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의 고통을 상징하는 신와르의 처참한 죽음
난민촌에서 출생, 이스라엘 감옥에서 22년 수감
무장 투쟁의 최전선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최후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 상징
'전 세계가 기뻐할 정의 실현'이라는 허튼소리들
10월 7일의 40배가 넘는 학살 저지른 이스라엘
신와르가 남긴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들
"세상은 우리가 소리 없이 학살당하길 바라나요?"
얼마 전 이스라엘군은 하마스 지도자 야히야 신와르를 폭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 직후 이스라엘군은 신와르의 마지막을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탱크 포격으로 표적을 제거하기 전에 드론이 건물 속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던 중에 촬영한 것이다. 폐허가 된 건물의 소파에 기진맥진한 채 앉아있던 신와르는 다가오는 드론을 향해 마지막 모든 힘을 다해 막대기를 던진다.
신와르의 머리와 얼굴은 카피예로 덮어져 있고 한쪽 팔의 팔꿈치 아래는 포격을 맞아서 절단되어 사라져 있다. 이어서 탱크의 포격이 있었고 나중에 그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가자의 난민촌에서 태어나 평생 이스라엘의 억압 속에 살다가 무장 저항의 길을 선택했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23년을 보냈던 하마스의 지도자 야히야 신와르는 이렇게 죽었다.
아마도 가자 주민들의 끝없는 죽음을 보면서 큰 책임감과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그는 1년 내내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선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웠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적어도 그가 여장을 하고 혼자서 가자의 생지옥 속에서 도망가 버렸고 다른 중동 국가에서 편하게 살고 있다는 이스라엘과 서방 언론들의 보도는 가짜뉴스였던 셈이다.
신와르의 비극적 최후는 마치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1년간 가자에서 죽어간 4만 3000여 명 중에 많은 이가 신와르보다도 더 처참한 형태로 죽어갔다. 신와르의 죽음 이후에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중동의 많은 지역에서 슬퍼하면서 그를 기억하는 목소리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그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마스와 신와르의 정치적 노선과 투쟁 방식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 반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의 대의를 지지하면서도 특정한 단체의 노선과 전략을 동의하지 않을 수 있듯이, 하마스와 신와르에 대해 여러모로 비판과 이견들이 제기돼 왔다. 특히 지난해 10월 7일 기습의 적절성과 정당성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신와르의 이슬람주의적 해방의 비전과 오류에 대한 모든 견해 차이와 비판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가자 민중이 느끼는 슬픔, 좌절감과 원망 등 복잡한 심정을 공유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네타냐후 정부와 미국 바이든 정부, 한국의 조선일보 같은 이들이 "오늘은 이스라엘, 미국, 세계에 좋은 날", "정의가 실현됐다"라며 이것을 기뻐하고 요란하게 축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와르의 손에는 10월 7일 희생자들의 피가 묻어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네타냐후와 바이든의 손에는 지난 1년 동안 이스라엘의 대량 학살에 희생된 4만 3000여 명의 피가 묻어있다. 더 나아가 지난 76년 동안 지속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 지배와 점령에 따라 고통받고 죽어간 수많은 가자 민중의 피가 묻어있다.
더구나 10월 7일의 비극은 단지 하마스나 신와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자 민중 230만 명을 '지붕 없는 감옥'으로 밀어 넣고 끝없이 폭력적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이 만들어낸 뒤틀린 반작용이고 예고된 비극이었다. 고립과 절망으로 내몰린 하마스는 장벽을 넘어가는 기습 공격으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특히 이스라엘 병사들을 인질로 잡아가서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8천여 명의 수감자들과 교환할 생각이었다. 23년간 이스라엘 감옥에 있다가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됐었던 신와르에게 이것은 '감옥의 다른 동료에 대한 도덕적 의무'와도 같았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날 일어난 일은 예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달랐고 비극적 장면들이 펼쳐졌다.
적어도 신와르는 10월 7일에 벌어진 희생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후회하기라도 했다. 하마스는 나중에 발표한 선언문에서 민간인 희생에 대해 "점령군과의 대치 상황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라고 했고, 신와르는 인터뷰에서 "사태가 통제를 벗어났"고 "사람들이 여기에 휘말렸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에 대한 하마스와 신와르의 책임과 잘못이 무엇이든지,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나 미국 바이든 정부의 책임과 잘못에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냉혈한 전쟁범죄자들은 이미 10월 7일의 희생자보다 40배가 넘는 가자의 민간인들, 특히 어린이들을 죽이며 최악의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그것을 지원해 왔다. 아무런 후회도 반성도 없다.
대량학살은 1년이 지난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레바논 침공 등으로 더 확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와르의 죽음으로 정의가 실현됐다'라는 네타냐후와 바이든의 말은 조금의 설득력도 없다. 네타냐후와 바이든이 대량학살의 전쟁범죄자와 그 공범으로서 체포되고 처벌받지 않는 한 국제사회에서 정의는 결코 실현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처음부터 하마스도 신와르도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인종청소하고 가자지구를 자신들의 점령지로 완전히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와르가 '테러리스트'라서 죽인 게 아니다. 그가 옳든 그르든 가자 민중 저항의 상징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따라서 신와르를 죽이고 나서도 이스라엘의 대량학살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지금 가자 북부에서 4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대상으로 최대 규모의 강제 이주 명령을 내렸고 물, 전기, 통신, 의료 지원, 언론 취재 등을 모두 차단하고 보름 넘게 조직적 학살을 벌이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가자 북부에서는 끔찍한 증언들이 들려오고 있다.
"가자 북부 자발리아 난민촌은 지금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는 쿼드콥터, 상공을 맴도는 전투기, 계속되는 폭격, 탱크 포격으로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다", "우리가 어떻게 표적이 될지 예측할 수 없고, 자발리아 전체가 불타고 있고, 우리 모두가 마지막 순간을 살고 있다."
신와르는 2018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진정으로 출소한 적이 없습니다. 감옥을 옮겼을 뿐이에요. … 이스라엘 감옥이 여기보다 훨씬 낫습니다. 거기엔 물이 있었고 전기도 들어왔거든요. … 문제는 우리의 저항이 아니라 그들의 점령입니다."
모든 곳이 감옥인 가자에서 큰 감옥에서 작은 감옥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 가자 민중 모두의 삶이었고, 이제 그 '세계에서 가장 큰 지붕 없는 열린 감옥'이 통째로 불타오르면서 수많은 이들이 산채로 불타 죽고 있다. 지금 가자는 오늘날의 아우슈비츠이다. 하지만 나치가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을 말살할 수는 없었듯이, 이스라엘도 가자 민중의 저항정신을 죽일 수 없다.
신와르는 과거의 인터뷰에서 또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죽어가는 동안 세상은 우리가 얌전한 희생자가 되기를 기대하나요? 우리가 아무 소리 없이 학살당하고 백기를 들 것을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과 동맹자들은 답할 자격도 없고,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이 물음은 끝없이 기억되고 다시 던져질 것이다.
하마스 대원의 85%가 이스라엘에 부모와 가족을 잃은 고아 출신이었다. 수많은 가자의 청년들은 다시 목숨을 던지며 저항에 나설 것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길을 찾을 것이다. 파타나 하마스도 넘어선 더 평등하고 민주적, 진보적이고 통합적인 정치적 대안을 찾아낼 것이다. 총칼로 짓밟고 지도자들을 죽인다고 이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깨달아야 한다.
믿을 걸 믿어야지, 미국을 믿다니
휴전안 믿었던 헤즈볼라 나스랄라 무참히 피살
우크라전쟁, 북한-이란 핵문제 키운 것도 미국
전 CIA국장 "우리는 사기 치고, 속이고, 훔친다"
'망상에 가까운 패권 전략' 미국 역사 그 자체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교수
미국 대선과 총선이 채 두 주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 내에선 당연히 관심이 높지만, 세계인들의 눈과 귀는 미국 대선 이상으로 요동치는 세계 정세에 쏠려 있다. 러시아의 승리를 목전에 둔 우크라이나 전쟁, 3차대전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이란-이스라엘의 격돌, 고조되는 중국-미국의 경제전쟁과 군사적 긴장 등.
여기서 기이한 것은, 패배를 눈앞에 두고도 ‘끝까지 싸워 승리!’를 외치는 우크라이나, 국제적 고립과 전략적 패배를 알면서도 ‘학살, 암살, 테러, 공습!’을 외치는 이스라엘, 불길한 후폭풍을 예감하면서도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자극하는 남한 일본 대만 필리핀 등의 행태다.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미국을 뒷배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적이 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친구라고 믿다간 죽어.” 이들에게 미국의 정체를 간명하고 날카롭게 묘사한 키신저의 경구를 일깨워주고 싶다. 적이든 동맹이든 필요하다면 가차 없는 폭력과 사기에 가까운 이중성을 발휘하는 게 미국이다. 이런 미국을 제일 믿는 건 이스라엘이다. 힘을 믿고 밀어붙이고 있지만, 둘 다 국제적 고립이라는 전략적 패배의 딜레마로 빠져들고 있다.
지금 일촉즉발인 이란-이스라엘 격돌의 결정적 계기는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의 암살이다. 그의 죽음은 이 금언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믿을 걸 믿어야지, 미국을 믿다니.’
임시 휴전안 수락 발표 직전 H. 나스랄라 암살?
이미 널리 알려졌듯, 한 달여 전인 9월 27일 이른 밤(베이루트 시각),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 남쪽, 헤즈볼라 사령부를 공습, 회동 중인 지도자 나스랄라를 포함, 일군의 정치 및 군사 지휘부를 암살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헤즈볼라는 지도부의 안전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암살 관련 보도나 시사 유튜브를 종합해보면, 그날 헤즈볼라의 경계는, 이란의 사전경고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왜 그랬을까? 결정적 이유는 임시 휴전안 때문이다.
9월 하순 유엔총회 및 안보리 기간, 프랑스와 미국 등은 헤즈볼라-이스라엘 간에 21일 동안의 임시 휴전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휴전안은 레바논을 통해 헤즈볼라로, 미국을 통해 이스라엘로 전달됐고, 두 당사자도 동의했다. 그래서 유엔 주변에서는 네타냐후가 금요일, 27일의 총회 연설에서 휴전안 수락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실제는 달랐다. 금요일 오전(뉴욕 시각), 총회장으로 가기 직전, 네타냐후는 군의 헤즈볼라 지도부 암살 작전을 승인했다.(사진 참조).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을 나섰다.
회의장에 도착, 연단에 선 네타냐후는 1시간 가까운 연설을 이어갔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모든 곳, 또 중동 어디도 공격할 수 있다’가 핵심 메시지였다. 맘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 협박을 사실로 입증하듯, 연설이 끝난 직후, 이스라엘 공군은 베이루트로 출격, 나스랄라에 대한 테러 공습을 벌였고 죽였다.
미국의 이중 플레이
나스랄라는 휴전안을 믿었다. 프랑스와 미국 역시 외교 노력이 성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미국, 나스랄라 모두는 속았고, 그는 처참하게 살해됐다.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은 휴전은커녕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을 당겼다. 4일 후인 10월 1일, 이란은 철통같다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방공망을 뚫는 대규모의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그동안 미국의 공식 입장은, ‘헤즈볼라와의 군사적 대결은 중동 전역으로의 확전이 우려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레바논 공격 자제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미국은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벌였다.
일군의 백악관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공식 입장과 반대로 이스라엘에 대 헤즈볼라 군사작전을 부추기고 다녔다.(관련 기사 사진 참조) 이해영 교수는 “바이든은 NSC(국가안보위) 중동 조정관과 이스라엘군 출신 안보 보좌관을 통해 ‘사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전쟁을 추동해 왔다”고 지적했다. 즉, 협상을 강조하지만, 백악관은 이스라엘의 작전을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이들은 레바논 공격을 준비하던 네타냐후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달리 말하면 휴전안을 미끼로 벌인 미국의 이중 플레이에 나스랄라는 암살되고, 가자에서 레바논, 시리아, 결국 이란까지, 전쟁은 확대됐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이젠 레바논에 주둔한 유엔평화유지군까지도 공격하고 있다.
거짓과 속임수는 미국의 주특기
트럼프 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냈던 M. 폼페오는, 지난 2019년 한 대학 강연에서 “웨스트포인트 생도규범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속임수 쓰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지만, CIA는 사기 치고, 속이고, 훔치는 조직이다”라고 자랑하듯 털어놓은 적이 있다.(사진 참조). 그것이 실은 CIA뿐 아니라 국무부와 백악관을 포함, 미국 정부의 일관된 대외정책의 기조(?)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민스크 협약이 사실상 사기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이뤄진 종전 협상마저 미국의 반대로 파기됐다. 대리전에 나선 우크라이나는 패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북한의 핵을 오늘날처럼 키운 계기도 미국의 협력 약속 불이행이다. 1994년 미국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을 조건으로 제시한 제재 해제, 발전소 건설 및 에너지 지원 약속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철천지원수(?)처럼 대하는 이란과의 문제 한복판에도 미국의 책임이 놓여 있다. 2015년 미국과 이란은 독일, 러시아, 영국, 유럽연합, 중국, 프랑스 등과 함께 ‘포괄적 이란 핵협정(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약칭 JCPOA)’을 타결한다. 이란 핵무기 개발중단과 경제제재 해제를 맞교환한 것으로, 이란과 미국의 오랜 긴장 관계를 푸는 매우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협정 타결의 이면에는, 핵발전 연료 생산을 위한 이란의 우라늄 농축, 즉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미국의 약속이 있었다. 이란은 협정을 준수했고, 이는 국제적으로도 확인됐다. 그런데 정작 제재 해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트럼프는 2018년, ‘부실한 협정이고 이란이 약속을 위반했다’며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애초부터 협정반대-협정탈퇴를 위해 노력해온 이스라엘 정부와 로비 단체는 트럼프의 결정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들에게 미국의 외교는 사기에 가까운 이중적 행태의 다른 말일 뿐이다.
스스로에게도 사기 치는(?) 미국
생각해 보면 키신저의 말은 다른 나라는 물론 미국 자신도 되새겨야 한다. 더는 사실이 아닌 ‘미군 최강! 미국 최고!’를 믿는 것이 스스로에게 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중국, 북한 등과 세 개의 핵전쟁을 동시에 치러 승리할 수 있다며 자신을 독려한다. 목전에 다가온 우크라이나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미국 중동외교의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암살 테러가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킨다는 걸 알면서도 참수 작전의 승리라고 자축(?)한다. 중국과의 격돌을 감당할 역량이 모자라면서도 군사적 긴장상태를 조성한다. 남한, 대만, 일본, 필리핀 같은 나라들이 중국을 자극하도록 부추긴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다극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지정·경학적 변동의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미국은 자신이 지구적 범위의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동시에 미국 밖에서 지구적 범위의 거대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 때문에 미국의 위상과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미군 최강, 미국 최고’라는 망상,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자유, 민주, 가치 질서 같은 허황한 구호가 합작해 빚어내는 엄중한 현실이다. ‘믿을 걸 믿어야지, 미국을 믿다니’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미국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금언이다.
패권 망상에 매달리는 미국
협상이 아니라 사기에 가까운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대화가 아니라 우선 총부터 드는 미국.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미국 역사가 그렇다. 미국은 건국 이래 19세기까지 조약 파기는 물론, 침략과 정복 전쟁으로 원주민 인디언을 죽이고 밀어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남미를 장악했고,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을 거스르거나 반대하는 정부나 집단은 봉쇄, 암살, 회유, 쿠데타, 경제제재, 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어 또는 제거하고 있다.
두 번째는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이 수립한, 특히 1960년대 이후 변함없이 이어지는 미국의 헤게모니, 즉 ‘패권 유지’라는 거대전략이다. 군사적 개입과 상대를 기망하는 이중적 외교는 이 전략의 실천 전술 중 하나고,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주체는 군산정언학 복합체다. 이 복합체의 일부로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트럼프가 자신이 당선되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은 좀 더 일찍 수습에 들어가겠다는 것일 뿐, 미국의 패권 전략이나 군사 개입 노선 자체를 바꾸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패권은 하락 중이고 패권 전략은 안팎의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미국은 강한 나라다. 그러나 영구전쟁으로, 이중적 사기술로, 천문학적 빚더미로 위기 극복의 역량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변하지 않는 한, 미국은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이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9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볼가강 유역의 도시 카잔에서는, 이번 22일부터 24일까지 열여섯 번째 브릭스 정상회의가 열린다. 다른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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