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리가 왕비(명성황후)를 죽였다”…을미사변 日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

무궁화9719 2022. 9. 14. 19:25

명성황후(나는 조선의 국모다)

2005. 6. 1

명성황후

 

나는 조선의 국모다.

비록 타오르고 타올라 그저 한줌의 재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빗물에 쓸려

외롭게 떠돌지만 이것이 어찌 내 마지막이라고 하겠는가?

 

경술국치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왜놈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참살이었다. 한나라의 국모를 어찌 왜놈들이 그렇게 능욕을 하고 궁궐 안에서 불태워 죽일 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바로 인식하고 왜놈들의 만행을 온 세계에 규탄해야 할 것이다.

 

1895년 음력 8 20(양력 10 8)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한 일본 나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 당했다. 시신마저 향정원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른바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인 것이다. 이를 배후에서 조정한 것은 일본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명성황후가 비참하고 굴욕적인 최후를 마쳤다는 것이 단지 일제낭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조선의 국모로서, 한사람의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을 왜놈들한테 당했다는 것이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들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 했다.

황후 시해, 낭인 아닌 일본 육군 소위가 자행한 ‘전쟁범죄’

2017. 8. 10.

[중앙선데이] 입력 2017.08.20 00:02 수정 2017.08.20 11:26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2> 을미왜변과 대한제국

 

명성황후 발인 반차도. 1895년 10월 8일 을미왜변이 일어난 지 2년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의 명성황후 장례식 장면이다. 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하는 행렬을 묘사했다.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에 실려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첫 회(‘식민지 프레임, 이제는 벗자’, 8월 13일자)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한마디로 놀라운 내용이라면서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궁금해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독자들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순 없을 것이다. 독자들이 알아보려고 해도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난 책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의 역사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식민지 프레임에 더 말려들어가는 악순환의 구조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용어인 소위 ‘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을 그대로 물려받아 쓰고 있는 학자들의 직무유기를 탓해야 할 것이다.
 

명성황후 칼로 찌른 인물 드러나
히로시마 법정의 낭인들은 들러리

日 정부와 軍 수뇌 미야모토 관리
대만 위험지대에 파견 49세로 전사
軍籍엔 기록, 야스쿠니신사엔 누락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
우치다 영사 비밀 보고서에 담겨
시효 없는 범죄 일본 정부의 책임

식민지 프레임 극복 출발점은 대한제국

 

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돌아보는 일은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1894년(갑오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개된 조선의 상황을 소위 ‘갑오경장’이란 이름으로 미화해 왜곡해선 안 되며, 조선인 2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갑오왜란’의 관점으로 다시 보아야 대한제국의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점을 지난 첫 회 기사에서 서술했다. 이제 그 갑오왜란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을미왜변’(1895)의 실상을 돌아보자. 을미왜변 이후 조선 백성들의 거국적 분노에 힘입어 이뤄진 사건이 ‘아관망명’(1896)이고 그 결실이 대한제국이기 때문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왕비가 자신의 왕궁에서 ‘소시(壯士)’라는 일본 낭인들을 들러리로 동원한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세계가 놀란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는 그동안 ‘을미사변’이란 중립적 용어로 얼버무려 왔다. 명성황후를 실제 누가 칼로 찔렀는지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것도 알고 보면 최근의 일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0년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을 펴내며 대한제국 다시 보기의 물꼬를 텄다. 곧이어 2001년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효형출판)를 통해 대한제국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펼쳐 보이며 을미왜변이 일제의 만행이었음을 확인시켰다. 2009년에는 재일동포 2세 역사학자 김문자(金文子)씨가 펴낸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태학사·2011년 번역)에서 일본 군부 자료 분석을 통해 을미왜변이 일왕 직속의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임을 밝혀냈다. ‘소시’라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됐던 그동안의 통설을 뒤집은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성황후에게 칼을 댄 자가 누구인지까지 밝혀졌는데 그것은 강범석 히로시마(廣島)시립대학 명예교수의 『왕후모살』(솔·2010), 이종각 동양대 교수가 펴낸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메디치미디어·2015) 두 책을 통해서다. 왕후 시해라는 중차대한 일을 깡패 같은 낭인이 저질렀다는 점에 강범석은 의문을 제기하며 연구를 시작했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다뤄진 을미왜변 관련 비밀 전문 등을 분석하며 경성수비대(후비보병 독립 제18대대) 대장 직속의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여기에 더해 이종각은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의 보고서를 분석해 을미왜변이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됐으며 범인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음을 다시 입증했다.

 

1909년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2007년 복원된 경복궁 건청궁. 명성황후가 살해된 장소다. 범행을 일본 낭인들이 저지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 명성황후를 칼로 찌른 자는 일본 육군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음이 최근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됐다. [중앙포토]

 

우치다 “고금 미증유의 흉악 저지른 것”

범인이 미야모토 소위냐 낭인패냐는 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낭인일 경우에는 정부의 책임이 도의적인 것으로 약화된다. 일본 육군 소위라면 다르다.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을 저지른 것”(우치다 주한영사 보고서의 표현) 또는 “전 세계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범죄”(베베르 러시아 공사가 1895년 10월 9일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는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통해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가 된다. 게다가 국제법상 정치범죄로 인정되지 않는 국가원수 가족 시해 범죄가 중첩된다. 전쟁범죄는 시효 없이 소급 가능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 정부도 법적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황태연 지음,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502~503쪽 참조).
 
우치다 영사는 왕비 시해 당일 오후 곧바로 하라 다카시 일본 외무차관에게 사건개요를 적은 극비 사신을 보내며 읽고 나서 불태울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하라는 이 사신을 자신의 생가 창고에 갖다 두었고 이것이 90년 뒤 다른 문서들과 함께 발견돼 1984년 『하라 다카시 관계 문서』로 묶여 나와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극비 사신 속에 우치다는 “(왕비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라고 적어 놓았다.
 

미우라 “20년간 화근이었던 왕비 제거”

히로시마 재판에 공식 회부된 이들은 미야모토의 들러리로 경복궁에 침입한 50여 명의 낭인과 군인들뿐이었다. 미야모토 소위는 교묘하게 빼돌려졌다. 미야모토는 범행 이후 버젓이 경성수비대에 근무하다가 11월 18일 별도로 군용선 오와리마루로 귀국하는데, 육군대신·참모총장·육군차관·참모차장 등 왜군 대본영 수뇌부 전체가 일개 소위의 소재를 파악해 별도 귀국 조치를 내리는 등 비상한 관심을 갖고 움직였음이 일련의 전보로 드러났다(이종각 지음,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146~152쪽 참조).
 
미야모토를 철저히 은닉해 오던 일본 정부는 1년 9개월 뒤인 1897년 9월 27일 그의 병과를 헌병 소위로 바꿔 대만에 파견했다. 토착민의 항쟁을 진압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그는 대만에 투입된 지 2개월23일 만에(그해 12월 20일) 전사했다. 미야모토 소위가 49세로 전사한 사실은 군적에 기록돼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246만6000명의 전사자 명부에는 누락돼 있다. 일본 군부와 정부가 미야모토의 입을 염려해 위험지대로 파견했고 또 전사 후에도 이웃 나라의 왕비 시해자임이 밝혀져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미리 계산한 교묘한 은폐로 보인다.
 
왕비 살해 후 미우라 공사가 국왕을 알현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에 들어와 범행 현장을 둘러보았고 시신 소각 명령도 내렸다(한영우 지음,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57~61쪽 참조). 미우라는 범행 6일 뒤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보낸 공식 보고서(10월 14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하게 된 바, 그 전후 사정을 잘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요컨대 이번 사건은 당국(當國:조선) 20년 이래의 화근을 단절하여 정부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단초를 열 것이라고 본관은 확신하는 바, 비록 그 행동이 좀 과격한 바 있었다고 해도 외교상의 곤란만을 극복한다면 우리의 대한(對韓) 정략은 이로써 확립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市川正明 편, 『日韓外交史料(5)』, 89쪽)
 

1910년 무렵의 장충단공원. 을미왜변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막으려다 전사한 연대장 홍계훈과 궁 내부대신 이경직 등 충신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00년에 조성됐다. 대한제국의 추모공간이었던 장충단공원은 강제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위락공원으로 변질된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博文寺·박문사)를 세우기도 했다. [중앙포토]

 

안중근, 이토 사살 후 “황후 살해한 죄”

조선을 정복하려는 당초의 목적을 위해 지난 20년 동안 화근이었던 왕비를 제거했다는 얘기가 미우라 보고서의 골자다. 이를 통해서도 을미왜변이 갑오왜란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전쟁범죄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총리가 이토 히로부미였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후 공개적으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 가운데 제1의 항목이 “황후를 살해한 죄”였다. 요즘도 우리 사회에 ‘황후는 무슨 황후냐’면서 명성황후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같은 시각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를 사살한 첫째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 문제를 거론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토가 지휘하는 일본 정부와 김홍집 중심의 친일내각은 사활을 걸고 을미왜변의 은폐에 나섰다. 미우라와 대원군이 공모했으며, 왕비와 대원군 간의 집안싸움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에 끌려나왔음은 친일파 윤치호가 쓴 『윤치호 일기』(1895년 10월 29일자)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김홍집 친일내각은 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巡檢·경찰)의 충돌로 변조하고 왕비가 무사한 것으로 꾸며 발표했다. 하지만 황제를 보호하는 시위대의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 등 외국인 목격자와 각국 공사들의 폭로로 사건을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친일내각의 시도는 무산됐다. 그러자 일본과 친일내각은 방향을 틀어 을미왜변이 일본 정부 모르게 미우라가 단독으로 대원군과 공모하여 낭인들을 동원해 저지른 사건으로 꾸며 댔다. 친일적 시각에서 사건들을 기술한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이 같은 일제의 연막과 홍보를 되뇌고 있다.
 

한성신보사 앞에 모인 낭인들. 1895년 2월 17일 창간된 ‘한성신보’는 일본 외무성의 기밀비와 매월 지급되는 일본공사관의 보조금으로 운영됐다. 한성신보사를 거점으로 아다치 겐조 사장 휘하에서 활동하는 낭인들이 명성황후 살해에 대거 들러리로 가담했다. [사진 눈빛출판사]

 

왕비 시해 사건에는 다수의 일본인 신문기자들이 관여하는데 이들이 왕비를 비방하는 글을 쏟아냈다. 을미왜변을 합리화하고 그 책임을 대원군에게 돌렸다.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896년 『조선왕국』을 쓴 기쿠치 겐조가 대표적이다. 기쿠치가 강제병합 직전인 1910년 7월에 펴낸 『조선 최근 외교사 대원군전 부(附) 왕비의 일생』은 ‘역사 왜곡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기쿠치 겐조는 일본 도쿄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의 서울특파원으로 들어와 1895년 10월 8일의 왕비 시해 사건에 직접 가담했다. 이 책을 쓸 때 기쿠치는 일본 외무성과 공사관 기관지인 ‘한성신보(漢城新報)’ 주필 겸 ‘고쿠민신문’의 사장이었다. 그는 1945년 패전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려 52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언론인이자 역사저술가로 활동하며 한국사를 식민사관으로 채색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조선잡기』(朝鮮雜記·전2권·1931), 『근대조선이면사』(1936), 『근대조선사』(전2권·1937·1939) 등도 펴냈다. (하지연 지음,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서해문집, 2015)
 

日, 대원군을 황후 살해범으로 몰기도 

기쿠치는 대원군과 왕비의 극한적 갈등을 꾸며 내면서 대원군을 왕비 살해의 주범으로 몰아갔다. 대원군을 영웅으로 묘사하면서 왕비는 온갖 추잡한 일에 연루된 인물로 그려냈고, 고종은 대원군과 왕비의 틈바구니에서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왕비 시해의 주범이 일본인이란 사실은 당시 국내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음에도 이런 일을 꾸며 댔던 것이다. 그럼에도 기쿠치가 퍼트린 낭설들이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의 식자층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심지어 소설이나 만화 등 더 과장된 형태로 전승되며 역사 왜곡의 큰 흐름을 만들어 냈다.(이태진, ‘역사소설 속의 명성황후 이미지’, 『한국사 시민강좌』 제41집, 2007년 8월, 일조각)
 
일본 정부와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을미왜변에 왜군이 개입한 사실이 발각되고 나서도 ‘한성신보’를 앞세워 왕비가 궁을 빠져나간 것 같다며 왕비 시해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정보 조작 때문에 당시 독일공사관조차 왕비의 생존 사실을 본국에 타전하는 외교적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집 친일내각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12월 1일에야 황후의 붕어 사실을 국민에게 알렸다.
 
경복궁이 초토화되고 왕비까지 살해되면서 고종이 안전하게 거처할 땅은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갑오왜란 이후 을미왜변을 거치며 조선은 사실상 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황후 살해에 복수심을 느끼는 백성들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이 을미의병은 대개 고종의 밀지를 받고 거의했다. 그리고 고종과 의병의 합작으로 아관망명이 준비되고 실행된다. 을미의병의 대부분은 동학농민군의 재봉기였다. 그런 점에서 갑오왜란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런 가운데 황후의 장례는 곧바로 치러지지 못했다. 2년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에야 장례가 치러질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한 달 만에 대한제국 선포의 의미를 대외적으로 과시한 행사가 바로 명성황후 장례식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 모르고 지내 왔다. 그 이유가 뭘까.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서울역사박물관, 눈빛. 
 
더 읽어볼 만한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한영우·효형출판·2001),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영희·서울대출판부·2003),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한영우 외·푸른역사·2006), 『왕후모살』(강범석·솔·2010),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문자 지음·김승일 옮김·태학사·2011),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메디치미디어·2015),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상 황태연·청계·2017)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충격의 126년전 日외교관 편지 / 연합뉴스 (Yonhapnews)

2021. 11. 16.

https://youtu.be/K_GCOHaWQO8

[영상]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충격의 126년전 日외교관 편지

11-16 17:06
김도희
 

(서울=연합뉴스)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가담했던 한 일본 외교관의 편지가 발견됐습니다.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발송인으로 돼 있는 편지로,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며 명성황후 시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16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호리구치는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시해 실행 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모두 8통의 편지 중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인 1985년 10월 9일자 편지에 사건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상세히 기술했는데요

 

그는 "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며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고 소감까지 적었는데요.

 

이번에 발견된 편지들은 1894년 11월 17일부터 사건 직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쓴 것으로, 호리구치의 고향 친구인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가 수신인으로 돼 있습니다.

 

나고야(名古屋)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 씨가 편지를 고물 시장에서 입수했으며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붓으로 흘려 쓴 문자를 판독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 영상으로 보시죠.

<제작: 이봉준·김도희>

<영상: 연합뉴스TV·아사히 신문 홈페이지>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21.11.16 15:26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생각보다 쉬워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나는 담을 넘어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 생각보다 쉬워 어안이 벙벙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실행 그룹’ 중 한 명인 일본 외교관이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다음 날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위 사진)이 발견돼 시해 당일의 전말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가

발송인으로 적혀 있는 편지 8통이 발견됐다. 호리구치는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실행 그룹의 일원으로 이번에 발견된 편지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호리구치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자 편지에서 사건 현장에서 본인이 맡았던

임무 수행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나는 (명성황후 침소) 진입이 담당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밝혔다.

한학자이며 호리구치의 고향 친구인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가 수신인으로 돼 있다.

 

이와 관련, 명성황후 시해 전날인 1895년 10월 7일 자 편지에서 호리구치는 흥선대원군과 서한을

주고받았다고도 밝히며 흥선대원군을 “조선 최고의 늙은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호리구치는 명성황후 시해 뒤 흥선대원군이 주모자였다고 주장했으나 이번에 발견된

편지 내용은 기존 호리구치 세력이 밝힌 서한의 내용과 달라, ‘흥선대원군 시해설’이 허구로

증명될 주요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아사히가 보도했다.

 

한편 해당 편지는 나고야(名古屋)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 씨가

고물 시장에서 입수했으며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붓으로

흘려 쓴 문자를 판독했다. 편지가 원래 보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나 기재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을 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 문화일보에서 -

 

“우리가 왕비(명성황후)를 죽였다”…을미사변 日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

2021.11.16 11:20

아사히 “고물시장에서 발견…재일학자 김문자 판독”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 기사 ‘조선 왕비 암살 사건’. [위키백과]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을미사변(乙未事變) ‘실행 그룹’ 중 한 명인 일본 외교관이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시해 다음 날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이 발견됐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16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발송인으로 돼 있는 편지에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실행 그룹의 일원이었다.

모두 8통의 편지 중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자 편지에는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는 “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밝혔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고 소감까지 적었다.

 

일련의 편지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사건 직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쓴 것으로 돼 있다.

 

일본 니가타(新潟)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 현재의 나카오카시)의 한학자이며 호리구치의 고향 친구인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가 수신인으로 돼 있다.

 

나고야(名古屋)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 씨가 편지를 고물 시장에서 입수했으며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붓으로 흘려 쓴 문자를 판독했다.

 

편지가 원래 보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나 기재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에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김문자 씨는 “사건의 세부(내용)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에 비춰보더라도 본인의 진필로 봐도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면(文面·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해명하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櫻) 당시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일본에 유리하도록 불평등하게 설정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하에서 실행 그룹의 일본인에게 당시 조선의 재판권이 미치지 않았다.

 

사건 다음 해 1월 일본 육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결론이 났으며 미우라와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면소(免訴)·석방됐다.

 

realbighead@heraldcorp.com
 

"명성황후 죽였다, 간단했다" 126년만에 발견된 '을미사변 고백'

중앙일보

입력 2021.11.16 17:50

업데이트 2021.11.16 17:54

 

명성황후(1851~1895) 시해에 직접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고향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126년 만에 발견됐다.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 등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 국가 차원에 주도된 것은 아니라는 그간 일본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 역사학자들이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사건 직후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린 16일자

아사히신문. 이영희 기자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1865~1945)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 8통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당시 외교관·경찰·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을미사변 실행단의 일원이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일본 니가타(新潟)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지금의 나가오카시)의 한학자이자, 호리구치의 친구인 다케이시 사다마쓰(武石貞松)다.

 

새로 발견된 편지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쓴 것으로 총 8통이다. 이중 6번째 편지는 을미사변 다음날인 1895년 10월 9일에 쓰여졌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상세하게 기록됐다.

 

그는 편지에서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서 오히려 놀랐다"는 소감도 덧붙였다.

 

해당 서한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시에 사는 우표·인지 연구가인 일본계 미국인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씨가 고물상에서 입수했다. 붓으로 흘려쓴 글자의 내용은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씨가 판독했다. 아사히신문은 "편지가 원래 보관돼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나 기록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을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전했다.

 

김문자씨는 "사건의 세부(내용)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을 비춰봐도 호리구치 본인의 진필로 봐도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려지는 문면(文面·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며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을미사변의) 세부 사항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가치 높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일본 근대사와 한·일 관계사에 정통한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는 아사히신문에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면서 "당시 일본이 조선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사건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당사자로부터 1차 자료가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또 "(이 자료가) 사건 당사자들이 현지인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해당 서한에 대해 "을미사변이 일본 국가 차원의 범죄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명예교수는 "그간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대원군의 뜻을 따라 일본인이 도운 것이며 을미사변 당시 실행단은 일본 낭인 등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해왔다"면서 "범죄 현장에 있던 현직 외교관이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한 서한이 발견된 것은 을미사변이 일본의 국가범죄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강조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櫻) 당시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하에서 을미사변을 실행한 일본인들은 조선이 아닌 일본 재판에 회부됐다.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면소(免訴)·석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