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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햇볓 정책의 원조는 미국이다!"

무궁화9719 2022. 9. 30. 07:56

DJ "햇볓 정책의 원조는 미국이다!"

[김대중 평전 '새벽'·36] 미국의 외투를 벗기다

기사입력 2012-05-14 오전 9:21:31

 

대통령 김대중은 1998년 4월 국제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영국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였다. 각국의 정상들은 김대중을 만나고 싶어 했다. 회담 요청이 줄을 이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는 예정에 없던 회담을 가졌다. 언제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시간만 내달라고 요청해왔기 때문이었다.

촌음을 다투며 정상 회담을 했다. 외교관들은 어느 때보다 숨이 가빴다. 그래도 감회가 새로웠다. 순간순간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독재자들의 신분 세탁이나 국내 선전용 회담에 익숙했던 외교관들은 김대중이란 인물이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 이름의 힘에 놀랐다. 대한민국은 반체제 민주 투사를 지도자로 선출한 나라, 그래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룩한 나라였다. 외교관들은 비로소 국격(國格)이 높아졌음을 실감했다.

김대중은 준비된 외교관이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외교적 식견이 깊었다. 우물 속에 있으면서도 천문도를 그렸다. 세계 지도를 머리와 가슴에 품고 있었다. 평생을 야당 생활만 해오던 김대중에게 이런 면모가 있음이 경이로웠다. 정상 외교 때의 김대중은 늘 힘이 넘쳤다. 회담은 예정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김대중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었다. 정상들은 불굴의 삶 자체에 경의를 표했다.

김대중은 현란하거나 추상적인 레토릭(수사)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화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이런 대화를 특히 서구 정상들이 좋아했다. 정상들과 대화할 때는 나름의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 되도록이면 상대 말을 많이 들어주는 것, 상대와 의견이 같을 때는 "내 의견과 같다"고 말해주는 것, 회담 성공은 상대의 덕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

김대중은 절제된 입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입에 진실을 담으려 노력했다. 김대중을 만나고 나오는 사람들은 그래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미국은 두 번씩이나 김대중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김대중은 기내에서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가 떠올랐다. 칠흑 같은 밤하늘을 날아가면서 얼마나 두려웠던가. 그때 아내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를 대표하여 수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아내 이희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대중은 새삼 출국 전에 가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이 생각났다.

"오래 살아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룰 수 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김대중을 '돌아온 영웅'으로 묘사했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된 삶을 깊이 있게 보도했다. 미국은 김대중에게 여전히 기회의 땅이었다. 망명 시절에는 민주화의 원군(援軍)을 얻으려했다면 대통령이 되어서는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해 달러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또 햇볕 정책에 대한 미국의 불안감을 해소해야 했다. 김대중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을 이루는 것, 그것은 김대중의 표현대로 '대통령으로서의 사명 1조 1항'이었다. 그 비원은 '햇볕'이 있어야만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협력 없이는 햇볕 정책을 펼 수 없었다.

김대중은 취임사에서 이미 북한에 대해 어떤 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 북한을 흡수할 생각이 없다, 남북 간 화해 협력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3대 원칙을 천명했다. 그리고 3·1절 기념사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특사 파견을 북한에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럴수록 햇볕 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필요했다. 어떻게든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지지를 끌어내야 했다. 


1998년 6월 9일 백악관에 들어갔다. 클린턴 대통령이 환영사를 했다. 의례적인 덕담이 아니었다. 클린턴은 인간 김대중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우리는 특기할 만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독재 체제 하에서 정치범이었던 폴란드의 바웬사, 체코슬로바키아의 하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그리고 오랫동안 정권으로부터 부당하고 가혹한 탄압을 받다가 결국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등 자유의 영웅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바웬사는 폴란드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하벨과 만델라도 그들 조국의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도 대한민국의 50년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여야 정권 교체 후에 오늘 대통령으로 여기에 서 계십니다.

김 대통령께서는 인권의 개척자이고, 용기 있는 생존자이며, 세계를 위해 더 좋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동반자입니다."

환영사는 각별했다. 김대중은 예감이 좋았다.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단독 정상 회담을 가졌다. 김대중은 물음을 기다렸다. 그것은 대북 정책에 대한 클린턴의 질문이었다. 예상대로 클린턴이 물었다.

"당신의 햇볕 정책이란 무엇입니까."

김대중은 준비된 답변을 시작했다.

"햇볕 정책은 사실 미국의 성공에서 배운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미국은 소련에 대해서 극단적인 냉전 체제를 유지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무기 경쟁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멸의 위기감만 고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데탕트 정책으로 바꿨고, 경제 협력과 교류를 했습니다. 그리고 15년 정도 지나니 세계를 양분해서 지배하던 소련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외부에서 총 한방 쏘지 않고, 안에서 폭동 한 번 일어나지 않았지만 붕괴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 역사에 일찍이 없었습니다."

김대중은 중국 베트남의 예도 들었다. 전쟁 범죄 국가로 적대시했을 때는 강경 대치했지만 외교 정상화를 통해 개방을 유도하자 친미 국가로 탈바꿈했음을 설명했다. 반대로 미국이 쿠바를 40년 동안 봉쇄하고 압박했지만 지금까지 굴복시키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김대중의 매듭 말은 명쾌했다.

"공산주의는 문을 열면 망하고 닫으면 강해집니다. 우리는 소련, 중국, 베트남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집니다. 공산주의를 대할 때는 군사적 힘으로 다른 도발은 못하게 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개방을 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햇볕 정책은 미국의 대외 정책을 통해 이미 검증을 마친 것입니다."

클린턴은 오래 깊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대외 정책이 미국을 압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앞으로 한국 외교사에 빛날 '말(言)의 탑'이었다. 클린턴이 말했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으로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께서 주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이로써 분단 후 처음으로 대북 정책에 주도권을 확보했다. 대미 외교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이었다. 김대중의 눈에 비친 클린턴은 순수하고 솔직했다. 클린턴은 의회를 잘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미국은 여소야대 정국이었다.

햇볕 정책은 미국 내 보수층, 특히 네오콘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에게 북한 지도부는 '무조건 악'이었다. 김대중은 의회 연설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연설 원고는 한국에서부터 고치고 또 고쳤다. 의회 연설 전날 밤에야 비로소 원고를 완성했다.

정상 회담 다음 날,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김대중은 미국이 두 번이나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햇볕 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북한을 화해로 이끌기 위해서 한미 양국은 강력한 안보 태세에 바탕을 두고 개방을 유도하는 '햇볕 정책'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 선의와 진실을 가지고 대함으로써, 북한이 의구심을 떨치고 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유연한 정책이 필요합니다. 지나가는 행인의 코트를 벗기기 위해서는 강력한 바람보다는 햇볕이 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의 햇볕에 결국 미국도 외투를 벗었다. 그 후 한반도에는 '김대중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남과 북은 서로 모자를 벗었다. 적어도 먹구름을 타고 대통령 조지 부시가 나타날 때까지는.

 

/김택근 언론인

 

햇볕 정책을 쓰레기통으로? '퍼주기'의 진실은!

[김대중 평전 '새벽'·51] "퍼주기가 아니다, 퍼오기다!"

김택근 언론인

기사입력 2012-07-05 오전 10:01:47

 

2006년 11월 2일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했다. 대통령 노무현이 참석했다. 이틀 후에는 동교동 사저를 전격 방문했다. 현직이 전직 대통령 자택을 찾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언론은 고립무원의 노무현이 김대중에게 일종의 '기대기'를 한다고 보도했다. 어쨌든 한 때 소원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복원됐다.2007년 10월 2일 대통령 노무현이 평양으로 떠났다. 김대중이 그토록 바랐던 정상 회담이 이뤄졌다. 아내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갔다.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가 분계선을 넘는 광경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여운형, 김구, 이후락, 박철언, 임수경, 정주영, 임동원이 넘어갔지만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노무현이 뜻 깊은 얘기를 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김대중은 이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봤다.

남북 정상은 8개항에 합의하고 10·4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평화적 공존, 경제 협력, 비핵화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기 말 정상 회담은 남과 북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다음 정권이 이를 승계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남과 북은 총리 회담, 국방장관 회담, 적십자 회담, 경제협력공동위원회 등을 잇달아 열었다. 다음 정권에서도 번복할 수 없도록 하자는, 나름의 못 박기였다.

하지만 차기 이명박 정부는 10·4 선언은 말할 것도 없고 6·15 공동 선언까지 무시해 버렸다. 냉전 시기의 유물인 '비핵 개방 3000'이란 정책을 케케묵은 자루에서 꺼내 들었다.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3000달러 소득을 올리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니 북한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초강경책이었다. 그것은 이미 부시 행정부도 시도했다가 폐기한 정책이었다.

야권과 보수 언론은 대북 지원을 '퍼주기'라며 깎아 내렸다. 김대중은 퍼주기란 주장에 할 말이 참 많았다. 실상은 퍼주기가 아닌 퍼오기라며 반박했다. 북한 땅 위에는 우리와 말이 통하는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인적 자원이 있고, 또 땅 밑에는 엄청난 양의 광물 자원이 있었다. 상공회의소 분석대로라면 어림 2조 달러어치가 묻혀있었다. 그 자원들을 활용하여 퍼오기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철도 도로 연결하여 '철의 실크로드' 시대가 열리면 북한 너머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대의 천연자원을 개발하여 들여올 수도 있었다. 김대중은 대북 지원의 필요성을 이렇듯 절묘하게 빗대었다.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더니 보물이 쏟아지는 박 씨를 물어왔듯이 작금의 '북한 돌보기'는 우리 민족에게 대운을 가져올 것이다. 뒷박으로 퍼 주고 말로 퍼 올 것이 분명하다."


사실 남쪽은 해마다 1억5000만 달러 정도를 북에 제공했다. 이를 환산하면 우리 국민 한 사람당 5000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를테면 자장면 한 그릇 값이었다. 그 돈으로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화해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지난 10년 동안 안보 불안 없이 살았다. 한반도의 평화를 산 셈이었다. 2만 명의 이산가족이 만났고, 44만 명이 남과 북을 오갔다. 금강산과 개성 지구가 개방됐다. 그러다보니 북한 민심이 변했다. 이것 또한 '보이지 않는 퍼오기'였다.

개성공단이 들어선 땅은 북한의 3개 여단이 포진하고 있던 최전방 기지였다. 그 군사 기지를 뒤로 물리고 공단을 지었다. 금강산도 해군의 요충지였던 장전항을 남쪽에 개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전쟁의 위험은 줄어들었다. 이런 성과를 살피지 않고 퍼주기 논쟁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김대중은 이를 개탄하며 "그렇게 햇볕 정책이 못마땅하면 대안을 내놓으라"고 일갈했다. 북을 변화시키기에는 '햇볕'이 제일 싸고 확실하다 믿었다.

김대중은 재임 중에 사형을 한 건도 집행하지 않았다. 퇴임 후 국제앰네스티 한국 지부와 사형 폐지 기독교 단체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김대중은 생명은 천부 인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으며 신앙심이나 교육으로 얼마든지 천사가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기회를 사형으로 박탈해서는 안 되며 적어도 죽음을 맞기 전까지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주 노동자와 중국 동포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 동포를 위하여 법 제정의 초석을 놓아 주셨습니다. 소외당하고 힘들게 살아왔던 우리들이 '노동자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관심과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이 패에 담아드립니다."


김대중은 우리 사회에 이주 노동자들이 몰려오고 국제 결혼이 급증하면서 다문화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다원 가치를 인정하고 이민족에게 관용을 베푼 나라가 융성했다. 페르시아, 로마, 당, 영국, 미국, 몽골 등이 인종, 민족, 종교에 차별을 두지 않아 제국을 건설했다. 역으로 이민족에 매몰찼던 스페인, 진, 나치스 독일, 군국주의 일본 등은 곧바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김대중은 인종, 문화, 이념의 순혈주의를 경계했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민주당 후보 정동영은 처음부터 열세였다.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에게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완패했다. 선거 역사상 이토록 허무하게 진 것은 처음이었다.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전통적 지지 기반이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대북 송금 특검, 분당, 야당에 연정 제안 등은 분명 잘못이었다. 김대중은 선거 결과를 보며 탄식했다.

이명박 정권은 '잃어버린 10년'이라며 과거 정부를 공격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은 없었다. 김대중은 신임 대통령 이명박의 취임사를 듣고는 매우 실망했다.

"실용주의자를 자처한 대로 철학이나 비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정책이란 것도 무얼하겠다는 나열이지 손에 잡히게 구체적 방법은 별로 없다. 남북 관계도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정상 회담에 응하겠다는 것인데 적극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2008년 2월 25일 일기)


7월 11일 금강산에서 여성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통제 구역을 벗어나 북한군 경계 구역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떠나 민감한 사건이었다. 김대중은 매우 불길했다. 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 전면 중단됐다. 남북 관계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김대중 바람대로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이 확정된 11월 5일은 온통 감격에 젖어 있었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미국이 그 위대성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오바마의 당선은 링컨의 노예 해방에 버금간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미국은 232년간 계속된 백인 중심 통치로부터 전 미국인 다인종 통치의 시대로 들어섰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세계 각국과의 화해 협력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북한, 이란, 시리아까지 포함해서. 오바마 당선으로 이명박 정권도 대북 대결주의를 더 이상 밀고 나가지 못하고 화해 협력의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6자 회담은 순항할 것이고 동북아가 '평화와 안보'의 시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2월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 중 비행기 안에서 전화를 해왔다. 또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즈워스도 방한했다가 귀로에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김대중은 그것들이 자신의 햇볕 정책을 지지한다는 우회적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낭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김대중은 오바마의 등장으로 미국의 오만과 독선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세계 곳곳의 문제들이 순리대로 풀릴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김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냥 미국인이었다. 북한이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이 로켓을 발사했다. 그리고 핵개발을 하겠다고 재천명했다. 그래도 오바마는 뜨뜻미지근했다. 결국 김대중은 오바마에 대해 실망감을 드러냈다.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 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 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한국에 왔다. 그는 김대중을 만찬에 초대했다. 김대중은 클린턴에게 북미 관계 개선을 요청하기로 하고 꼼꼼히 준비했다. 그것은 클린턴 부인 미 국무장관 힐러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날 하얏트 호텔 양식당은 너무 추웠다. 김대중은 원래 추위에 약했다. 여름에도 별다른 냉방 장치 없이 지낼 정도였다. 정상 회담 등 국제회의를 하러 나갈 때는 여름에도 내복을 입었다. 그날은 봄날이라 그냥 나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김대중은 온몸을 떨었다. 비서들이 냉방기 가동을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냉방 장치가 중앙 공급식이라 끌 수 없었다. 김대중은 오금이 오그라들었지만 클린턴 앞에서 웃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을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했고, '내 정책은 부시 대통령이 아닌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은 오바마 정권의 출범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는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 북한으로서는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9·19 공동 성명을 이행하겠다고 선언하면 북핵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9·19 성명은 '첫째 북한은 핵을 포기한다. 둘째 미국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셋째 6자가 협력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한다. 넷째 북한에 식량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다섯째 모든 것은 행동 대 행동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옳은 정책입니다. 미국에 돌아가면 말씀하신 내용을 힐러리 클린턴 장관에게 설명해서 잘 진전되도록 하겠습니다."


김대중은 클린턴에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문건을 건네며 따로 한 부를 챙겨 힐러리에게도 전해달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문건에는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있는가, 북한의 대미 강경책의 진위는 무엇인가, 무엇이 해결책인가 등이 담겨 있었다.

만찬을 마치고 김대중이 휠체어에 올랐다. 클린턴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대통령께서 다리가 불편하신 것은 '명예의 상징'입니다."


김대중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클린턴은 김대중의 마른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의 모습이 무척 수척해 보였다. 마지막 작별이었다. 김대중은 클린턴에게 한반도 평화를 부탁했다. 클린턴은 김대중에게 건강을 챙기라고 당부했다. 5월 18일, 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김대중은 시국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방송 장악을 비롯하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 촛불 집회 참가자 무차별 처벌, 인권위원회 무력화,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보복 수사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서는 무리가 없었다. 야당은 이를 저지할 힘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이를 일갈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김대중은 홀로 일어났다. 국내 문제에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식장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는 지금 세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민주주의 위기, 경제 전반 특히 서민 경제의 위기, 남북 관계의 위기가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듯 명확하게 시국을 진단하지 못했다. 김대중은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그는 현실에 피를 대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주의를 반석에 올려놨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김대중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내와 같이 다짐했다. '우리가 정치에서 은퇴한 지 오래지만 오늘의 현실 즉 반민주, 반국민 경제, 반통일로 질주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50년간의 반독재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형, 학살, 투옥, 고문을 당하면서 얻은 자유이고 남북 화해였던가! 그 자유와 남북 화해가 무너져 가고 있다. 늙고 약한 몸이지만 서로 비장한 결심과 철저한 건강 관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오늘의 역주행 사태를 보면 지하의 열사들이 고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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