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불 가져올게, 기다려”…6살 아이는 무덤가에서 사흘 울었다

무궁화9719 2023. 4. 20. 15:59

“이불 가져올게, 기다려”…6살 아이는 무덤가에서 사흘 울었다

등록 2023-04-03 05:00수정 2023-04-03 18:24

[제주4·3 그 뒤, 75년]
4·3 후유장애인 양수자의 ‘4·3 트라우마’ 앓이
온 가족 몰살되는 현장 목격하고 자신도 다쳐

1949년 훈련을 받고 있는 제주읍 노형리 민보단원들.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들을 ‘민보단원’으로 편성해 군경 토벌작전에 동원했다. 1949년 4월1일 제주도 민보단원은 5만명에 이르렀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3월27일 제주시 일도2동 집에서 만난 양수자(81)씨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숨이 차오른다. 그에게 4·3은 75년 전의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다. 가족의 몰살을 목격한 6살 아이는 평생 숨이 턱턱 막힌 채 살아왔다.
 
깨어나면 그날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 4·3 소식이 들리기만 하면 심장이 떨려온다. 2020년 3월 뒤늦게 4·3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아 “이제 조금은 살 것 같다”고 하지만, 여전히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렸어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은 외면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생각하면 숨이 콱콱 막혀요. 살아온 것 자체가 너무 숨이 막혔어요.”
 
1949년 2월3일. 군 토벌대가 노형리 외곽 소나무밭(지금의 제주고 부근)에 얼기설기 엮은 양씨 가족의 피신 움막에 들이닥쳤다. 지금은 제주 최고의 번화가가 된 노형리는 ‘리’ 단위에선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다. 제주4·3평화재단이 펴낸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1>(2019)을 보면, 제주읍 노형리는 사망자 370명, 행방불명자 156명, 수형자 11명, 후유장애자 1명 등 538명의 4·3 희생자를 냈다.
 
노형리는 1948년 11월19일과 20일 사이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되기 시작됐다. 계엄령이 내려진 지 이틀 만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죽어갔다. <노형동지>(2005)는 노형리 6개 자연마을 가운데 양씨 가족이 살던 정존마을에 4·3 무렵 61가구 260여명이 거주했으나, 이 가운데 12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희생된 이들 가운데는 양씨의 이모(어머니 여동생) 일가족도 있었다. 이모네는 시할아버지부터 자식까지 4대가 한꺼번에 몰살당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노형리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각명비에는 양씨 가족의 이름이 보인다. 허호준 기자
 
양씨 가족이 살던 정존마을 초가도 불에 탔다. 할머니(김사일·당시 64살), 아버지(양우빈·27살)와 어머니(현경옥·29살), 언니(양정자·10살), 여동생(양신자·4살), 그리고 생후 2~3개월 된 남동생 등 모두 7명이 한집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초가가 불탄 뒤 1948년 12월10일 밭에서 일하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졌다.
 
갈 곳이 없게 된 여섯 식구는 정뜨르비행장(제주공항) 인근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할머니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동네 주민들이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피난 온 양씨 가족에게 산에서 내려온 ‘산폭도’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집이 불타기 전 미리 왔으면 됐는데, 늦게 왔다는 게 이유였다.
 
추운 겨울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어디서 군경이 나타나 잡아갈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씨와 언니는 걷고 동생들은 업거나 안고 집안 소유의 노형리 외곽 소나무밭으로 갔다. 양씨는 “아버지가 아무리 사정해도 산폭도라며 들여보내 주지 않아 우리 소나무밭까지 갔다. 그곳에 움막을 지어 살았다”고 말했다.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 얼기설기 엮어 바람을 피할 정도의 조그만 움막이었다. 그 안에서 여섯 식구가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겨울의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기보다 더 무서운 일이 찾아왔다.
 
1949년 2월3일 낮, 토벌대가 움막에 들이닥쳤다. 아버지가 잠시 나간 사이였다. 그날의 일을 6살 아이는 눈으로 보고 기억했다. 그리고 평생 그 기억의 고통에서 달아나려 했다. 달아나려 할수록 기억은 더 그를 옥죄어왔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쏘았어요. 총으로 쏴서 맞지 않으니까 세 번을 쏘았어요. 세 번째 쏘았을 때는 총알이 목에 맞았습니다. 목에 맞으니 피가 튈 거 아닙니까? 피가 팍팍 튀면서 우리 몸이 피범벅이 됐어요.”
 
토벌대는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언니는 다리에 총을 맞아 눈 위에 나동그라진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토벌대는 언니가 죽은 줄 알고 그냥 방치했다. 아버지가 돌아온 뒤 언니를 치료하려고 인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으나, 그 집도 그날 저녁 불에 탔다. 언니의 주검은 찾지 못했다. 여동생은 움막 안에 앉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양씨는 왼쪽 옆구리에 칼을 맞아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눈을 떠 사방을 둘러봤다.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생후 2, 3개월밖에 안 돼 이름도 짓지 못한 남동생이 목이 잘린 채 움막 안에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양씨는 그때 토벌대가 한 말을 기억한다. “갔다가 와서 살아 있으면 다시 죽여버리겠다.”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아요. 우리 언니, 동생들, 어머니 죽이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까 그 장면들이 지금도 훤하게 보이는 거예요. 아버지도 독자, 남동생도 독자였어요.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2월3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가족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울부짖으며 죽은 아내와 자식들의 주검을 수습한 아버지는 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칼에 찔린 딸만이라도 살려야 했다. 아버지는 어린 양씨를 업고 겨울철 그 움막에서 삼성혈까지 눈 내린 길을 걸어 내려왔다. 직선거리로는 6㎞가 채 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3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던 거리였다. 그것도 언제 어디서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이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삼성혈 옆 무덤가에 다다르자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말했다.
 
“이불 가졍 오켜. 이디 이시라.”(이불을 가져올 테니 여기 있어라) “아버지, 나도 가젠(갈래).”
제주4·3 당시 토벌대에 초토화된 뒤 1950년대 재건된 제주읍 노형리 모습이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딸이 보채자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같이 잠을 자는 척했다. 제주의 무덤은 방목한 소나 말의 출입을 막기 위해 대개 장방형의 돌담(산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양씨가 깨어나 보니 옆에 있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이는 더럭 겁이 났다.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조그만 차롱(대바구니)에 삶은 보리쌀과 게다짝(일본 신발)에 할머니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그 산담 안에서 사흘을 밤낮 울었다. 눈이 내리고 또 내렸다. 추위로 몸은 시커멓게 변해갔지만, 혼자 산담 옆에서 사흘을 버티며 울었다. 아버지가 올 것 같아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무도 없는 무덤가 산담 옆에 앉아 울어대는 아이. 울음은 추운 겨울의 바람소리 사이를 타고 퍼져나갔다. 그러다 울음이 그치면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저승과 이승의 어디쯤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감시막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감시초소를 지키던 사람이 찾아왔어요. 짐승 소리인지, 사람 소리인지 무슨 소리가 난다고 찾아온 거예요. 와서 보니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하도 울어대니 몸이 붓고, 시커멓게 변해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모습이었던 거예요.”
 
제주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온 가족이 희생되는 속에서 살아난 양수자씨. 허호준 기자
 
주민들은 게다짝에 쓰인 주소를 보고 아이를 할머니 집으로 데려다줬다. 할머니 집에서 양씨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이유 모를 갖은 구박을 받았다. 차라리 보육원에 맡겨졌으면 고생을 덜 했을 거라고 했다. 식사도 눈치를 보며 해야 했다.
 
“밥을 먹으면 많이 먹는다고 구박했어요. 남박세기(나무바가지)에 밥과 국을 퍼서 고팡(창고)에 숨겼다가 할머니가 외출하면 그걸 씹어먹지 않고 꿀꺽꿀꺽 삼켰어요. 지금도 밥을 5분 이상 먹지 못해요. 그렇게 살았어요.”
 
7살 때부터 아이는 밭에 검질(김)매러 다녔다. 혼자만 가서 조팥(조밭) 검질을 맬 때가 훨씬 편했다. 혼자서 콩을 갈 때는 덥거나 지치면 드러누워서 쉬기도 했지만, 할머니와 함께 가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양씨는 “콩밭 검질맬 때는 더울 때다. 더워서 일어서면 골갱이(호미)로 와싹 때려. 일어서면 버릇 난다면서 일어서지 못하게 말이야. 그렇게 일어서서 바람 쐬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기절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부럽지 않았다. 부럽다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글을 배우고 싶었다. 양씨의 표현에 따르면 ‘눈이 벨라지게(벌겋게)’ 배우려고만 했다. 정뜨르의 한 교회에 다녔다. 10살 무렵부터 다닌 교회는 결혼하기 한 해 전인 19살까지 다녔다. 할머니는 “여자가 밥할 줄만 알면 되고, 솥뚜껑만 열 줄 알면 된다”며 다니지 못하게 했지만 용케도 다녔다.
 
할머니는 새벽 3~4시가 되면 깨워 밥을 짓게 했다. 쇠먹이러 갔다 오고, 구루마(마차)를 끌고 가 촐(꼴)을 실어다가 집에다 놔둔 뒤 양씨는 조그마한 널빤지를 하나 갖고 교회 부설 야간학교로 달려갔다.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그렇게 글을 익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중학생들과 함께 수학 수업을 들을 정도였다. 월 회비 5원을 내기 위해 남의 집 쇠먹이러 가서 콩이나 보리를 줍거나,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남는 돈은 저축해 결혼 밑천으로 삼았다.
 
지난해 5월28일 제주4·3생존희생자후유장애인협회가 주최한 ‘한마음기행’ 행사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양수자씨. 제주4·3트라우마센터
 
양씨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냇가에 물을 길으러 가다가 아버지 닮은 사람이 다가오면 아버지인가 하는 마음에 뒤를 졸졸 쫓아갔어요. 그러다가 할머니 집 골목을 넘어가면 ‘아버지가 아니었구나’ 하며 실망하고 다시 물을 길으러 가기를 여러 차례 했어요. 20살 무렵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며 “배토라진 가매기질 했다”(배가 뒤틀린 까마귀 노릇 했다)며 구박했다. 몇번이나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한테 울면서 이야기를 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베개가 왈탕하게 젖었다. 베개에 머리를 묻고 우는 울음은 목구멍에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졌다.
 
아버지는 삼성혈 인근 무덤가에서 양씨와 헤어진 뒤 군경에 붙잡혀 제주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무죄로 석방됐다고 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가락질로 다시 붙잡혔다. 아버지는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뒤 행방불명됐다.
 
2021년 3월1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수형 희생자 335명에 대한 직권재심에서 아버지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씨는 4·3 당시 아버지가 형무소에 끌려간 사실은 고모부를 통해 들었지만, 얼마나 형을 받았는지는 몰랐다. 그날 양씨는 법원에서 재판장에게 “아버지가 행방불명돼 돌아가신 것은 알았지만 무기징역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너무 가슴이 아파 터질 것 같다. 무죄를 선고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에 있는 4·3 후유장애인 양수자씨의 아버지 양우빈의 표석. 허호준 기자
 
팍팍한 환경에서도 부모에게 못 한 효도를 한다고 경로당에서 12년 동안을 밥을 짓는 등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2020년 3월 4·3 때 입은 부상 때문에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됐고, 당시 숨진 온 식구가 4·3 희생자로 인정됐다.
 
이제 그의 마음이 풀어졌을까. 양씨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다. 4·3평화공원에 처음 갔을 때는 눈물만 나고 숨이 탁탁 막혀 걷지를 못했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와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고, 눈물도 조금은 말라 살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 모여 있는 데 가기도 싫고, 텔레비전에서 4·3 이야기가 나오면 꺼버려요. 4·3 트라우마센터에서 오라고 해도 가기 싫었어요. 그때 일이 너무 생생해서 잠자다 깨면 그 생각이 먼저 나는 거예요.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지만, 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해요.”
 
75년 전 제주읍 노형리 정존마을에 살았던 아이는 지금도 매일이 4·3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홍춘호 해설사가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1948년 11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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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밭일을 할 때면 옆에서 사탕수수를 입에 물고 동생들을 돌봤다. 70여 년 전이지만 장난을 치며 놀던 기억이 선하다. 어머니, 아버지와 남동생 셋, 그리고 사촌언니와 함께 살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1948년 11월은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이 그녀가 살던 곳이다. 4.3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홍춘호(86)씨의 어린 시절 얘기다.

그녀의 11살 가을은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중산간지역 통행자를 사살하겠다'는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때다. 중산간 마을 동광리의 주민들은 해안으로 내려오라는 소개령도 포고령도 알지 못하고 대다수가 마을에 남아 있었다.

동광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연설이 있을 예정이라며 주민들을 집결시켰고 구타와 총성이 이어졌다. 처음엔 10여 명이 죽었다. 최초의 학살터는 집 근처였다. 홍 해설사는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고 그날을 회상한다.

영문도 모른 채 고달픈 피난살이가 시작됐다. 처음엔 낮에는 동굴에 숨어지내다 밤이 되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물오름 굴에 숨어있던 때의 공포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총소리도 나고, 말소리도 나고, 발자국 소리도 났어요. 그날은 '우리가 이제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발소리만 나면 우리에게 오는 것 같았어요. 가만히 그 굴 속에 엎드려서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데...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 그 사람들도 돌아갔어요. 그래서 '아 오늘은 살았구나'라고 한숨을 쉬었어요."

곶자왈과 굴 속을 넘나들며 숨어지낸 지 몇 개월이 흘렀다.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던 남동생 3명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한 마음과 함께 12월말 동광리 이웃들과 향한 곳은 큰넓궤다. 

큰넓궤는 굴 입구에서 10m까지는 한 사람씩 낮은 포복을 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이어 2m 높이의 낭떠러지를 다시 내려간 뒤에야 높이 2m에 90여㎡의 공간이 나온다. 토벌대의 감시가 심해지자 40일이 넘게 어두컴컴한 굴 속에 숨어지내야 했다.

"부모님이 몰래 집에 가서 맷돌로 곡식을 갈아서 만든 범벅을 만들어오면 그걸 먹으면서 지냈어요.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서 고이면 억새를 빨대같이 만들어서 빨아먹고... 그 속에서 짐승같이 살았어요. 하늘을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밤 하늘이라도 한 번 보여달라고 했어요. 아버지에게 밤하늘이라도 한 번 보여달라고. 그러면 아버지는 '이제 나가면 죽는다, 잠잠해지거든 나가자'고 말씀하셨어요."

"4.3만 아니었다면..."
 
  영화 <지슬>에 나온 큰넓궤 관련 장면. 군인들이 동광리에 들어와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큰넓궤 속으로 들어가 50일 가량을 숨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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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던 주민들은 결국 토벌대에게 발각됐지만 불을 피워 연기로 내쫓는 기지를 발휘해 겨우 살아남았다. 토벌대는 입구를 돌로 틀어막고 가버렸다. 다행히 다른 곳에서 망을 보던 주민들이 늦은 밤 굴 입구에 박혀있던 돌을 모두 치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돌을 치워준 분들이 날이 밝으면 토벌대가 와서 죽일 거니까, 아무데라도 마음대로 가서 살라고 했어요. 아니, 그런데 우리가 갈 수 있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온갖 고생 끝에 '계엄령 해제' 선전물을 보고 주민들과 하산해 임시수용소인 정방폭포 위 단추공장으로 끌려갔다. 운동장의 풀을 뜯어먹고, 조금씩 나눠주는 쌀로 끓인 물을 먹으며 버텼다. 

이 곳에서 풀려난 뒤에도 갈 곳이 없었다. 가족들이 함께 살던 동광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 무등이왓은 130여 호가 모두 불타 없어진 뒤다. 안덕면 화순리에 정착해 움막을 짓고 살고, 애기업개(보모)를 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썼다.

그녀가 14살 되는 해, '폭도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면서 살았냐'며 억울하게 고문을 당했던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8년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이 9살이 됐던 해다. 그때를 회상하던 그녀의 입에서 "진짜 기가 막히게 살았지"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4.3 때문에 학교도 몇 달 밖에 못다녔어요. 시국만 아니었으면 편하게 살고 공부도 하고 다 할 텐데."

20대 초반 결혼과 함께 동광리로 돌아온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며 밭을 매고, 산에서 나무를 베다 숯으로 만들어 팔았다. 자정까지 일한 날이 많았다. 나무를 가득 등에 짊어지고 10km 거리에 있는 모슬포항 일대까지 걸어가야 했다.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다보니 4남매의 어머니이자 9명의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됐다. 괴로웠던 그 시절 기억을 가족들의 미소로 조금씩 메웠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숨어 살던 큰넓궤 쪽으로는, 불타 사라진 무등이왓 마을 근처로는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해설사로 시작한 제2의 인생 
 
  홍춘호 해설사가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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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고 있는 홍춘호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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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조금씩 바뀌었고, 4.3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4.3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다. 그녀가 취재진들의 동행 요청을 받고 큰넓궤를 다시 들어가본 것은 일흔여섯살이 되던 2013년이다. 얼마 뒤 동광리에는 사리진 무등이왓 마을과 아픔의 장소를 잇는 4.3길이 열렸다.

이곳에서 제주도 소속 4.3문화해설사를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4.3의 아픔을 직접 겪고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람들의 부탁에 마음을 먹었다.

해설사가 된다는 것은 끔찍했던 고통의 공간들을 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의미다. 고통스런 공간을 다시 마주했을 때는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용기를 내며 말을 하기 시작하자 이곳을 찾은 방문자들은 그와의 대화에서 큰 충격과 교훈을 얻었다.

홍 해설사 역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보람이 느껴졌다.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70여 년 전 공포스런 공간들은 이제 그의 일상이 됐다.

2021년 홍 해설사는 4.3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했다. 

"죽지 않아 이제도록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죽어버렸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온 걸 누가 압니까? 아무도 모를 일인데 살아있으니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고."

아직 홍 해설사는 할 일이 많다. 특히 단추공장으로 끌려가 고생하던 남제주군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크다. 4.3 생존 피해자로서 세상에 4.3의 이야기를 알리는 해설사로서 소명도 남아있다. 4.3 75년을 맞는 2023년에도 그녀가 계속 걷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앞으로도 내가 말을 지금처럼 잘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요청하면 해야죠. 내가 말을 잘 못하고 걷지 못하게 되면 못하지만... 지금처럼 말하고 걸을 수 있다면 손님들이 요청하면 얼마든지 해야죠."

세 자매의 4·3…임신한 엄마 고문한 경찰, 큰형부도 지하실로

등록 2023-04-03 10:00수정 2023-04-03 22:13

[제주4·3 그 뒤, 75년] 하도리 세 자매의 연좌제
아버지 항일, 4·3, 도피, 밀항…파란만장 삶
제주에 남겨진 가족은 간첩사건 때마다 공포

40여년 전 오기숙씨의 남편이 심은 팽나무 앞에서 선 세 자매. 오기숙, 오희숙, 오계숙씨. 허호준 기자
 
어머니는 바다에 가면 시름을 잊었다. 토끼섬 넘어 아스라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지난날들을 자맥질했다. 세 자매도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갔다. 바다를 보면 속이 후련했다.
 
지난달 19일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만난 오희숙(87)·계숙(80)·기숙(78) 자매는 신산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울고 웃었다. 어릴 때 세 자매는 어머니와 함께 모두 물질을 했다. 첫째는 2년 전 은퇴했지만 셋째는 현역 해녀다. 제주시내에 사는 둘째는 일찍 해녀를 그만뒀다. 어머니와 세 자매는 일제강점기와 4·3을 거치면서 언제나 연좌제의 공포에 시달렸다.
 
아버지 오화국의 삶은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와 4·3을 거치면서 이어진 시련은 자매들의 남편에게까지 이어졌다. 취직할 수 없었고, 간첩사건이 터질 때는 장모와 함께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연좌제에 시달렸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아버지는 17살 나던 1930년 4월 당시 제주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제주농업학교에 진학했다.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자식 열둘을 낳았지만 한집(홍역)에 걸려 잇따라 숨졌고, 겨우 아버지를 건졌다. 그 귀한 아버지가 농업학교에 진학하자 할머니는 하도리에서 양식을 짊어지고 성안(제주시내)까지 걸어갔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 어두워지는 거리였다. 그렇게 키운 자식이었다.
 
1931년 3월 학교 쪽의 부당한 학사 운영에 분노한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 사택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이 사건에 연루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학생들은 유치장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해 8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이 일로 아버지는 제적됐다. 고향 하도리로 돌아왔다.
 
아버지 오화국 선생의 1948년 3월 가석방증. 허호준 기자
 
아버지는 이듬해 1월 하도리를 중심으로 구좌면 해녀들이 일제의 착취에 맞섰던 해녀투쟁에도 가담했다. 그러다 그해 2월 구좌면 일대에 살포된 ‘격문’ 때문에 세화주재소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는 해녀투쟁을 지도했던 이 지역 문도배, 오문규 등과 함께 청년운동에 뛰어들어 야학 활동을 하며 마을 청년들을 가르쳤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아버지와 집안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다. 제주읍은 물론 도내 면별로 수천명씩 모여 기념행사가 열렸다. 아버지는 동료들과 함께 이날 오전 구좌면 세화교에서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기념대회를 이끌었다. 둘째는 “이모가 ‘느네 아방이 요망졌져’(네 아버지가 똑똑했어)라고 얘기해줬다”며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행사에 참석해서 연설문도 낭독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제주읍 제주북교에서 열린 기념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난 직후 경찰의 발포로 시위를 구경하던 주민 6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경찰은 발포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정당방위’라며 다른 지방에서 경찰을 증파받아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같은 해 5월6일까지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된 인원만 368명에 이르렀다.

할머니·할아버지 세워두고 공포탄 위협

아버지도 그해 5월 하순 집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하도교 2학년이던 첫째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집 뒤는 대나무밭이었지만, 갑자기 경찰이 오니까 뛸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잡혀갔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미군정 포고 2호 등 위반으로 징역 10개월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면회하러 부지런히 목포를 다녔고, 그 덕인지 8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1948년 4월1일,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무장봉기 발발 이틀 전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가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저녁이었어요. 아버지와 같이 저녁 먹고, 그날 밤을 보냈는데 다음날 밝으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잡혀갔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아버지도 여기 있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어요. 하룻저녁 자고 떠난 겁니다.”
 
첫째 오희숙씨. 허호준 기자
 
그 뒤로 아버지는 제주 땅을 밟지 못했다. 이튿날 바닷길이 막혔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다. 갑자기 ‘빨갱이 가족’이 돼버렸다.
 
12살 희숙은 할아버지네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동생들을 돌봤다. 그러나 친구를 찾아가면 친구 부모들이 “물 붙는다”(나쁜 일에 연루된다), “너희들은 밖에 다니면 안 된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첫째는 “이웃집 삼촌(주민)들이 했던 ‘놀지 말아라,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셋째는 “우리를 ‘빨갱이 새끼’라고 하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경찰은 아버지가 부산으로 떠난 사실을 알면서도 수시로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아들을 찾아내라”고 닦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세워놓고 위협하며 공포탄을 쏘는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들이 피해를 볼까 봐 “우리는 죽어도 좋지만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며 남의 집을 빌려 밤이면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도록 했다.
 
경찰이 찾아올 때마다 가족들은 두려워했고,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밭에서 거둬들인 메밀을 밤새 맷돌에 갈고, 할머니는 “잘 봐달라”며 그것을 경찰에게 갖고 갔다. 경찰이 탄 차가 보이면 겁부터 났다.
 
1948년 여름이 지날 무렵 바닷길이 잠깐 열렸다. 아버지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아들과 셋째 기숙을 데리고 물질 가는 배를 이용해 부산으로 갔다. 부산 영도에 셋방을 얻은 어머니는 그곳에서도 물질로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첫째와 둘째는 제주에 남아 할아버지가 경찰에게 당하는 수모와 고초를 고스란히 지켜봤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한국 땅에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제주로 가면 죽을 것이라 생각했고, 부산에서도 살 수가 없었다. 친척이 사는 일본으로 가려고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둘째 오계숙씨. 허호준 기자
 
기약 없이 남편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1950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기다린 건 경찰이었다. 경찰은 어머니를 잡아가 “남편이 어디 갔느냐”며 고문했다. 주전자로 코에 물을 들이붓고, 전기고문을 가했다.
 
둘째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모진 고문을 하던 경찰이 ‘홀몸이 아닌 것 같다’며 고문을 멈췄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고문당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막내를 임신하고 5개월 될 때였다. 때리지는 않았지만 옷을 벗겨서 거꾸로 달아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코에 물을 길었다”고 몸서리를 쳤다. 어머니는 2007년 세상을 떴다.

“취직할 수 없어 농사만 지었다”

연좌제는 자매의 남편한테까지 영향을 미쳤다. 1959년 결혼한 첫째는 “동갑내기 남편은 그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장인어른 때문에 취직할 수가 없어 처가에 와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셋째 오기숙씨. 허호준 기자
 
셋째의 남편도 연좌제에 걸렸다. 셋째는 “군에서 제대한 남편이 1970년대 초에 외항선을 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소를 팔고 부산에 가서 요리를 배웠다. 배를 타려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해서 배웠던 건데, 장인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하게 되자 제주로 돌아와 농사만 지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간첩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주목 대상이 됐다. 197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간첩사건에 연루돼 어머니와 첫째 사위가 경찰에 끌려갔다. 며칠 뒤에는 셋째도 세살 아들을 업은 채 연행됐다. 셋째는 “경찰서에 가니까 아기는 경찰이 어디론가 안아 데려가버리고 지하실에서는 취조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부가 내는 소리인지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도 들리고, 고문받는 소리가 지하실에서 들려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장모와 사위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셋째는 경찰이 수십년 전 어릴 때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 기가 막혔다고 했다.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한 경찰은 셋째를 당일 저녁 풀어줬다. 어머니와 형부는 이튿날 석방됐지만, 그 후로는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자매는 “장인 때문에 사위들까지 연좌제 피해를 봤다. 우리하고 결혼하지 않았으면 고초를 겪지도,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세 자매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네와 어머니한테 평생 마음고생을 시킨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 아버지가 3·1절 기념대회와 관련해 형을 받은 사실이 인정돼 지난해 7월20일 4·3 희생자로 인정됐다.
 
“아버지의 처지가 애달프고 처량해요. 일제 때 항일운동한 기록이 있는데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4·3 희생자로 인정되니까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아납니다.”세 자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3일 이른 아침 제주4.3 유적지 사진을 찍으려고 성산 일출봉 근처 광치기해변 터진목 학살 현장에 들렀다가 근처 위령비 앞에 술을 치고 있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름은 정순자(76). '유족이냐'는 질문에 정씨는 "우리 할머니가 이 해변에서 총살당했다"고 답했다. 그의 할머니, 오남윤씨는 학살을 면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피한 아들 정양필씨 대신 처형된, 이른바 '대살' 희생자였다. 

 
▲ 4.3 유족 정순자 정순자씨는 아버지 대신 학살된 할머니를 추모하려고 3일 아침 ‘제주4.3 성산읍 희생자위령비’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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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살'은 학살을 면하려고 한라산 자락이나 일본 등으로 도피한 청장년들 대신 배우자나 어머니를 납치했다가 출두하지 않으면 처형하는 극악한 연좌제였다. 4.3 당시 성산포는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400여 명이 참살돼 죽음과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다크 투어리즘' 현장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제주4.3은 <한겨레> 기자인 허호준씨가 최근 발간한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7년여 장기간에 걸쳐 자행된 국가폭력이었다. 그러나 제주는 온통 동백과 유채꽃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인식돼 제주 곳곳이 학살의 현장임을 아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400여 명이 희생된 성산 터진목 학살 현장도 일출봉 옆으로 펼쳐지는 일출을 보기 좋은 장소로 유명할 뿐이다. 4.3 유족들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지만 그 또한 남의 일이 돼 갈 뿐 아니라 가해 세력의 후예들이 수시로 상처를 헤집는다. 정순자씨도 '4.3 때 학살 주범인 서북청년단이 4.3평화공원에 온다는데, 항의하러 가고 싶어도 다리를 수술해 가지 못 한다'며 분개했다.

정씨는 할머니가 학살된 뒤 아버지마저 '빨갱이'로 낙인 찍혀 23년 동안 귀국하지 못하는 바람에 고아처럼 살았다고 한다. '뭘 하고 살았느냐'는 질문에 "살아시난 살았쥬"라며 금세 눈자위가 벌개졌다. 어릴 때부터 해녀가 돼 평생 물질로 살았다고 한다.

 
▲ 터진목 위령비 일출봉이 보이는 광치치해변 터진목 학살 현장. 추모석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4월 3일 아침인데도 조화를 꽂는 용기가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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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때 가장 많이 쓰인 슬픈 말들

'살아시난 살았쥬'란 정씨의 말은 '살았으니까 살았지'라는 뜻의 제주어다. 살 상황이 아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았거나 어렵게 살아왔다는 얘기다.

이 말은 서귀포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하루 전날 배운 제주어여서 반갑기까지 했다.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지난 3월 12일부터 일요일마다 8주 연속 제주어교실을 열고 있다. 

 
▲ 서명숙 이사장 강연 서명숙 이사장이 2일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4.3 관련 제주어교실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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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숨허라이."

이는 말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뜻의 제주어다. 사람은 숨을 쉬며 말을 해야 하는데 숨을 속으로 삼키라는 당부다. 제주도민들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을 반세기 넘게 살아왔다. '4.3 때 부모가 죽었다'는 말만 해도 '폭도 새끼'로 몰려 연좌제가 작동하던 인고의 반세기였다.

1948년 발발한 제주4.3 사건은 인구 10%인 3만 명이 희생된 '대학살극'인데도 나라가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라고 인정한 것이 2003년이었다. 그리고 20년, 제주4.3을 왜곡하는 집권여당과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이어지고 악랄한 가해자였던 '서북청년단'을 계승하겠다는 무리가 제주에 다시 나타났다.

산으로 가도 안 가도 죽음은 가까이 있었다

"여기 시민 몬딱 죽는다게. 글라 글라 산으로 가게. 애기들 재기재기 업으라."
(여기 있으면 모두 죽는다. 가자 가자 산으로 가자. 애기들 빨리빨리 업으라.)

대부분 사람이 '산사람'이 되고 싶어 산으로 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말 속에 들어있다. 살려면 우선 산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말해준다. 

 
▲ 서명숙 강연 청중 제주어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수강생들. 강연 뒤 한 수강생은 “올레길 걸으러 제주 왔는데 올레길이 달리 보일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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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이신 사람이나 곱으로 댕기지 무사 곱으레 댕기느냐?"
(죄 있는 사람이나 숨으러 다니지 왜 숨어 다니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마을에 남은 사람들도 대개 학살을 면치 못했다.

"혼저 글라. 혼저 글라. 오렌 허난 재기 안 가민 두드려 분다게."
(빨리 가자. 빨리 가자. 오라고 하니까 빨리 안 가면 때려버린다.)

서북청년단이나 군경이 집합하라고 하는데 빨리 안 가면 팬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군경 가족을 빼고는 학살된 이가 많았다.

"죽어신디 어떵항 이추룩 사람 말소리 들어점신고."
(죽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사람 말소리가 들리지!)

등에 업힌 아이만 총에 맞아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어머니가 한 말이다. 총에 맞아 자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아이만 죽고 뜨거운 피가 등을 적셔 상황을 알게 되는 슬픈 사연이다.

 
▲ 제주올레여행자센터 서귀포시 제주올레여행자센터는 숙박을 할 수 있고 올레 답사 정보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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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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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이사장은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을 구상하면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도 겸하도록 가능하면 4.3 유적지를 지나가게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탄 오르한 파묵을 인용하면서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조국인 튀르키예 또한 제주도 못지않은 기구한 역사를 겪었다.

서 이사장은 저서 <제주올레여행>에서 제주올레를 걷고 또 걸으며 깨닫게 됐다고 한다.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음을. 두 발로 발도장을 찍은 곳만이 온전한 내 것이 된다는 것을.' 

 
  4.3 주요 유적지. 중산간지대 말고 해안지대는 거의 다 올레길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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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이사장은 이북 출신인 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들의 언어가 소통이 힘들 정도로 달랐던 점도 더 많은 희생을 초래한 원인으로 본다.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약해 더 무자비하게 대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활발한 저술 등을 통해 제주어와 제주의 독자적인 문화를 소개한 공로로 지난 2월 제주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