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6.10.인혁당사건.4.19(민주화운동)등 등...
5·18 군 기록 3곳에 등장하는 공용터미널 18구 주검 행방 묘연
무궁화9719
2023. 5. 18. 15:12
옛 광주공용터미널 지하에 주검 방치
군 기록 3곳서 등장…진상규명 필요
공용터미널 학살 참상 목격자 기록도

1980년 5·18항쟁 당시 공수 특전여단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육군본부 상황일지와 전남합수단(505보안대)의 ‘광주사태시 전교사 정보일지’, 출처 불명의 군자료 등에 광주공용터미널에 주검이 방치돼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공용터미널 학살 참상의 목격자도 있다. 5·18항쟁 10일 동안 취재수첩 3권에 공수 특전여단 군인들이 저질렀던 학살의 참상을 꼼꼼하게 기록했던 고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는 <10일간의 취재수첩>(1988)에 “오후 6시쯤 대인동 공용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고 밝혔다. 김 전 기자는 “이 주검들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라며 “또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공용터미널 앞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고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1988)에 나오는 공용터미널 상황.

11공수 특전여단이 공용터미널에 숙영했다는 군 상황 기록.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오인해 30분간 교전…현장 참혹”
등록 2023-05-18 10:00수정 2023-05-18 12:09
5·18 전투병과교육사령부 교도대원 정광효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육군 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
정씨는 “5·18 때 민간인들이 군인한테 당한 것을 아는데 그걸 기념하겠다고 기장을 주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정씨는 일기에 ‘훗날 전씨 시대가 끝날 때 이 쇳조각이 올가미의 상징일지 모르겠지만 주는 거니까 받긴 했다’는 속마음을 적어놓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 복무를 했던 정광효씨가 1981년 전두환 정권에서 받은 국난극복기장과 이에 대한 생각을 쓴 일기장.
5월19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는 채 소총(M16)과 개인용 실탄 120발, 분대용 실탄 1060발, 비상식량, 판초우의, 모포, 야전삽 등을 챙겼다. 당시 그는 ‘북한군이 쳐들어온 줄 알았다’고 한다.
교도대는 광주와 화순, 나주 사이 경계지역에 투입됐다. 5월24일은 송암동 인근 야산에 매복했다. 시민군이 장갑차를 탈취했다는 소식에 화기중대는 90㎜ 무반동총을 챙겨 광주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1~3중대는 나주 쪽에서 오는 차량을 차단했다.

1979~1981년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심정을 쓴 일기.
화기중대는 곧장 무반동총 등으로 장갑차와 뒤따르던 군트럭을 공격했다. 정씨 기억으로는 30여분쯤 교전한 뒤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상대편이 11공수여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교전 현장은 참혹했다. 11공수여단의 한 중사가 교도대장의 정강이를 발로 차며 “아군 적군 구분도 못 하는 너희가 군인이냐”고 하극상을 벌였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된 뒤 정씨가 길 안내를 하려고 앞장서서 걷고 있는데 승용차에 탄 최웅 11공수여단장이 옆으로 다가와 권총을 겨누며 “총성이 또 들리면 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후 교도대는 매복 임무를 이어가다 부대로 복귀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산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한 정광효씨가 일기장에 그린 전교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