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 군·경 한국전쟁 민간인 총살 “총알에 깨진 머리, 살점이 흙 위로 삐죽…” 위령제에 진실화해위원장·대전시장 불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두 발목을 잡힌 채 총살당하기 직전의 피해자 모습.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발굴한 사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7월4일, 임순재는 백일을 갓 넘긴 딸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유성경찰서로 나오라”는 통지를 따르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어떤 낭패를 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경찰서에 들렀다 출근하겠다”고 말한 뒤 늘 그랬듯 자전거에 올랐다.
대덕군(현재 대전 대덕구) 회덕면 읍내리에서 태어난 임순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큰집에 손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지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그를 친아들로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철도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4년 철도국에 취직해 순탄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1950년 4월 차장으로 발령받아 일하던 중에 전쟁이 났다.
여느 날처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 뒤 임순재는 사라졌다. 가족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았다. 경찰이었던 임순재의 동서는 유성경찰서를 찾아가 그의 행적을 물었다. 같은 경찰인데도 유성서의 경찰은 “다시 묻지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정색을 했다.
“산내로 끌려갔다더라.”
그의 행방과 관련해 ‘산내’라는 지명이 언급된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 기자 앨런 위닝턴은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을 찾았다. 그해 8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당시 골령골 현장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위닝턴 기자가 현장을 찾은 건 1950년 7월6일부터 7월17일 새벽까지 벌어진 ‘3차 골령골 학살’ 직후였다. 임순재가 골령골로 끌려간 시점도 이때로 추정된다.
위닝턴은 기사에서 “7월16일 100명씩 실은 트럭 37대가 이동했고, 상당수의 여성을 포함해 3700명이 사살됐다”고 썼다. 그는 “총질·구타, 그리고 목을 자르는 일은 남한 경찰이 했지만 이것은 미국의 범죄”라며 “(학살은) 미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고 (학살 과정에 동원된) 운전자 몇 명은 미국인”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골령골에서의 첫 학살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에서 6월30일 사이에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 등 정부 각료들은 27일 새벽 대전으로 내려와 있었다. 다음날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여수·순천 사건 관련 사상범 일부가 대전 골령골로 끌려갔다.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란 제목의 기사에 실린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흙 위로 학살된 이들의 팔·다리 등이 드러나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란 제목의 기사 표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대전 동구 낭월동에 있는 골령골은 인적이 드문 골짜기였다. 미국 육군 방첩대(CIC) 파견대의 전투일지는 6월28일부터 사흘간 골령골에서 1400명이 총살됐다고 기록한다. 당시 총살을 집행한 경찰 책임자는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사형목인 기둥 10개를 박아놓고 사형수 눈을 가리고 뒤에서 나무기둥에 손을 묶었다. 7m 전방에서 사수가 탄환 1발씩 장전된 M1으로 사살했다. (헌병)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헌병들이) 발사하면 사형수는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러면 지휘자가 확인사살을 했다. 확인사살이 끝나면 소방대원이 손을 풀고 시신을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졌다. 시신이 50~60구씩 차면 화장을 했다.”
1950년 7월1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비밀리에 대전을 떠났다. 대통령이 떠난 그날 새벽, 대전지검 검사장은 대전형무소에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4천명이 수용돼 있었다. 7월2일 당시 제2사단 헌병대는 대전형무소 쪽에 “좌익수들, 즉 포고령·국방경비법 위반 등 주로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10년 이상 강력범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다음날 재소자들은 골령골로 끌려갔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장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라.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 바지가 엉망이 돼.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 지휘관이 청년 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
5일 동안 계속된 2차 학살의 희생자는 1800~2천명으로 추정된다. 1950년 6월28일~7월17일 3차에 걸쳐 7천여명이 골령골에서 집단 사살된 것이다.
2021년 9월10일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들 모습. 최예린 기자
2021년 8월6일 대전 산내 학살 희생자 유해발굴단 연구원들이 골령골 현장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발굴단 제공
2021년 골령골에 발굴된 학살 희생자 유해들. 최예린 기자
■ 북한 이적 가능성을 없애라
우리 군과 경찰이 자국민을 상대로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로도 대전형무소는 ‘절도범’과 ‘사상범’으로 가득했다. 해방 뒤 남한에서 좌우 대립이 심해지고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소요가 확산되면서 갇히는 사람들은 더 늘었다. 1948년 3월 1875명이었던 대전형무소 수용자는 1949년 3041명으로 급증했다. 그중에는 여순사건과 제주4·3 관련자들도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5일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에 가입시켰다. ‘좌익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였지만, 실적에 눈먼 공무원들은 좌익과 관련 없는 이들까지 마구잡이로 가입시켰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통첩을 보낸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은 경찰서, 면사무소 창고,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그리고 6월28일 골령골에서 첫 학살이 일어났다.
■ 아버지 한,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임순재의 딸 임남신(73)씨는 출근길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했다. 가족들은 임순재가 ‘산내로 끌려갔다’는 소문에 시신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들 찾기에 몰두하던 할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앓더니 세상을 떠났다. 가세는 점점 기울었고, 남신씨가 12살 때 어머니는 재가했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남신씨는 ‘부모 잃은 대전’이 싫어 대구로 시집을 갔다.
골령골 학살 희생자 임순재씨의 딸 임남신(73)씨가 지난 2일 대구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사진을 들고 울먹이고 있다. 최예린 기자
남신씨는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2005년 발족한 1기 진실화해위는 2010년 “전시였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수감된 재소자들을 좌익 전력이 있거나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만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라며 “이에 대한 책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광동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최근 한국전쟁 전후 시기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사망 사건의 피해자들이 보상받는 것과 관련해 “심각한 부정의”라고 발언해 유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골령골에 2024년까지 들어설 예정이었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은 공사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상태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는 1441구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는 2000년부터 매년 6월 ‘골령골 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도 27일 골령골에서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에 참석한 남신씨는 억울한 영혼을 달래는 종교제례를 바라보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김광동 진실화해위 위원장과 이장우 대전시장은 이날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2010년 이후 매년 보내온 대전시장 추도사도 올해는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백일 사진을 들고 남신씨가 울면서 말했다. “사진 속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어요. 억울한 우리 아버지 죽음 못 밝히면 눈도 제대로 못 감을 것 같습니다.” 최예린 기자floye@hani.co.kr
기자
2021년 8월 골령골 초입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이라고 적힌 리본이 걸려 있다. 최예린 기자
골령골에 세워진 추념비. 최예린 기자
현재 골령골의 모습. 2020년부터 3년 동안의 유해 발굴을 마치고 평평하게 다져진 상태다. 이 자리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지난해 6월27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에서 열린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제사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다. 최예린 기자
임남신씨가 27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열린 ‘대전산내골령골학살사건 73주기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예린 기자
27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열린 ‘대전산내골령골학살사건 73주기 희생자 위령제’에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초헌을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억울함을 풀기 위한 노래,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춤짓
대전민예총 ‘제2회 골령골 평화예술제’ 개최
기자명대전=임재근 객원기자
입력 2023.06.27 08:19
‘제73주기 대전 산내 학살 사건 피학살자 합동 위령제’를 하루 앞두고 전야제 성격의 ‘골령골평화예술제’가 개최됐다.
(사)대전민예총(이사장 이찬현)은 6월 26일(월) 저녁 7시 30분, 작은극장 ‘다함’(대전 동구 가오동)에서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제2회 골령골 평화예술제’를 열고,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지난해에는 위령제가 있던 날 저녁 골령골 현장에서 개최됐지만, 올해에는 전야제 성격으로 하루 앞서 진행했다. 또한 장소도 당초 골령골 현장으로 예정했으나, 전국적으로 장마권에 접어들면서 우천으로 인해 급히 장소를 실내로 옮기게 됐다. 급히 장소가 변경되었지만, 평화예술제를 찾은 시민들은 극장을 가득 채웠다.
골령골 평화예술제는 대전민예총에 참여하고 있는 지역의 각계 문화예술인들이 각자의 재능으로 만들어갔다.
‘제2회 골령골 평화예술제’가 6월 26일 저녁 7시 30분 작은 극장 ‘다함’에서 개최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평화예술제 예술 감독을 맡은 대전민예총 연극위원회 김황식 감독은 “우리의 역사는 민간인 수천명을 억울한 주검으로 골령골에 파묻고 가족들의 삶고 함께 묻어 짓밟아 온 세월”이며, “학살자들은 영웅이 되어 떵떵거리며 활개 친 세상, 그 억울함을 그 한을 그 사실을 골령골에 묻어 놓고 우리에게 망각을 강요한 미친 세월의 역사”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제2회 산내 골령골 평화예술제는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한 자리”라며, “억울함을 풀기 위한 노래이며,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춤짓”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루 빨리 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외침”이라고 덧붙였다.
한기복 명인의 대북 소리에 맞춰 한항선 작가가 붓으로 무대 배경대를 완성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맨 처음 무대에 오른 이들은 음악위원회 한기복 명인과 미술위원회 한항선 작가였다. 한기복 명인의 대북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한항선 작가는 붓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한 작가는 ‘골령골 평화예술제’라는 글씨가 쓰여 있던 무대 배경에 북소리에 맞춰 붓질을 하기 시작했고, 골령골 산능선 아래 노란 달맞이꽃과 파란 나비 등이 그려지면서 어느 순간 멋진 배경대가 완성됐다.
이어진 무대는 가운데 긴 봉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천이 펼쳐진 상태에서 천을 서로 엇갈려 돌면서 엮어 가는 단심줄 감기였다. 대전민예총 교육위원회 소속 구성원들이 소리를 하는 동안 대전평화합창단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단심봉과 천을 잡고 노래 소리에 맞춰 천을 천천히 감아갔다. 단심봉을 중심으로 단단히 묵인 천들은 무대의 기둥이 되어 무대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연극위원회 성원들은 ‘살아살아 괴롭구나’라는 제목으로 탈극을 선보였고, 정진채 가수는 ‘골령골 산허리’와 ‘서시’를 노래했다. 특히 ‘골령골 산허리’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신순란 유족의 사연을 담은 가사에 정진채 가수가 작곡한 곡이다. 이어 김희정 시인은 자신의 시 ‘여기에’를 낭송했다. 김희정 시인이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정진채 가수는 기타로 배경음악을 연주해주었다.
대전민예총 외 단체들도 무대에 오르면서 골령골 사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노래와 그 사건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춤짓에 동참했다. 노래모임 ‘놀’과 대전평화합창단은 노래 공연을 했고, 대전댄스보컬학원 랩퍼 최진리와 빅버스트는 산내 골령골 사건의 내용을 담은 랩과 함께 춤 공연을 펼쳤다.
노래모임 ‘놀’이 ‘제2회 골령골평화예술제’에서 노래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대전평화합창단이 ‘제2회 골령골평화예술제’에서 노래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대전댄스보컬학원 랩퍼 최진리와 빅버스트는 산내 골령골 사건의 내용을 담은 랩과 함께 춤 공연을 펼쳤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평화예술제의 마지막은 앞서 묵었던 단심줄을 풀어내면서 넋푸리로 마무리했다.
평화예술제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무대로 올라 장단과 소리에 맞춰 하나씩 줄을 풀어냈고, 단심줄이 모두 풀리자, 천을 잡았던 손은 옆 사람의 손을 잡으며 강강술래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대의 힘으로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넋을 위로할 평화공원이 하루빨리 조성되기를 기원하며 예술제는 막을 내렸다.
평화예술제 초반에 묵어두었던 단심줄을 다시 풀어내면서 단심죽 넋푸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단심줄을 모두 풀고 난 후 참가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평화예술제를 마무리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한편, ‘대전산내학살사건 제73주기 제24차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는 27일 오전 11시 30분에 골령골 현장에서 예정되어 있다. 오전 10시 30분부터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 4대 종단이 진행하는 종교제례도 진행된다.
[역사 논픽션 : 본 헌터①]나는 누구인가 어둠의 땅이 빛을 만나던 날, 쪼그려 앉은 채로 당신들을 만나던 날
어둠의 땅이 빛을 만났다. 2023년 3월10일 오전, 나의 머리가 땅 위로 솟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몇십년 만의 햇빛인가.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편집자 주: ‘본 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 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 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종이신문 <한겨레>에도 실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얼마 동안 앉아있었냐면,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다면, 2만6440일 이상 앉아있었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63만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분으로 쪼개 말하자면, 3807만3600분 이상 앉아있었다. 22억8441만6000초 이상 앉아 있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숨 막혔는지, 의식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고, 머리 위로 흙이 덮였지만, 자세를 고치지 못했다. 한 번 고치지 못한 이상 내 힘으로는 영원히 고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아 흙과 하나가 되었다. 땅과 하나가 되었다. 산과 하나가 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이 자세로 100년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000년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만년, 10만년, 100만년 뒤 불현듯 나타나 후대의 고고학자들에게 연구 거리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거대하고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두개골을 쑤시고 들어와 일찌감치 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오르던 산 위에서 굴삭기와 덤프트럭, 타워크레인의 소음이 숲을 흔들던 시절이 있었다. 1996년 북쪽으로 340m 지점에 공장이 들어섰다. 2017년 남쪽 470m 지점에 공장이 들어섰다. 나는 두 공장의 가운데 지점에서 철근 아래 처박히거나 배려 없이 버려지는 운명은 피했다.
드디어 나의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었다. 쪼그려 앉아있었다. 나는 서서히 드러나 바깥으로 나올 준비를 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기회가 왔다. 산에서 빠져나올 천금 같은 기회. 2022년 4월, 나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왔다. 일본제 바이오35 4t 굴삭기를 앞세우고 왔다. 굴삭기는 내 옆을 지나 북쪽 산등성이 높은 곳에 올라, 불로초라도 찾으려는 심마니처럼 3일간 땅을 뒤지고 다녔다. 120m에 이르는 구간에서 너비 80㎝, 깊이 60㎝의 땅을 팠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산등성이 높은 곳에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게 문제였다.
굴삭기는 산 아래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있는 곳 아래 지점에서 35도 각도의 비탈을 올라왔다. 굴삭기 앞에 달린 버킷이 땅을 가볍게 파낼 때 나뭇잎 속에 감추어져 있던 무언가가 걸렸다. 두 개의 어떤 조각이었다. 사람의 조각인가 동물의 조각인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그 답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이 왔다. 그것은 사람의 조각으로 판명 났다. 두 사람의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였다. 그 옆에서도 계속 조각이 나왔다. 그들은 이제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했다. 조각이 발견된 곳에 현장보전 조처가 내려지고 하얀색과 빨간색이 칠해진 폴대가 꽂혔다. 하지만 그들은 한동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절차를 기다려야 했다. 산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300여일간 그 침묵은 지속했다. 자동차들이 산 아래 왕복 2차선 도로를 무심하게 달렸다.
굴삭기여, 나의 냄새를 맡은 기계여. 그대는 왜 산 높은 곳에 올라 헛물을 켜고 인제야 내려왔는가. 나는 이 낮은 산 아래 언덕에 있었노라. 사진 고경태
사계절이 순환하고 봄이 돌아왔을 때, 다시 그들이 왔다. 이번에는 작정한 듯 매일 왔다. 2023년 3월6일. 산 위로 오른 굴삭기가 내 북쪽 2m 부근에서 움직였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땅을 건드리며 45도 각도의 비탈 아래로 내려오는 데 무언가가 걸렸다. 반대편에서는 호미질이 한창이었다. 며칠 간의 작업 끝에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어떤 라인이 포착되었다. 2023년 3월10일 오전 9시30분,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나는 ‘노출’되었다.
굴삭기의 무한궤도 소음이 잦아들면서 호미질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점점 가까워졌다. 내 머리 위를 짓눌렀던 두꺼운 표토층이 벗겨졌다. 호미는 그 옛날 나를 덮었던 흙 사이로 부드럽게 침투해 들어왔다. 흙더미가 쓰레받기와 양동이에 실려 버려진 뒤 내 머리뼈가 삐죽 돌출되었다. 나머지 흙들도 떨어져 나갔다. 나의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동굴 속의 불상을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호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정교한 기구들이 접근해 왔다. 대칼이, 스파출라라 부르는 주걱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긁더니 내 몸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몸을 채웠던 흙과 모래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멀리 산기슭을 찾아준 이들이여, 나와 내 동료들을 위해 땅을 파헤쳐준 이들이여. 나와 동료들은 당신들을 기다렸노라.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 산을 함께 오른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둠 속의 땅에 박혀 누운 채였다. 쪼그려 앉아있는 이는 나 혼자였다. 누워있는 이들도 하나씩 형체를 드러냈다. 그들을 가렸던 흙들도 밖으로 퍼 날라졌다. 얼마만의 달콤한 햇빛이던가. 그 빛을 어둠이 밀어낼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돌아갔다. 서너장의 신문지가 나와 동료들을 감쌌다. 그 위에 다시 두꺼운 방수포가 얹혀졌다.
아침 이슬이 맺혔다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왔다. 나와 동료들은 다시 밖으로 몸을 드러내고 작업 대상이 되었다. 낮과 밤이 반복되는 동안 누워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떠났다. 사람들은 그것을 ‘수습’이라 불렀다. 끝내 나 홀로 남았다. 3월28일 오전 11시. 기자들이 나를 만나러 왔다. 누워있다 수습되었던 동료들도 다시 나와서 그들을 맞았다. 카메라 셔터와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처음으로 내가 땅 밖으로 노출되자 사진작가는 조용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진 박꽃님 제공
산을 떠나는 날이 왔다. 2023년 3월29일 아침 9시. 나는 일어서는 대신, 분리되었다. 머리뼈가 먼저 내 몸과 이별했다. 두 팔이, 흉부가, 골반이, 척추가, 허벅지가, 정강이가 각자 떠났다가 한자리에 모였다. 나의 팔을 애초에 묶었으나 헐렁해진 전화선도 떨어져 나갔다. 하나였던 나는 플라스틱 모판 위에서 206개로 나누어졌다. 이제서야 누운 것인가. 아니다. 놓인 것이다. 붓의 솔이 머리뼈에서 발가락뼈 끝까지 마디 사이를 간질였다. 흙과 잔여물을 털고 목욕을 할 시간. 무색의 아세톤 용액 속에서 206개의 나는 하나씩 담가졌다. 세척을 마쳤다. 그늘을 찾았다. 바람을 맞았다. 물기를 털었다.
나는 측정되고 감식되고 분석되었다. 머리뼈는 어떠한가. 최대 길이는 170㎜, 최대 너비는 142㎜, 광대사이 너비는 145㎜…. 기초조사가 하나씩 진행되었다.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른인가, 아이인가. 내 키는 몇㎝인가. 또 얼마나 성한 상태인가. 그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묻기까지 몇년이 걸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