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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무궁화9719 2023. 9. 6. 10:06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핵심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은 봉오동 전투를 보도하며 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독립군 부대를 '아군'으로 명시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합니다. 임정이 '아군'으로 부른 독립군은 '대한민국 군대'로 해석됩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2021년 광복절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2년 후 육군사관학교가 교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여러 논란이 있는 분을 육사에서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방부는 '홍범도함' 명칭변경도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이번 타임라인에선 봉오동 전투 전개 과정부터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론 보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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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8-01

전국적인 '정미의병' 일어나…홍범도 장군도 활약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정미의병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에서 발생한 의병항쟁으로 홍범도 장군은 함경도에서 활약했다. 포수였던 홍범도는 1907년 11월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본 군경을 기습한 것을 시작으로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1920-06-22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 '봉오동 전투' 보도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1920년 6월 7일에 일어난 봉오동 전투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투로 임시정부는 대승리를 쟁취한 우리 독립군을 '아군'으로 불렀다. 대한민국 군대의 승리라는 것이다.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거두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85호에서 봉오동 전투를 조명했다. 신문은 "6월 7일 상오 7시에 북간도의 주둔한 우리 군 700명이 북로사령소재지인 왕청현(汪淸縣) 봉오동을 향하여 행군할 새 불의에 동 지점을 향하는 적군 300명을 발견한지라. 동군을 지휘하는 홍범도, 최명록 양 장군은 직접 적을 공격하여 급 사격으로 적의 120여의 사상자를 출(나오게)케 했다"고 보도했다. 임정은 해당 보도에서도 이들을 '아군'으로 불렀다. 같은해 12월 25일 임정 군무부는 독립신문에 북간도 독립군 승전보를 발표하기도 했다. 봉오동전투의 시작인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에서의 전투 전개, 청산리 일대 독립전쟁에 대해 전반적인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신문에는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했다", "적군의 사망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요, 아군의 사망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 등이 기록돼 있다. 자료=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21-02-25

청산리 전투 조명한 독립신문 "김좌진·홍범도 부대 왜병 1200명 격살"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임시정부 군무부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 전황보고를 근거로 청산리대첩의 총체적인 전과에 대해 일본군의 전사자가 연대장과 대대장 한명씩을 포함해 1257명이며, 부상자는 장교 이하 200여 명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독립신문'도 “김좌진씨 부하 6백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 명은 대소전투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자료=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43-10-25

홍범도 장군, 75세 일기로 별세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크즐오르다에서 사망했다. 이인섭의 '홍범도 수기 등서본 및 관련글'과 이함덕의 '홍범도 일지 필사본'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했다. 출산 이후 모친은 7일만에 사망했고 아버지마저 그가 9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왼쪽부터 홍범도 수기 등서본(이인섭)과 카자흐스탄 공화국 정부가 발급한 홍범도의 사망증명서다. 자료=독립기념관·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1962-02-24

대한민국 정부, 홍범도 장군에 '건국훈장'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1962년 홍범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경향신문 등의 언론보도로 알려져 있다.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제공

 

1975-08-13

8·15광복 30주년 기념 '홍범도 위패' 국립묘지에 안치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1975년 8월 13일 원호처(국가보훈부 전신)가 선열묘역인 충열대 뒤쪽에 '무후선열제단(후손이 없는 선열의 제단)'을 준공하고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열들의 위패를 안치했다. 이 제단에는 홍범도 장군, 유관순 열사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국립서울현충원

 

2016-04-05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진수식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5일 해군은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214급 잠수함(1800톤급) 7번함인 ‘홍범도함’의 진수식을 거행했다. 해군은 제97주년 3·1절을 맞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함명을 '홍범도함'으로 제정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연합뉴스

 

2018-06-07

홍범도 장군 '육사명예졸업장'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봉오동전투 전승98주년기념 국민대회가 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정진경 육군사관학교 교장(중장)은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했다.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2021-08-15

'장군의 귀환' 홍범도 장군 유해 고국품에

 

https://youtu.be/UYtSvwoY2WQ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광복절인 8월 15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저녁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나가 서거 78년만에 돌아오는 홍 장군의 유해를 직접 영접하며 영웅의 희생에 대한 예를 갖췄다. 유해가 실린 대한민국 군 특별수송기(KC-330)는 이날 오전 묘역이 있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를 출발, 카자흐스탄 상공을 3회 선회한 뒤 한국으로 향했다. 이어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으로 진입한 특별수송기는 공군 전투기 6대의 호위 비행을 받으며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특별수송기에서 내렸다. 홍범도 장군 유해는 8월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앞서 지난 2019년 4월 22일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카자흐스탄 지역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영상=노컷브이

 

2023-08-25

육사, 홍범도 등 독립군 흉상 철거 추진

25일 육군사관학교가 교내에 있는 김좌진, 홍범도, 이회영 등 5명의 독립군 장군과 독립운동가의 흉상을 철거하기로 해 논란이 일었다. 육사는 종합발전계획의 일환으로 교내 기념물에 대한 재정비 차원에서 충무관 앞에 설치된 이들 흉상을 철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을 억지하고 전시에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인데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국방부가 합당한 이유 없이 (흉상) 철거를 시도한 것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들어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며, 우리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은 분노를 금할 수 없어 이를 항의하고 규탄한다"고 밝혔다. 영상=노컷브이

 

2023-08-28

"국방부 앞 홍범도 흉상도 이전 검토 중"

 

https://youtu.be/RlH1mBg_F9w

28일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에서 '국방부 앞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검토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국방부가 현재 검토하고 있으나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국방부 앞 흉상은 물론 해군의 홍범도함 명칭도 교체 검토 중이라고 전해졌다. 앞서 국방부는 육사 흉상 철거 논란 직후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여러 논란이 있는 분을 육사에서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재차 밝히기도 했다. 영상=노컷브이

 

2023-08-31

육사 "홍범도 흉상만 철거"…한덕수 '홍범도함' 이름변경 시사

육군사관학교는 31일 논란이 되고 있는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 철거·이전 문제와 관련해 홍범도 장군의 흉상만 철거하기로 했다. 육사는 이날 "교내 충무관 입구와 내부에 설치된 독립투사 6위의 흉상과 관련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려"한 결과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에 대해 "주적과 싸워야 하는 군함"이라며 함명 변경을 시사하기도 했다. 영상=노컷브이

 

2023-09-04

이종섭 "홍범도함 명칭변경 검토필요"…해군 "검토하고 있지 않아"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4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홍범도함 명칭 변경과 관련해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군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전했다. 홍범도함 명칭 변경 언급은 8월 28일 처음 나왔다. 당시 홍범도 흉상 철거 관련 브리핑을 하던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홍범도함 명칭 변경 질문에 "필요하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배석했던 해군 측에선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사진=방사청

 

2023-09-07

국방부 "육사 전신은 국방경비대사관학교…신흥무관학교 아냐"

돌아온 영웅 홍범도, 대한민국이 배척하다[타임라인]© 제공: 노컷뉴스
 

7일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은 신흥무관학교가 아닌 국방경비대사관학교라고 밝혔다. 이날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육사는 1945년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조선경비대사관학교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로 정식 출범했다"고 말했다. 전날 이종섭 국방부 장관도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의 '육사의 정신적 뿌리는 신흥무관학교인가, 국방경비사관학교인가'라는 질문에 "육사의 정신적 뿌리는 '국방경비사관학교'로 보고 있다"고 답변했다. 사진=육군사관학교

‘독립 투쟁’ 사관생도 32명 러시아행…학교 지키려 벌목노동

등록 2023-09-06 15:31수정 2023-09-06 16:37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 극장
사관학교 폐쇄 위기에 생도들 스스로 자금 마련

독립운동 지탱하는 근간으로 성장…1명은 숨져

1921년 7월 국제공청 제2회 대회 대표증에 첨부된 증명사진. 임경석 제공
 
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상하이에서 나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도로 갔다. (…) 그 후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금 결핍 때문에 학교는 단지 11개월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1915년 말이었다.”1 
 
■ 의병 투쟁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조훈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에 울분을 품고서 미국행을 꿈꿨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리라. 평안남북도의 기독교 청년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조훈이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세 명의 학우가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장벽이 높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뱃삯도 문제려니와 출입국 서류를 마련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식민지 조선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려면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과 출국 서류,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입국비자가 있어야 했다.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출입국 서류를 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밀입국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하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조계지가 자리잡은 대도시이자 동아시아와 유럽·북미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만 가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 밀입국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고심 끝에 조훈이 선택한 곳은 북간도였다. 두만강 국경 너머 조선인 이주민이 수십만 명 거주하는, 그곳으로 나아갔다.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이었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있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였다. 중국 교육법상 정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지방정부 길림 동남로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개설된 학교였다. 설립 당시 지방정부 수반으로부터 3천원의 특별지원금까지 받을 정도로 합법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국인이었다.
 
■ 사관생도 20살부터 30살까지…평균 24.4살
 
사관생도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 45%에 이르는 54명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2 최연소자는 20살이고, 연장자는 30살이었다. 오늘날 대학교 1~3학년에 해당하는 20~22살 주니어층이 15명이고, 대학교 4학년에서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23~25살 중간층이 22명이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에 해당하는 28~30살 시니어층이 13명이었다. 평균 24.4살이었다.
 
나자구라는 지명은 일명 대전자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이 사관학교를 조선인들은 대전학교라고도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동림무관학교라는 호칭도 쓰였다. 나자구 사관학교를 포함한 이 명칭들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조선인들끼리 은밀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관학교를 유지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교육을 맡은 교수들이 보수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설립 과정에서 토지와 건물은 장만했지만, 생도들의 의복과 식비를 다달이 마련해야 했다.
 
일본 관헌의 첩보에 따르면 매달 700루블의 경비가 필요했다. 학교 당국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머지않아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32명의 사관생도에 관한 회상기를 담고 있는 조훈 자서전 첫 쪽. 임경석 제공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 사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영사관 쪽 방해 공작도 영향을 끼쳤지만 주로 자금난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조훈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이 학교의 120명 사관생도 가운데 32명이 결사를 맺고서 군사학교 재개 자금을 벌기 위해서 러시아로 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 청부업자에게 고용됐다. 그는 우리를 페름현 나제진스크 공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우리를 6개월간 장작 제조공으로 채용하고, 선불금을 받고서 달아났다.”
 
사관생도 32명이 동맹을 맺었다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사관학교 재개를 위한 자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기꺼이 내려놓기로 작정한, 수준 높은 윤리적 행동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구체적인 성명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참가자의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예외적이다. 보기를 들면 뒷날 독립자금 조성차 일본은행 현금 수송대를 습격한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되는 임국정, 이 글의 주인공이자 뒷날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는 조훈 등이다. 앞으로 언젠가 사료 여건이 개선돼서 그 외 사관생도들의 신원을 알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학교 자금 마련하려 벌목 ‘노예노동’ 
 
당시는 전시였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군수 생산을 위한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32명의 사관생도는 일자리를 찾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그들은 조선인 청부업자의 힘을 빌렸다. 저 멀리 시베리아 너머 우랄산맥 깊은 곳에 있는 페름현 산악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기로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청부업자는 정직하지 않았다.
 
그자는 사관생도들이 러시아어에 서툰 점을 악용해 근로계약서를 위조했다. 1년 기한을 2개년으로 몰래 늘렸고, 약정된 근로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도록 꾸몄으며, 노임 수준도 통상 임금의 절반도 안 됐다.
 
약정 내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고용 기한이 다 찼더라도 작업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사관생도뿐만이 아니었다. 청부업자의 농간으로 페름현의 공장과 사업소에서 노예노동에 얽매인 조선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청부업자는 ‘포드랴치크’라고 부르는데,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이미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 맡았다. 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광산, 어장 등지에 노동자를 모집해주거나 관청과 군대에 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신이주민과 관청 일에 어두운 러시아어 문맹자는 일자리를 얻으려면 그들을 통해야만 했다. 근로계약의 관행도 청부업자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고용주에게서 노동자의 임금 총액을 직접 수령해, 소관 노동자 개인에게 나눠주는 권한이 있었다.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문창범, 최봉준, 최재형, 김두서 등은 모두 이 직업을 통해 재산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사관생도 32명이 독립군자금을 벌기 위해 고용돼 일하던 러시아 페름현의 위치. 구글 지도
 
문제의 청부업자는 김병학이라는 자였다. 그는 사관생도 등 조선인 노동자 몫의 임금 선불금을 받고서 자취를 감췄다. 그도 연해주 조선인 사회의 유력자였다. 시베리아철도 건설공사 청부, 러시아 군납용 쇠고기 조달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민회 회장, 민족운동 단체 권업회의 외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사관생도들은 노예노동의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의 고난은 1년 이상 계속된 뒤에야 끝났다. 사관생도들이 억류에서 벗어난 시점이 눈에 띈다. 1917년 6월이었다. 바로 그해 2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이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노동운동사의 첫 장을 열다
 
실제로 벌목장의 사관생도들이 노예노동의 처지에서 벗어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2월 혁명 덕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가 우랄산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항의 캠페인을 조직한 덕분이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이주민 2세로 러시아의 정규 초등, 중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이었다. 그는 재학 중에 혁명사상을 수용해 비밀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사관생도들이 우랄산맥에서 노예노동에 종사하던 그때, 김알렉산드라도 페름현 일대에서 거주했다. 왜냐하면 혁명당의 일원으로 지목돼 우랄산맥 방면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페름현 벌목장에서 노동과 착취에 고통받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주목했다. 특히 사관생도 그룹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한편, 그들의 대표자로서 노사 교섭의 현장에 섰다.
 
김알렉산드라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합법투쟁을 밀어붙였다. 조선인 노동자를 대리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전술도 병행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지방법원의 판사들은 시종일관 자본의 편에 섰다.
 
2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덕분에 페름현 조선인 노동자 소송 사건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일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했다. 지방법원 둘레에 수만 명의 사람이 에워쌀 정도였다. 마침내 법원의 최종 판결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처럼 조선 노동운동사의 첫 페이지는 32명의 사관생도와 김알렉산드라에 의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 독립운동 지탱하는 근간으로 자란 생도들
 
2월 혁명 이후 전 러시아가 혁명적 정세에 휩싸인 조건 속에 사관생도들은 연해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청부업자 김병학에게서 1200루블을 받아냈고, 그 돈을 우랄동맹 31명의 명의로 북간도 무장투쟁 준비사업에 기부했다. 왜 32명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사관생도 한 사람이 우랄산맥 벌목공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1년여 세월에 걸친 사관생도 32명의 용기와 모험치고는 성과가 보잘것없다고 보는 독자도 있겠다. 북간도로 송금한 1200루블은 나자구 사관학교의 약 2개월치 경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헌신 결과는 고조된 조선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자랐음에 주목해야 한다. 1920년 초 독립군이 발흥하던 때였다. “오늘날 중국·러시아 영토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은 나자구 사관학교에서 나온 자가 가장 다수”라는 평가가 나왔다.3 그 한가운데에 바로 32명의 사관생도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с.1,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1927년 3월28일.
2. 琿春副領事 北條太洋, ‘機密公信第10号, 汪淸縣ニ於ケル不逞鮮人ノ設定ニ係ル學校職員並生徒名簿ニ 關スル件’, 3~5쪽, 1916년 3월1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在滿洲の部>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3. 四方子, ‘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 <독립신문> 19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