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6.10.4.19(민주화운동)외 형제복지원.실미도 등 등..

뱀 잡아먹고 연명한 실미도 ‘반전’…“최소 3명 살아서 탈출” [인터뷰 ①]

무궁화9719 2024. 7. 20. 12:31

뱀 잡아먹고 연명한 실미도 ‘반전’…“최소 3명 살아서 탈출” [인터뷰 ①]

[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애초 북 올라갈 생각 1%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
국방부, 잇단 증언에도 생존설 부인

기자고경태
  • 수정 2024-08-23 10:23
  • 등록 2024-08-22 11:41

2024년 8월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다 죽지 않았다. 최소한 3명이 그날 살아서 탈출했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웠던 ‘실미도’(감독 강우석)의 소설 원작자 백동호 작가(68)의 말이다. 그는 실미도 사건 53주기를 앞두고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2003년 영화 개봉 직후 여러 언론에 밝혔던 ‘실미도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을 거듭 주장했다. 20여년 전과 다른 점은, 그 생존자가 2006년 사망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겨레가 공작원 이름 3명(임기태, 박응찬, 정은성)을 추린 뒤 그중 생존자가 있냐고 하자 “그중에 있다. 세 사람 다 탈출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본인이 목격한 생존자의 실제 삶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도 했다. 실미도 사건 53년, 소설 출간 25년 만에 생존자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증언을 한 셈이다. 

영화 ‘실미도’에서 강인찬으로 나온 설경구. 한겨레 자료사진
 
문제의 생존자는 1999년 출간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와 2003년 같은 이름으로 개봉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강인찬’(영화에서는 설경구 분)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소설 ‘실미도’는 금고털이로 교도소에 수감된 주인공 백동호가 감옥 안에서 실미도 부대 출신인 강인찬을 만나 사건의 전모를 듣게 된다는 내용이다.(실제로 작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절도와 금고털이로 교도소를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백동호 작가는 강인찬의 모델이 된 인물을 만나 소설의 영감을 얻었으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실미도 기간병과 군 관계자 등 수십명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1999년에 소설 ‘실미도’를 쓴 백동호 작가. 12년 전 모습이다. 본인 제공

“홧김에 만들고 버린 부대”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북한산을 통해 서울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맞대응하려 같은 해 4월 똑같은 31명의 숫자로 만든 ‘김일성 암살’ 특수부대였다. 정확한 명칭은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교육대)로, 인천 중구 무의동의 무인도 실미도에 세웠다.
 
하지만 부대 창설 3년4개월 뒤인 1971년 8월23일, 이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인천에 상륙한 뒤 북한의 김일성이 아닌 남한의 박정희와 만나 담판을 짓겠다며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청와대로 진격한다. 열악한 처우에 대해 높은 사람에게 항의하겠다는 취지였다.
 
“애초에 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1%도 없으면서 홧김에 만든 부대였다.” 
 
백동호 작가가 한 줄로 정리한 실미도 부대의 본질이다. 당시 베트남 전선에서 허덕이던 미국은 한국에서 또 다른 전선을 확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미-중 관계 등 세계정세도 화해 무드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미도 부대를 기획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경질됐고, 김계원에 이어 이후락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실미도 공작원들은 배를 곯으며 뱀을 잡아먹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 속에서 점차 버려졌다. 비밀리에 모집한 공작원들은, 이제 국가 입장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져줘야 할 존재였다.
 
백 작가는 “강인찬 모델이 된 사람은 1971년 8월23일 오후 2시15~20분께 공작원들이 두 번째로 탈취한 시내버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섰을 때 버스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버스 안에서 일부 공작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그는 “강인찬 말고도 여럿이 유한양행 앞에서 탈출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2004년 2월 충북 옥천에서 실미도 사건 공작원 유족들과 만난 백동호 작가(맨 오른쪽)의 모습. 연합뉴스

과거사위 조사관 출신도 “최소 3명은 생존”

실미도 공작원 생존설은 허무맹랑하게 비칠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방부뿐 아니라 대통령 직속 기구였던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국방부 과거사위, 2005~2007년)도 최종 보고서에서 “공작원의 생존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실미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한겨레에 “공작원 생존자설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나 역시 최소 3명 이상 생존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보고서를 작성할 때 위원회 상부에서 이에 대해 질색을 해서 넣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왜 실미도 공작원 생존설은 사건 발생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에도 식지 않을까. 한겨레는 당시 사건의 전개과정을 복기하면서 생존설의 진위를 살펴보았다. 백동호 작가는 당사자와의 약속 때문에 강인찬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공작원 31명의 사망 시점과 유가족 출현 여부 등을 분석하면서 강인찬의 후보군을 좁힐 수 있었다. 
 

2회(https://hani.com/u/OTI3NA)에서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유한양행 앞 버스 들이받은 뒤…“한명이 뒷문으로 탈출” [인터뷰 ②]

[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기자고경태
  • 수정 2024-08-23 10:51
  • 등록 2024-08-22 11:42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 당시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 모습. 실미도 공작원들이 탈취한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서 있다. 이제는말할수있다 화면 갈무리
 
2024년 8월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경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은 14일, 17일, 19일, 20일 전화로 2시간가량 진행한 백동호 작가와의 일문일답.

1970년대 용산역 앞에서 처음 만나

― 소설 ‘실미도’에 실미도 부대 출신으로 나오는 강인찬의 모델이 된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소설에서 픽션과 사실의 경계는 무엇인가.
 
“용산역 앞에서 ‘양아치’로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대북침투 부대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녔고, 거기 다녀온 사람들을 영웅 취급하던 때다. 당시 대북침투부대 모집관들이 서울 양동 사창가와 남영동 굴다리 앞 노동자 합숙소,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녹십자 혈액원 등을 돌며 사람들을 모으러 다녔다. 당시엔 고아가 많던 시절이다. 체격이나 깡다구가 좋아 보이면 몇 명 찍어서 살짝 따로 불러내 ‘국가를 위해 봉사하지 않겠냐’며 장밋빛 약속을 해 데려가곤 했다. 물론 전혀 지켜지진 않았지만.
 
그때 강인찬의 모델이 된 인물을 처음 만났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도 들었다. 그게 실미도 부대였다. 그때가 1970년대였는데, 10여년 뒤인 1980년대 교도소에 들어가서 우연히 운동하다가 재회했다. 그리고 교도소 나와서도 도합 7~8번은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고 소설까지 쓴 거다. 소설 속엔 강인찬이 대북침투부대 지원하러 갔다가 퇴짜당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건 내 이야기다. 또 킬러로 그려지는 등 소설 속 강인찬의 행적 중에 창작된 부분이 많다. 분명한 진실은 그 모델이 된 인물은 1971년 8월23일 실미도 공작원들이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가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다.”
 
실미도 부대 실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탈취한 버스 멈춰 선 뒤 도망갈 시간 충분했다

― 당시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나.
 
“사람들은 실미도 공작원들이 서울로 향하다가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다. 1차 육군(33사단 병력)과 2차 경찰(노량진경찰서 소속)의 총격이 있었으나 이를 뚫고 가다가 그만 가로수를 들이받고 선 것이다. 실미도 공작원들이 실미도에서 배를 타고(서너명의 공작원들이 무의도에 가 실미도로 배를 끌고 옴- 필자 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로 가는 과정에서 군은 제대로 막지를 않았다. 유한양행 앞에서 공작원들을 태운 버스가 멈춘 것은 오후2시20분인데, 한참 동안 군경이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유한양행 앞 공작원 탈출설은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사건 당일 배재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박OO씨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가던 중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버스 안의 여학생이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자 10~20분간 현장에서 부상자를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2006년 3월26일과 6월27일 국방부 과거사위 면담조사에서 “버스 뒤 창문을 열고 한 명이 뛰쳐나와 도망갔다.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사람도 없고 민가도 없는 맞은쪽 길(철길) 건너로 도망갔다”고 진술했다. 박씨에 따르면 군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뒤 10~20분 뒤였다. 현장을 빠져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증언했던 박OO씨는 1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량진에서 영등포에 있는 연흥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다가 버스가 반대편 차선을 넘어 버스가 가로수에 부딪히는 장면을 목격했고 구조작업을 했다. 창문을 통해 철길로 가던 남자의 모습도 분명하고 생생하다”며 18년 전의 증언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는 현재 한 법무법인의 대표를 지내고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실미도 부대원 무장공비로 속여 서울 한복판서 몰살시키려…” [인터뷰 ③]

[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기자고경태
  • 수정 2024-08-23 10:23
  • 등록 2024-08-23 07:00
실미도 부대원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2024년 8월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실명 밝힐 수 없다” 생전의 굳은 약속

― 강인찬의 모델이 된 사람의 실명을 말해줄 수 있나.
“그건 안된다. 그의 실명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으면서도 발표하지 못한 것은 생전에 굳게 한 약속 때문이다. 정체를 철저히 숨겨주기로 했다. 사람들은 내가 사건 내부사정을 좀 알 수 있는 위치의 사람 이야기를 듣고 괜히 실미도 공작원을 만났다며 거짓으로 뻐기는 게 아니냐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 비난에는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실미도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더불어 돈도 좀 벌 목적으로 소설을 쓴 것뿐이다.”
 
― 그는 살아있는가.
“2006년 여름에 돌아가셨다. 1940년대생이니 60대 나이에 떠난 셈이다. 원래 고아였는데, 실미도를 탈출한 뒤 가정을 이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미국으로 혼자 건너가 살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아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자녀들은 한국에서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동해에 뿌려달라’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자식들이 속초에서 어선을 빌려 바다로 나가 유골을 뿌린 것으로 안다. 묘지도 없고, 위패도 모시지 않았다. 나는 빈소에 가지는 않았다. 나중에 유족들이 찾아와 차 한잔 나눴다. 영원히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
 
실미도 부대원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사건 발생 직후, 군 당국은 알았나 몰랐나

―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는 말인가.
“1970년대는 무호적자가 발길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그때 전쟁고아가 얼마나 많았나. 교도소에서 출소해 갱생보호소에 가면 호적을 만들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알기로, 치안국에서 지문 담당하는 감식계 직원 숫자가 4~5명이었다. 본적과 현주소만 대면 전과가 탄로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았을 거다.”
 
― 정부에서는 1971년 8월23일 사건 당일 현장을 탈출한 이들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아예 추적을 안 했다. 공개 추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미도에서 오전 6시30분부터 사건이 터졌을 때, 군 당국이 이걸 몰랐을까? 알았다. 알면서도 왜 바로 작전을 못 했을까. 드러나선 안 될 극비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천에 오전 11시30분에 인천 송도에 상륙하는데(12시35분께 33사단 102연대 2대대6중대 605 해안초소 통과) 그때까지 정부가 몰랐다는 건 세 살 먹은 애도 웃을 일이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던 군인들이 탈취해 타고 오던 버스가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멈춘 뒤 군인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실미도와 공군정보부대의 교신 여부

― 정부가 일찍이 알았다는 근거가 뭔가.
“매일 아침 실미도 부대는 서울 오류동에 있는 공군정보부대와 교신하게 돼 있다. 교신이 안 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1968년 4월 실미도 창설 이후 아침 교신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1971년 8월23일만 교신이 없었던 거다. 당연히 공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까지 이야기가 들어갔을 거다. 이건 1998년 소설 준비하면서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두만씨와 인터뷰하면서 얻은 내용이다. 오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하나는 실미도 건너편 무의도 해수욕장의 땅콩밭 주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물이 빠지면 실미도와 무의도는 걸어갈 수 있는 곳 아닌가. 이 사람 말이, 아침부터 요란한 총소리가 나서 실미도를 보니 연기가 나더란다. 훈련이 아니라고 직감하고 무의도에 딱 하나 있는 이장 집 전화기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이 뿐인가. 무의도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을 내려준 배 선장, 첫 번째 탈취한 버스에서 내린 승객 등도 ‘청와대로 간다’는 이들의 말을 들었다. 신고를 안 했을 리 없잖은가.”
 
(아침 교신 문제와 관련해,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김두만씨를 만났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버려진 부대’라 교신 따위에 신경 안 썼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아침에 발생한 사건을 공군정보부대에서도 인지하지 못했을 거라며 백 작가와는 정반대 이야기를 했다. 김두만씨의 증언에 대해서는 ‘과장’이라고 봤다. 그는 “나중에 통신 관련자들이 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다. 그 이유는 통신시설의 열악함 때문이었다”고 했다.)
 
인천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의 모습. 물이 빠지면 무의도와 실미도는 걸어갈 수 있다. 고경태 기자

한강다리에서 기다리다 몰살시키려 했다?

― 그런데 왜 인천 송도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지 않고 그냥 둔 것인가.
“국회에서 당시 신민당 김상현 의원이 물었다. 버스로 도로만 차단해도 실미도 공작원들이 들어올 수 없는데, 왜 그렇게 안 했냐고 말이다. 군은 한강대교(당시 서울제1교) 북단에서 장갑차를 대기시켜놓고 진을 치고 있었다. 실미도 공작원들이 남단에서 진입하면 남쪽을 봉쇄하고 중간에서 다 죽여버릴 계획이었으리라 추정한다. 왜 미리 인천이나 영등포에서부터 막지를 않고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한강대교에서 기다렸을까. 이들을 무장공비로 속이고 서울 한복판에서 무장공비 몰살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다린 건 아닐까.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을 만나 이렇게 물으니까 껄껄껄 웃으면서 ‘하나도 틀린 말 없다’고 했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입장에서는 이들의 존재가 절대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전가의 보도가 무장공비 출현을 알리고 정국을 경색시켜 독재정권을 강화시키는 거였다. 이후락 입맛에 딱 맞았을 것이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유한양행 앞에서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거지. 이건 순전히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당일 김포공항도 저녁까지 폐쇄됐다. 왜 그랬겠나. 공작원들이 해외로 나갈까 봐 막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신문을 보면 한강대교에 장갑차와 함께 무장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중앙정보부의 ‘몰살 기획설 또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면담 조사했던 대간첩대책본부장 김재명(중장)도 ‘까맣게 몰랐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당시 중정을 비롯해 군과 경찰이 우왕좌왕했던 정황이 뚜렷하며 공군 2325부대도 오후 2시께 대방동 유한양행 앞 수류탄 자폭 한참 이후서야 “우리 부대 같습니다”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무의도 주민들의 신고도 위에서 적당히 뭉개고 일상사였던 간첩신고 건 정도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했다.)
 

4회(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54987.html)에서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수류탄에 죽었다는 실미도 공작원, 면도칼로 그어낸듯 목 잘려” [인터뷰 ④]

[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기간병들도 생존자 여부 부인 안해
소설에선 많이 순화해서 써줬다”

기자고경태
  • 수정 2024-08-23 10:21
  • 등록 2024-08-23 09:00
1971년 8월23일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던 군인들이 탈취해 타고 오던 버스가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멈춘 뒤 군인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목 없는 주검 사진에 대한 의구심

― 국방부는 어쨌든 사건 당일 유한양행 앞에서 산 채로 잡힌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가 실미도 사건에서 모두 죽었다면서 시신 사진을 보여준 적 있다. 그중에는 목 없는 시신이 3구 있었다. 아니 수류탄으로 버스에서 죽었는데 어떻게 목이 면도칼로 그어낸 것처럼 잘릴 수 있나. 1·21 사태로 북한 무장공작원이 넘어왔을 때도 시신 보여주면서 31명 다 죽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몇 명이 살아남아 북한으로 돌아간 게 드러나지 않았나. 똑같다. 가짜 시신 사진 찍어놓고 다 죽었다고 한 거다. 지금이라도 국방부에 목 없는 시신 사진을 공개하라고 요청하고 싶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말이다.”
 
목 없는 시신과 관련해 실미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위원회 조사 때 국방부 실미도 사건 TF단(과거사위 출범 전 국방부 자체적으로 꾸린 조직)에서 이관받은 사진첩에 문제의 사진들이 있었고, 이는 아마 사건 직후 공군 2325 정보부대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사체 사진 중 목 없는 시신뿐만 아니라 마구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이 있었는데 부상한 생존 기간병은 2005년 11월29일 면담조사에서 ‘자기가 일일이 시체 확인을 했는데 형체 불명의 시신은 군화 혓바닥(발등 위 가리개)에 쓰인 이름을 보고 알아냈다’고 했다”고 전했다.
 
― 국방부가 엄청 싫어할 이야기다.
 
“한번은 국방부에서 보자고 해서 갔더니 ‘공작원은 다 죽었다’고 이야기가 끝났는데 왜 생존자에 관해 떠드냐면서 자중해달라고 했다. 실미도에서 살아남은 기간병들도 입 다물라고 철저히 교육받았을 거다. 생존자가 강인찬 모델 하나만 있는 게 아닐 거다. 최소한 3명은 있다고 진실에 목을 걸겠다. 확실하다. 실미도 소설 발표한 뒤 수상한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생존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여러 이야기를 했다. 기간병 중 누가 살아남았는지를 꼬치꼬치 물었다. 나를 떠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야기하다 보면 ‘아 이 사람이 문외한이 아니구나’ 하면서 통하는 게 있지 않았겠나.”
 
2006년 3월 육군본부 유해발굴단은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한 이들을 포함해 20명을 묻었다는 서울 오류동 산 26-2, 23-8 공군정보부대 터에 대한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박선주 제공

공작원 8명은 아직도 유가족 안 나타나

1971년 8월23일, 실미도를 탈출해 인천 송도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던 공작원의 수는 국방부 과거사위 공식 기록상으로는 22명이다. 전체 공작원 31명 중 7명은 훈련 중 사망한 상황이었고, 당일 아침 기간병 살해 과정에서 공작원도 2명 죽었다. 전균, 이영수다. 그리고 3명(심보길 김기정 전영관)은 송도에서 서울로 가는 조개고개(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한다. 결국 19명이 마지막 ‘죽음의 버스’에 탑승한 셈인데, 군 당국은 이 중 15명이 자폭해 결국 사망하고 4명은 구속돼 사형 집행되었다고 발표했다. (마지막 버스에 탔던 인원이 19명이 아닌 18명이라는 사형집행 공작원의 증언도 나왔다. 이 밖에도 송도에 도착한 공작원 숫자에 대한 송도 초소 초병의 최초 보고가 22명이 아니라 21명이었다는 주장(안김정애 ‘실미도의 아이히만들’)도 있다)
 
2005~2006년 대통령 직속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실미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2006년 3월 육군본부 유해발굴단은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한 15명을 비롯해 20명을 묻었다는 서울 오류동 산 26-2, 23-8 공군정보부대 터에 대한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여기서 유해는 20구가 발굴되었고, 발굴된 유해와 유가족의 디엔에이 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가능성 있음’ 포함)은 8명 뿐이었다. 남은 12명 중 유한양행 자폭 전에 죽은 이들과 유가족이 나타난 9명을 제외하면 3명이 남는다. 이들은 고아였거나 사고무친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임기태, 박응찬, 정은성이다. 백동호 작가에게 이들에 관해 물었다.

임기태·박응찬·정은성, 모두 탈출했을 수도

― 임기태·박응찬·정은성을 아는가. 애초에 확실히 죽었거나, 유해발굴로 신원확인이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강인찬이 있는가.
“그렇다. 그 추측이 맞을 것이다. 강인찬은 그중 한 명일 수도 있고, 탈출한 사람은 그들 다일 수도 있다.”
 
― 정확히 누구인가. 백동호 작가는 소설에 나오는 강인찬의 실체에 대해 밝힐 의무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실미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도 그렇다.
“하하하. 말할 수 없다. 이미 밝혀질 만한 것들은 다 밝혀지지 않았나. 그와 내가 한 약속은 역사 속에 묻어야 한다.”
 
― 성이라도 알려주면 안되나.(웃음)
“안된다니까.”
 
2006년 3월 육군본부 유해발굴단은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한 이들을 포함해 20명을 묻었다는 서울 오류동 산 26-2, 23-8 공군정보부대 터에 대한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개토제 행사 때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박선주 제공
 
― 실미도 기간병들은 생존자 설에 대해 뭐라고 하나.
“실미도 사건 당일 공작원들에게 18명이 살해당하고 6명이 살아남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제대한 기간병들까지 13명 정도 참여하는 ‘실미도 전우회’가 있었다. 1999년 소설 ‘실미도’가 나오고 그들이 나에게 찾아왔다. 한때 특별회원으로 회비도 내면서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그들도 공작원 생존자가 있다는 걸 강하게 부인하지 않았다.”
 
― 기간병들과 친하게 지냈나.
”모임에 가곤 했지만 친해질 수 없었다. 그들은 소설에서 기간병을 너무 악마로 그렸다며 나에게 시비를 걸어 다툼이 일기도 했다. 나는 소설에서 많이 순화해서 써줬다고 생각한다. ‘명예훼손으로 걸 테면 걸라’고 했다. 이들이 2003년 영화 개봉 전에는 ‘기간병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영화상영금지 가처분하겠다’고 영화사에 압력 넣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교육대장이었던 김순웅 상사(안성기 분) 등이 인간적으로 묘사된 게 아닌가 싶다. 2004년 이후엔 만나지 않았다.”
 

5회(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54995.html)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실미도 기간병들, 죽은 공작원 기름에 튀기고 조각내 태우기도” [인터뷰 ⑤]

[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20대 초반 기간병들, 약자에 악마적 군림
소설 다시 쓴다면 기간병 악행 더 부각할 것”

기자고경태
  • 수정 2024-08-23 17:28
  • 등록 2024-08-23 10:00
실미도 부대원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실미도 공작원들의 막사가 있던 곳은 아름다운 해변이다. 실미도는 현재 외국인 소유로 알려져 있다. 2024년 6월의 모습. 고경태 기자
 
다시 소설 쓰면 기간병 악행 더 부각하고파
 
― 기간병도 피해자 아닌가?
“맞다. 하지만 피해자이되 잔인한 피해자였다. 통제받지 않은 권력은 인간을 악마로 만든다. 기간병들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공작원들을 경멸했다. 나는 끝까지 기간병을 적대시하는 공작원 입장에 섰다. 소설 실미도를 개작한다면 기간병들의 악행을 더 부각하고 싶다. 20대 초반의 애송이 기간병들이 약자에 군림했던 모습이 치기 어리면서 악마적이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약자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면 매우 잔혹해진다. 그걸 더 까발려 보여주고 싶다. 그들은 무의도에서 강간 사건을 저지른 공작원 3명을 다 때려죽이게 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강간 사건은 힘으로 눌러 드러나지 않게 했다.”
 
1966년과 1969년 실미도 사진을 비교해보면 공작원 막사 등 건물 배치에 따른 변화가 보인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됐다. 강변구 제공
 
실미도에서 7명의 공작원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군기를 어기고 잡혀 온 공작원들은 교육대장의 지시에 따라 동료 공작원들에게 맞아 죽었고, 죽은 뒤엔 드럼통에 디젤 기름으로 튀겨졌다. 화장하는 도중 비가 내리자 빨리 처리하라는 명령에 의해 공작원들은 동료의 시신을 칼로 발라내고 조각내 태우기도 했다. 이는 모두 유한양행 앞에서 체포된 4명이 사형당하기 전 남긴 증언이다.
 
결국 남은 공작원들은 실미도에서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나중에 사형집행된 임성빈은 ‘탈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입대 전 약속과 너무 다른 인간 이하의 대우,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생각하는 교육대장과 교관들의 태도, 구타에 대한 증오심, 4년 가까이 격리 수용되어 외출 한 번 서신 연락조차 허락되지 않는 유배생활로 불만 누적된 상태에서 소주 사건(민간인에게 얻은 소주를 나누어 마시다 발각)으로 나이 많은 A조장을 훨씬 어린 소대장이 구타하여 눕게 한 것이 직접적 동기.”
 
소설 ‘실미도’의 백동호 작가. 10여년 전 모습이다. 본인 제공
 
10년 뇌졸중 투병…고하도 생체실험 소설 집필중
 
― 어떻게 지내나.
“뇌졸중에 걸려 10여년 투병생활 했다. 지금은 괜찮다. 2004년부터 나주에서 가까운 광주의 시골 마을에 있던 2층 법당을 살림집으로 개조해서 살고 있다. 1980년대 교도소에서 쌍둥이 형을 만난 뒤 내 인생이 바뀌었는데, 2000년대 초반에 그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려온 거였다. 지금은 일제 강점기 시절 목포 인근 고하도에서 벌어진 일제의 생체실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과 이서천을 서울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인터뷰한 1971년 8월24일자 경향신문 기사.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김종철이다.
 
1999년에 나온 소설 ‘실미도’ 1·2권은, 작가 말에 따르면 50만부 넘게 팔렸다. 사회고발 소설이지만 일종의 무협소설에 더 가깝다. 주인공 백동호를 교도소에서 만나는 강인찬은 파란만장한 ‘협객’으로 그려졌다. 물론 대부분 작가의 상상력이 입혀진 부분이다. 백 작가는 그가 실미도를 탈출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어쩌면 믿거나 말거나다. 검증할 길이 없다. 오로지 작가의 양심에 달린 문제다. 그럼에도 이 증언은 자꾸만 끌린다. 백 작가가 실미도를 한국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해서가 아니라, 실미도 공작원이 다 죽었다는 국방부의 발표가 그만큼 개연성이 없고 국방부 과거사위의 조사 역시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다. (끝)

‘53년 실종’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실미도 53주년 기획]
사형자 명단에 없고, 뚜렷한 병사 기록도 없어

기자고경태
  • 수정 2024-08-23 10:23
  • 등록 2024-08-23 05:01
김종철의 20대 중반 모습. 그는 1943년생으로, 살아있다면 81살이다. 김종억 제공
 
오는 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해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과 이서천을 서울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인터뷰한 1971년 8월24일자 경향신문 기사.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김종철이다.
 
문 : 당신은 누구냐?
답 : 나는 경기도 인천 가까이 있는 OOO 소속 소위 김종철이다. 지난 60년도에 디(D)고등학교를 졸업, 61년도에 입대했다. 고향은 대전시 성남동이고,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이 살고 있다.
 
문 : 난동 동기는?
답 :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살기가 싫다.
 
문 : 주동자는 누구인가.
답 : 나다. 낮 12시에 부대에서 24명이 나와 인천 송도 부근에서 잠시 해수욕을 하고 주안으로 나와 버스를 탈취, 내가 직접 운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대방동 삼거리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유한양행 앞까지 오는 동안 몇 명은 뛰어내리고 대부분은 유한양행 앞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나도 죽으려고 수류탄 안전핀을 뺐으나 복부에 파열상만 입고 살아났다.
 
문 : 현재의 심경은?
답 : 죽으려 했는데 우리들의 이번 난동의 동기 등에 대해 지금 말할 순 없으나 후에 밝혀질 것이다.
 
1971년 8월24일치 경향신문 기사다. 부상으로 영등포시립병원에 입원한 두 ‘난동 특수범’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실미도 공작원에 대한 유일한 인터뷰인데, 주인공은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이다. 또 다른 공작원 이서천은 기자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만 했다. 문제는 김종철의 경우 이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서천은 동료 공작원 임성빈·김창구·김병염과 함께 구속돼 속전속결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1972년 3월10일 사형집행) 김종철은 사형집행자 명단에 없다.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기록도 없다. 김종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몇 년 전 공군본부에서 형에 대해 사망신고를 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하지만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실미도 부대원들의 모습. 해골 표지판에서 두 번째 아래가 김종철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7월31일 저녁, 전북 익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공작원 김종철의 동생 김종억(69)씨가 말했다. “사망신고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그냥 어쩌다 보니 지나갔네요.” 김종억씨에게 김종철은 7남매 중에서 12살 터울 나는 둘째 형이었다. 1943년생으로, 살아있으면 여든하나. 그 형님이 설마 생존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선뜻 사망신고를 하러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53년 전 이맘때였다. 김종억씨는 16살 때인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이 난 직후 대전시 성남2동의 집으로 새까많게 몰려온 기자들을 기억한다. 대전이었지만 변두리 시골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들로 동네가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간첩이 아니냐는 말들이 오갔고, 부모들은 그저 쉬쉬했다. 가족 중 아무도 김종철이 있는 서울 영등포시립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7월31일 저녁 익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의 동생 김종억씨.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했다. 고경태 기자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이들에게는 농촌진흥청에서 검사원으로 일하는 첫째 아들 김점산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형제 중에 변변한 직장에 다니는 자식은 김점산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종된 둘째 아들이 ‘난동 특수범’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정말 오로지 김점산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가족들은 아무도 김종철을 찾지 않았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이렇게 썼다. “아버지(60)와 어머니(49)는 ‘4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미친 짓을 하다니’하며 울음을 터뜨렸다.(중략) ‘난동의 주범이 내 아들인가 확인해보고 싶어 면회라도 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 가지도 못 한다. 죄 진 대가를 받아도 싸지만 저 하나로 인해 많은 목숨을 잃게 한’이라고 통곡했다”고 썼다. 또한 “(김종철의 가족들이) 셋방에서 날품팔이로 살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이 난 직후 최초로 자신들의 혈육이 실미도 공작원에 끌려갔음을 알게 된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서천도 언론에 노출됐지만 혈육인 여동생 이향순과는 연락 두절 상태였다. 나머지 공작원의 가족들은 2003년 ‘실미도’ 영화가 나오고 국방부 실미도 티에프(TF)단이 꾸려진 뒤에야 실종된 이들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김종억씨는 둘째 형 김종철이 형제 중에 키가 가장 작지만 ‘깡다구’가 있었다고 했다. 정겨운 추억은 없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익산에서 중학교를 나온 형은 자리를 잡는다며 대전에 먼저 갔고, 뒤따라 모든 식구가 대전에 갔지만 김종억씨와 함께 산 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형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식당 일을 하다가 건빵공장에 무연탄 대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형을 떠올리면 건빵과 오토바이가 생각난다고 했다. 형이 처음에 시작한 식당은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식당을 이어받았다. 형은 언젠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김종억씨가 13살이었고 형 김종철이 25살이던, 1968년의 어느 날이었다. 실미도 공작원이 된 줄은 알 리 없었다.
 
김종철은 경향신문 인터뷰 사진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본인이 탈취해 서울로 몰고 온 시내버스의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소위라고도 했다. 하지만 김종철은 소위도 아니었고, 사병도 아니었다. 군 당국은 실미도 공작원들에게 군인 신분을 부여하지 않았다. 부대원 모집과정에서는 “장교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육군 제11보급대대 봉안소에 모셔져 있는 실미도 공작원 위패들. 맨 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종철의 위패다. 2006년 유해 발굴에서 김종철의 유해는 확인되지 않았다. 고경태 기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국방부 과거사위) 조사보고서에 실린 공작원 사상자 명단에 김종철은 고향이 군산이며 ‘1971년 8월23일 유한양행 앞 자폭으로 부상 후 사망’이라고 적혀있다. 사망장소는 항의원으로 돼 있다. “부상을 입은 임성빈, 김창구, 이서천, 김종철 등 4명이 항의원에 후송되었는데, 김종철은 이튿날 사망하였다”는 서술도 있다. ‘항의원’은 항공의학연구원의 약자로 공군 소속 병원을 이르는 말이다. 영등포시립병원에 입원시킨 뒤 언론에 노출되자 병원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다음날 사망했을까. 머리에 붕대를 감았지만 기자와 멀쩡하게 인터뷰를 해놓고 이튿날 사망했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2005~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실미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상식적으로 언론을 통해 이미 주소와 가족이 다 알려진 공작원을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부상 정도도 경상이었다. 절대 부상으로 사망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종철이 사망했다는 원자료는 국방부 과거사위가 꾸려지기 전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꾸린 조직이었던 실미도 사건 티에프단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사위가 조사한 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실미도 공작원 중 사형 집행된 임성빈의 경우 가족도 모르게 1969년 11월로 사망신고가 돼 있었다고 한다. 1969년 11월은 임성빈이 실미대 공작원으로 있던 때다. 임충빈 제공
 
김종억씨는 육군본부 유해발굴단이 공작원들의 시신 매장지인 서울 오류동에서 유해 발굴을 하던 2006년 셋째 형 김종선씨와 함께 디엔에이 검사에 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전자 구조가 일치하는 유해는 나오지 않았다. 유해발굴 때 국방부가 발표한 것처럼 20구의 개체(교육 중 사망한 7명과 사형 집행된 4명은 제외)가 나왔지만 유족과 디엔에이가 일치한 개체는 4구였고, 나머지 4구는 ‘가능성이 높음’으로만 나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12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이들은 공작원의 유해가 맞을까? 김종철의 죽음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안김정애 상임대표는 “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는 20명 전원 사망으로 쓰기로 결정했고, 이견은 보고서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했다.
 
형 김종철은 호적에 ‘실종’으로 돼 있다. 김종억씨가 공군본부의 사망신고 권유를 끝까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형이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그런데 왜 디엔에이 감식을 했는데 유해가 안 나오냐”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소설 ‘실미도’의 백동호 작가는 한겨레에 “김종철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본다. 군 당국에서 살려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문제는,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느냐다.
 
김종억씨는 몇 년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느닷없이 ”형님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그냥 이상한 전화려니 치부했다. 그러면서도 한켠에 찜찜함이 남았다. ‘형님이 혹시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