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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에 밀착하는 윤석열 외교…실익은 적고 내놓을 건 많다
무궁화9719
2023. 7. 12. 23:19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왼쪽 둘째)이 12일(현지시각) 빌뉴스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파트너국(한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정상회의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 둘째)에게 발언 순서를 양보하며 팔을 잡아끌고 있다. 왼쪽부터 앤서니 앨버니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와 윤 대통령, 기시다 총리, 크리스 힙킨스 뉴질랜드 총리. 빌뉴스/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윤 대통령은 빌뉴스 리텍스포에서 열린 나토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 공개 발언에서 “나토와 상호 군사정보 공유를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한국이 나토의 군사정보 공유시스템인 전장정보수집활용체계, 이른바 ‘바이시스’(BICES: Battlefield Information Collection and Exploitation System)에 참여한다는 의미라고 대통령실은 설명했다.
바이시스는 나토 동맹국과 일부 파트너국이 군사정보를 공유하는 전산망으로, 지난 1월 방한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이 한국에 가입을 제안했다고 한다. 한국의 군 정보당국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면, 바이시스 이사회와 나토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회원이 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전날 밤 기자들과 만나 “나토와 우리가 먼저 바이시스 망을 열어놓고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 앞으로 우리가 미국과 핵협의그룹(NCG)을 만들고 가동할 때 한·미 간 어떤 핵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지, 그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도 참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바이시스에 가입한다 해도 당장 한국이 나토의 핵 정보를 바로 공유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관계자는 “바이시스는 주로 사이버상의 불법 활동, 해킹, 범죄와 관련해 필요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협력하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전장’이 특정한 영토와 지리적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사이버상에서 많은 불법 행위와 폭력, 심리전·여론전이 전개되고, 고급 첨단기술 탈취와 첩보까지 안보 영역이기 때문에 정보·사이버 협력 강화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움직임은 전날 한국과 나토가 체결한, 대테러 분야와 사이버방위 분야 등 11개 분야 협력을 제도화하는 ‘개별 맞춤형 파트너십 프로그램’(ITPP)의 상세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윤 대통령은 아울러 전날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의 면담에 이어 이날 회의 발언에서도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국제사이버훈련센터 설립과 나토의 사이버방위센터 협력 강화 방안을 구체화해나가자고 제안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아시아·태평양 파트너국(한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AP4) 정상회의에서도 “대서양과 태평양의 안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우리 4개국은 나토와 연대해 강력한 집단 안보 태세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토와의 군사 협력 강화는, 지난해 6월 윤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미국과 동맹국을 주축으로 하는 서방의 반중·반러시아 연대 강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행보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핀란드·스웨덴까지 나토에 가입하며 유럽이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안보를 강화해 러시아와 대적하는 구도가 뚜렷해진 가운데, 이번 나토 정상회의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파트너국 자격으로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아태 파트너국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이 회의는 앞으로도 정례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더욱 심화될 결속을 강조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나토 협력 강화 구상은 손에 쥐는 것은 불분명한 반면, 현실적인 부담이 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 대통령이 “대서양 안보와 인도·태평양의 안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협력을 강조한 것의 의미도 불분명하다. 이혜정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인도·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짓는 것은 쉽지 않다. 당장 인태 지역은 중국과 대만 문제가 있고, 유럽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상황에서 인태 지역과 실질적으로 군사적 연계를 어떻게 할지 의문”이라며 “당장 북핵 문제에서 나토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을 상대로 한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압박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얻는 것은 크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보내라는 압박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한-미 동맹 관계가 있는 이상 미국과의 공조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우크라이나전은 미-중 대립을 더 심화시켰기에 미국과 중국, 러시아에 대한 통합적인 정책 방향 없이 미국과의 공조만 강화해선 안 된다”고 했다.
빌뉴스/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장예지 기자 mina@hani.co.kr
이승만·박정희도 거부했는데... 윤 대통령이 건든 시한폭탄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입력 2023. 7. 12. 16:24
[김종성의 히,스토리] 나토-동북아 연계 강조하며 '일본 군사대국화' 돕는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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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0일 오후(현지시간) 리투아니아 빌뉴스 국제공항에 도착,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서 내리며 영접객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4박 6일간의 일정으로 리투아니아·폴란드를 순방한다 |
ⓒ 연합뉴스 |
윤석열 대통령이 스웨덴과 벨라루스 사이의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0일 출국했다. 그가 나토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취임 후 50일 만인 지난해 6월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를 첫 해외 방문지로 잡은 데서도 나타난다.
그 후로 한국과 나토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뉴욕 시각으로 그달 28일 장쥔 주유엔 중국대사가 윤 대통령 등의 참석을 겨냥해 '나토를 아시아·태평양으로 끌어들이거나 아태판 나토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윤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 바이든 대통령 및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공조하며 나토를 계속 끌어들였다.
지난해 9월 6일 국방부가 개최한 '2022 서울안보대화'에도 나토가 참석했다. 이날 배포된 국방부 보도자료에도 언급됐듯이 "서울안보대화는 한반도 평화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협력 증진에 기여하고자" 마련된 자리였지만, 윤 정권은 나토도 이 자리에 초청했다.
그달 27일에는 나토 최고기관인 북대서양이사회가 주벨기에 한국대사관을 한국의 나토대표부로 승인했고, 올해 1월 30일에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이 윤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날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최종현학술원 강연에서 한국의 우크라이나전쟁 직접 지원을 촉구했다.
미국은 유라시아 동부의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을 유라시아 서부의 나토와 연계시키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일견 나토를 강화하는 조치로 보이지만, 이에 대해 나토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같은 객(客)들이 자주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산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회원국들도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일부 나토 회원국에서 한·일 등의 참여로 인해 러시아 견제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된다는 불평이 나온다고 지난 8일 보도했다.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표하는 사람은 유럽의 독자 안보체제를 주장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다. 지난 6월 6일 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나토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큰 실수'라는 그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마크롱 대통령이 나토 연락사무소의 도쿄 설치에 반대했다고 보도했다.
북태평양방위동맹 반대한 이승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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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당시 국가보훈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나토를 동북아 및 동남아와 연결하는 시도는 1949년 4월 4일 나토가 창설된 지 얼마 뒤부터 본격화됐다. 195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 중간 기사는 미 국무부의 세계전략 논의를 소개하면서 "지난 10년간 여러 번 논의된 바 있는 하나의 계획은 동북아세아조약기구 설치안"이라고 말했다.
그런 뒤 미국의 아시아정책과 관련해 "아마도 가장 중요한 조치는 아세아 우방제국(諸國)을 방위조약으로 미국과 연결시키고 또한 NATO 및 바그닷드 조약, 리오조약제국과 연결시키는 일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언급된 아시아 우방국들의 연계 방안은 1955년 3월 3일자 <경향신문> '동남아동맹과 직결될 동북아동맹'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 기사는 니토(NEATO)로 약칭되는 동북아시아조약기구와 시토(SEATO)로 간칭되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함께 묶는 것이 미국의 아시아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니토·시토를 중동조약기구(바그다드조약기구), 미주상호원조조약(리우데자네이루조약) 체결국들과 더불어 나토와도 연결해 글로벌한 안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미국의 세계전략이었다. 한·일 및 아세안을 나토와 연결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세계전략은 이렇게 예전부터 추진된 미국의 오랜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때 추진된 것들 중에서, 미국의 의도를 충족시키며 지금까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나토뿐이다. 1955년에 발효된 동남아시아조약기구는 1977년에 해체됐고, 이라크에 본부를 둔 중동조약기구는 1958년 이라크 7·14혁명(왕정종식)으로 이라크가 탈퇴하면서 해체됐고, 미주상호원조조약은 중남미에서 좌파 정권들이 성행하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미국의 세계 전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토와 발음이 비슷한 니토, 즉 동북아시아조약기구는 아예 출범조차 하지 못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려던 미국의 구상이 동북아에서부터 뒤틀렸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동북아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니토를 결성해 나토와 연결하면, 동아시아 내부의 위험 요소인 일본 재무장보다 저 멀리 유럽의 안보 이슈가 동북아를 지배할 위험성이 있었다. 또 미국 동맹국 또는 미국 대리인으로 격상된 전범국 일본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의 재무장이 합리화될 수도 있었다. 이를 우려하는 동북아 여론이 미국의 구상을 저해한 핵심 요인이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고 친일파와 합력해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지만,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돕는 일에는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 국민들 속에 내재된 반일 감정에 불을 지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57년 7월 20일 자 <경향신문> 1면에 크게 보도된 기사가 있다. '일본은 전통적인 침략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승만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텔레비전 및 라디오 편집자들과 가진 그달 18일 자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었다.
기사에 나오는 '일(日)은 강국되는 날 대망, 공산국가만이 적이 아니다'라는 소제목은 이승만이 반일 여론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전에 침략자였으며 다시금 침략자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인접국에게 자기의 집과 가족을 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로 대일 경계심을 표시했다.
"북태평양방위동맹에 일본과 같이 가입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미국 언론인들의 질문에 대해 그는 "대공동맹은 좋은 것"이라면서도 이것이 일본 재무장에 악용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 또는 일개 국가의 지배욕에 대하여도 역시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함으로써 동북아동맹이 일본의 지배욕을 충족시킬 가능성을 경계했다.
그는 북태평양방위동맹을 주창한 미국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다. "동(同) 주창자들은 일본이 지난날 한국을 점령하였고 만주를 침략하였으며 중국을 정복하고자 기도하였으며, 또한 미국을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全) 동부 아세아를 유린하고자 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동북아시아조약기구 창설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 위 발언이 있기 전부터 별도의 대체물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1954년 6월 15일 한국·중화민국·필리핀·태국·베트남·오키나와·홍콩·마카오를 참여시켜 아시아반공연맹 창립대회를 연 일이 그것이다. 동아시아 반공 무대에서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아시아반공연맹의 한국 지부로 출범한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이 지금의 한국자유총연맹이다.
일본을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삼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에서 벗어났기에 아시아반공연맹은 흥행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반일 정서가 이승만을 움직이고 이것이 나토와 니토의 연결을 가로막은 데서 이 일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간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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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21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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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역시 일본 주도의 동북아동맹에는 협조하지 않았다. '동북아동맹은 불필요'라는 1961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그는 쿠데타 6개월 뒤인 그해 11월 17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재 한국·일본·자유중국 등 동북아세아 제국은 미국과 개별적인 방위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동맹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뒤 그가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부속협정)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이 실현되리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뤘지만, 그것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한일협정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반일 감정을 직접 목도하고 이 때문에 두 번 다시 일본에도 가지 못하게 된 그가, 군국주의의 부활을 돕는 국제 연대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이다.
나토와 동북아의 연계는 나토의 힘을 동북아로 끌어오는 측면보다는 집단안보를 빌미로 일본의 부활을 돕는 측면이 더 크다는 점을 이승만·박정희 시기의 한국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정서로 인해 이승만과 박정희는 동북아조약기구 결성에 나설 수 없었다.
지금도 한국에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반일 감정이 잠재돼 있다. 윤석열 정권이 이를 해소시킨 상태에서 나토와 동북아의 연계에 착수한 것은 아니다. 반일 정서를 제대로 해소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한일 군사협력에 나서고 나토와 동북아의 연계에 나서고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돕고 있으니, 이승만·박정희가 보기에도 현 정권이 얼마나 불안할지를 절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