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손 묶인 사람들 빨래 널 듯 세우고…서북청년단이 총 쐈어”

무궁화9719 2023. 6. 28. 16:04

“손 묶인 사람들 빨래 널 듯 세우고…서북청년단이 총 쐈어”

등록 2023-05-30 15:45수정 2023-05-30 21:23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목격자 한광석씨

1950년 10월께 벌어진 충남 서산시 갈산동 교통호 인근의 학살 현장을 목격한 한광석(88)씨. 그는 “아침 해가 뜨면 경찰이 하얀 옷을 입고 손이 묶인 사람들을 산에 끌고 가 빨래줄 널듯이 세워놓고 총을 쏘는 장면을 5~6차례나 봤다”고 증언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장소를 특정하는데는 목격자 한광석(88)씨의 증언이 결정적 도움을 줬다. 한광석씨는 30일 오전 갈산동 176-4 발굴현장에서 <한겨레>와 만나 73년 전 직접 목격한 상황을 들려줬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10월 서산중학교 2학년생(15살)으로, 충남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봉화산 교통호 맞은편 마을에 살고 있었다. 한씨는 “꼭 아침에 날이 훤하게 밝기 시작하면 경찰이 차에 사람들을 태워 산에 끌고 가 죽였다”고 말했다. 매회 20명은 넘게 왔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경찰이 하얀 옷을 입고 손이 묶인 사람들을 꼭 빨래줄 널듯이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총을 쏘면 불이 번쩍번쩍 했지. 그러면 사람들이 쓰러져. 총을 쏘면 원래 크게 울려야 하잖아. 사람이 맞는 총소리는 울리지 않아. 그냥 ‘톡톡’ 소리만 들렸어.” 목격한 횟수만 해도 5~6회였다고 했다.
 
한씨는 학살이 벌어지기 전 인민군 점령 시절엔 이곳 교통호(참호와 참호 사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판 호)를 파는 데 동원됐다. 인민군의 지시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삽과 곡괭이로 들고 봉화산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수복과 함께 부역혐의를 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끌려와 총살당한 뒤 이 교통호에 묻히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은 총살시킨 사람들을 구덩이에 집어넣은 뒤 묻어주지도 않고 갔어. 동네 사람들이 나중에 다 묻어주었지. 오죽하면 개가 죽은 사람을 끌고 마을로 내려왔다는 소리까지 나왔겠어.” 서산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유독 서북청년단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한씨도 말했다. “경찰이 데리고 왔지만 직접 쏘지는 않고 건달들 시켰다고 해. 그 건달들이 서북청년단원들이야. 걔들이 총을 쏘았대.” 현재 생존한 갈산동 교통호 학살 사건 목격자는 한씨 뿐이다. 그는 이번 유해발굴 지역 아래쪽에도 유해가 더 묻혀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번 발굴단을 이끈 이호형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 원장은 이 일대에 묻힌 부역혐의 희생자 유해를 200여구로 추정했다.
 
이호형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 원장이 30일 오전 서산시 갈산동 176-4 ‘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유해의 상태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산 지역에는 한국전쟁기 학살 사건이 유독 많다. 1950년 6월25일부터 7월14일 사이엔 예비검속으로 국민보도연맹원 수백여명이 대전형무소로 끌려가 대전 산내 골령골 등지에서 학살됐다. 서산 지역에 남은 보도연맹원 수백여명도 메지골 등에서 학살됐다.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7~10월엔 인민군과 지방좌익 등 이른바 적대세력에 의해 450여명이 희생됐고, 다시 수복 뒤인 10월 이후엔 서산경찰서, 치안대, 서북청년단, 해군에 의해 1천명에 이르는 부역혐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정명호(74)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 유족회 서산지역 회장은 “그동안 조사를 해온 결과 서산 지역의 실제 부역혐의 희생자 수는 220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이 연 이날 발굴현장 언론공개에 앞서 열린 중간보고회 자리에서 황창순(73)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유족회 서산지역 부회장은 “완전유해 형태로 나온 30구가 누구인지 찾기 위한 유전자검사와 함께 갈산동의 다른 지역에서도 추가 발굴을 진행해줄 것”을 진실화해위 관계자에게 요청하기도 했다.서산/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유골 다리 사이에, 남의 유골…폭 1m 땅속 뒤엉킨 지 73년

등록 2023-05-30 11:00수정 2023-05-31 02:41

고경태 기자 

[현장] 한국전쟁 서산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
갈산동 교통호 현장서 유해 60~68구 발굴
깊이 1m 좁은 교통호에 2·3중 포개진 참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 봉화산 교통호 현장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시기 부역혐의 희생자 유해를 30일 오전 언론에 공개했다. 2구역에서 발굴된 유해들이 2중, 3중으로 중첩되고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유해들은 전체 길이 60m의 교통호(참호와 참호 사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판 호) 안에 머리를 한쪽 방향으로 두고 눕거나 고꾸라져 있었다. 양팔이 뒤로 꺾인 채 신발을 신은 상태로 발견된 유해도 있었다. 일부 구역에서는 유해 다리 사이에 다른 유해가 2~3중으로 쌓인 채 발견되기도 했다.
 
‘충남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현장에서 73년 전 집단 학살 정황을 보여주는 완전한 형태의 유해(유골) 60구 이상과 유품 등이 발굴됐다.
 
희생자 대부분은 농사 짓던 20~40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유해 수습을 앞두고 30일 오전 11시 유해발굴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진실화해위는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호형)과 함께 이달 10일부터 20여 일간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 봉화산 교통호 인근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해왔다. 부역혐의 사건 관련 유해발굴은 충남 아산에 이어 두 번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 봉화산 교통호 현장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시기 부역혐의 희생자 유해를 30일 오전 언론에 공개했다. 사진은 1구역에서 발굴된 유해로 양 팔이 뒤로 꺾여 있고 교통호 바닥으로 고꾸라져 있는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이번 유해 발굴과 관련한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은 1기 진실화해위가 2007년 1월부터 조사를 시작해 2008년 12월 진실규명 결정한 사건이다. 조사 결과, 1950년 10월 초순부터 그해 12월 말까지 서산경찰서와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 해군이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977명이다. 1기 진실화해위는 최소 1865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던 20~40대의 성인 남성들이었으며, 여성들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지난 1기 진실화해위 조사 당시 참고인 다수는 읍·면 단위마다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서산경찰서의 ‘신원기록심사보고’를 통해 당시 총살 목격자와 주검 수습자 등과 함께 현장 조사 중 발견한 지역이기도 하다. 1기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보면, 이곳 교통호에서의 총살은 서쪽 풍전리 방향에서 3회, 동쪽 갈산리 방향에서 5회 목격됐다.
 
60m 구간을 총 3개 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한 이번 발굴에서 유해는 60~68구 나왔으며 구역별로는 1구역 13구, 2구역 30~35구, 3구역 17~20구다. 유해는 폭과 깊이가 각각 1미터 이하인 좁은 교통호를 따라 빽빽한 상태로 발굴됐다. 굵은 다리뼈들뿐만 아니라 척추뼈와 갈비뼈까지도 완전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나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 봉화산 교통호 현장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시기 부역혐의 희생자 유해를 30일 오전 언론에 공개했다. 2구역에서 발굴된 최소 30구 이상의 유해가 서로 뒤엉켜 있다. 진실화해위 제공
 
이들 유해를 감식할 예정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는 발굴지의 유해 상태와 관련해 “유해의 머리뼈가 한쪽 방향으로 누워있는 걸로 볼 때 교통호 밖 산기슭에서 처형한 뒤 교통호 안에 집어넣은 것 같다”고 말했다. 교통호 안에서 M1 탄피들이 발견됐지만, 그 양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도 교통호 밖에서 총살이 집행된 정황을 보여준다고 했다. 
 
“들개가 시신 물고 내려와 재매장” 증언 뒷받침
 
박 교수는 또한 “유해의 윤곽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지만 머리 안에 흙이 들어가 있어 수습 과정에서 많이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했다. 진실화해위는 일부 시신이 위아래 중첩된 상태로 발견된 것과 관련해 “당시 학살이 진행된 후 마을 들개가 시신을 물고 마을까지 내려와 마을 이장이 청년들과 교통호 주변 시신을 교통호 안에 재매장했다는 증언을 뒷받침해 준다”고 밝혔다. 이번 유해 발굴에서는 M1 탄피와 함께 흰색 4구 단추와 고무줄 바지 끈, 반지 등 유품이 발견됐다. 
 
이날 현장에 온 정명호(74)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서산지역 회장은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다. 어떻게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사람을 개 끌 듯이 산에 끌고 와 죽여놓고 전부 짐승의 밥이 되게 만들 수 있느냐”면서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 후속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2기 진실화해위는 실효성 있는 유해발굴과 위원회 종료 이후, 유해발굴 사업이 지속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유해매장 추정지 실태조사 및 유해발굴 중장기 로드맵 수립 최종보고서’를 발간하고 이를 근거로 전국 6개 지역 7개소를 선정해 유해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이 중 부역혐의 희생자들이 묻힌 아산시 배방읍 성재산과 염치읍 백암리 새지기2지점에서는 각각 62구와 2구가,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이 묻힌 경남 진주시 관지리 야산에서는 20구가 발굴된 상태다. 역시 국민보도연맹원이 희생된 충주 호암동과 안성시 보개면 기좌리에서는 유해가 발굴되지 않았고,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된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서는 지난 24일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 봉화산 교통호 현장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시기 부역혐의 희생자 유해를 30일 오전 언론에 공개했다.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3구역 유해발굴 전경으로 최소 17구가 발굴됐다. 진실화해위 제공
 
서산/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