상이라는 것도 있었고, 오히려 내가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반란죄라는 것도 있었다”고 허탈해했다.
 
그는 끝으로 “군의 최고 가치는 국가가 요구할 때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이라며 “생명을 바칠 기회가 없을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국방 임무에 최선을 다해 충실히 임해야 한다. 쿠데타 하는 것이 군의 임무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장 전 사령관은 뒤늦게 명예를 회복해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과 국회의원 등을 지내다 2010년 78세로 사망했다. 그가 숨지고 2년 뒤에는 부인이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입력 2023.12.03 07:00

[영화 '서울의 봄' 참군인 쿠데타 이후 삶]
장태완(이태신) 수경사령관, 3대가 비극
정병주(공수혁) 특전사령관, 야산서 숨져
김오랑(오진호) 소령 아내, 실명 후 의문사

영화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이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보고를 받고 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1979년 12월 12일 일으킨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지난달 30일 기준 개봉 6일 만에 관객수 271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에는 반란군에 맞서는 정의로운 군인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과 그를 돕는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과 김준엽(김성균) 육군본부 헌병감이 있고, 죽음을 각오하고 이들을 따랐던 오진호(정해인) 소령과 병사들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12·12 쿠데타 당시 이들의 9시간만 극적으로 다뤄진다. 반란군에 맞섰던 실존 인물들은 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부친은 사망·서울대 수석 아들은 의문사

영화 '서울의 봄' 이태신(왼쪽 사진) 수도경비사령관과 실존 인물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속 이태신의 실존 인물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육군 소장)은 12ㆍ12 쿠데타 이후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1980년 2월 풀려나면서 강제 전역한 장 소장은 이후 6개월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고초를 본 후 충격으로 곡기를 끊었고 19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장 소장의 아들 성호(당시 20세)씨는 1982년 1월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행방불명됐다. 한 달 후인 2월 9일 장 소장의 고향인 경북 칠곡 낙동강 기슭 조부 묘소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소장은 꽁꽁 언 아들을 끌어안고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좀 더 따뜻하게 아들을 감싸 안아줘야 했다”며 오열했다.

 

장 소장은 1993년 펴낸 회고록 ‘12ㆍ12 쿠데타와 나’에서 “미칠 정도로 아들놈 생각이 나면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은 채 묘지로 달려가 대성통곡을 하고 그러다 지쳐버리면 그놈 옆에 누워 밤을 같이 새워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문 소리만 나면,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아들놈 생전 모습이 선하게 들어왔다. 그럴 때면 아들놈의 공부방으로 건너가 내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아들놈 머리털 한 줌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볼에 비벼대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절절한 심정을 밝혔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장 소장은 정계에 진출했다. 장 소장은 2002년 3월 "12ㆍ12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해 멸문지화를 입었던 사람으로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을 돕고 600만 재향군인들의 권익을 향상하겠다”며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장 소장은 2010년 7월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2년 뒤인 2012년 1월엔 그의 아내가 아파트 단지에서 숨진 채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994년 10월 30일 한국일보에 장태완 등 12·12 군사반란 당시 소신을 지켰던 군인들의 가족들에 대한 비보가 전해졌다. 한국일보 자료

숨진 정병주 특전사령관 주머니엔 버스 토큰 다섯 개

영화 '서울의 봄' 공수혁(왼쪽 사진) 특전사령관과 실존 인물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에서 반란에 가담한 공수여단에 배신감을 느끼며 유일하게 남은 9공수여단의 반란군 진압을 명령했던 공수혁 특전사령관의 실존 인물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육군 소장)이다. 정 소장은 반란군이 특전사령부로 그를 체포하러 올 때까지 저항했다. 당시 반란군의 무차별 총탄에 비서실장 김오랑(영화에서 오진호) 소령의 도움으로 살았다.

 

정 소장도 쿠데타 이후 전역했고, 방황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곁을 지켰던 김 소령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소장은 1985년 한 인터뷰에서 “내 몸이 성할 때까지는 김 소령의 무덤을 돌보고, 내가 죽고 나서는 자식들이 계속 참배할 생각”이라고도 밝혔다. 그는 서울 근교의 인적이 드문 야산이나 교외를 혼자 산책하며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곤 했다.

 

12ㆍ12 쿠데타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정 소장은 1988년 10월 행방불명됐고,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 경기 의정부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생전 군사정권으로부터 취업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곤궁하게 살았던 그는 주로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시신으로 발견됐을 때 그의 주머니엔 버스 토큰 5개가 있었다고 한다.

 

쓸쓸한 그의 죽음에 당시 장태완 소장은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정 소장은 그에게 “12ㆍ12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묘비에는 비명을 새기지 않았는데, 유족들은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고 사인을 밝힌 뒤에야 비명을 새기겠다고 밝혔다.

김오랑 소령 아내는 실명 이후 의문사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해인이 연기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오진호(왼쪽 사진)는 김오랑 소령을 모델로 삼았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은 영화에서처럼 정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의 6발의 흉탄에 맞아 숨졌다. 반란군은 그의 시신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했고, 김 소령의 가족들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특전사로 오래 복무한 김 소령은 후방 지역에서 편한 보직을 마다하고 시력을 잃어가는 병을 앓고 있던 아내의 치료를 위해 서울에 남았다. 12·12 쿠데타 발생 9개월 전인 1979년 3월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됐다.

 

김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는 쿠데타 당시 불안한 마음에 여러 차례 사령부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김 소령과 연결되지 않았다. 백씨는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이 내 전화를 받았을 때 사령관실 내 흩뿌려진 김 소령의 피를 청소하고 있었다고 한다”라며 “자신들의 상관의 피를 닦으며, 그 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차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통곡했다.

 

영화에서처럼 김 소령 부부와 같은 군인 아파트에 살며 선후배 사이였던 박종규 중령의 배신도 컸다. 정 사령관 체포에 앞장섰던 박 중령은 김 소령을 구하지 않았다. 이후 백씨를 만난 박 중령은 "김 소령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반항해 그 같은 변을 당한 것"이라고 되레 언성을 높였다. 김 소령은 암매장된 지 3개월 후 동료들의 항의로 1980년 2월 28일 서울국립현충원 제29묘역에 이장됐다. 그는 논란 끝에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홀로 남은 백씨는 당시 머물던 장교 관사에서 쫓겨났다. 남편의 죽음으로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백씨는 고향 부산에서 전화 상담 봉사를 하며 김 소령 구명 운동을 펼쳤다. 1990년 12월 신군부 세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려다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갑자기 소송을 포기했다. 이후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를 호소했다. 백씨는 1991년 6월 그가 봉사활동을 하던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백씨가 허리 높이의 난간에서 실족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의문사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백씨의 시신은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됐다. 김오랑 소령의 조카 김영진씨는 지난달 30일 YTN라디오에 출연해 "(백씨가) 다른 질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며칠 후 독일에 가서 눈 수술을 하기로 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진기 헌병감은 낙향...무고한 병사들도 희생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과 김진기 전 육군본부 헌병감이 12ㆍ12 군사반란을 다룬 드라마 '제4공화국'과 '코리안게이트'에 대해 인터뷰한 한국일보 1995년 11월 8일 자 기사. 한국일보 자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납치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대한 체포를 강력히 요청하고, 노재현 국방장관과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등이 모두 육군본부를 버리고 달아날 때 끝까지 남았던 김진기(영화에서 김준엽) 육군 헌병감은 쿠데타 이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이듬해 강제 전역당했다. 이후 반란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보기 싫다며 낙향했다.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6년 1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반란군과의 교전에서 숨진 병사들도 있었다.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던 정선엽 병장은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육군본부 지하 벙커에서 반란군의 공격에 스러졌다. 박윤관 일병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과정에서 발생한 교전에서 희생됐다.

원다라 기자 dara@hankookilbo.com
 

국방장관 도피는 사실

국방장관 오국상(김의성)은 노재현을 바탕으로 했는데, 그는 실제로 육군참모총장 관저에서 총격전이 있자 총소리를 듣고선 가족과 함께 미8군 사령부로 도피했다. 그는 국방부로 돌아왔다가 반란군에 체포됐다. 전두광 일당이 8공수 철수를 위해 신사협정을 제안한 후 역습하는 대목도 사실이다.

‘서울의 봄’ 참군인 정우성·정해인…실제 삶은 더 참혹했다 [영상]

등록 2023-11-27 10:32수정 2023-11-27 17:58

영화 속 사실과 허구는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네이버 영화 갈무리
 
개봉 5일 만인 26일 189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1979년 12월12일 주도한 군사 반란이 벌어진 9시간에 집중한 영화다. 영화가 사실을 바탕으로 두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허구적 요소를 가미하다 보니 관람 뒤 실제 역사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반란 세력과 군이 대치하거나, 반란 세력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당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진짜 있었던 일이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영화와 실제 역사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를까.
 
※기사 내용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네이버 영화 갈무리
 
역사 속 정우성은 이등병 강등…일가족은 풍비박산
 
영화에서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를 연상케 하는 극 중 전두광(황정민)이 이끄는 군사반란에 끝까지 맞선 사람으로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정우성),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 김준엽 육군본부 헌병감(김성균)이 부각된다. 실제 역사에서 전두환 세력과 맞섰던 세명의 장성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김진기 육군 헌병감을 모티브로 한 인물들이다.
 
특히 영화는 전두광과 맞선 이태신의 갈등을 축으로 진행되는데, 이태신이 신군부 세력들에게 “니들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탱크 몰고 밀고 들어가서 니들 대가리를 뭉개버릴 테니까”라고 호통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시사저널이 2006년 공개한 장태완 사령관의 ‘육필 수기’를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을 회유하려던 반란 세력과의 전화통화에서 욕설과 함께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영화 속 이태신은 반란군을 대하는 장태완 사령관의 언행과 태도가 대부분 반영된 인물이다.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반란 세력의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와 가족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서빙고분실에 고초를 겪고, ‘투스타’인 육군 소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됐다. 이후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됐다. 2년간 가택연금도 당했다. 아들의 처지에 실의에 빠진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엔 서울대생이던 장태완 사령관 아들이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아 의문사로 남았다. 일가족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이후 전두환·노태우씨가 법의 심판을 받으며 ‘참군인’으로 재조명된 그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이어갔다. 2010년 7월26일 79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2년 뒤 그의 아내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일촉즉발 광화문 대치는 없었다
 
영화는 서울 종로구 경복궁 앞(광화문 광장)에서 반란군과 이들을 진압하려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대치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태신은 비전투병까지 포함한 100명의 병력과 전차 4대를 끌고 와 반란세력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 한다. 산하 포병부대에 반란군이 근거지로 삼은 곳을 포격할 준비 하라고도 명령한다. 새벽이지만 도심 한복판이라 민간인들의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라 영화 속 긴장감은 최고조로 올라간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이런 장면이 벌어지진 않았다. 12월13일 새벽 장태완 사령관은 비전투병까지 소집해 출동을 준비하긴 했다. 그러나 참모들의 만류가 강했고, 반란세력이 육군본부를 장악하며 사실상 상황을 뒤집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출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육필 수기에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것은 끝난 것 같습니다. 사무실로 올라가서 사후 정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비서실장이)건의했다. 직감적으로 ‘이제 수도경비사령부는 내 부대가 아니고, 내 부하들이 아니다. 취임한 지 불과 24일 만에 나의 부대라고 믿었던 내 생각부터가 착각이었다’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비서실장 건의대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때가 12월 13일 오전 1시31분경이었다.

 

그는 이후 자신을 “수도경비사령관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권총 한 자루로 맞선 김오랑 소령
 
반란군이 공수혁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러 사령관실로 들이닥쳤을 때 이에 끝까지 맞서는 오진호 소령도 영화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진호 소령은 배우 정해인이 연기했다. “사령관님 혼자 계시면 적적하시지 않겠습니까”라며 사령관실을 떠나지 않고 끝내 쓰러지는 정해인은 앞서 연기했던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D.P.)’ 속 ‘안준호 일병’을 떠올리게 하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오진호 소령의 실제 모델은 김오랑 소령이다. 1979년 12월13일 새벽, 반란군에 가담한 3공수여단 10여명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다며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사령부에 전투 병력이 많지 않다 보니 정병주 사령관은 고립무원이었고,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만 곁을 지켰다. 김오랑 소령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엠(M)16 소총의 실탄을 여러발 맞고 숨졌다. 정병주 사령관도 왼팔에 총탄을 맞았다.
 
이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정병주 사령관은 강제 예편 뒤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다 행방불명됐다가 결국 1989년 3월 서울 교외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당시 한겨레, 중앙일보 등 여러 언론이 ‘의문의 죽음’ 이라 전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는 남편의 죽음 뒤 충격으로 시신경 마비가 되며 실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1991년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을 내렸다. 김오랑 소령 본인은 1990년에야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이 돼서야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당시 장교들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희생도 있었다. 영화에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를 지키다 숨진 병사는 당시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던 정선엽 병장이 모델이다. 전역을 3개월 앞둔 채 반란군과 맞서다 스러졌다고 한다. 반란군 부대에 속해 있던 박윤관 일병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숨졌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가 2013년 진행한 크라우드 소싱 기획 ‘전두환 재산을 찾아라’에서 볼 수 있다. (▶바로가기: https://hani.com/u/ODM4Mg)
 
영화는 끝났지만 진행 중인 역사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 개봉 다음날인 23일 서울 광화문에선 퇴역군인 단체와 일부 시민단체가 전두환 2주기 시민 추모행사를 열고 그를 추모했다. 전두환씨의 미납추징금은 아직도 920여억원이 남아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영화 보다가 화나서 울었다"... '서울의 봄'에 쏟아진 후기

 임병도입력 2023. 11. 26. 10:51

<서울의 봄>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 돌파, 챌린지 유행까지 

12·12 군사반란의 긴박했던 9시간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했다. 영화는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26일 기준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는 전두환을 모델로 한 전두광(황정민 분)과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델로 한 이태신(정우성 분)이라는 두 인물의 대결을 그린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서울의 봄 챌린지'도 유행하고 있다. '서울의 봄 챌린지'란 영화를 보고 스트레스 지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휴대폰 건강 관리 애플리케이션으로 측정하고 인증하는 것이다. <서울의 봄> 영화를 보면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인정하는 셈이다.
 
영화 보면서 화나서 운 적은 처음이야

 
  '서울의 봄' 챌린지 인증 이미지. 영화를 보는 동안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 온라인커뮤니티 갈무리
 
현재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에는 "<서울의 봄>에 대한 짧고 명확한 후기"라며 시간별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한 그래프가 올라오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히 상승한 그래프를 보면, 영화 후반부를 볼 때 이 관객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해당 게시물에는 인증숏과 함께 "영화 보면서 화나서 운 적은 처음이야"라는 글이 달렸고, 또다른 누리꾼들도 자신도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후기를 앞다투어 올리고 있다. 
"화딱지 나고 스트레스 받아서 머리 아픔, 타이레놀 먹고 앓아 누웠다. 러닝타임 긴지 모르고 봤는데 몰입력 심해서 긴 시간 동안 스트레스 받음."
"스트레스. 누구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나도 스트레스 받아서 기절할 뻔. 부관참시. 부관참시."
"난 각오하고 갔더니 그나마 나았어. 그래도 ㅂㄷㅂㄷ(부들부들)"
"나도 보고 화나서 집에 와서 타코야끼 씹음."
"나도 '빡빡이' ㅂㄷㅂㄷ하고 왔음."
 "끝나고 밥 먹는데 스트레스 받아서 밥맛 없어짐."

영화 후기와 댓글을 본 한 누리꾼은 "안 봐야겠다. 내 돈 주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는 답글을 달기도 했다. 또, "보고 싶은데 보다가 화병 날거 같아서 못보겠다"며 영화 예매를 주저하는 이들도 있었다. 
 
실화라 바뀌지 않는 결말에 더 화가 났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을 모델로 한 전두광의 모습. 그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는 말을 했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의 봄 챌린지'가 유행하는 것은 12·12 군사반란 주범 전두환과 당시 국방부장관 등 무기력한  군 수뇌부에 대한 분노가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또한 영화이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화라 결말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원망도 한몫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한 누리꾼은 "군사반란의 주범인 전두환이 자연사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난다"고 하기도 했다.
 
영화를 본 한 누리꾼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래도 본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글을 올렸고 다른 누리꾼들도 영화를 꼭 봐달라고 호소했다. 
"이거 제발 봐줘 우리나라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같음. 세세하게 잘 나옴."
"나도 OO이랑 같은 생각이야!! 많은 사람들이 봐 주면 좋겠다. 꼭 흥행해라."
"이거 진짜 스트레스 받는데 재밌고 잘 만든 영화라 다들 봤음 좋겠다."
"보고 왔는데 너무 화나서 '전대갈' 부관참시라도 하고 싶음. 그렇지만 많이들 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영화 더 많이 봐줘야 계속 나오지. 많이 가서 봐줘. 스트레스 받아도 우리가 기억하고 계속 잊지 않는 게 중요해. 극적으로도 재밌고 짜임새 있게 잘 만들었더라."

영화를 먼저 본 아들이 기자에게 충고를 했다. "아빠, 영화 보지마. 아빠는 전두광 보면 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어." 하지만 아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나는 '내돈 내산' 스트레스를 선택했다.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탱크로 짓밟은 범죄자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 것은 44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