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아동’포함 좌익 철저진압 지시 뒤 6·25 전후 학살참극 속출
- 기자명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 입력 2023.04.22 11:02
[한미관계 탐구 (16)] 제주 4·3과 ‘현대사서 가장 아픈 손가락’ 여순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21일 여수,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초기 진압작전에서 봉기군에게 밀리자 여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군대는 물론 박격포·장갑차·경비정 등 모든 수단까지 동원해 해당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후 14연대는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 산청 웅석봉 등으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전개했으나 순천은 10월23일에, 여수는 10월27일 군경에 의해 완전 진압되었다.
진압군의 무차별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1949년 1월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이고 가옥 피해는 8554호(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였다<(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여순 사건 희생자에 대한 ‘즉결처분’, 재판절차 거치지 않은 ‘학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124명 가운데 10대에서 30대가 117명으로 91.9%를 차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3.6%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수도심권 사건이 59.6%에 달해, 희생자는 여수 진압작전과 반군 협력자 색출작업이 주로 이뤄진 이 지역에서 피해가 집중되었다. 사건 당시 반군 활동 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처형 이유가 된 가담혐의의 경우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담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군경이 작전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근거는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군의 ‘즉결처분권’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였으나, 법의 일반적 요건이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군경당국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이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됐으며, 이는 ‘즉결처분’이 사실상 학살이었다(https://www.jinsil.go.kr/fnt/nac/selectNoticeDetail.do?bbsId=BBSMSTR_000000000717#).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反) 이승만 성향의 군인들에 대한 대대적 숙군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에 전군의 5%에 달하는 4,750명이 축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60432&cid=43667&categoryId=43667).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숙군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살아남는다.
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으나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여순사건은 제주4·3사건과 직결된 비극으로 그 전말은 여수시가 운영하는 디지털여수문화대전이라는 사이트에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http://yeosu.grandculture.net/yeosu/search/GC01302160?keyword=%EC%97%AC%EC%88%9C%EC%82%AC%EA%B1%B4&page=1).
국군 제14연대, 제주 4·3사건 진압명령 거부하고 봉기
여수순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르는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시작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무장봉기가 진정되지 않자, 국군과 경찰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1948년 10월19일, 지창수(池昌洙)를 비롯한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제 14연대가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직후인 1948년 10월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서 작전 중이던 제9연대장 송요찬을 통해 강력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제주 해안선에서 5㎞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
이 포고령에 따라 제9연대는 제주도의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공공연하게 게릴라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가 점령했던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14연대 봉기는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의 지역당도 사전에 알지 못했다. 봉기를 처음 계획한 하사관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14연대 봉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주도 파병 반대였지만, 이전부터 쌓여왔던 군과 경찰 간의 갈등도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장비가 우세했던 경찰은 경찰 보조병력으로 창설된 국방경비대를 깔보았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을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노 친일 집단으로 간주했다.
10월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오전 여수와 순천으로 확대되었다. 순천에서는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했지만,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파견대(홍순석 지휘)가 봉기에 합류하여 저지에 실패하였다. 며칠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14연대는 여수에 들어온 후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란 이름으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4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고 밝히고,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 등을 요구하였다.
10월20일 오후, 여수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인민대회가 열려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 기구 접수’, ‘대한민국 분쇄 맹세’,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실시’ 등을 결의하였다. 여수,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세력과 청년·학생들이 봉기에 참여하면서 대중봉기로 전환하였다.
인민위원회가 재건된 여수에서는 경찰을 체포하고 친일파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식량영단 창고를 개방하여 쌀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하였다. 여수 외 다른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판을 실시하기도 했다. 순천까지 장악한 14연대는 10월20일 밤 세 그룹으로 군대를 재편했다. 3개 편대 중 첫 번째 부대는 벌교 방면[서쪽], 두 번째 부대는 학구 방면[북쪽 방향], 세 번째 부대는 광양 방면[동쪽]으로 진출하였다.
이승만, ‘아동’ 포함 철저 진압 강조, 수많은 양민 학살 계기 돼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이 사건이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이 합심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10월21일,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는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의용군은 조직적 실체도 없는 허상의 군대였고, 이후 재판에서 무력공산혁명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혁명의용군사건에서 가리키는 ‘극우 정객’이란 김구 등의 한독당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극우세력이 관련되었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 곧바로 부정하였다. 김구가 여순사건 관련 주장을 부정하고 일반 여론도 이에 동조하지 않자, 김형원 공보처차장은 말을 바꾸어 “여순사건은 전라남도 현지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국방부는 여순사건을 “소련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 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고 규정하였다. 여순사건을 반도 남쪽의 한 지방에서 이승만 정부에 반항한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소련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철저한 진압 방침을 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는 강경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사태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며 ‘아동’까지 포함한 철저한 진압을 강조하면서 진압군이 잔혹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의 무차별적인 동족학살 지시는 6·25 전쟁을 전후해 미군의 직간접적 개입 속에 발생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학살 사건 등 수많은 양민학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이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 수 십 년 전의 학살 사태에 대해 뒤늦었지만 국가원수의 책임을 추궁했다.
군·경의 진압작전과 민간인 희생
반란 소식을 들은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는 10월20일 오전에 관계자 회의를 열고, 진압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이었다. 미군은 진압작전을 펼칠 때 미국인 군사고문단 장교를 대동하도록 했다.
10월20일 오후, 서울에서 군 지휘부가 광주에 도착하자 구체적인 진압작전이 수립되었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21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 제5여단 사령부에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는 한편, 진압작전에는 작전 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전(제2연대), 전주(제3연대), 광주(제4연대), 부산(제5연대), 대구(제6연대), 군산(제12연대), 마산(제15연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 가운데 총 11개 대대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들 병력 중 제2연대·제6연대·제12연대·제15연대는 원용덕이 지휘하는 제2여단으로 소속되었고, 제3연대와 제4연대는 김백일이 지휘하는 제5여단에 소속되었다. 부산의 제5연대는 해안경비대와 함께 여수 앞바다에서 해상작전을 전개했다.
진압군은 순천 북방에서 벌어진 학구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진압군은 순천을 공격했으나 봉기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쉽게 순천을 공략하지는 못했다. 봉기군은 진압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밤을 이용해 순천에서 퇴각하였다. 이후 진압군은 비교적 손쉽게 순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10월24일부터 시작된 진압군의 여수 공격은 치밀한 작전 계획을 갖고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봉기군과 지방 좌익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여수에 대한 초기 진압작전에 실패하자 진압군은 기계화 부대와 해안경비대, 그리고 연락용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초토화 진압작전에 나섰다. 여순 진압에서는 군 역사상 최초로 육군과 해군, 공군의 합동작전이 실시되었다. 결국 여수를 방어하던 봉기군과 지방 좌익세력도 더 이상 여수를 지킬 수 없어 인근 지역으로 후퇴했다.
진압군이 여수 공격을 감행 중이던 10월25일, 국무회의는 여순지역계엄령(대통령령 제13호)을 통과시켰다. 계엄법은 일 년이 지난 1949년에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는 계엄법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였다. 국무회의에서 계엄령이 통과된 다음 날, 호남방면사령관은 여수·순천 지구에 임시계엄을 선포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법적인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국군의 여수·순천에 대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정규 병력은 이미 산악지대로 탈출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진압군 작전은 정규 반란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 되었다.
진압군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전 시민을 학교운동장에 모이게 하여 협력자를 색출했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 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봉기군으로 간주되었다.
흰 고무신은 지방 좌익세력에게 처형당한 우익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제조한 것이었는데,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가 이를 배급했기 때문이었다. 또 국방경비대가 입고 있던 군용 표시가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혐의 대상이었다. 진압된 뒤 겉옷은 버릴 수 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 기준들은 원래 제14연대 반란군을 색출하기 위한 기준이었지만, 진압군은 이런 외모를 봉기군 협력자로 간주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했다.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이 지역의 존경받는 우익인사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인민재판 배석판사로 참가했다는 누명을 쓴 황두연[순천 갑구 국회의원]은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박찬길[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 검사]은 진압군에게 총살당했고, ‘민중을 총연합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라고 잘못 알려진 여수여자중학교 교장 송욱은 행방불명되었다.
진압군의 부역자 색출 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계엄령하에서 군법재판이 열려 많은 수의 민간인이 회부되었다. 군법회의는 계엄사령부가 있었던 광주와 중앙고등군법회의가 설치된 대전 등지에서 열려, 수천 명의 혐의자들을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처리해 갔다.
여순사건이 끝난 뒤 정부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등지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월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이고, 가옥 피해는 8554호(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였다.
가옥을 비롯한 총 재산 피해 추정액은 99억 1763만 395원에 달했고, 가장 긴급한 구호가 필요한 대상 주택은 1만 3819호로서 그 인원은 6만 7332명이었다. 단 일 주일간의 피해가 이처럼 막대했는데, 이러한 피해의 대부분은 진압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여순사건의 영향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이승만 정부는 내부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물리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군대와 경찰을 정비했다. 경찰관을 증원하는 한편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고, 학교에는 군사훈련을 위해 학교별, 지역별로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군대에서는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숙군(肅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9년 7월까지 국군 병력의 약 5%에 이르는 총 4749명이 숙청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또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강력한 법제를 마련했다. 급속하게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에 달하는 11만 8천 명에 적용될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언론은 반란군의 잔혹한 학살을 부각시켰고, 진압 후에 현지에 파견된 문인조사반은 ‘잔인무도한 귀축(鬼畜)들’, ‘악의 승리’ ‘인간성 상실’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봉기군의 만행을 표현했다. 이에 따라 봉기군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잔인한 짐승으로 여겨졌고, ‘절대 악’이었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표현처럼 반란자들은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진압군에 의해 전라남도 동부지역은 10월 말에 완전히 장악되었지만, 14연대 반란군은 지리산 등 산악지대로 입산하여 유격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여순사건은 지역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정치적·사회적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형성된 반공체제는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여순사건 특별법 21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
여수·순천 10·19 사건은 해방 후 혼란과 이념 갈등의 시기에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에 대한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해 수많은 민간인이 군·경의 진압 작전이나 일부 좌익 세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됐다.
“현대사서 가장 아픈 손가락”으로 불리던 여순사건이 발생 73년 만에 국회에서 2021년 6월29일 ‘여순사건 특별법'(여수·순천 10·19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연합뉴스 2021년 6월29일).
여순사건 특별법은 여순사건의 시기적 범위를 14연대가 제주 4·3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1948년 10월19일부터 지리산 입산금지 조처를 해제한 1955년 4월1일까지로 규정했다. 또 장소적 제한은 여수·순천을 비롯해 전남·북, 경남 일부 지역으로 명시했으며, 역사적 성격은 당시의 혼란과 무력충돌, 이의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다수가 희생당한 사건으로 명시했다.
이 특별법은 국가가 희생자에게 의료·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는 규정이 포함됐으며 여순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묘역과 위령탑, 여수·순천 10·19 사건 사료관, 위령공원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2001년 16대 국회 이후 4차례나 발의됐지만, 번번이 이념 대립 등으로 처리가 무산됐다가 21대 국회 들어 지난해 7월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 등 152명이 발의해 여야 합의로 법안이 통과됐다. 국가 권력 기구인 군대에서 촉발된 여순사건을 국가 차원에서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첫발을 뗐다는 점에서 특별법 제정은 큰 의미가 있다.
이승만 정권 여순사건 빌미로 국가보안법 제정
한편 한국일보가 2017년 10월 12일 “여순사건, 왜곡된 역사 방치로 피해 주민만 빨갱이 돼”라는 제목으로 한 역사학자를 인터뷰한 기사는 여순사건에 대해 잘 정리해 소개했다.
-- 여순사건은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 등으로도 불리며 제주 4·3사건과 함께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다. 내년이면 여순사건이 발발한 지 70주년을 맞지만 아직까지 사건의 성격과 진실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지금도 말할 수 없고 꺼내기 힘든 상처와 아픔, 여전한 구조적인 사회 인식 때문에 그 누구도 섣불리 진실을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 사건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여수·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 등을 비롯한 37개 시·군의 광범위한 지역이 죽음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53)는 “당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면서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은 채 70년간 왜곡된 역사로 방치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펴낸 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도서출판 흐름)를 통해 여순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발발 배경, 사건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증거자료를 제시해 주목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여순사건의 성격을 ‘항쟁’으로 규명한 최초의 연구집이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이 ‘반란’과 ‘항쟁’의 목적이나 행위 자체에 대한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추적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이 2차 사료나 구전에 의한 증언을 통해 서술하면서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규정을 미루고 단순히 여순사건이라고 명명해 왔다면 이 책에서는 ‘항쟁’과 ‘반란’을 규명하기 위해 1948년 당시의 가공하지 않은 1차 사료를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항쟁과 반란을 구별하면서 ‘여순항쟁’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대한 증거자료도 충분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주 박사는 “반란이 성립되려면 수도 점령이나 정부 전복, 권력자 축출 등의 계획과 새로운 권력 주체가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한다. 여수에 주둔했던 제14연대 군인이 주도한 이 사건은 그런 조건들이 하나도 갖춰지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은 철저히 무시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건의 주체인 당시 14연대 군인에게 ‘동족을 학살하라’는 제주도 출동 명령이 하달됐다”며 “1980년 5월의 대한민국 군인은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출동해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이 자행됐지만 1948년 10월의 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여순사건은 반란과 전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여수 출신의 주철희 박사는 2013년 3월 여순사건에 대한 19가지의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한 저서 ‘불량 국민들’을 발간해 관심을 모았다.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 공저 ‘인물로 본 전라도 역사이야기’ 등의 저서와 ‘여순사건 주도인물에 관한 연구’, ‘한국전쟁 전후 반공문화의 형성과 그 의미’ 등 여순사건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여순사건 대신 ‘여순항쟁’으로 부르기를 제안하며 정명(正名)운동을 본격 추진하고 이번 저서를 3권까지 펴낼 계획이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항쟁의 역사지만 피해주민은 그동안 ‘빨갱이 자식’으로 불렸다”며 “이제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후속작업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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