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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누군가는 기억해야할 비극, 제주 4.3

by 무궁화9719 2023. 4. 20.

 

7년 7개월에 걸친 학살이었다.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만 1만 명이 넘고, 추정 사망자는 최대 6만 명에 이른다. 제주 4.3 사건 이야기다.

공산당 토벌이란 명분 아래 미군정은 제주도내 학살을 묵인했다. 처음엔 민중봉기였던 것이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싸움이 되고, 이내 민간인에 대한 화풀이성 학살로 번져나갔다. 확인된 당시 미국 보고서엔 마을이 통째로 불타고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는 언급까지 나왔다. 언론엔 재갈이 채워졌고 민간인은 도망치기 급급했다. 미군정도 대한민국 정부도 무려 7년의 시간 동안 이어진 학살을 묵인하고 독려하기까지 했다.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운 좋게 살아서 연행된 제주 4.3사건 연루자들은 감옥에서까지 학살을 면치 못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보도연맹 처형 등 좌익척결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한 탓이었다. 이후 34년 간 공산박멸을 기치로 내건 군부독재가 이어졌다. 정부에 의한 학살사건은 반세기 넘게 조명 받지 못했다.

제주의 비극이 본격 조명된 건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2003년 10월에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 자격으로 사건을 언급하고 사과했다. 2년 뒤 국가차원의 사과와 과거사 정리 약속이 참여정부에서 처음 이뤄졌다. 학생들이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심도 있게 배우게 된 건 그 이후부터의 일이다.

  
▲ 노무현 대통령 2003년 10월,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
ⓒ 제주4.3 아카이브 관련사진보기
 
국가는 외면했지만 문화는 기억했다

국가는 오래 진실을 외면했지만 문화는 비극을 기억하려 했다. 문학계에선 현기영과 이산하, 김석범과 문충성이, 영화계에선 김경률과 오멸이 끝나지 않은 비극을 조명했다.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한강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비극을 다룬다. 전작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증언한 작가는 이번엔 끝나지 않은 제주의 비극을 소재로 삼았다. 마치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비극의 증인이 되겠다는 듯이, 문학으로써 그 모든 폭력을 기록하고 저항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소설엔 두 친구가 나온다. 새로운 소설을 준비하는 소설가 경하는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받는다. '경하야' 하고 이름 석 자만 적힌 문자는 친구 인선으로부터 온 것이다. 전엔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나 지금은 제주에서 목공을 하며 사는 인선이었다. 인선은 경하에게 제가 입원한 병원 이름을 일러주었고, 도착한 그녀에게 부탁 하나를 하였다. 제주에 있는 집으로 가서 기르던 새 '아마'에게 물을 주라는 것이다. 새는 물을 마시지 못하면 얼마 살지 못하므로 날을 넘기지 말고 바삐 가달라는 부탁이다. 경하는 인선의 새를 한 번 본 것이 고작이지만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날 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꺼지지 않은 생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날씨는 험상궂었다. 폭설이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간신히 버스를 잡아탔지만 산 중턱 외딴 곳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흐린 기억을 간신히 부여잡고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한발 한발 내딛기 어려운 제주, 움푹 파인 땅을 잘못 디딘 경하의 머리에선 핏물까지 흐른다. 그러나 경하는 멈출 수 없다. 눈밭을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던 경하의 눈에 드디어 한줄기 빛이 보인다. 미처 끄지 못한 인선의 목공방 불빛이다.

 
  책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1947년 버려진 섬과 오늘의 제주를 잇다

그곳에서 경하는 인선이 기르던 한때는 새였던 것, 차갑게 식어버린 아마를 본다. 늦어버린 것이다. 죽어버린 것이다. 이별당한 것이다.

목적이 좌절됐을 때 이야기는 비로소 한 발 전진한다. 육지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인선과 제주를 찾은 경하가 이어지고, 세상을 떠난 인선의 어머니와 경하가 마주 닿는다. 공간과 시간을 넘어 경하는 한 때는 생기 있었던 지금은 죽어버린 인선의 어머니를, 그녀가 반드시 이루려 했던 과업을, 그 과업을 있게끔 한 고통을 대면한다. 그것은 1947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버려진 섬, 이념갈등이 낳은 비틀린 폭력 아래 무참히 짓밟힌 제주의 비극이다.

한강은 현실감 느껴지는 제주 방언까지 동원해가며 당시의 지옥도를 선명하게 재현한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이 반세기 시공간을 가로질러 책장 위에 선명히 나타난다. 목공일을 하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린 인선의 고통이 그토록 큰데 이들이 겪었을 고통은 얼마만큼 컸을지를 한강은 미루어 짐작하려 한다. 그 고통은 총탄에 뚫리고 몽둥이에 얻어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을 넘어와 살아남은 인선의 어머니와 그녀가 견딘 세월과 인선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득하게 붙어 있다.

한강은 인선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로 '스스로가 변형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이다.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다고 말이다.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다가서는 이의 내면을 파괴하는 비극이 그 비극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뒤쫓아 파괴해왔다는 걸 몸소 비극을 추적해온 한강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3사건은 7년 간의 학살에서 끝나지 않는다. 반세기 동안 그 폭력성이 그치지 않고 지속돼온 것이다. 한강이 이 소설에서 내보이려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 제주 4.3사건 산으로 피신한 주민과 아이들
ⓒ 제주 4.3 아카이브 관련사진보기
 
학살도 증오도 아닌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작가는 이 소설이 폭력에 대한 것도, 학살에 대한 것도, 증오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한강은 이 소설이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무엇일까. 나보다도 다른 누구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꺼이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군경의 총탄 앞에 몸을 던져 아이를 막아선 어머니처럼, 저보다도 다른 무엇을 위하는 것이다.

인선을 위해 경하는 폭풍우를 뚫고 제주 깊은 마을로 향했다. 단 한 번 본 작은 생명을 위하여 경하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추운 산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얼핏 한 번 지나친 게 전부인 인선의 어머니와, 단 한 번 만난 적 없는 제주의 숨진 영혼들을 위해서 경하는 나무를 깎고 그것을 세우고 어쩌면 이제껏 쓰인 적 없는 글까지 써내려갈 것이다. 한강이 매순간 고통을 마주하며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인선의 작업과 경하의 변화와 한강의 소설을 이끈 것이 모두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한강이 이 소설을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침묵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이름 얻지 못한 ‘제주4·3’

등록 2023-03-31 05:00수정 2023-03-31 09:21

 

[책&생각]
제주4·3 75주년…기자이자 연구자의 종합적 서술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허호준 지음  |  혜화1117  |  2만3000원
 
올레1코스에 있는 성산일출봉 앞 터진목 학살터. 사진 허호준, 혜화1117 제공
 
늘 관광객이 들끓는 정방폭포는 제주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3m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물줄기가 바다와 해안 절벽, 우거진 소나무 숲 등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75년 전인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 사이, 이 절경 속에서 248명이 무고하게 죽어 갔다. ‘빨갱이’를 잡는다는 ‘토벌대’가 주민들을 정방폭포 들머리에 있는 수용소로 내몰고, 어른들을 세워놓고 총으로 쏴 죽이는 ‘즉결심판’을 벌였다. 따로 갇혀 있던 아이들은 먼발치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열두살이던 김복순은 “팡팡팡팡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쓰러지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죽고 있다는 생각에 울기만” 했다고 기억한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증언했다.
 
어디 정방폭포뿐인가. 육지와 섬을 잇는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길목인 터진목, 평온한 서남쪽 모슬포 지역의 섯알오름… ‘집단학살의 기억’은 제주 섬 전체에 서려 있다. 부모의 시신을 찾을 엄두도 못 낸 채 ‘폭도 새끼’라는 말을 들으며 남의집살이로 근근이 살아가야 했던 김복순의 삶에서 보듯, 학살은 그저 한때 일어났던 일도 아니었다. 가족과 삶을 억울하게 잃고도, 사람들은 집요한 해코지 앞에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다. 75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모른다. 장소와 시간만을 앙상하게 가리켜, 그저 ‘제주4·3’이라고 부를 뿐이다.

허호준 <한겨레> 기자가 쓴 <4·3, 19470301-19540921 기나긴 침묵 밖으로>(이하 <기나긴 침묵 밖으로>)는 제주4·3을 “30여년 동안 취재한 기록이자 연구의 집성”이다. 지은이는 제주 지역기자로 일하며 제주4·3을 특히 천착해왔고, 제주4·3과 그리스 내전을 비교해 국제적 의미를 짚어낸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 지은이는 ‘제주4·3 70주년’(2018년) 때 기획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생존 희생자, 유족 들의 육성을 바탕으로 삼아, 역사적 사실과 의미까지 아울러 최대한 종합적으로 제주4·3을 다뤘다. 빼곡한 증언과 사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2007년 제주국제공항에서 학살 암매장된 지 60년 만에 발굴된 희생자 유해들. 사진 허호준, 혜화1117 제공
 
2007년 제주국제공항에서 학살 암매장된 지 60년 만에 발굴된 희생자 유해들. 사진 허호준, 혜화1117 제공
 
제주4·3의 역사적 사실은 이미 대강이 밝혀진 상태다.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시점은 1948년 4월3일이지만,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 등은 1947년 3월1일 오후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진 사건(‘3·1사건’)을 제주4·3의 기점으로 본다. 해방 뒤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양분해 점령한 상황 속에서,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친일·우익 세력을 중용하며 민심을 잃었고 섬에 닥친 경제난·식량난·전염병에도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3·1사건을 불렀는데도 미군정은 진상 조사를 뭉개고, 되레 제주도민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길을 열었다. 제주도 전체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붉은 섬’으로 규정해, 문제의 싹을 애당초 짓밟으려 했던 것이다. ‘5·10 선거’를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곧 “남한에 친미 반공 정권을 수립해 소련을 봉쇄”하는 것만이 미군정의 최대 목적이었다. 외지에서 응원경찰이 들어와 수많은 제주 사람들이 검거되고 고문을 받았다.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이 함께 들어와 백색테러를 저지르는 등 활개를 쳤다. 폭동이 아니라 학정과 탄압이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학정과 탄압이 부른 무장봉기, 그리고 이에 대한 군경 토벌대의 잔인한 무력 진압은 제주 전체를 ‘죽음의 섬’으로 만들었다. 지은이가 전하는 수많은 생존 희생자, 유족 들의 말들이 제주 섬 전역과 주민들이 도피하거나 쫓겨 간 본토와 일본을 오가며 당시의 지옥도를 전달한다. 토벌대는 중산간 지역 마을들을 불태우고 내키는 대로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고 죽였다. 도피한 사람이 있으면 가족 중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했다. 북촌리에서는 단 하루 동안 무려 300여명이 집단학살됐다. 무장대 역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아이들은 가족을 잃고 토굴에 숨어 지내다 굶어 죽었다. 살기 위해 섬을 떠난 사람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제주4·3은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로 끝났다. 그러나 집단학살을 자행한 국가는 “반세기에 걸친 탄압과 금기의 시대”를 만들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도’, ‘빨갱이’ 낙인 아래 오랫동안 숨죽여 살아야 했다.
 
제주4·3평화공원 안의 행방불명인 표석. 사진 허호준, 혜화1117 제공
 
제주4·3평화기념관의 전시물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란 설명이 달려 있다. 사진 허호준, 혜화1117 제공
 
역사의 흐름은 커다란 물줄기와 같아서, 제주4·3의 비극은 끝내 4·3특별법 제정(2000년),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2003년)와 대통령(노무현) 사과, 국가추념일 지정(2014년)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부 보고서는 4·3 희생자 수를 2만5000~3만여명으로 추정하는데, 2022년 7월까지 4·3 희생자로 결정된 인원은 1만4660명이다. 책의 끄트머리에 지은이는 ‘정명’(正名)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실체를 밝히는 일에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당장 정권의 암묵을 틈타 극우 세력이 ‘폭동’이란 말을 다시 꺼내어 들며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지은이는 “부당한 탄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에 부합한다는 측면에서 제주4·3에 ‘항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定名) 길을 제안한다. 물론 이것이 정답은 아니며 “지난한 논의를 거쳐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라 덧붙인다.
 
또 다른 과제들도 헤아린다. 지금껏 어떤 사과도 없었던 가해자들의 책임은 어떻게 물을 것인가, 무장봉기 주도 세력이란 이유로 4·3 희생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의 책임, 그리고 사건 이후 수십여년 동안 정부의 탄압 등은 그 실체를 어떻게 밝힐 것인가….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을 중심에 두고 이 문제들을 헤쳐나갈 때, 제주4·3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역사적 유산이 될 것이란 메시지를 담았다.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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